대학 생활의 마지막 한 학기를 마무리짓기 위해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덥다... 샤워한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땀이 줄줄 흐른다.
....심란하다. 그 분은 행복하게 잘 사실 수 있으려니... 하면서도 아직 마음이 복잡하던 참이라, 기분 전환이나 하려고 평소 종종 보던 개그 웹툰을 보고 있었는데, 그 분이 연상되어 버렸다. 그 웹툰 작가야 나라는 독자가 있는 줄도 모를테니 그 작가는 아무 잘못도 없다. 하지만 우울해져 버려서... 맥주 캔 사들고 왔다. 지난 주 일요일날에도 소주 세 병을 들이부었는데, 약빨이 부족한 듯 하다. 알콜에 너무 의존하는 건 썩 좋지 않지만 뭐,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니까.
......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그 분과는 딱히 이렇다할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분은 밝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니, 내게도 호의 정도는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과 연애감정은 명백히 다른 문제다. 그리고 그 분이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안 이상, 난 이 지점에서 마음을 접어야만 한다.
그 분은 나와 친구로 지내기를 바라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자신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결혼까지 앞둔 분인데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맴도는 짓거리 따위, 나는 못한다. 방금 전에도 메신저에 그 분 이름이 보이길래 친구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가능한 거리를 두고서, 내가 해야만 할 다른 일들에 집중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다.
.......후우, 논리적으로 생각하자. 어쩌면 난 그 분에게 반했던 게 아닐 수도 있다. 단지 그 분께 좋은 인상을 받고, 꿈에서 몇 번 나오고, 소설을 쓰다 '그 분이 이 소설을 읽으면 어떻게 여기실까' 무심히 웹서핑을 하다 맛집 정보 같은 게 보이면 '그 분과 같이 갈 기회가 있을까' 뭔가 괜찮아 보이는 물건이 있으면 '그 분께 어울릴까' 생각이 종종 들은... 그게 전부다. 내가 그 분께 갖고 있던 인식 모두가, 어쩌면 단순한 나만의 환상일 뿐일 수도 있는 거다.
현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 내가 그 분께 갖고 있던 그 모든 감정은 아무 의미도 없어졌다. 그리고 그 분은 그 분이 사랑하는 다른 분과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할 일은 다만 그 분의 행복을 바라는 것 뿐이다. 정작 중요한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하고 자기 감정에 취해 허우적 거리는 짓거리 따위 한심할 뿐이다. 그 분의 결혼식 날이 오면, 계좌로 축의금이나 좀 보낼까. 직접 갈 용기는 아무래도 안 날 것 같으니. 그게 적절할 듯 하다. ......망할, 짝사랑 한 번 거하구만. 꼴 사납게스리. 최소한... 구질구질해지고 싶지는 않다.
냉정해지자. 내게 주어진 현실은 한 없이 단순하다. 난 그 분께.... 음... 호의가 있었고, 그 분은 남자 친구가 있고, 곧 결혼하실 모양이다. 내가 그 분 주변을 맴돌았다간 그 분은 필시 부담스러워 하실 테고, 그런 건 바라지 않는다. 내 행동을 돌이켜 보니, 그 분은 어느 정도 내 마음을 눈치채셨을 가능성에 아무래도 무게게 살린다. 이 이상 불편하게 해 드릴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그 분의 행복을 비는 것, 그리고 이제 내가 가장 확고하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것- 나의 명예를 추구하는 일만 남았다. 언젠가, 내 의지도 결국 꺾이고 사람 사는 게 원래 다 그런 거라고 자위하면서 내가 그토록 경멸했던 이들과 똑같아지는 그 날까지. 지금 내가 그토록 간절히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을 철없던 시절의 몽상이라고 비웃게 될 그 날, 이미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지금이라도 정신차려서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게 될 그 날까지. 가깝든 멀든, 언젠가는 아마도 내게도 올 그 날까지.
난 결코 영웅이 아니다. 나는 한없이 범속한 인간이며, 그 날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분명히 올 그 날까지.
평소 눈팅하던 인터넷 게시판 몇몇 곳에선 '충격적이다' '배신감 느껴진다' '진보진영 전체에 똥을 줬다' '너님만 좋은 의도였으면 뭐하냐'라는 여론이 대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실드도 간간이 보이고.
내 관점에서 보자면, 곽 교육감의 선의드립은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깨끗한 척 하더니 잘 걸렸다는 식인 검찰의 표적 수사도 짜증나고, 증여 방식도 너무 허술하고 조악해서 도무지 믿기지가 않지만... 그와 별도로 어쨌든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다.
백보 양보해서 그가 주장하는 대로 '선의'에서 나온 행동일지는 몰라도, 지금 상황에서 그가 말하는 선의를 인정하자면 자연을 사랑해서 땅투기를 했다거나 아들에게 서민의 삶을 체험시키고 싶어 산업 기능요원으로 보냈다는 헛소리도 인정해야 한다. 진심과 선의는 그 자체로 분명 중요한 것이지만, 별로 쓸모는 없다. 개인적인 레벨에서도 그러할진데, 큰 조직에 속해서 정치를 하는 입장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반드시 도덕적 잘못이나 탈법적 행위가 아니어도 '입장 상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게 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도 말한다. 곽노현이라는 '개인'이 진보의 가치이며 진보의 미래라고. 사람만이 희망이며, 사람을 버리는 것은 진보를 버리는 것이라고.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논리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민주주의의 근간은 특정한 뛰어난 개인의 영웅성에 의존하지 않고 범속하고 평범한 이들이 동등한 위치에 서서 시끄럽고 서툴게나마 조금씩 스스로를 향상시켜 가는 것이다. 우상이 아니라 이상을 받드는 것(Serve the Ideal, not Idol), 그것이 민주주의다. 한 개인이 아무리 위대하고 고귀하다 해도, 그 한 가지 사실에 매몰되서는 진영논리에 기울어 비판 받을 짓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진보고 보수고를 떠나 민주주의가 아니다. 곽 교육감이 무상급식이나 학생 복지 등의 이슈에 대해 좋은 정책들을 여럿 내놓은 것은 사실이나 그 사실 하나에 매몰되어 '한나라당은 더 심하게 해먹는 데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으니 곽노현 교육감도 사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편리한 핑계다. 그런 식으로 해서 곽 교육감의 사퇴를 막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악마의 거래에 불과하며,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의 탈을 쓴 수구들'이 만들어 낸 게임의 법칙에 굴종하는 짓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충격적이라거나 실망스럽지는 않다. 나는 내 명예를 위해- 주어진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자긍심을 위해 좌파로서의, 진보로서의 정체(政體)를 택했다. 노회찬 씨나 조국 씨, 진중권 씨 같은 이들마저 모두 포기하고 절망한다 해도 나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고결한 인간이 아니다. 난 더 없이 범속한 인간이며, 평범하고 낮은 이의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해나갈 것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건 '진보로서의 이상향이 실현된 나라'가 아니라, '나 자신의 명예와 긍지'이기 때문이다. '동지'들이 타락하고, '대의'가 모독당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것이기에. 바로 위에 쓴 글과 모순되는 내용이지만, 나는 그러한 나 자신의 모순마저도 감내하고 살아가며, 싸워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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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겐 강했던 무렵이 있었다. 제대로 교활해지지도 못한 채, 그저 비열하게 살던 때가 있었다. 아무리 어렸을 때라 해도, 그리고 당시 내가 처해 있던 여러 안 좋은 상황들을 고려해봐도 그것은 철이 없어서 그랬던 거라고 대충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 의지가 현실을 바꾸는 데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알량한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해도 좋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가진 감정은 진실하다. 하지만 내 감정보다는 그 분의 감정이 우선하며, 그 분은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안타깝고 괴롭긴 하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내가 그 분께 내 마음을 털어놓고, 거절당할 가능성은 상정해 뒀지만 그 분이 이미 사랑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감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분은 이미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그 분은 내가 몇 번이고 그 분의 꿈을 꿨다는 것을. 내가 얼마나 그 분을 사랑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의 그 분에 대한 감정보다는, 그 분의 행복이 훨씬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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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할 생각은 없다. 난 그 사람에게 반했다. 그건 명백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단순한 남자 친구 정도가 아니라 함께 미래를 약속한 대상이 있다. 나는 고통스럽고, 조금은 질투심이 든다. 하지만 도저히, 내 질투보다 그 분의 행복을 우선하지는 못하겠다.
난 그 사람의 행복을 깨트릴 수 없다.
차라리, 이러한 결말이 잘 된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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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부디 행복하게 잘 사시기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술을 잔뜩 퍼마시고 들어왔고, 이제 내 앞에는 마지막 대학생활 한 학기가 남아 있다. 그 분에 대한 애정과, 그런 스스로에 대한 낯설음과 당황스러움, 혐오감이 내 안에서 여전히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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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그 분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보다는, 그 분의 행복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행복하시길. 부디, 더없이 행복하시길.
잘 지내시기를 빈다.
그거면 됐디.
난, 내 명예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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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시길.
부디.
더없이 행복하게 절 사시기를.
이젠 꿈에 나타나 마음을 어지럽힐 일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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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끝내 알지 못하겠지만, 전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덧없는 것이며, 당신께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행복하게 사실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부디 저보다 훨씬 더 당신을 사랑할 수 있고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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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행복하시길.
부디.
