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우절이겠다 뭔가 재미있는 거짓말할 게 없나 생각해 봤는데,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마땅히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에라 내 팔자가 아무렴 그렇지ㅋ
2)
소설 쓰던 걸 완성하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정작 소설은 한 줄도 안 쓰고서 그 대신 RPG 팀에서 마스터링할 새 캠페인에 필요한 데이터만 잔뜩 만들어놨다. 일해라 나새끼
3)
반한 분이 여전히 약간은 그립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내 감정이 좀 흐려졌다는 느낌은 든다. 오래지 않아 사라지겠지. 그러고 나면 다음에는 누군가에게 반할 일 없길 바란다.
4)
약을 다 먹었다. 전에 한 번 죽으려고 했다가 실패한 이후, 죽는다는 건 나한테 있어... 일종의 최후의 보험 같은 게 된 것 같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안 되면 그 때 죽어도 된다' '그러니 지금은 이거 저거 해봐라'라고 무언가가 나한테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다. 병원에 다시 가서 요즘 상태를 이야기하고 약 좀 더 사올까, 아니면 약 끊는 게 나을까.
5)
난... 어느 정도 이상 사람과 관계가 가까워지면, 관계가 망가질 것이 두려운 나머지 내 쪽에서 일부러 상대를 쳐내고 멀리 하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 없어서 정말로 그런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한 때 더 없이 간절히 바란 것은, 그리고 그걸 손에 넣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은 결국 무가치한 것에 불과했고 그저 혼자서 견디며 사는 데까지 살아가는 것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새끼가 지금 도대체 뭐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상황은 단순하다. 난 그 분에게 반해 있고, 나와 그 분은 객관적으로 생판 남남이고, 그 분은 남자 친구가 이미 있고, 아마도 행복하게 잘 지내시는 것 같고, 그 분이 남자 친구가 없으셨더라도 난 내 문제 때문에 접근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매일 같이 그 분을 떠올리고, 그 분은 그 분이 사랑하는 다른 어떤 놈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란다고 기도하고, 내가 그 분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기도 뿐이라는 것에 대해 좀 허탈해하고... 그를 반복하고 있자니 '1년이 넘게 얼굴을 안 봤는데 왜 아직 감정이 안 없어지는 걸까'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분의 이미지와 실제의 그 분은 아마도 분명 다를 텐데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이 감정이 정말 사랑이긴 한 건가' '난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도취감을 즐기고 싶은 것 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이 감정이 다 사라지고 나면, 또 누군가에게 반해서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건 피하고 싶다.
+
새삼스럽게, 그 분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서 혼자 속에 묻어 버리고 가기로 한 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을 알면 그 분 입장에서는 불편하시겠지, 암.
+
문득 그 분이 이 블로그 보시지 않을까, 내가 자신한테 반한 거 눈치채시고 이미 불편해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어서 약간 불안해졌다. ....눈치챌 만한 증거는 모두 없앴다. 그 분과 난 생판 남남인데 이 블로그까지 굳이 찾아서 보실 것 같지도 않고. ....괘, 괜찮겠지.
평소에는 이성적이고 과묵한 편이지만(정확히는 이성적이려고 하는 편이지만) 사실은 다혈질에 자존심도 강한 편. 욱하는 기질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기에 가능한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고 매사에 이성적이고 냉정해지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기분 상하는 일이 있어도 가능하면 속으로 삭이거나 좋게 돌려서 생각하려고 하는 편.
본성 자체는 정의감이 강하고 올곧지만 인간관계에 있어 나쁜 일을 워낙 많이 겪어서 타인에게 마음이 닫혀 있고 늘 거리를 두려고 한다. 인간불신이 대단히 심함. 게다가 말주변까지 없다 보니 오해를 사기도 쉬운 타입. 초면이어도 잠깐 마주치는 상대에게는 평범하게 웃어 보이며 사교적으로 대할 수도 있고 화제가 적절하다면 적당히 농담도 해 가며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본인도 스스로의 문제를 자각하고 있어서 그런 성격을 고쳐보려고 한 때는 꽤나 노력했지만 실패를 거듭한 끝에 좌절하고서 이제는 거의 포기했다. 그 당시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노력한답시고 허공에 삽질만 잔뜩 한 끝에 스스로를 망쳐버린, 지금 만나면 한 대 치고 싶을 정도로 한심한 찌질이’로 여기며 부끄러워한다(그나마도 지금은 좀 나아진 상태). “내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치려면 계속 재시도를 하면서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하는데, 남들로서는 자신의 시행착오를 받아주며 고쳐질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 줄 이유가 없을 테고 관계만 더 나빠질 뿐이니 차라리 입 다물고 그저 공적인 차원에서 말썽 안 생기게 주의하면서 사적으로는 사람을 멀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른 상태. 몇 없는 옛 친구들에 대해서도 혹시 “그저 내 서투름을 적당히 참아주고 있었던 것 아닐까” “어쩌면 내 쪽에서만 친구라고 착각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 해도, 오랜만에 만났다가 상대방의 감정이나 입장은 충분히 배려하지 못하고 나 자신의 한탄만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내심 그리운데도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쿨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다만 강한 자제력으로 그러한 욕구를 억누르고 있는 것일 뿐.
원판이 감정적이다 보니 내심으로는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으며 그를 혼자서 견디다 못해 자살시도도 한 적 있다. 무작정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기 보다는 잘 표현하고 해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러한 자신의 약한 부분을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고+한번 섣불리 드러냈다가는 눌러둔 게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중.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어 있는 블로그에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그렇게 억눌러둔 감정과 욕구들을 비교적 안전한 방식으로 해소하기 위해서(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딱히 크게 신경 쓰지도 않을 테니까).
