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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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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이다. 참다 못해 결국 그 교수에게 '빡쳐서 도저히 님 수업 못 듣겠음 수업 거부할거임ㅇㅇ'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는 주려고 했는데 아침에 가보니 아직 안 왔길래... 그냥 책상에 올려놓고서는 몇 부 더 뽑아온 걸 같이 수업 듣는 학생들에게 생각 있으면 돌아가며 한번씩 읽어보라고 하고서는 나눠줬다.

그 교수가 저 편지 한 장 읽고서 스스로의 사고방식을 고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같이 수업 듣던 학생들도 저거 읽어보고서 무언가 영향을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알량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기대를 가질 만한 시기는 지났다. 교수는 그냥 '얘가 좌빨이구나' 내지 '건방진 새퀴' 해버리고는 F를 띄울 가능성이 높고, 다른 학생들도 대충 읽어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아 ㅅㅂ 조낸 잘난 척하네 어쩌라고'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내가 손해볼 건 없다. 어차피 이 수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오직 그 교수만 알고 있는 특별하고 독보적인 지식인 것도 아니고, 책 좀 읽고 뉴스만 꼬박꼬박 챙겨봐도 익힐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그 정도 지식은 이미 가지고 있다. F가 뜰 게 거의 확실한 학점은 좀 문제긴 한데, 그래봤자 교양이고 이번 학기에 듣는 교양은 그것 말고도 많다. 학점 포기 하고서 다음 학기에 교양 하나 더 들으면 된다. 그래도 교수인데 너무 무례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이건 좀 마음에 걸리지만 뭐 어쩔 수 없다. 단지 교수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아무 말도 않고 그걸 계속 듣고 있기에는 내 정신 건강에 미치는 해약이 너무 심각하다.


내가 좌파인 진짜 이유는, 그 좌파로서의 이상이 정말로 실현될 것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다만 눈 앞의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채 불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꿈꾼다는 자기만족을 위해서일 뿐이다. 나의 그러한 에고만 충족된다면 사실 굳이 '정치적 지향점으로서의 좌익'이라는 정체성을 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념을 떠나서, 진정으로 순수하고 고귀한 인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상을 믿으며 타자와 연대하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의 그 에고만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거기서 만족하는, 그런 인간에 불과하다.

....그래서 원래 교수한테만 쓸 생각이었는데, 나 자신도 확실히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충동 때문에 여러 장 뽑아서 다른 학생들에게도 나눠줬다. 돌아오며 속으로 자문했다. 어차피 이 수업을 듣는 40여 명의 학생들 중에 이 편지에서 내가 쓴 내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결코 높지 않은데 나는 왜 공연히 돈 들이고 종이 낭비해 가며 여러 장을 뽑아간 걸까. 

아마도 중2돋는 허세일 거다. 나는 내가 저 편지에서 틀린 이야기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들이 그걸 알아줄 거라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나는 사람을 너무나도 믿지 못한다. 게다가 나 자신이 그렇게까지 정의롭고 고결한 인간일 리도 없다.

의식적으로는 '내 에고만을 만족시키면 되니까 남들이 다들 절망하고 포기해 버리건 말건 나는 저항을 계속할 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내 안 깊은 곳에서는 남들에게 인정 받고, 그 가운데서 돋보이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내가 다른 학생들에게도 저 편지를 나눠준 건 아마도 그런 이유... 일 거다.

.........

이런 내가 과연 누군가를 사랑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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