필사적으로.... 내 모든 능력을 동원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그 분의 행복을 빌고서, 한진 중공업 파업 현장엘 찾아갔다. 내가 몇 번이나 그 분을 꿈에서 봤다는 것, 내가 얼마나 간절히 그 분을 사랑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희망 버스는 끝났고 당직 근무자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아무 궤적도 남지 않을 보도 블럭 위에 '이 곳에 사람이 있었다'라는 글귀를 적었다. 싸우기도 전에 패배한 병사가 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면서.
얼마 전, 타로를 볼 줄 아는 친인에게 부탁해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상관 없다, 한국의 진보가 집권해서는 정치 싸움에 물들지 않고 '사람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는지 봐달라"고 부탁했었다( 타로 보면서 그런 거 질문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그 분은 웃었다). 돌아온 답을 대강 요약해 보자면(괄호 안은 개인적인 추측)....
"진보 세력 내의 세다툼이 너무 심각하다. 섞여서는 안 될 요소들이 섞여 버렸다(...민노당과 진보신당이 결국 다시 합쳐진 걸 의미하는 듯. 모두 외쳐, 김정일 개객끼!!!!!!). 그래도 한 때는, 이 기사처럼 나름 순수한 이상과 대의를 우선해서 행동한 적도 있었지만(촛불 정국 때가 마지막이었으려나) 지금은 아니다. 대의가 아니라 권력을 위해, 그것도 대권 같은 게 아니라 고작 당권 정도 수준의 권력을 위해 진보입네 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나름 재주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노회찬 씨 같은 사람들이 있지...) 너무 갈갈이 찢겨져 있어서 앞으로 한참 더 혼미를 거듭할 것이다. 지지하던 사람들도 많이 등을 돌렸고 해서 결코 상황은 희망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는 여전히 자신이 고귀하고 위대한 이상을 위해 싸운다는 나르시즘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한참 동안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진보 정당이 한국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 이상을 계승하는 이들이 언제나 최소 수준은 남을 것이다. 한국의 진보는 길고 가늘게 한참 더 명맥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그 점괘를 듣고서, 난 웃음을 터뜨렸다.
애초부터 희망은 갖고 있지 않았다. 내가 '진보'로서의 정치적 스탠스를 견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통한 무관심과 '그러니까 나도 내가 먹고 사는 문제에만 신경쓰겠다'는 식의 정당화를 거부하고 항상 보다 드높은 가치를 추구한다는 나 자신의 명예 때문이다. 그것이 실제로 이뤄질 수 있으리라고 여겨서가 아니다.
나는 결코 순수하고 고결한 인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순수성과 고결함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대중이 민중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가지고서 소통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한 발 떨어져 선 채 전라디언이 어쩌고 홍어가 저쩌고 뇌무현이 이렇고 슨상님이 저렇고 시시덕대기만 하는 이들이 변화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경멸한다.
나는 한없이 범속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스로에게 가질 수 있는 긍지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그 '절망은 내 의지를 꺾지 못한다'는 명예에서 비롯할 것이다. 이게 설령, 알량한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이라 해도.
희망이 없어도 괜찮다. 결과가 나빠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끝까지 굴복하지 않을 수 있냐, 그리고 마지막에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냐는 거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희망 버스가 있는 날이다. 헤게모니를 가진 자들의 잔치에 불과하다고 여겨서 나갈 생각이 없었지만, 저 점괘를 듣고서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 낮에 가야만 하는 선약이 있어서 불참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카페 마리 같은 곳이라도 들러야겠다.
ps=...반해 있는 그 분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나친 욕심이다, 핫하...
ps2=며칠 전, 지인이 '졸업하고 나면 취직 때문에 고민이 많을텐데 아는 출판사 쪽 몇 군데에 자리를 알아봐 줄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그 때는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생각해 보니 그렇게 되면, 명절 때 취직한 친척들 앞에서 공연히 위축되지도 않을테고, 어머니 용돈도 드릴 수 있게 되겠지만... 또한 동시에 낙하산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나 때문에 그 자리를 정당하게 잡지 못한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 소개해준 사람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언제나 위축되어 있고 불안할 게 확실하다. 당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취직한 사회인, 30대 대졸 백수. 양쪽 다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최소한 나는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고 싶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허세돋는다. 1년이나 갈까ㅋ
거울 쪽에서 회의가 있어서 나갔다 왔다. 돌아오던 길 편집장님과 사담을 나누다가... 최근 반한 분 화제가 나왔다... ...라기 보다는 편집장님은 아무 생각 없이 말씀하셨는데 내가 낚였다-_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야기하지 않는 쪽이 나을 것 같다. 그 분도 거울 분이고... 누구인지 이야기하면 편집장님도 도와주시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분의 의사다. 내가 꿈에서까지 그 분을 보건 말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 분이 내게 마음이 없으시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나는 마음을 접어야 한다.
편집장님이 엮어 주셔서... 결국 내가 그 분과 잘된다면 모르겠지만, 그 분이 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는 이상 일단 잘 되지 않을 가능성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그 분은 내게 별 감정이 없는 데도 내가 그 분에게 마음이 있다... 는 게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고 사람들 입을 타게 되면, 내가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그 분 입장이 아무래도 거북해질 수밖에 없다. 결론은... ...누구에게 도움 받을 생각하지 말고 나 혼자 어떻게든 해봐야 한다... 인 듯.
사실 개인적으로는 광복절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독립군의 희생이 덧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해방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덕택에 이뤄진 것이었으며 조선인들이 스스로 이뤄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민중으로 거듭날 기회를 갖지 못한 이 나라의 국민들은 미소로 대표되는 두 이념 간의 대리전을 수행하기 위한 일종의 용병으로서 분열을 요구당했다. 그 이후로 6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남쪽은 탐욕과 천박함으로 얼룩졌고, 북쪽은 공포와 무자비함으로 뒤덮였다.
외세에 의존한 해방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이후 수십년간 공화국 대한민국을 지배한 근대화라는 이름의 개발독재의 기틀이 놓였다는 점에서 마냥 오늘의 의미를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민중의 것이어야 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가치를 독점하고서 친미 독재자 하나의 위업으로 종속시키려고 하는 짓거리는 못 봐주겠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내 주변에 '친구' 내지 '친인' '지인'이 얼마나 있는지 머릿속으로 정리를 좀 해봤다.
군대를 갔다 오자마자 알바 자리보다 먼저 구한 게 trpg팀이었고, 거기서 알게 된 형들과 6년 째 교분을 이어오고 있다. 완전히 터놓고 격의 없이 지내는 건 아니지만, 꽤 친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터놓는 건... ....하고 싶지 않다. 안 좋았던 일을 이야기했다가 중2병 취급 당했고, 그 이후로 그런 이야기를 하기 싫어졌다. 딱히 실망했다거나 한 건 아니다. 객관적으로 그렇게 보일 만한 여지가 있기도 했고, 꼭 자신의 치부라거나 트라우마 같은 걸 드러낼 수 있어야만이 친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난 그걸 깨닫는데 상당히 오래 걸렸다.
하지만, 두번 다시 그 형들한테 내가 진정으로 절실하게 고민하는 것이나 두려워하는 것, 갈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견뎌야 했던 시간들은, 중2병이라는 단어 하나로 그렇게 간단히 소급될 수 있을 정도로 하찮은 게 아니었다.
지금도 그 형들과 친하다고는 생각한다. '먼저 마음을 열고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을 여러 번 시도해봤었고, 대개 실패했고, 그 중 몇 번은 매우 나쁘게 끝났다. 하지만 성공한 경우도 있었고, 그 형들과의 관계는 제법 성공적인 축에 든다.
그러니 괜찮다. 이 정도 관계만 유지할 수 있어도,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발전한 거다. 그리고 이 정도 관계만으로도, '만나서 딱히 뭔가를 하지 않은 채 농담하고 잡담하면서 적당히 노닥대기만 하더라도 즐거운' 정도는 된다.
.........
문득 지금 반한 상대가 떠오른다. 그 분이 받아들인다면, 난 다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고, 주의깊게 거리를 재고, 이해받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와 상대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이성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 모든 것들이 다시 반복될 것이다. 나는 또 다시 갓 제대했을 무렵, 6년 전 당시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절한다면, 나는 최소한 인간 관계 같은 것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고민하지도 우울해 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타인에 대한 인정이나 배려 같은 것은 거의 신경쓰지 않은 채 오직 나 자신의 충동에만 이끌리며 나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이 될 것이다.
...내가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건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고,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런 경우가 비교적 적은 편이었지만, 어쨌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 하나로 사람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 같은 건 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분에 대한 이 감정이 결국 어떤 방향으로 흐르냐가 내게 있어 결코 작지 않은 하나의 '계기'가 될 것임은 확실해 보인다.