스스로의 그러한 정서적 결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막연히 그 사람이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그 분에게 뭔가 해주고 싶으면서도, 그 분과 자신은 생판 남이며 친구도 뭣도 아니니 그랬다가는 오히려 부담만 줄 거라고 여기는 중. 그 분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나 때문에 불편한 감정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얼굴을 보면 마음이 흔들린 나머지 거리 조절에 실패하고 거북하게 해드릴 것 같아서, 그 분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자리는 피한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사랑하는 그 분’에 대한 심상이 실제의 그 사람과는 동떨어진, 자신의 환상이 덧씌워져 미화되고 변형된 이미지일 뿐 그 사람이 아닐 거라는 점-즉, 자신은 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에, 그런 자신의 감정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여기며 약간 죄책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중. 그 분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자친구에 대해서는 질투심을 느끼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놈인지 몰라도 최소한 나처럼 정서 결함은 아니겠지’ ‘그 분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괜찮아’ 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감정도 완전히 사라지려니 하는 중.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제 거의 포기했다.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관계’에 대한 욕구가 전부 사라지고 지금 느끼는 고독감이나 좌절감도 모두 사라져서는, ‘혼자여도 현실적인 불편함만 느낄 뿐 적어도 정서적으론 어떤 번민이나 고독, 슬픔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면 최소한 절반은 성공한 인생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게 현재 상태.
PS=트위터에서 발견한 내용
한편 타인에게는 자신에 엄격하고 타인에 관대하도록 요구하며 사스로는 자신이 엄격하고 타인에 관대하다고 기만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성공하는 사람의 자기관리로서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http://www.ilwar.com/allbest/192642
일베의 기본적 성격, 행동양식, 유사집단 소개부터 시작해서 일베에서 쓰이는 코드 분석, 주요 전략, 그에 대한 대처법, 그간 일베에서 저지른 주요 트롤링과 패악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일베의 거의 모든 것을 총망라해 놓았다. 출처는 일간 '워'스트. 늘 느끼는 거지만 꽤나 방대한 분량인데도 상당히 정리를 잘 해놨다. 일워는 커뮤니티로선 솔까말 노잼이지만 뭐 이런 사이트도 있어야지.
1)
꿈 속에서, 반한 분이 곧 결혼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겉으로는 그 소식을 전해준 상대에게 "축하할 일이지만 나와는 상관 없어" "그 사람하고 친한 것도 아닌데 뭐" "그래서 언제?" 같은 반응을 하면서 동시에 속에선 '그 분이 행복하다면 된 거야' '추하게 질투 같은 거 해선 안 돼' '그 분이 남자 친구 없으셨어도 나하고 잘 됐으리라는 법은 없어' '어차피 난 내 문제 때문에 사랑 같은 거 못해' '이제 내 감정을 거의 다 추스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등등 온갖 생각들이 끓어 오르는 걸 느끼다가 깼다.
현실에서 같은 소식을 듣더라도, 나는 꿈 속에서와 똑같이 반응할 거다. ...그 분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그게 매우 안타깝다. 뭐... 이것까지는 딱히 악몽이랄 것도 없는데, 다시 잠들었다가...
2)
엄청 뜬금 없이 내가 국정원 요원이 되서는 '빨갱이'들을 잡으러 다니는 꿈을 꿨다. 난 국가의 인정을 받는 고급 공무원이며 내가 하는 일은 정당하다는 자의식과 정권의 사냥개에 불과하다는 자격지심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한 유명한 사회 운동가를 붙잡았다. 마침 난 혼자였고, 늘 나를 쫓아 다니면서 은근히 감시하던 파트너도 곁에 없었다. 난 그 사회 운동가에게 '적당히 치고 받은 뒤 놔줄 테니 내가 때리면 같이 맞 때려라'고 하고는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회 운동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나에게 맞고 있다가 죽어 버렸다. 그 시체를 붙잡고서 당황하던 중 잠에서 깼다.
.....어린 시절 생각나서 엄청나게 기분이 더러웠다. 게다가 그 사회 운동가가, 현실에서 내가 존경하는 한 작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더욱 기분이 더러워졌다.
난 다시는, 내가 한 때 그러했던 것처럼 비굴하게 살지 않을 거다.
+
그 분한테 반한 이후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그 분이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란다고 기도했다. 이젠 그 기도마저도, 어느 정도는 관성이 되어간다는 걸 자각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얼굴 하나만 보고 반했던 건데 내 감정이 과연 얼마나 진실한 것일지 회의도 숱하게 했었고.
난 결국 내 감정이 이렇게 수렴할 것임을, 내 사랑이 오래지 않아 바래지고 끝나갈 것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분을 떠올리면 아직 마음 한 구석이 쑤셔온다.
오랜만에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일찍 잠들었다가 지금 일어났다.
무슨 만화 주인공마냥 딱히 별 거 안 해도 저절로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고, 우정과 유대를 맺고, 서로 도와 난관을 타개하고, 그런 일은 현실에서는 판타지에 가까운 수준의 행운이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난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늘 마음 한 편으로는 '남들은 훨씬 더 쉽게 타인과 관계 맺고, 더 쉽게 속내를 나누는 걸로 보인다' '나도 평범하게 친구를 갖고 싶다'는 욕구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타인과의 이해와 유대'라는 개념을 수치화한다고 가정한다. 물론 그런 추상적인 개념을 수치화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그렇다. 평균적인 사람은 그걸 30~40 정도로 누리고 있다. 특히 인기가 많고 주변에 사람이 떠나질 않는 사람은 80에서 90 정도 된다고 친다. 픽션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높아지고, 소년만화처럼 애초에 그런 주제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장르라면 200을 넘어간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그것의 수준이 기껏해야 5, 높이 쳐도 10 정도에 불과하다. 애초에 난 밖에 나가서 놀기보다는 책을 읽는 걸 더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그러면서 같이 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묘사되곤 하는 '화목하고 건강한 가정' '늘 함께 온갖 말썽에 말려드는, 하지만 밉지 않은 친구들' '역경에 처했을 때는 우정과 믿음으로 극복' 같은 요소들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걸 어느 정도 '이상적인 모습'으로 내면화했고,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으로는 충분히 나름의 고민과 신산이 있을망정 나보다는 그런 '이해와 유대'를 높은 수준으로 누리고 있다고 여겨지는 타인들을 보면서 그러한 이상적인 모습을 투영해 저 사람들은 한 70 정도 누리고 있겠거니 하고, '나도 저렇게 평범하게 친구들과 어울려 같이 놀고 싸우고 웃고 그렇게 살고싶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삶을 살 리는 만무한데도. 그리고 이제 나는 그걸 거의 포기했다. 완전히 포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런 친구를 가지고서 그런 삶을 살고 싶어했고 그걸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던 한 때의 나 자신이 끔찍할 정도로 치욕스럽고 한심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때의 내가 눈 앞에 있으면 두들겨 패주고 싶었는데(그 때의 나라고 해서 가만히 맞고만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이제는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여전히 싫다.
전에 가까이 지냈던 옛 친구들과 연락하지 않은지 한참 지났다. 분명 그 친구들도 자신의 삶이 있고, 그 자신의 고통이 있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 자신의 고통과 고독감, 절망감에 짓눌려서 내 이야기만 끝없이 늘어놓을지도 모를 스스로를 보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가끔, 가볍게 연락이라도 할 걸 그랬다 싶긴 한데 이젠 이미 늦은 것 같다. 때로는 그립다. 아주 많이.
내 안에서 이 毒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종종 들곤 한다.
얼마 전에, '아, 이 친구는 더 이상 내가 보고 싶다거나 안 봐서 아쉽다거나 하지 않는가 보다' '굳이 내 쪽에서 자꾸 연락해봤자 좋을 것도 없겠다' 생각하게 된 옛 친구와 같이 노는 꿈이었다. 즐거웠다, 그래봤자 꿈 속의 일에 불과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악몽인 거다.
이대로 천천히 멀어지겠지. 잘 지내길 바란다.
잠이 안 올 거 같다.
우연히 지인을 만나 인사를 주고 받았다. 최규석 작가님께 가져갔던 책들에 사인도 받았다. 다 끝나고 난 뒤 하종강 선생님께 질문을 하나 했다.
나:노동운동에 있어서, 노 측을 '선' 사 측을 '악'으로 규정하는 프레임은 위험하다고 보는데요. 그간 운동 해오시면서 노동자들끼리도 서로 벼라별 괴이한 이유들...출신 지역이라거나 종교 같은 걸로 싸우고 대립하는 경우 숱하게 보셨을 거 같은데...
하종강 선생님:숱하진 않아요, 가끔...(웃음)
나:그런 경우를 보다 보면, 실망스럽기도 하고 종종 진짜 정 떨어지거나 하지 않나요?
하종강 선생님:어쩔 수 없지요. 잘 이야기해서 하나로 묶어야 해요. 그런 문제 때문에 지쳐서 운동 그만 두는 활동가 분들도 많아요. 그래도 해야죠. 그런 걸 너무 많이 접하면, 운동을 관둬야 해요. 인간이 파괴되어 버리거든요.
나:그걸 머리로 알아도 그런 상황을 계속 겪다 보면 지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냥 견디는 것 밖에 방법이 없나요?
하종강 선생님:네.
인간이 파괴된다는 말씀을 하실 때, 문득 '이 분은 그런 상황에 처해서 좌절한 동지에게 운동 그만 두라고 직접 설득하신 적 있지 않을까' '고양이 손이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동지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운동을 관두라고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각오가 필요할까' 라는 생각이 들어 숙연해졌다.
나는, 좌파임을 자임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상에 의해 바뀌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人間 간의 신뢰와 연대가 어떤 힘이나 지식, 논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지향에 있어서 그러할 뿐 누군가와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다거나...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는다.
...사실은, 그러고 싶지가 않다.
<송곳>에서, 구고신 소장이 이수인에게 "직원들이랑 호형호제 안 하죠? 밥부터 같이 먹어요,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을 듣지." 라는 대사를 할 때, 그걸 보면서 약간 슬퍼졌다. 난 얼추 중학생 때부터 막연히나마 정치 성향이 굳기 시작했고 군대를 제대할 때 쯤 확실히 '아, 난 좌파구나'라는 걸 자각했다. 그리고 대학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큰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자가 되기에는... '사람'을 너무도 믿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내가 느꼈던 절망이, 人間이 되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들이 하찮고 무가치한 게 되었다는 느낌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하종강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이미 파괴되어 있다.
난 이성적으로는 나의 그 절망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서투름과 불운에서 비롯한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며, 사람과 사람 간의 신뢰와 연대는 여전히 고귀한 가치라고 여긴다. 하지만 누군가를 믿고 손을 잡는 건 도저히 할 수 없다. 정 필요하다면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웃고, 농담하고, 친한 척하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장일 뿐 진심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사회주의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하는 주제에 인간불신이라니ㅋ
...괜히 반한 분 생각난다. 모든 것이 잘 되어서 그 분과 자주 볼 기회를 만들면서 친분을 쌓고, 고백하고, 그래서 그 분이 내 마음을 받아 주셨다고 해도 이렇게 사람을 믿지 못하는 내가 연애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분이 남자 친구가 있는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부디, 행복하시기를. 부디. 부디.
시간이 더 지나고, 그 분에 대한 내 감정이 전부 사라지고 나면 그 후로는... 누군가에게 반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악몽을 꿨다.
즐거운 꿈이면, 깰 때마다 결코 내 현실이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생각에 하루 종일 우울하다. 그 꿈 속에서는 내가 한 때 가장 간절히 원했던 게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난 이제 그걸 거의 완전히 포기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즐거운 꿈도 나한테는 악몽에 불과하다.
싸우는 꿈이면, 깰 당시에는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분노에 몸이 떨려올 지경이지만 최소한 그런 우울감과 무력감은 들지 않는다.
후자 쪽이 훨씬 마음에 든다.
타서는 안 될 배였다.