그녀는 첫눈에 반할 정도의 미인이거나 한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화장기 없는 얼굴에 가는 눈썹과 쌍꺼풀 없는 속눈썹, 아몬드 형의 눈은 얼핏 보기에 약간 쌀쌀 맞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상을 완화시키는 것은 동그란 얼굴형과, 그 얼굴 주변으로 흘러 내리는 숱 많고 부드러운, 살짝 굽슬거리는 갈색 머리칼,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생동감이 넘치는 그 눈빛, 목소리, 말투, 그리고 웃음 소리다. 그녀의 눈동자는 울창한 숲 속에 고인 작은 샘을 떠올리게 한다. 조용히 물줄기가 샘솟고, 낙엽 몇 개가 떨어져 작은 파문과 함께 그 위를 떠돌고, 오직 새들과 작은 동물들만이 목을 축이는 샘과 같다. 마냥 맑기만 한 샘은 아니다. 가끔은 흐려지기도 하고, 가끔은 작지만 격렬한 파문이 일기도 한다. 그녀가 미소지으면, 섬세한 윤곽을 지닌 아몬드 형의 그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구부러진다. 그 다갈색 눈동자는 따스하고, 머리칼이 가볍게 얼굴 주변으로 나부낀다. 미간이 살짝 보기 싫지 않을 정도로 찡그려지고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아래 보일락 말락하게 보조개가 파인다. 적당히 보기 좋을 정도의 높이를 가진 콧날 아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중과 그 아래 자리한 그렇게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분홍빛 입술 양쪽 끝이 들려 올라가고 뾰족한 송곳니가 살짝 드러나 보인다. 그녀가 웃는 모습은 물론, 찡그린 표정도, 화내는 표정도, 투덜대는 표정도, 슬퍼하는 표정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지상에 속해 있으며, 지상에 속한 그 모든 번잡함과 너절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더럽혀지는 법 없이 '그녀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한 '인간됨'은 누군가가 한때 간절히 추구했던 것이며, 이제는 거의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좋은 쪽으로도 아마 나쁜 쪽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인간다우며, 인간성에 속한 그 모든 것들을 긍정하면서 꺾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누군가가 한 때 동경했던 것이며, 필사적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 때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 앞에 있다면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조갑제(이하 조영감님)의 주장을 (짜증을 억누르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의외로 논리정연하다. 사람이 아무리 망가져도 평생에 걸쳐 익힌 가락은 어디 안 가는 법이고, 조영감님은 한 때나마 개념 기자의 본좌였다. 지금까지도 그 간명한 논리와 알기 쉬운 문장은 여전하다(국한문 혼용 주장은 논외로 한다). 그러나 문제는, 논리와는 별개로 그 근본적인 사고 방식 자체가 낡은 데다 그 구조 역시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영감님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저는 "북한 정권은 사악한 것"이라는 명제다. 이 명제 자체는 말할 것 없이 참이다. 그러나 조영감님은 그 명제가 참이라는 것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다른 모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그 한 가지 사실에 종속시켜 버린다. 북한 김씨 왕조의 악랄함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정도가 좀 덜하고 양상이 달랐을 뿐 무자비한 독재 정권이기는 마찬가지였던 한국의 군사 정권에 대한 비판 역시 그 자체로 온당한 것이다. 그러나 조영감님은 "북한 정권의 사악함"이라는 그 명제 하나에만 매몰되어서는 반대급부로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바치며, 누군가가 그 점을 지적하면 "북한 정권이 악하지 않다는 거냐, 이런 빨생이 새퀴"라고 반문한다. 조영감님의 글 여럿을 두고 교차 검증을 해보면 명백히 드러나는 특유의 이중잣대와 흑백논리는 여기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 이중잣대와 흑백논리는 친북은 친일보다 나쁘다는 병맛 넘치는 주장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조영감님이라는 인물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악인이 아니다. '공화국 대한민국의 청산되지 못한 부정성의 총화'인 이명박에 비하면 순수하기까지 하다. 그의 이상은 뚜렷하고, 신념은 단호하다. 그가 주장하는 북한 정권의 사악함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그의 눈을 멀게 한다.
조영감님의 행보를 지켜보자면,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당시의 입장, 그리고 그를 둘러싼 당시의 조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절감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나는 전쟁의 참상을 겪어보지 못했고, 산업화와 근대화를 지켜보지 못했다. 대신 나는 그러한 외형적인 급성장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어둠 속에서 태어났고, 그 그늘 아래서 자랐다. 나는 그렇게 좌파가 되었고, 스스로의 편향성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를 고칠 생각은 없다.
스스로를 성찰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나는 내 명예를 위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그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조영감님도 자기 성찰과 회의를 거듭한다고 한다, 그래봤자 결론은 '역시 난 틀리지 않았어'로 수렴되긴 하는데-_- 조영감님은 그의 한 저서에서 '기자는 진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자성과 회의를 끝없이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의 몫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아마 이 역시도 언론이 통제되고 대부분의 시민들이 진실에 접근할 기회 자체가 차단되어 있던 7~80년대 군사 정권 하에서 가질 만한 기자로서의 엘리티즘의 발로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이들 속에서 나 자신과 비슷한 어떤 면모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ps=그러고 보니 곶감 정동영 선생이 '노인 분들은 선거날 나오지 말고 쉬시라'소리를 해서 감 까듯이 까일 때도 나는 반사적으로 거기에 공감했다가 다음 순간 그런 자신을 깨닫고 식겁했었지, 젠장-_-
꿈을 꾸고 있을 당시에는... 행복감이라고까지는 하기 힘들어도, 분명히 즐거웠다. 그 꿈 속에서는 내가 한 때 간절히 원했던 것이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악몽이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고 난 뒤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끝나버린 꿈에는 의미가 없다. 예전에도... 비슷한 꿈을 몇 번 꿨었다. 그 때는 깨고 난 다음에는 한없이 우울해서... 눈물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지만 이제는 비교적 덤덤하다. 나는 그 때와는 다르다. 난, 강해졌다.
그런 꿈을 꿨다는 것 자체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직도 여전히 그 꿈 속의 풍경을 바라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무의식까지 통제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예전의 그 한심한 꼴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한참동안 아팠다. 지금도 여전히 상태가 썩 좋진 않지만, 정신적으로 약간 우울하고 침체되어 있어서 그렇지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정도가 극단적이지 않은 한은, 대개의 경우 몸의 고통보다 정신의 고통이 더 견디기 쉽다. 정신의 고통이 몸의 고통보다 힘들다는 주장은 한심한 투정인 경우가 많다.
오랜만에 메일을 확인해 보니 거울 쪽에서 연락이 와 있었다. 그간 연락을 못한 것도 있고...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는 쓰던 원고 완성해서 보내야겠다. 이미 많이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몸 상태가 회복되어 다행이다.
...한달은 쓸모가 없겠지만 뭐. 어떻게 행동할 것이며,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대강 예상.
예상 반응:
1. 승락한다.
단번에 승락할 가능성은 사실 매우 낮다. 높게 쳐봐야 20퍼센트. 그 사람은 밝고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성격이고, 대체적으로 누구한테나 그렇게 대하는 편인 듯 하다. 딱히 그 사람에게 내가 특별한 대상이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2. 거절한다.
안지는 제법 되었지만 사적으로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 받거나 할 정도로 친밀하지는 않다. '친구로 지내요' 정도의 완곡한 거절이 돌아올 가능성도 상당하다. ...어쩌면, 나 자신을 위해서는 이 가능성이 가장 바람직한 걸지도 모른다. 이 가능성은 대략 35퍼센트 정도.
3. 생각해 보겠다고 답한다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대답이다. 가능성은 약 45퍼센트(생각해 보겠다고 한 후 연락이 끊긴다거나 하는 건 거절이라고 봐야 할테니 2에 포함).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대답인 동시에, 그 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가장 애매한 대답이기도 하다.
각 반응 별 대처:
1. 승낙한다고 해서 전부 끝나는 건 아니다.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고 해서 오래 간다는 법도 없고. 서툴게나마... 연애 심리 관련 서적 같은 것도 찾아보고, '이런 종류의 지식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닐텐데' '그래도 아예 헛소리는 아니겠지, 참고 정도는 해보자' 사이에서 고민하고, 데이트 코스 같은 것도 뒤져보고, 공통된 화제 거리도 찾아보고, 소소한 선물이라도 해주기 위해 알바도 구하고... 하게 되겠지. 그 다음은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연애하기 즐거운 상대는 아닌 쪽에 가깝고. 사귄다고 주변에 일부러 알리고 다니거나 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2. 나는 한번 거절당한 상대 주변에서 맴돌며 계속 기회를 노리거나 하는 짓거리가 싫다. 그 사람이 어장관리하면서 적당히 원하는 것만 취하는 유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그런 짓 자체가 싫다. 그러기엔 난 너무 자존심과 자의식이 강하다. 그 사람과는 다른 인간 관계를 통해서도 엮여 있는 게 있고 앞으로도 만날 일이 있겠지만... 가능한 거리를 두고, 필요한 이야기 외엔 하지 않고, 뒷풀이 같은 데도 안 가고... 하는 게 가장 무난할 것이다. 그 사람은 그냥 부담가지지 말고 예전처럼 지내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 보다 보면 나 자신이 내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주변에 티를 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분명 부담스러워 할 테고. 나는 그런 짓 못한다.
그런 생각도 든다. 이번에 거절당한다면 나는 앞으로 한참 동안, 최소한 몇 년 간은 고민하는 법도 슬퍼하는 법도 없이 오직 내 '강함'이라는 이상만을 쫓을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에고이스트고, 이런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해도 되는 걸까, 그게 과연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내내 고민해왔다. 하지만 거절당하면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냥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묻어 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그건 좀 무리다. 꿈에까지 나타나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차라리 거절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 술이나 한 잔 하고, 며칠 정도 좀 풀죽어 있는 선에서 마무리되겠지.
3. ....어렵다. 사실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대처 방안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난 그 사람에게 반한 게 맞고, 그 사람이 요구하는 거라면 불합리하거나 크게 어려운 게 아닌 이상 가능한 그에 맞추는 걸 우선한다. 그 외에는 불편해하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서 상황을 본다는 게 그나마 유일하게 도출 가능한 결론이다. 너무 애매한 방침이긴 한데,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 상황이 되어 봐야 할 것 같다.
기말 과제 하나 처리하고... 그거 끝내자마자 또 시험공부 하기 싫어서 웹서핑질하다 발견.
기억을 더듬어 몇 년 전에 했던 걸 다시 짚어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ABACC
무미건조한데다 근엄하고 올곧은 타입
▷ 성격
재밌지도 그렇다고 이상하지도 않은 사람의 전형입니다. 사회질서나 도덕관념에 절대적으로 충실한,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넥타이를 매고 부인과 잠자리를 가질 정도의 타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머 같은 것은 손톱의 때 만큼도 없어 은근히 무례한 인상을 온몸으로 풍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이런 타입은 놀이를 죄악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놀이와 즐거움을 부정할 뿐 아니라 배우자나 아이들, 심지어는 친구들에게까지 그런 생각을 강요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주위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꺼리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피해를 줍니다. 주위에서 볼 때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아가는지 신기한 생각이 들 정도인 타입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사람들이 절대로 알 수 없는 도원향과 같은 것이 마음 속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대인관계 (상대방이 이 타입일 경우 어떻게 하연 좋을까?)
연인, 배우자 - 이런 타입과는 가정생활을 해봤자 무미건조함의 반복일 뿐입니다.
거래처고객 - 목적지향과 사리분별은 지나칠 만큼 가지고 있지만 융통성이 없는 타입이라 당신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사 - 농담을 하며 장난이라도 치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상대입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그저 순응하고 있어야 합니다.
동료, 부하직원 - 성희롱 사건만큼은 일으키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일이면 능숙하게 잘 해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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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랬었지. 최근의 스스로를 돌아보며 다시 해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BCACC
냉정한 현실지향 타입 3
▷ 성격
완전히 자기 갈 길로 가는 타입입니다. 정도욕망도 없고 배려 따위는 알지 못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니 스트레스 같은 것과는 평생 인연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일절 감정을 섞지 않고 1+1=2라는 식으로 정리해 버립니다. 어떤 일에도 거의 동요하지 않기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도라도 깨친 승려와 같이 보입니다. 다만 번뇌와 형식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나 본능에 워낙 강약이 없어 그저 번뇌를 느낄 일도 없다는 것이 둘 사이의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엉망인 삶을 살아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은 지극히 납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위가 이러쿵저러쿵 평판을 하는 것은 오히려 월권을 휘두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위로부터는 외로운 삶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본인은 가장 즐겁고 편한삶인 경우도 있는 법입니다. 어쨌든 따뜻한 마음씨나 풍부한 감정을 늘려간다면 손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 대인관계 (상대방이 이 타입일 경우 어떻게 하연 좋을까?)
연인, 배우자 - 일반사회의 상식에서 꽤 동떨어진 상대방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을 앞으로 계속해서 용인해 줄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거래처고객 - 상대방의 자유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상사 - 이치를 모르는 상대는 아니니까 평상심으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타입의 상사와 만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동료, 부하직원 - 인간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는 기회라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비난을 하거나 푸념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아니 주변 사람들에게 쓸데 없는 기대를 걸거나 희망을 가지는 경우도 확실히 적어졌고, 난 역시 사회적 정의나 질서 자체보다는 그를 구하는 자기 자신의 태도나 결의 같은 것에 더 애착을 갖고 있는 모양이고, 그 외에도 이래저래 전보다 더욱 '나 자신'에 집중하게 된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 이 정도로까지 쿨하진 않은데.
이렇게 되고 싶기는 하다. 이렇게 된다면, 여전히 외로움이나 우울함을 느끼는 지금과는 달리, 오직 '강함'만을 쫓을 수 있을 듯 하다.
매주 금요일마다 인턴십으로 논술학원을 갔다 왔다(어제로 끝났다). 후배 하나가 있는데... 애가 SF도 좋아하고 웹진 거울도 드나들고 있어서... 학기 초부터 종종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같이 인턴십을 다니면서 친해졌다. 성격도 좋고 예의 바르고 다 좋은데... 애가
건강
없어
늘 감기를 달고 살길래 몸 관리 좀 하라고 타박을 줬는데... 한번은 그 녀석이 조금 이상한 말을 했다. 자기 가문이 꽤 명가인데, 대대로 자기 가문에서 태어나는 남자 두 명 중 한 명은 일찍 죽는다고. 명가인만큼 원수도 많고, 조상들이 못할 짓 한 것도 많은데 아마 그 벌을 받는 모양이다, 남자 친척 한 명은 매우 건강한데 자신 몸은 이 모양이라서 자신도 오래 살 것 같지 않다고 쓰게 웃어 보였다. 그 때는 '어휴 중2병 냄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하고 타박을 줬지만 왠지 좀 마음에 걸려서... 돌아와 녀석 본관으로 구글링을 좀 해보니 확실히 약간 꺼림칙한 이야기가 몇 가지 나왔다. 인터넷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으니 부정확한 사실도 섞여 있긴 하겠지만.
정말로 무슨 초자연적인 저주 같은 것 때문에 단명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가닥 했다 하는 가문 출신 양반치고 손에 그 정도 피를 안 묻힌 사람이 한 둘이 아니기도 했을 테고. 그런데 그 녀석이 우울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답답하고 열받았다. 젠장. 좋은 놈인데.
.....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그 녀석과 그렇게 오래 알아왔다거나 절친한 사이거나 한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거나 해도 한 동안 좀 우울하긴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종강하기 전에 그 녀석 데리고 밥도 사주고 어디 놀러라도 갈까 같은 생각을 하다가 그런 자신을 깨닫고 약간 놀랐다. 나는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상대도 성인이고, 스스로가 정한 삶의 방식이라면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도 딱히 나나 남들에게 심각한 민폐를 끼치지 않는 이상은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없다. 그 정도로 절친한 사이인 것도 아니고. 순간적으로 '이 놈도 삶을 좀 즐기면 좋을텐데'싶었지만 정작 나 자신부터가 그런 성격이 못 된다. 게다가, 나는...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신뢰하는 능력을 거의 잃어버리다시피 한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심각한 모순이다. 더 이상 깊이 연관되지 않고 지내다 때가 되면 졸업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선택이다.
.......
썩을-_- 그럴 수 있을 리가 있나. 망할.
다음 주에 연락해봐야지. 같이 한 잔 하면서... 아니 그 놈은 술 못 마시지. 밥이라도 먹으면서 소설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고 그래봐야지 쩝.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불합리해, 비논리적이야, 난 그래야 할 이유가 없어 젠장...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가 않다.
........
진심과 선의로써 타인을 대한다는 건 매우 중요한 거지만... 그와는 별도로 대단히 무력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내가 왜 그렇게 그 녀석을 신경쓰는지는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럴 뿐이다. 상대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만 할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나도 내 판단을 재고하고서 그 녀석이 원하는 쪽으로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그 녀석은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확실히 말한 적이 없고, 그걸 모르는 이상 난 거기에 신경쓰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 녀석이 나를 더 멀리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씁.
...이전과는 다르다. 그 때의 난 진심과 선의로 타인을 대하는 게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일지는 몰라도, 별로 쓸모가 있는 경우는 적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 결과를 감당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때의 내가 지금 내 앞에 있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비웃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나쁜 결과가 나온다 해도 그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 녀석이 나를 불편하게 여기고 멀리하게 된다 해도,
공동창작과 공연
다다음주 주말이 기말 대체 과제 데드라인이다. 일단 거의 다 써놨고... 저번에 교수가 태클 넣은 것에 따라 좀 고치기만 하면 된다. 훌륭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잘 뽑혀 나왔고, 교수 반응도 괜찮았고, 과제 한 번 안 낸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외엔 대체로 수업도 잘 듣고 과제도 잘 해간 편이니... A0 정도는 나올 듯.
독서 세미나
과제 한 번 안 낸 거 있고, 지각 몇 번 있고... 다른 것들은 괜찮게 잘 해 간 편이니 대충 B0~B+ 정도 무난히 예상 중.
전쟁사
시험도 잘 봤고 지각도 없고... 왠만해서는 A+ 나올 듯. 결석 한 번이 좀 걸리긴 한데, 별로 관련 없어 보이는 전공 소속인 학생들에게는 교수가 추가 보정을 좀 줄 듯 하니 못해도 A0 정도는 나와줄 듯. 다음 주 시험이긴 한데... 하루 날 잡아서 빡세게 공부하면 별 문제 없을 듯 하다.
인턴십
...이번 주면 드디어 끝난다, 만세! B+~A0 정도 무난히 예상 중.
과학 기술의 역사
다 좋은데 이번 주는 몸 상태가 개판이었던터라 결석. 게다가 그 날 발표 있었는데OTL 시험은 잘 봤으니까 다음 주에 결석계 들고 가서 어떻게 교섭을 잘 해보면 B+ 정도는 줄... ...까.....?
매스컴과 현대 사회
그냥 F를 받고 만다 아오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
대중 문화와 인간 행동
교수하고도 말이 잘 통하는 편이고, 수업 자체도 흥미롭고 해서 잘 들은 수업. A+은 무리겠지만 A0 정도는 나와줄 듯 하다.