일본에서 십팔 년이나 운항된 낡은 배였고 무분별한 규제 완화를 통해 수입된 선박이었다. 수리는 늘 땜빵으로 이뤄졌고 무리한 개조와 증축이 배의 무게중심을 높여놓았다. 더 많은 화물을 싣기 위해 배의 균형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평형수가 상당량 빠져 있었다. 선장은 비정규직이었고 일등 항해사와 조기장은 출항 전날 채용된직원이었다. 선사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출항 직전 선박직 선원들이 출항을 거부하며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장의 상태도 평소와 달리 불안해 보였다. 세월호는 국가보호장비로 지정된 배였고 국내 이천 톤급 이상 여객선을 통틀어 유일하게 유사시 국정원에 우선 보고를 해야하는 배였다. 안개가 많이 낀 밤이었다. 다른 여객선의 출항이 모두 취소된 상황에서 그날 밤 인천항을 출발한 배도 세월호가 유일했다. 다음날 배는 침몰했다. 예견된 사고였다고,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배였다고 모두가 말했지만
그런 배를 탔다는 이유로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침몰해가는 배에서 제일 먼저 빠져나온 것은 선장과 선원들이었다. 해경 123정은 기울어가는 배 주위를 돌기만 하다가 딱 한 번 접안을 하고 그들을 옮겨태웠다. 승객들의 출입구가 있는 선미로는 가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어 몰랐다고는 했지만, 일반인의 출입이 원천적으로 통제된 선수 쪽 조타실이었다. 아니 그마저도 나중에 거짓임이 드러났다. 선원임을 알았고, 그들은 족집게처럼 476명이 타고 있는 배에서 선원들만 빼내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접안하지 않았다. 승객들은, 또 아이들은 배 안에 갇혀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선장의 명령을 따랐기 때문이다. 승객들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선장과 선원들, 또 해경은 탈출하라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배를 빠져나온 승개들만이 가까스로 헬기와 보트에 오를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 구조가 아닌 탈출이었다. 해경은 끝내 선내에 진입하지 않았다. 의자로 창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의 외침도 외면했다. 그리고 배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잔잔했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보다 잔혹한 일은 그뒤에 일어났다. 배가 침몰한 상황에서, 일 분 일 초가 아쉬운 그 상황에서도 구조는 이뤄지지 않았다. 현장에 집결한 수백 명의 실종자 가족들이 애원하고 오열해도 해경은 구조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하는 척만 했다. 항의하는 유가족들에게는 거짓말을 둘러댔다. 결코 사실이어선 안 될, 괴담이라 치부되던 소문들이 대부분 나중에 사실로 드러났다. 언론은 종일 가능성과 희망을 떠들었다. 에어포켓이며 골든타임, 정부가 구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속보들이 매체를 장악했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구조대원 726명과 함정 261척, 항공기 35대가 집중 투입된 사상 최대 규모의 수색작전을 벌인다는 기사도 있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거짓말이었다. 구조는 없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장을 통제한 해경은 적극적으로 골든타임의 구조를 가로막았다. 해군과 119구조단, 각지에서 모여든 민간잠수사들.... 어느 누구도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 수 없었다. 심지어 해군참모총장이 두 번이나 명령을 내린 통영함도 현장에 투입되지 못했다. 이는 감히 해경이 저지할 사안이 아니었다. 구조을 전담한 것은 한 민간업체였다. 선사와 계약을 맺었으며 이런 일은 민간업체가 더 전문적이란 설명이 뒤따랐다. 그렇게 골든타임이 지나갔다. 그리고 더는, 누구도 구조될 가능성이 사라진 어느 날 (한 달 후) 논란이 불거지자 그 민간업체의 이사가 TV에 나와 말했다. 우리는 사실 구조업체가 아니라고, 우리는 인양을 하러 온 업체라고, 그가 말했다. 그럼 구조는 누가 맡은 거냐는 질문에
구조는 국가의 업무죠.
라는, 너무나 당연한 답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럼 여태 국가는 무얼 했단 말인가? 가라앉은 배보다 더 무거운 의혹이 우리를 짓눌렀다. 무엇 하나 이상하지 않은 게 없었다. AIS 항적이며, 교신 기록이며, CCTV며.... 아무튼 침몰한 배에 관련된 기록들은 없거나, 불분명하거나, 조작되거나, 공개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아무도 그 의문에 답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구조는 국가의 의무였으므로 국가에 대한 의혹의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잔혹보다 끔찍한 의혹이었다. 악마를 보았다고 우리는 외쳤고 미안하다고, 잊지 않겠다고 울며 조문했다. 이것이 과연 나라인가? 기울어가는 배의 갑판에 모두가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일찌감치
제일 먼저 배를 빠져나간 것은 대통령과 청와대였다.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라는 말로 일찍 못을 박았고 이 말은 감사원의 입을 통해 또 국정조사에 임한 대통형 비서실장의 입을 통해 수차례 언급되었다. 아니, 그보다 청와대는 TV뉴스를 보고 사고소식을 처음 접했다고 했다. 안전행정부 상황실도 국정원도 YTN뉴스를 보고 사고를 알았다고 했다. 같은 시각 나는 세탁소에 맡긴 옷을 찾으러 갔다가 뉴스를 보았는데, 말인 즉슨 나와, 세탁소 김씨와, 김씨의 부인인 안씨와, 정부가 동급이라는 얘기였다. 국정원의 말은 거짓으로 드러났다.그리고 이것은
실은 매우 이상한 거짓말이다.
여론이 악화되자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대통형은 모든 걸 바꾸겠다고 했고 이번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치 결백(청와대가 컨트롤타워가 아니었다는)이라도 증명하듯 최동 책임이 아닌 최우선 책임을 져야 할 해경을 해체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독단적이고 강렬한 처벌이었다. 그리고 울었다. 막 울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지만 6.4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어쨌거나 대통령이 사과를 한 이상 이 참혹한 사고의 진상이 곧 규명될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선거에 출마한 여당 후보들의 외침도 한결같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꾸겠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울먹이며 절을 했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참패를 예상했던 여당이 선거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자 상황이 급변했다.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가 시작되자 이를 가로막은 것은 정부였다. 국회의 거듭된 요구에도 청와대는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청와대 담당자는 "자료 제출을 하지 말라는 지침을 받았다"고 했고, 지침을 내린 자가 누구인지도 끝내 밝히지 않았다. 조사를 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청와대가 그러하니 다른 기관들의 자세도 성실할 리 없었다. 당신 누구야?, 여당 의원은 유가족에게 호통을 쳤고 조사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새로운 도대체, 왜? 가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구조에 최선을 타하겠다 해놓고 왜 구조를 하지 않았나? 란 질문에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 해놓고 왜 이를 가로막나? 란 질문이 추가된 것이다. 몇 가지 성과가 있긴 했다. 이미 버린 몸(해체) 해경이 제출한 사고 당시 청와대와의 통화내역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었고 어렵게 모셔온 비서실장의 입을 통해 사고가 있은 당일 대통령의 행적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엇보다 476명이 탄 선박이 침몰한 참사가 일어났는데 아무런 대책회의가 없었으며, 그 위중한 일곱 시간 동안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어디 있었는지 "모른다"는 답변을 했다. 그날 국가는 없었다는 가설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말 그대로 국정'조사'였으므로 국정조사는 그걸로 끝이 났다. 수사관과 기소권이 포함된 특별법이 그래서 화두가 되었다. 당신 누구야 소릴 들어가며 퇴장을 당해가며 유가족들이 알아낸 것은 구조를 하지 않은 정부가 그에 대한 진실을 밝힐 의지도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누구도 정부를 믿을 수 없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에 대해 여당은 사법 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며 예민하게 반응했다. 대한 변호사협회가 이는 사실이 아닌 근거없는 주장이며, 진실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4.16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한 여당 의원은 말했다. 유가족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준다는 것은 피해자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것과 같다고,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그럼 가해자에게 칼자루를 쥐어줘야 하냐고.
공공의 적이 공공일 때
공공의 적인 공공에게 어떤 혐의가 있을 때
그 공공을 심판할 수 있는 건
누구냐고 묻고 싶다.
의혹을 만들고 키운 것은 정부였다. 그리고 갑자기 프레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3족을 멸한다는 느낌으로 유병언 일가가 부각되었고 결국 유병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유병언의 시신에 관해서는... 성인의 입장에서 달리 할 말이 없다. 아니, 애썼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다만 나는 눈이 좀 쓰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과도한 보도였기 때문이다. 제사상에 오른 되지머리를 보는 듯도 했고, 굿판이란 게 이런 건가 생각도 들었다. 실은 그럴 사안이 전혀 아니었다. 과도하고 불필요한 흐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농성중인 유가족들을 향한 공격이 여당 의원들의 입을 통해, 언론과 인터넷과 sns를 통해, 애국보수단체의 행동을 통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럴 사안도 전혀 아니었지만, 아무튼 이 불필요한 동작의 흐름을 모아보면 정부가 지향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세월호는 사고다.
즉 사고-보상 프레임이다. 이미 여러 의원들이 같은 맥락의 말을 이어왔고, 이 말은 또 여러 갈래의 뿌리를 내리고 또 내렸다. 누가 놀러가서 죽으라 했어요? 그만큼 했음 됐지. 왜 사고로 죽은 걸 가지고 정부를 물고 늘어지냐. 유가족이 벼슬이냐? 사고 원인은 죽은 유병언한테 물어봐라. 차 타고 가다 죽으면 대통령한테 가서 항의하냐? 세월호는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다. 아무튼 또... 기타 등등. 나는 문득 김보성을 떠올렸는데 이것이 논리라기보다는 의리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렇다.
지금 누군가가
세월호가 으리으리한 사고로 정리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만약 이 나라가 침몰한다면
그 원인은 의리일 거라 나는 믿는다.
의리 아닌 의리로 유지되는 집단 두 개를 나는 알고 있다. 군대와 마피아다. 윤일병 사건과 세월호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지도자(국방부장관)가 뉴스를 보고 사건을 알았다는 점, 유가족의 손으로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그대로 묻혀 넘어간다는 점, 수십 년간 이런 일이 있어왔으나 어떤 적패도 실은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 관피아며 해피아, 이런 단어들이 비로소 수면에 떠올랐지만 나는 그 정점에 정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진보는 분열로 망해도 보수는 부패로 망하지 않는다. 분열엔 의리가 없지만 부패엔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사실 삼십 년 전 한 여가수의 노래 속에 처음으로 떠 있었다. <아, 대한민국>이란 노래였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에 떠 있던 그 유람선... 바로 유병언과 세모해운의 출발이었다. 그는 바로 정권과의 의리를 쌓아나갔다. 그 의리 때문에
오대양 사건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아, 대한민국> 속에 떠 있던 그 유람선은 삼십 년 뒤 세월호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여기서 아무도 지적 하지 않는 세월호의 키워드를 말해야겠다. 그것은 '민영화'다. 세월호에 조금 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선급이며 이런저런 각종 조합들의 이름을 기사에서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제 이것을 단순한 비리, 유착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예컨데 삼십 년 전 세모의 뒤를 봐주던 공무원이 진급을 하고 퇴직을 했다면 그는 순순히 그 권익을 손에서 놓고 싶었을까? 아니면 어떤 단체를 만들어 자신이 해왔던 정부의 역할을 민간이 대행하는, 그런 길을 걸었을까? 그럼 이런 예는 또 어떨까? 세월호를 검사했던 한국선급은 주로 퇴임한 해수부 관리들이 요직에 앉는 비영리단체인데, 경제활성화와는 매우 동떨어진 '비영리'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지난해 박근혜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창조경제 대상'을 수상했다면... 어떨까? 실제로 한국선급은 대한민국 창조경제 대상을 수상했고, 이는 비단 해운업계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끊임없이 정부의 업무는 민영화되어가고 있다. 때로 정부의 형태를 빌려 민영화가 진행될 수도 있다. 예컨대 정권의 핵심이 어떤 정책을 세워 특정 기업이나 업종에 정부의 업무를 맡긴다면, 혹은 판다면... 