컴퓨터 상태가 안 좋아 백신 정밀검사 돌리고서 피시방 가서 마저 하려다가 결국 2시간 동안 놀기만 하고는 돌아오던 중 불현듯 또 옛 기억이 떠올랐다.
인정한다. 난 그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크다. 희망을 가지고서 노력했고, 그 노력을 보답받을 것 같았고, 그리고 결국 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사람을 증오할 수도 없다. 한 때나마 친구라고 여겼고, 나름 그 사람 덕에 위안을 받은 것도 있었고, 그 사람도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그 모든 게 아무 의미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억울하기도 하다. 그 사람은 가끔씩 나를 떠올릴 일이 있다해도 기껏해야 약간 미안하다는 마음 정도밖에 없을 텐데 나는 몇 년이 지나도록 악몽을 꾸니.
나는... 썩 관대하다거나 한 성격이 못 된다. 그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서 날 배반한 것이었다면 거리낌없이, 내 온 마음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 사람을 거꾸러뜨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 사람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 역시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고, 그걸 알면서 그렇게 하기에는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겠다. 그건 불명예스러운 짓이다.
......
가끔 기도한다. 그 사람의 평안과 행복을 빈다.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그 기도는 다만, 명예마저 잃지 않기 위한 내 나름의 발악에 불과하다.
그 사람은 내게 '강자이기를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타인에게 공감하고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포기했다. 과 후배 놈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전라디언 드립을 치고 좌빨 드립을 치고 민주화 드립을 치는 걸 곁귀로 들어도 나는 무시한다. 나는 그들이 '진보'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속으로 경멸한다.
한참 생각을 해봤습니다만, 저와 교수님은, 그리고 현행 수업 방식은 저와 도저히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은 이하와 같습니다.
첫 번째로, 수업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불만이 없습니다. 하지만 매스컴과 현대 사회라는 이 과목은 그 근본적인 정의 상 교수님의 정치적인 관점 및 견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연히 수업 내용에 있어서도 그것이 반영될 수밖에 없고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는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는 식으로는 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자 역시도 인간이며, 그 자신이 속한 사회와 환경에 대해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고 과목 특성 상 그것은 필연적인 결과니까요. 관건은 다만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그러한 관점 차이를 얼마나 현명하게 좁힐 수 있느냐라고 봅니다. 딱히 그러한 견해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요(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그러한 자신의 신념이나 입장이 없어선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교수님은 그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에 수업 중에, 교수님이 ‘한국 사회의 분열은 북한의 책동 탓이다’ ‘현재 한국의 정당 중 보수는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이며 민주당부터 민주노동당까지는 전부 진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정치적 견해 차이를 떠나 사실 관계 자체가 틀렸다고 여겼고, 그래서 이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그 때 교수님은 제가 하고자 하던 이야기를 중간에 묵살해 버리고는 다른 학생들을 향해 교수님 자신의 주장만을 반복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이어지는 겁니다. 제 정치적 입장은 명백히 좌파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 북한 체제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않게 증오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북한 정권이 모든 종류의 가난과 억압, 고통과 슬픔을 거부했던 맑스의 이상을 외면하고서, 권위주의적 억압과 대중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정당화하는 스탈린 식 일당 독재 체제를 합리화하며 결국 그들이 말하는 주체사상으로 생명, 인권, 정의와 같은 ‘이념을 떠난 근본적인 가치’들을 외면했기 때문이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처럼 ‘사악한 빨갱이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닙니다. 전 북한 지배층이 좌파라거나 사회주의라거나 하는 것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그 이상을 모독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제 자체는 단순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반공’을 국시로 내건 이승만 정권 이래로 내내 ‘북한 체제는 사악한 것이다’->‘북한 체제는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경제적으로 공산주의다’->‘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상은 자유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사악하고도 불합리한 것이다’라는 위정자들의 선전에 지배당해왔고, 그로 인해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의 개념 자체가 왜곡되어 일반에 전파되어 있는 실정이며 저는 그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본 결과 좌파를 스스로의 정치적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저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음을 인정하며,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정작 스스로는 ‘좌파 사상은 사악한 것’이라는 식의 7~80년대 군사정권 시절의 테제를 그대로 반복해서 주장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는 지난 주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지금처럼 살면 인생의 패배자 밖에 못 된다, 노력하면 누구나 승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경쟁 체제는 그 정의 상 본질적으로 ‘승자’는 소수이며 ‘패자’는 다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출발선의 위치 자체가 너무 현격히 차이가 나면 그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며,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은 이미 견고해져가고 있습니다. 교수님이 젊으셨던 시절에는 그것이 비교적 용이했을지 몰라도 부와 권력의 자손 승계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합리화, 합법화되어 가고 있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아닙니다. 그러한 노력이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한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만, 승자는 패자가 있기에-즉 자신이 경쟁에서 따돌린 패자들의 시체를 발 아래 딛고 있기에 그 ‘승리’를 손에 잡을 수 있는 겁니다. 교수님께선 기업의 사회 환원이나 자선 활동 등이 무한 경쟁의 폐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기시는 듯합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언제나 승자보다 많을 수밖에 없는 패자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스스로 발전하고 향상될 기회를 얻지 못하고서 늘 승자가 관대하게 베푸는 자비에만 의존해야 하게 될 겁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것처럼 삶의 목적은 고통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삶 그 자체를 누리는 것이지 승리하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교수님과 저의 관점 차이로 여기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가장 제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유성 기업 자동차 노조의 파업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교수님은 그 사람들도 계속 야근하려면 힘들기야 하겠지만 그 직장도 없어서 고생하는 실업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당장 학생들도 취직 고민이 많은데 보기에 좀 그렇지 않냐, 그런 파업은 국익에 위배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교수님께 묻고 싶습니다. 무엇을 위한 국익입니까? 국가는 그 자체로 신성하고 존엄한 권위가 아니며, 국민 대다수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업은 이익을 내는 게 존재 의의이고, 거기에 노동 강도나 작업 환경 등의 문제는 가장 효율적으로 이익을 내야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구 소련의 국가에 의한 직접적인 시장 통제와 같은 방법이 먹힐 거라고는 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업에 도덕관념을 요구하는 대신 그 존재 의의에 따라서 이익을 위해 움직이라고 하고, 법과 시스템을 통해 그러한 기업을 견제하고 가능한 모든 국민들의, 불가능하다면 최대한 많은 국민들의 복리 증진을 위해 움직이는 게 국가의 역할이죠.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정경 유착과 기업인들의 탈세, 중소기업에 대한 폭리, 노조 탄압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한 국익입니까? 나라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겁니까? 나아질 거라는 전망도 없는데 대체 언제까지? 그런 걸 두고 파시즘이라고 부릅니다.
결정적으로,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너희도 취직 때문에 고민이 많을텐데 고액 연봉을 받는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게 보기 좋냐’는 투로 말씀하셨습니다(그런 의도가 아니셨다면 죄송합니다만 맥락 상 저는 그렇게밖에는 해석이 안 되더군요). 이번 파업은,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시행됐습니다. 교수님도 인정하셨다시피 파업 노동자들이 죽창과 쇠파이프를 휘두르지도 않았고요. 정당한 이유에 따라 합법적으로 실시된 파업을 공권력으로 억누르는 처사는 그 실체조차 불명확한 ‘국익’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무엇이 옳은 것인가’ ‘무엇이 정의인가’를 말씀하시는 대신, ‘당장 취직을 하지 못해 힘든 입장에서 고액 연봉 받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어떻게 보이냐’라는 ‘이익’을 말씀하셨습니다. 교수님 자신은 자각이 없으셨을지 몰라도,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학생들이 ‘정의’를 고민하게 하는 대신 이기심에 더 이끌리도록 종용하신 셈입니다. 저 자신도 완벽하게 도덕적이고 고결한 인간과는 거리가 멉니다. 저도 이기심이 있고, 시기심이 있고, 냉담함이 있습니다. 가끔은 거기에 휘둘릴 때도 있고, 그로 인해 후회하게 될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한 자주 스스로를 돌아보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무엇이 드높고 명예로운 것인가에 대해서 자문해 보곤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저 자신에게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다른 학생들 역시도 그러한 자문을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학생들이 스스로 그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조차 빼앗으려고 하셨습니다. 그게 교수님의 본의는 아닐지라도요.
제가 어리고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보일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어린 시절, 쌀 살 돈이 없어서 뒷산에 올라가 약숫물과 진달래 꽃잎, 산딸기로 배를 채워야 했던 가난을 겪어봤으면서도 ‘정신 못 차리고 세상모르는 소리만 하는’ ‘책상머리 앞에 앉아 책만 줄창 읽었을 뿐 현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여겨지실 겁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비정규직이라도 좋다는 심정으로 수 십장의 이력서를 써서 어디에라도 취직하고, 나이가 더 들고 나면 저도 역시 어떤 식으로건, 어느 정도로건 탐욕과 이기심을 정당화하고 남들도 다 그렇다- 산다는 게 원래 그렇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아마도 그렇게 될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직 20대인 지금은 도저히 그렇게 못 하겠습니다.
어차피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더 이상 이 수업을 듣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니, 거부합니다. 교수님은 한심하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고, 이 수업을 같이 듣는 학우들은 허세라고만 여길지도 모르는 저의 그 긍지를 위해.