또 예컨데 국정원과 같은 국가 주요기관이 어떤 특정 세력에 의해 실은 민영화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다시 세월호는 사고다. 라는 명제로 돌아가보다. 자꾸 사고, 사고, 해서 하는 말인데 그렇다. 이제 겹쳐진 두 장의 필름을 분리할 때가 되었다. 세월호는 애초부터 사고와 사건이라는 두 개의 프레임이 겹쳐진 참사였다. 말인즉슨 세월호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이제 이 두 장의 필름을 분리해야 한다. 겹쳐진 필름이 이대로 떡이 질 경우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프레임, 즉 '세월호 침몰 사고'로 기억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아직도 이 타이틀을 쓰고 있다. 별다른 오류가 없어 보이지만 여기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함정이 있다. 명사는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를 '사고'로 인지하기 마련이다. 사소한 문제인 듯하나 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사전적 해석을 빌리자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 반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의미하는데 거기엔 또 다음과 같은 해석이 뒤따른다. 주로 개인, 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며 범죄라든지 역사적인 일 등이 이에 속한다. 그렇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교통사고를 교통사건이라 부르지 않으며, 살인 사건을 살인사고라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월호 사고와 세월호 사건은 실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나는 후자의 비중이 이루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이것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야당이 왜 '사건'이란 타이틀을 확보하지 않는지 나는 모르겠다. 거기에 비해 여당은 노력하고 있다. 필사적이다. AI가 퍼지는데 대통령이 모든 사람 동원해서 막아라 그럼 컨트롤타웝니까?(조원진) 세월호는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다(주호영)... 나는 이들이 학식이나 판단력이 모자라 저런 말을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모르고 뱉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지금 저들은 '사고'란 타이틀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사고, 사고, 사고란 단어가 거론될 때마다 겹쳐진 필름이 떡이 진다는 사실을 저들은 잘 알고 있다. 3족을 멸하듯이 유병언을 부각시킨 이유도 그 것이다. 부각이란 말에 거부감을 느낄 사람도 있겠으나 나는 '호위무사라'란 단어를 고딩 때 겨울날 무협지에서 읽은 후 이십칠 년 만에 조우했다. 경호원이나 보디가드란 단어를 기자들이 몰랐을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않는다. 유병언이 사고의 책임자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의 책임자는 아니다. 사건의 책임자는 따로 있다. 유가족들이, 또 많은 국민이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지금 그것을 정부가 가로막고 있다. 도대체, 왜?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얘기만 하려 한다. 사고와 사건의 관계에 관한 얘기이다. 우선 사고에는의도가 없다. 자연재해가 그러하며 인재의 경우에도 실수, 태만, 방심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지 의도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의도가 개입되는 순간 사고는 사건이 된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교통사고가 사건으로 발전하는 가장 흔한 예가 뺑소니다. 신고와 구호-수습의 '의무'를 져버린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보를 중시하고 애국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군대에서 탈영이 얼마나 중차대한 범죄임을. 특히 전쟁과 같은 유사시 탈영이 어떤 처벌을 받는가를.
왜?
국민이 국가를 지켜야 하는 의무를 져버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국가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져버렸을 때
국가는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걸까?
당신은 의무를 다해왔고
한 푼 빠짐없이 세금을 납부했다.
국가의 안녕을 위해 언제나 여당을 지지해왔다.
그런 당신이라면
한번쯤 깊이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안다. 대통령이 직접 TV에 나와
눈물을 흘렸다는 걸 안다.
탈영병들도 모두
눈물을 흘린다.
앞서 말한 '의도'라는 이 중요한 단어를 기억하자. 역시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얘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이 의도가 있으므로 해서 사건에는 위장과 은폐, 의혹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사건과 실화』라는 잡지는 창간될 수 있어도 『사고와 실화』라는 잡지는 창간될 수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대상이 해경이든, 언론이건, 국정원이건, 청와대건... 어쨌거나 공공의 주체인 당신들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들은
너무 많은 거짓말을 했다.
선박이 침몰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말 너무 많은 거짓말을 했다. 서슴없이 했다. 유가족들이 오열하는 앞에서도, 야 거짓말하지 말라고 씨발 년아 소릴 들어가면서도 (KBS <굿모닝 대한민국>),전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 다 바꾸겠다고 거짓말을 했고, 성역 없는 수사를 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구조에 최선을 다한다는 거짓말을 했고 구조대원 726명과 함정 261척, 항공기 35대가 집중 투입된 사상 최대 규모의 수색전을 벌인다는(연합뉴스) 사상 최대 규모의 거짓말을 했다. 304명의 무고한 죽음 앞에서 그러니까 당신들은 이루 열가하기 힘든 많은 거짓말을 했다. 왜냐고는 묻지 않겠다. 더는 거짓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의도에서 비롯된다. 아니, 거짓말은 그 자체가 의도이고 사건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많은 거짓말이 필요했던 사고 수습은 없었다. 당신들은 어떤 의혹을 받아도 싸다. 역사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얘기로 못을 박자면
사고로 위장된 사건은 있어도
사건으로 위장된 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예컨데 그런 일이 없었는데, 정부가 전 언론을 동원, 자국의 군함이 적국의 어뢰를 맞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아, 뜨끔하거나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1964년에 있었던 미국의 통킹만 사건을 말하는 것이니까(훗날 베트남전의 빌미를 얻기 위한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이런 개쓰레기 같은 조작은 인류사를 통틀어 극히 드문 일이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인 범주에서 사고와 사건의 관계이다. 실은 정부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내가 볼 때 진실을 밝혀야 할 입장에 선 것은 유가족들이 아니라 당신들이다. 이 참사가
사고로 위장된 사건이 아니라면 말이다.
가라앉은 세월호 속에서 한 대의 노트북이 건져졌고, 거기서 또 국정원의 이름이 적힌 파일이 나왔다. 세월호의 실소유주가 국정원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곧바로 국정원이 이에 답했다. 아니었다. 이미 사망했다는 국정원이 말한 파일의 작성자는 문서가 작성된 이후 입사한 선원이었다. 당신들은 이미 지난 대선 때 댓글 공작을 통해 선거에 개입했으며 이 와중에 군 사이버 사령부의 선거 개입 역시 사실로 밝혀졌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으로 국정원장이 사과를 한 것은 세월호 참사가 나기 불과 하루 전이었다. 사건 초기 참사가 난 사실을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또 거짓말을 했다. 정말 진실을 밝혀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다.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언제나 위중한 업무를 도맡아야 할 국가의 주요기관이기 때문이다.
나는 두렵다.
유가족들의 단식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이 보이는 사고-보상의 프레임으로는 이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아마도 다음 프레임은 세월호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 또 이어질 프레임은 세월호 유가족 속에 불순 선동세력이 있다. 그리고 당신들의 비장의 무기 당신들의 오류~겐 종북으로 몰아갈까 나는 두렵다. 그럴 사안의 일이 아니다. 선거에서 이겼으니 이는 국민이 면죄부를 준 것이라는 식으로 뭉개고 갈 일이 아니란 말이다. 진심으로 대통령께 고하건데 아직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당신도 분명 그 꽃다운 아이들을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선실 구석구석 수색해 단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기회가 당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비서실장의 말 그대로, 누가 보기에도 생각보다 배는 너무 일찍 넘어갔다. 그러나 아직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라건데 각하, 지금 당신에겐
저 불쌍한 유가족들을
구조할 기회가
아직은
아직은 남아 있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기회이다. 역사가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단 한 번도 진실이 밝혀진 적 없는 나라에서 이 글을 쓴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고 이곳에 발붙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모두 한 배를 탔기 때문이다.
내릴 수 없는 배다.
일본이 삼십 육 년간 운항하던 배였고 우리가 자력으로 구입한 선박이 아니었다.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승전국어었던 미국은 군정을 통해 배의 평행수를 조절했고 배의 관리를 맡은 것은 예전부터 조타실과 기관실에서 일해온 선원들이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벨로스터 벨브의 한쪽을 아예 비웠다. 평형수를 비우면 비우는 만큼, 배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양은 증가했다. 적재와 적재와 적재와 적재...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생각했다. 배는 늘 통제되고 관리되어 왔다. 2층 객실에서 3층 객실로, 이어 4층 객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언제나 좁고 미어터졌다. 붐비는 통로에서 또 복도에서 우리는 늘 방송을 들었다. 잘살아보자는 방송, 하면 된다는 방송이었다. 올라가기 위해, 한 층이라도 더 올라가기 위해 우리는 노력했다. 발전과 번영은 종교가 되었고 배가 왜 이렇게 기울었지? 의혹을 제기하면 종북이란 이름의 이단으로 몰려야 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기울어야 했던 국민이다. 기울어진 배에서 평생을 살아온 인간들에게
이 기울기는
안정적인 것이었다. 제대로 포박되지 않은 컨테이너처럼 쌓아올린 기득권과 기득권과 기득권과 기득권의 각도 역시 이 기울기와 각을 같이 한 것이었다. 배는 계속 운항을 해야 했다. 평형수를 뺐음에도 배의 무게중심은 생각보다 낮고 안정적이었다. 왕정에서 식민지를 거쳐 영문도 모르고 배의 아래칸에 선적된 '국민'이라는 화물이 있어서였다. 항해가 계속되고 사정은 달라졌다. 무분별한 개축과 증축이 이어지며 무게중심은 올라갔다. 84퍼센트가 대학에 진입하는 초유의 고학력사회가 되었다. 정권에 눈먼 선원들은 여전히 기울기를 유지하려 애를 쓰고, 탐욕에 눈먼 국민들은 층수를 유지하려 애를 쓴다. 당연히 문제가 많았으나 근본적인 수리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땜빵과 땜빵과 땜빵과 땜빵... 그리고 어느 날
마치 이 배를 닮은 한 척의 배가 침몰했다. 기울어가는 그 배에서 심지어 아이들은 이런 말을 했다. 내 구명조끼 입어... 누구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누구도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는 기울어진 배에서... 그랬다. 나는 그 말이 숨져간 아이들이 우리에게 건네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치의 문제도 아니고 경제의 문제도 아니다. 한 배에 오른 우리 모두의 역사적 문제이자 진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때 에밀레종의 실제 타종 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다. 그 소리는 매우 슬펐으나 어떤 슬픔도 극복 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기나긴 여운을 간직한 것이었다. 우리가 탄 배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세월호라는 배를 망각의 고철덩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밝혀낸 진실을 통해 커다란 종으로 만들고 내가 들었던 소리보다 적어도 삼백 배는 더 큰, 기나긴 여운의 종소리를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 이 것은 마지막 기회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민규, 문학동네 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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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http://www.djuna.kr/xe/board/12078124
인권은 사소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중요하다니, 이건 뭐 "나는 레이시즘과 흑인이 싫다" 같은 소리하고 있네 병시니가.
글 쓰던 게 잘 안 풀려서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맞은 편 집 마당에 길고양이 한 마리가 얼음판을 핥고 있는 걸 봤다. 집에 들어와서, 곰탕 데워놓은 걸 통에 떠다가 뒷 마당에 내다 놨다. 마실 물도 약간.
이게 진짜 무의미하고 하찮은 짓인 이유는, 길고양이나 쥐 같은 게 그거 먹는 걸 본 이웃 사람들이 약 넣은 먹이를 뿌려 잡아 죽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길고양이가 공공위생 상 안 좋은 건 사실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누가 그런 짓 했냐고 이야기하다가 내가 했다는 게 드러나 한 소리 들을 수도 있고. 그거야 뭐 죄송합니다 안 그럴게요 한 마디로 대충 무마할 수 있는 일인데... 앞 쪽 경우가 걱정된다. 책임지지도 못할, 얄팍하고 단편적인 진심과 선의는 없는 것만 못하다. 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주.
...아 시발 그걸 그렇게 잘 아는 데도 얼음판 핥는 모습이 더럽게 눈에 밟히더라, 쯧. 하필 왜 딱 그 타이밍에 눈에 띄어 가지고. 망할 고양이 놈.
잠깐의 변덕이었을 뿐이다. 다음부터는 보이든가 말든가 이런 짓 안 할 거다.