학우 여러분들께도 한 말씀 드립니다. 제 생각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저처럼 수업을 거부하라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틀렸을 수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너무 무례하다고 여겨지신다면 죄송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이와 관련해 교수님께 드릴 말씀도, 들을 이야기도 없을 것 같습니다.
불손하게 보일 수 있는 글을 드리는 것, 재차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건강하십시오.
2011. 6. 2. 올림.
목요일이다. 참다 못해 결국 그 교수에게 '빡쳐서 도저히 님 수업 못 듣겠음 수업 거부할거임ㅇㅇ'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는 주려고 했는데 아침에 가보니 아직 안 왔길래... 그냥 책상에 올려놓고서는 몇 부 더 뽑아온 걸 같이 수업 듣는 학생들에게 생각 있으면 돌아가며 한번씩 읽어보라고 하고서는 나눠줬다.
그 교수가 저 편지 한 장 읽고서 스스로의 사고방식을 고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같이 수업 듣던 학생들도 저거 읽어보고서 무언가 영향을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알량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기대를 가질 만한 시기는 지났다. 교수는 그냥 '얘가 좌빨이구나' 내지 '건방진 새퀴' 해버리고는 F를 띄울 가능성이 높고, 다른 학생들도 대충 읽어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아 ㅅㅂ 조낸 잘난 척하네 어쩌라고'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내가 손해볼 건 없다. 어차피 이 수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오직 그 교수만 알고 있는 특별하고 독보적인 지식인 것도 아니고, 책 좀 읽고 뉴스만 꼬박꼬박 챙겨봐도 익힐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그 정도 지식은 이미 가지고 있다. F가 뜰 게 거의 확실한 학점은 좀 문제긴 한데, 그래봤자 교양이고 이번 학기에 듣는 교양은 그것 말고도 많다. 학점 포기 하고서 다음 학기에 교양 하나 더 들으면 된다. 그래도 교수인데 너무 무례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이건 좀 마음에 걸리지만 뭐 어쩔 수 없다. 단지 교수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아무 말도 않고 그걸 계속 듣고 있기에는 내 정신 건강에 미치는 해약이 너무 심각하다.
내가 좌파인 진짜 이유는, 그 좌파로서의 이상이 정말로 실현될 것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다만 눈 앞의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채 불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꿈꾼다는 자기만족을 위해서일 뿐이다. 나의 그러한 에고만 충족된다면 사실 굳이 '정치적 지향점으로서의 좌익'이라는 정체성을 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념을 떠나서, 진정으로 순수하고 고귀한 인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상을 믿으며 타자와 연대하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의 그 에고만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거기서 만족하는, 그런 인간에 불과하다.
....그래서 원래 교수한테만 쓸 생각이었는데, 나 자신도 확실히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충동 때문에 여러 장 뽑아서 다른 학생들에게도 나눠줬다. 돌아오며 속으로 자문했다. 어차피 이 수업을 듣는 40여 명의 학생들 중에 이 편지에서 내가 쓴 내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결코 높지 않은데 나는 왜 공연히 돈 들이고 종이 낭비해 가며 여러 장을 뽑아간 걸까.
아마도 중2돋는 허세일 거다. 나는 내가 저 편지에서 틀린 이야기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들이 그걸 알아줄 거라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나는 사람을 너무나도 믿지 못한다. 게다가 나 자신이 그렇게까지 정의롭고 고결한 인간일 리도 없다.
의식적으로는 '내 에고만을 만족시키면 되니까 남들이 다들 절망하고 포기해 버리건 말건 나는 저항을 계속할 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내 안 깊은 곳에서는 남들에게 인정 받고, 그 가운데서 돋보이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내가 다른 학생들에게도 저 편지를 나눠준 건 아마도 그런 이유... 일 거다.
예전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을 때처럼 오직 상대방만 떠오르고, 모든 것을 상대방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럴 나이는 지났다.
하지만... 그 사람이 취해서 다른 분 팔에 매달린 채 횡설수설하는 건 썩 보기가 좋지 않았다. 취해서 그런 건 괜찮다. 나도 취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실수한 적이 몇 번 있다. 상습적으로 그러거나 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다.
그렇지만 다른 분 팔에 매달려 거의 껴안다시피 하고 있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난 그 감정이 어떤 건지 이해한다. 질투다, 이건.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돌아오며 괜히 애꿎은 벽만 한 번 걷어찼다, 쳇-_-
......
내가... 왜 그 분에게 반한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내가 과연 누군가를 사랑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건 원래 완전히 분석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내 감정에 대해서는 확신하게 됐다. 그러나 그 분이 내 마음을 받아들이냐는 별개 문제다. 받아 들인다해도 과연 얼마나 갈 것인지도 알 수 없고. 하지만 지금은 그것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다니, 모르는 새에 나도 꽤 변한 모양이다.
조만간.... 적당한 기회를 봐서 내 마음을 밝혀야겠다. 승낙한다면 그걸로 된 거고, 거절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해봐야겠다고 하면 기다릴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거절한다면, 나는 언젠가 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 결코 짧지 않을 시간 동안 '강함'이나 '명예' 등과 같은 내 이상을 돌아보지 않고 쫓으며, 내가 나 자신으로서 존재한다는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승낙한다면 그것 역시도 재고해봐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강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 되었다.
이전 수업 시간에 민노당과 무려 민주당을 놓고 '둘 다 좌파 정당임ㅋ' '한국 사회의 분열은 북한의 음모ㅇㅇ' 같은 소리를 할 때부터 이미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라갔다. 참다 못해 몇 마디 했지만 '니가 어려서 뭘 모름' '훗 하여간 철없는 이상주의에 쩐 대학생이란' 식의 소리만 들었다.
그 교수의 정견을 수정해 놓겠다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나 자신도 올바름으로 이뤄져 있다거나 한 건 결코 아니고, 나이가 들고 젊은 시절부터 보고 들은 게 전부 그런 식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그것이 개인의 정견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진실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문제다.
지각이나 결석 등 이래저래 교수한테 안 좋게 보일 거리도 좀 있고, 저번에는 내가 좀 무례했다는 생각도 들어서 왠만해서는 참으려고 했는데.... 목요일날 유성 기업 자동차 노조 파업 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거기 노동자들 연봉이 대단하거든요? 그런데도 야근이 끊이질 않으니까, 그 돈 안 받고서라도 좀 쉬고 싶다고 파업한 거에요. 물론 힘들기야 하겠죠. 하지만 그 직장도 없어서 고생하는 실업자들이 한 둘이 아니거든요? 여러분들 취직 고민되죠? 여러분들이 보기에 좀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유성 기업에서 생산하는 피스톤링이 국내 자동차 생산업체 공급 점유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파업 때문에 현대 같은 기업들이 큰 손해를 봤어요. 거기 노동자들이 죽창이나 쇠파이프 같은 거 안 휘두르고 드러눕는 정도로 평화시위한 것까지는 높게 평가해줄 수도 있지만 국익이 훼손된다고요. 여러분들도 노동자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기업주 입장도 좀 헤아릴 수 있는 '폭넓고 균형잡힌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무상급식 같은 파퓰리즘에 휘둘리지 말고."
플러스 알파.
"여러분들도 정치나 사회에 관심 좀 가지세요, 늘 멍하니 학교에서 시간만 때우다가 수업 끝나면 술 마시러가고 피시방 가고 하지 말고. 그런 식으로 살면 루저 밖에 못 되요. 승리해야죠, 안 그래요?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싶어요? 제가 말이 좀 지나치긴 한데, 충격 요법을 좀 써봤습니다. 정신들 차리라고."
아아, 그러쿠나... 노동자 관점에서만 보면 편향적이니 기업주 입장도 헤아려야 하는 것이어쿠나.... 인생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되는 것이어쿠나......
...........
내가 왜
-_-
이미 안드로메다에 가 있던 어이가 다시 시동을 걸더니만 급가속해 전력으로 오리온을 천원돌파하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태클 걸 곳이 많아서 어디서부터 걸어야할지 모르겠어, 이건 뭐 총체적 난국이군요?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웃을까? 웃어야 하는 건가? 응응응?
....경쟁 체제는 그 정의 상 본질적으로 '승자'는 소수이며, '패자'는 다수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출발선의 위치 자체가 너무나도 현격히 차이가 나면 그 가능성은 더욱 감소하고,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은 이미 고착화되어 가고 있다. 승자는 패자가 존재하기에, 자신이 쌓아온 희생자들의 시체를 딛고 있기에 그 승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삶의 목적은 고통과 희망으로 가득한 삶 그 자체를 누리는 것이지 승리가 아니다.
기업주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라, 국익이라. 그 노동자들도, 그리고 곧 졸업을 앞두고 있는 나도 명백한 '약자'다. 이건 뭐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 고양이가 최소한 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가능한 생존을 위해 최소한만 쥐를 먹으려고 하고, 쥐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예컨데, 이웃집의 사납고 그저 재미삼아 쥐 사냥을 하는 고양이와 맞서 싸운다거나- 그럴 수도 있다('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양이가 아무리 관대하다 해도 그 고양이의 새끼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익을 내는 것이 존재 의의인 기업이 퍽이나 그러겠다. 게다가 뭐, 국이익? 그 알량한 국익이 국민들한테 얼마나 돌아갔는데!? 양극화만 심화됐을 뿐이지.
폭넓고 균형잡힌 시야, 물론 중요한 거다. 하지만 그게 적절한 사안이 있고 아닌 사안이 있다. 교수의 논리는 전제 자체가 글러 먹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빡치는 건, 취직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을 학생들에게 자신의 논리를 강화시키기 위해 '너희도 취직하고 싶은데 고액 연봉받는 노동자들이 파업 같은 거 하면 아니꼽지 않냐'라는 식의 비겁하고 교활한 화법을 씀으로써 학생들이 그 노동자들에게 공감하고, 약자로서의 연대를 이룰 가능성을 차단하려고 했다는 거다.
더 이상은 못 참아주겠다. 학기도 거의 끝나가고, 조금만 입다물고 있으면 교수가 내게 괘씸죄를 적용하지 않은 한에야 그럭저럭 B정도는 받고 마무리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더는 아니다. 그 교수가 오직 그 교수에게만 배울 수 있는 독보적이고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작자하고 한 강의실에 있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짜증난다. 차라리 학점 포기를 하고 다음 학기에 교양 하나 더 듣고 만다 썅. 또 그런 교수를 만난다면 대략 시발 망했어요 되는 거지만 이번 학기 참는다고 해서 그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게 만일 회사였고, 인사권을 쥔 상사가 저런 소리를 했다면 나 역시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아직 대학생이고, 교양과목 교수가 내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F를 띄우는 것 뿐이다. 받아주지 망할, 알량한 학점 몇 점 때문에 신념을 팔아치울 것 같냐. 아니, 이건 신념 이전에 내 자존심의 문제다. 자기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렇게 비열한 화법까지 쓰는 상대에게까지 굽신거리고 싶지는 않다.
군부 독재가 끝나고 김영삼 정권이 집권하며 한국의 형식적 민주주의는 달성되었다(노태우 정권은 군사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점에서 논외로 한다). 비록 3김 체제라는, 일종의 과두적 정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는 명백했지만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정치군인들의 오랜 전횡에 시달려 오던 한국의 근대에 있어 그 가치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러나 독재가 종식되고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숙화되는 단계에 접어들자 그토록이나 간절했던 자유와 민주주의의 대의는 급속히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흐려지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의 퇴진은 그 자체로 분명 한국의 정치적 진보에 중요한 주춧돌이 된 사건이었으나, 그 주춧돌은 ‘반공’을 국시로 해서 성립된 이승만 정권의 대한민국 초대 정부 시절 이전부터 존재해 온 좌우의 갈등을 표면화·본격화시키는 기점이 되기도 했다.
한 때 그들 모두의 공통된 적은 분명했다. 헌법에 명시된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모독하고 권위주의 정부를 세운 군사 정권. 그러나 적어도 표면적으로나마 그것이 종식되고 나자 이념적 분열이 시작되었고, 여전히 위협으로 존재하고 있는 북한과 97년 가을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대의나 이상 같은 추상적인 가치보다는 일신의 안전과 이익에 민감해진 국민들의 정신적 토양 형성, 그러한 분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온 위정자들과 같은 요인들 때문에 그 분열은 점차 확고해지고 있다. 그러나 2011년 현재에 이르러, 가장 커다란 문제는 그러한 분열이 아니다. 지금의 한국은 화려한 외면적 성장 뒤에 여전히 전근대적인 의식과 관습이 뿌리박혀 있다. 그를 찬찬히 살펴보다 보면 어느덧 인정하게 된다. 한국은 ‘글로벌 코리아’가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슬픈 열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2. 무엇이 문제인가:자유로부터의 도피
한국 사회에 있어, 근대적 의미의 정치적 좌우 개념이 처음 수입된 것은 일본의 식민지 시절이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함께 연합군에 속해 추축국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지리적인 요인과 이념적인 요인 때문에 공동 전선을 펼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연합군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추축국의 맹주국이었던 독일이었고, 상대적으로 빈약한 세력으로 평가되던 제국주의 일본을 상대하는 동북아시아 전선의 상황은 우선 순위가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대신 양쪽 모두 조선의 무장 독립운동을 음으로 지원했고, 그와 더불어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와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도 흘러들어왔다.
독립 이후 남쪽은 미국에 의해, 북쪽은 소련에 의해 점령된 와중에서 우파의 경우에는 이승만과 김구 등에 의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좌파의 경우에는 박헌영, 김단야 등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수립되었다(이 이전에 이미 연해주에서 고려공산당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이르쿠츠크 분파와 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에 의해 수립된 상해파로 갈렸고, 전자는 볼셰비키에 충성하며 러시아에 머물렀고 후자는 국제 공산당 사건으로 인해 와해되었으므로 이후 사상적으로 미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좌파 정당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해방 이후 비교적 중도적이고 온건한 성향을 가진 양측 인사들의 주도로 좌우합작 운동을 통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 시도가 있었으나, 합작에 참가하지 않은 외곽 극우·극좌 조직들 간의 갈등과 합작에 참가한 인사들에 대한 테러리즘(한민당과 남로당이 각각 대표적이다), 초기에는 합작에 호의적이던 미군정의 지지 철회, 합작 운동의 구심점이던 여운형의 암살, 2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 및 한반도 문제 관할권의 UN 이관 등으로 인해 이 시도는 좌절되었다. 이 지점에서 일차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쪽 모두가 당시 한국에서 건전한 형태로 소화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 전쟁 전부터 이미 각각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주도하는 남과 북의 갈등은 노골화되어 가고 있었고, 미군의 신탁통치에 찬성한 임시정부는 어디까지나 경제 체제로서의 의미가 강한 자본주의가 곧 정치 체제로서의 자유민주주의와 동의어인 것처럼 선전했고, 이제 갓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원주민 신세에서 벗어났을 뿐 복잡한 정치 사회 이론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일반 국민들은 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였다. 이와 같은 실정은 공산주의 측에서는 더욱 심했으며, 당시 소련의 공산주의는 이미 트로츠키를 비롯한 정적들을 숙청한 스탈린에 의한 일당 독재와 ‘반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합리화되는 구조가 완성되어 있었다. 이제 갓 태어난 대한민국의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 것인지 이해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이렇게 애초부터 모순과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던 한국의 ‘좌익’과 ‘우익’은 한국 전쟁 이후로 확고히 대립하게 된다.
전쟁 후 실질적으로 두 개의 나라로 분단되고, 남쪽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전술했다시피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서는 적극적인 친미 노선을 걸으며 이후 공교육 체계를 통해 수십 년간 계속될 ‘미국은 착하고 소련은 나쁘다’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국민들에게 주입하는 기틀을 놓았고, 전쟁을 통해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극대화된 국민들은 그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한국을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는 방파제로 키우기 위해 행해진 미국의 대규모 지원은 이후 찾아오는 세계적인 호황 및 군사정권의 강력한 성장 중심 개발독재 정책과 상승효과를 일으켜 한국의 성장에 커다란 기여를 했지만 민주주의 국가로서 그 중핵을 이루는 국민들의 의식 수준은 그 지점에서 정체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서 우민화되어 온 데다, 갑작스레 맞이한 해방과 전쟁은 국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진보’할 틈을 주지 않았고 극단적인 반공 교육과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물질적 풍요와 쾌락은 그를 위한 최소한의 기회마저도 빼앗아갔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빨리, 많이 변했고 한국의 국민들은 스스로가 곧 민주주의 국가의 주체라는 자각을 이루기보다는 ‘정치 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많이 배우고 잘난 윗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식의 전근대적인 정치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국민들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권력을 쥔 이승만 정권은 당연한 귀결로 타락했고, 장외에서 야당 의원들에게 협박을 가함으로써 통과시킨 직선제 개헌 등으로 이미 처음부터 부패의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승만 정권은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를 거쳐 권력을 연장하려 하다 결국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짧은 윤보선 정권이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스스로도 남로당 출신이었던 박정희는 자신의 과거 이력과 결별하고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그늘을 만든 독재자가 되었다. 박정희는 스스로의 과거를 지울 겸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친미 반공 정책을 펼쳤고(이승만이 반공을 대한민국의 정체성으로 삼았다면, 박정희는 그걸 공고히 했다), 잇따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국토 종합 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이 과정의 정당성 및 효율성에 있어서는 학계에서도 아직까지 크게 논란이 되고 있으나, 그로 인해 한국의 이념 분열 및 일반 국민들의 정치관 혼란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 두 가지 요소가 생겨났으니 첫 번째는 뒤틀린 민족주의였고, 두 번째는 본격적인 정경 유착의 시작이었다.
당시까지 일관되게 이어져 내려 온 반공 교육으로 ‘북한은 우리의 적이며 공산주의는 악’이라는 개념은 한국 사회에 확고히 뿌리박혀 있었고, 이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북한의 일반 주민들을 같은 민족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박정희 정권은 답해야만 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에 대해 ‘우리의 적은 북한 정권이며, 북한 시민들은 우리가 해방시켜야 할 동족이다’라는 애매모호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거기에서 비켜갔고, 그를 통해 ‘북한 정권=사악한 빨갱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독립 운동 시절부터 계속되어 온 저항적 민족주의 사상의 흐름을 흡수해 국민적인 ‘애국주의’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식은 ‘북한 정권과 일반 북한 주민들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가 불명확했으며 무엇보다도 북한 체제 역시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에서 얼마나 거리가 먼지에 대해 외면했다는 점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기득권을 쥔 입장에서는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체제가 가진 나름의 장점을 인정하고 북한 체제가 받아들인 스탈린 식 일당독재 구조의 폐쇄성과 경직성, 권위주의를 공격하기보다는 그저 ‘공산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대립되는 사악한 것이다’라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게 손쉬운 데다 본질적으로 공산주의 경제 체제에 가까운 개념인 국가에 의한 사회 안전망 구축 등을 이론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사회의 다변화와 더불어 좌파 이론도 변화했고, 경쟁 지향적이고 소모적인 자본주의의 폐단이 일찍부터 지적되어 온 덕에 수정 자본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었지만 한국은 그럴 상황이 되지 못했다. 정도의 양상의 차이만 있었을 뿐 권위적이고 강압적이라는 면에서는 북한 체제와 다를 바 없는 군사 정권 입장에서는 국민들이 그러한 변화의 물결을 접하고 정신적으로 각성한 ‘민중’이 되기보다는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대중’으로 남는 쪽이 더욱 편리했다.
정경 유착의 문제 역시 그러했다. 유사 이래로 정치와 경제는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은 사실이나, 국민이 국가의 중핵이 되는 근대 국가와 다수 국민들의 생산 및 소비 활동으로 뒷받침되는 자본주의가 출현하며 그러한 유착과 부패의 구조는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오로지 성장과 효율의 신화만이 존재했던 70년대 한국에서 기업의 윤리나 사회적 책임과 같은 개념은 설 자리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박정희 정권의 공적은 경제 발전, 과실은 독재 정치라는 도식이 일반화되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 둘은 표리일체의 관계이며, 당시 한국의 경제 발전은 세계적인 호황에 힙입은 바가 컸고 그로 인한 ‘국익’마저도 다수 국민들에게 돌아가기보다는 대기업의 성장에 재투자되고 나머지는 기업주 및 관료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는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70년대는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정치 운동만이 아니라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과 여성 인권 향상을 주장하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저항이 격렬하던 시기였으며, 박정희 정권은 그 저항들을 단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들의 음모’로만 치부해 버렸다. 한국은 외연적으로는 눈부시게 성장했으나 그 성장의 그늘 속에서 억압당한 민중들의 눈물은 위로받지 못했고, ‘국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라는 편리한 논리와 정치적 수사들만 그들의 영전에 남겨졌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한 암살로 박정희 정권이 종식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간선제 방식으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전두환 소장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의 12.12. 쿠데타로 하야했고, ‘시대의 어둠’은 계속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 이상으로 강력하게 국민을 억압했고, 국민들은 숨이 막힐 듯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 배우고 진보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에게 저지른 가장 큰 죄는 따로 있다.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를 비롯한 좌익 사상은 사악한 것’이라는 독트린을 확립했고 박정희 정권은 좌익에 대치되는 우익의 개념마저도 그 의미를 곡해하고는 단순한 정권 연장의 도구로 삼았다면,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이 대중이 아닌 민중으로 각성할 기회를 빼앗아 버렸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성장이나 자아실현이 방해될 때 일종의 존재론적 위기에 빠지며 그 위기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타인에 대한 공격성이나 사디즘, 마조히즘, 권위에 대한 맹목, 스스로의 의지와 자발성에 대한 부정 등의 성향을 보이게 된다’고 지적했다. 전두환 정권은 충실히 군사독재의 길을 걸으면서 박정희 정권 시절 이미 전범이 세워진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을 고수했고, 어찌되었건 경제 성장을 이끌어냈다.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면면히 계승되어 온 강력한 국가주의는 국민들로 하여금 ‘나보다는 조직 우선, 개인보다는 국가 우선’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만들었고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이 자기 자신을 비롯한 기층민들의 자유나 인권, 사회적 정의, 시민의식에의 각성보다는 다만 정권이 ‘관대하게 베푸는’ 오락거리들과 국민 소득 100만불 시대라거나 OECD 회원국 가입 등 외면적인 화려함으로 치장된 수사들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기반을 다졌으며 국민들은 그에 현혹되어 강자와 권위에 대한 애정을, 약자와 빈천에 대한 경멸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권에 들어서야 언론에서 공공연히 언급되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도덕적 해이, 출세 지상주의, 엘리티즘 등의 상당 부분은 거기에서 비롯했다.
3. 나오는 글:미완의 시대
물론 현대 한국의 이념 분열이 모두 이 글에서 언급한 이유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니다. 군사정권을 거치는 동안 지배층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극단적으로 부풀려진 ‘빨갱이’들에 대한 증오는 확실히 지나친 것이지만 어쨌든 북한의 존재가 현실적인 위협인 것은 사실이며, 너무나도 빠른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신 구세대 간의 정신적 격차 문제도 있고, 97년의 경제 위기 이후 IMF로 대표되는 국제 금융 질서에 의해 강요된 신자유주의 경제사조가 이끄는 천민적인 자본주의로 인한 철학의 부재 초래 등 다양한 요인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애초부터 충분한 이해 없이 이식된 좌우 개념이 경제 개념과 혼동을 일으켰고, 지배층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그를 조장함으로써 국민들 대다수의 인식에 왜곡을 가져왔다는 것과 너무나도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해 국민들 스스로가 무엇이 문제이며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하루하루 그저 먹고 사는 문제에만 급급해왔다는 것이다. 2011년 현재, 한국은 여전히 분단과 독재의 그 시절을 완결짓지 못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루 이틀로는 불가능하다. 정치권이 바뀌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진보는 느리게, 시행착오를 거듭해 가면서도 스스로가 조금씩 이뤄가는 것이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들과 기업가들의 자비와 관용을 바랄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의 주체인 시민들 자신이 스스로 무기력하고 아둔한 대중에서 민중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미완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으로 가는 첫 발걸음이다.(*)
교양 과목 레포트로 쓴 것. 원래 이 정도로까지 각잡고 쓸 생각은 없었는데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주제기도 하고 전에 교수와 이것 관련해 좀 언쟁을 벌인 것도 있고 해서 다른 거 할 것도 많은데 일주일을 꼬박 때려 박았다. 그런 것치고는 좀 더 부연해야 할 부분을 안 하고 넘긴 부분도 있고 후반부에 들어 논리가 좀 널 뛰는 부분도 있고 특히 결론 부분에서 좀 오글거리기도 하는데... 몰라 젠장-_-
최근 들어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이다. 세부적인 내용은 약간씩 다르지만, 대개는 지금 아는 사람들이나 예전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나타나 나를 조소하거나 비난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그에 대한 내 반응도 그 때마다 다르다. 어떨 때는 우울함과 비참함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를 듣고만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떨 때는 열 받아서 주먹을 휘두를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그냥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물론 현실에서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내 무의식에 깔린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그런 식으로 나타난 것일 확률이 높다. 그래도 어쨌든 그런 꿈에서 깬 직후에는 대단히 기분이 더럽다. 고작 악몽 좀 꾼 것 가지고 그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 자체도 스스로가 나약해진 것 같은 기분이라 불쾌하고.
하지만, 어젯밤에는 달랐다.
꿈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그 누군가의 손을 잡고서 나는 하늘로 날아올랐고, 보랏빛과 장미빛이 어우러진 밤 하늘 가운데서 달이 빛나고 있었다. 대기를 채운 달콤한 미풍에 실려 음악 소리가 들려왔고, 그 음악 속에서 나는 평온과 자유를 느꼈다. 나와 손을 잡은 그 누군가가 내게 미소지어 보였다.
꿈에서 깬 뒤, 담배 한 대를 피우며 그게 누구였는지 기억해 냈다. '그 사람'이었다.
역시 난 그 사람에게 반한 게 맞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아직 확신할 단계는 아니긴 한데... 곧 그 사람을 만날 일이 있으니까... 그 때가 되 보면 확실해 지겠지. 그 뒤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내 감정이 확실해진 뒤에 결정해야겠다.
그냥... 별 이유 없이, 누군가가 보고 싶어져서.... 하지만 왜인지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기도 하고, 사적인 연락을 주고 받거나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도 아니고 해서... 그냥, 비오는데 안 맞게 조심하라고 단체 문자 돌리면서 슬그머니 같이 보냈다. 왜일까.
자각만 없을 뿐 내가 그 사람에게 연애 감정을 가지고 있다... 고 해석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그 사람은 꽤 매력적인 편이고, 나도 예전에 사랑했던 분에 대한 감정을 슬슬 털어낼 때가 됐으니까-여전히 그립긴 해도-. 게다가 그냥 그런 식으로 보고 싶은 감정이 든다는 것은 역시 연애 감정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아무래도 납득이 되질 않는다. 난 딱히 그 사람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사적인 친분도 별로 없다. 물론 첫 눈에 반한다... 와 같은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처음 그 사람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냥 호감이 가는 정도였고, 당시 난 사랑하는 상대가 따로 있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나는 좀처럼 누군가에게 반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답은 이래저래 그 때와는 여러모로 상황이 달라지고 지치게 된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다'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소중히 여김 받고 싶다'는 식의 미련이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대가- 아직 내게 남아 있는 '줄'들이 한 둘인 것도 아닌데 왜 유독 그 사람이 보고 싶었던 것인지는 납득이 가질 않는다. 정말로 연애감정... 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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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좀 붙이고 시험 공부나 마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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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미련일 뿐이고, 마침 '우연히' 그 사람이 적당한 위치에 있었을 뿐이라면 문제될 게 없다.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면 된다. 가끔은 우울하고, 좀 더 가끔씩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독하겠지만 지금까지 내내 잘 견뎌왔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반한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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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은 굳이 지금 당장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던 거나 마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