+
한참 뒤 나가 보니 내놓은 그대로 있었다. 어쩌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놔둬봤자 얼어붙어 못 먹게 될 듯해, 다시 가져와서는 아래층에서 키우는 개한테 줬다.
<녹색 평론> 2013년 5~6월 호에 실린 글. 작성자 김해창(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부산시 원자력안전 대책위원회 회원).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고리 원전의 관리 부실과 원전 자체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스위스와 독일의 사례를 들어 탈 원전 계획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분량이 좀 많아서... 첨부 파일로 올린다. 원전 정지를 요구하는 해킹 사건도 있었고.
반한 분이 불쑥 생각났다. 평소 의식적으로는 그 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연말이겠다 거리에 커플들도 자주 보이겠다 무의식적으론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 그 분 닮은 사람(...본인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을 우연히 봤을 때의 증상이 또 도졌다. 길 가는 모든 여자들이 순간 그 분으로 보이는. ...들어오는 길에 술이라도 사와서 한 잔 할까 하다가 앞으로도 그 분 떠오를 때마다 퍼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이 들어 관뒀다. 내 사랑은, 술 마시기 위한 핑계 따위가 아니다.
그 분이 얼른 결혼이라도 해 버리시면 이 감정을 떨치는데 좀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ㅋ
이 그리움은, 얼굴도 뭣도 모르는 그 분의 남자 친구놈에 대한 질투는, 내 감정이 진실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면 뭐해, 난 그 분이 남자 친구가 없으셨어도 내 문제 때문에 다가가지 못했을 텐데.
그 분은 그 분이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행복하고, 난 삶을 혼자 견디고. 그거면 되는 거다. 주여, 부디. 부디. 그럴 수 있기를. 그 분이 사랑하는 남자가, 좋은 놈이길. 내 사랑이 이뤄질 수 없다면, 적어도 내 명예만은 지킬 수 있기를. 내 사랑이 질투와 집착으로 타락하지 않기를.
하지만, 고통스럽다.
보고 싶다.
....써놓고 보니 새삼 엄청나게 한심하다, ㅉ.
오랜만에 반한 분이 나왔다.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라. 기억하는 것보다 모습이 많이 흐릿해져 있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 분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 분은 남자 친구가 있고(아마도 그 분이 별 볼 일 없는 놈과 덥석 사귈 것 같지는 않다, 모르긴 몰라도, 남자 입장에서 봐도 괜찮은 놈이겠지), 객관적으로 그 분과 나는 생판 남에 가깝다. 그 분은, 나에 대해 관심은 커녕 별 생각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데도 그런 꿈을 꿨다는 것은 아직도 내 감정이 채 다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이제 멀지 않아 그렇게 되리라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생각보다 꽤 오래 가네, 앞으론 누군가에게 반할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플레이 끝나고 잠깐 눈 좀 붙이고서 거울 쪽에 줄 원고 마저 완성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많이 자 버렸다, 아 젠장.
Definition....
아무리 터무니없고, 심지어 악랄하기까지 한 행동도 그를 수행하는 사람은 대체로 그를 정당화할 만한- 제3자 입장에서는 전후 관계와 그 의미를 잘 따져보지 않고서는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그럴싸한 핑계를 갖고 있다. 그 핑계가 '난 악인이 아니며 다만 합리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라는 심리적 알리바이를 스스로에게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건, 외부의 법적인 처벌이나 사회적 비난 같은 압력을 피하기 위한 것이건 그 핑계가 정말로 핑계에 불과한지 아니면 비교적 진심에 가까운 것인지(물론 그게 온전한 진심이건 야비한 거짓말이건 둘 중 하나이기만 한 경우는 잘 없지만 일단 그 사실은 차지하고) 판단하는 기준 중 가장 신뢰도가 높은 잣대가 있다.
그 상황을 거꾸로 적용해서 그가 내세우는 대의나 공익을 위해 그 자신이 지금 남에게 강요하는 것과 똑같은 희생을 요구받는 입장일 때 과연 그가 그러한 희생을 치를 만한 사람인지, 그리고 희생을 거부할 경우 외부의 압력을 똑같이 가할 수 있는 입장인지를 따져 보는 게 바로 그것이다. 회사가 경영난에 봉착했다면, 이 상황에서는 '회사의 생존'이 노사 모두가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의'가 된다. 그리고 노사 양쪽 모두 '회사 전체가 도산하는 걸 피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이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명목 상의 합의를 이룬다. 하지만 그를 위한 수단으로 '노동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늘리고 재계약 기한을 연장한다'는 것을 사측이 선택하고 그것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할 경우, 그 주장이 회사와 그 구성원 모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지 아니면 노동자 측에 일방적으로 책임을 떠 넘기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핑계인지 판단하고 싶다면 이러한 잣대를 적용해 보면 된다. 약자인 노동자 측과 마찬가지로 강자인 회사 측의 고위 임직원들 역시도 부양 가족이 있는 상태에서 갑작스레 해고 통보를 받고, 40이 넘은 나이에 재취업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니며 고개를 숙이고, 같은 위기에 처한 동료들과 함께 이러한 상황의 부당성을 알리고 직장으로 복귀하기 위해 집회를 가지고, 그것이 불법 집회로 신고당해 경찰들이 쏘는 물대포 얻어 맞고, 동료들은 너를 이용하려 들 뿐이니 그들의 이름을 불면 너 하나는 복직시켜 주겠다고 회유 당하고, 그래야 하는 입장이라면 그것이 정말 '유일하게 현실적인 대안'인지는 일단 차지하고 최소한 그들이 진심으로 그걸 믿고 있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는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위 예시에서 회사 측은 노동자들과 같은 입장에서 같은 논리로 같은 희생을 강요당할 때, 그걸 거부하고 노동자들에게 그를 전가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다. 노조를 좋아하는 경영자 따위는 없다. 하지만 경영자 역시 회사의 관리와 운영을 맡는다는 면에 있어 본질적으로 노동자에 해당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경영자들의 모임인 전경련 역시도 일종의 노조에 해당한다. 하지만 전경련과 일반 노조는 법적 위치도 사회적인 시선도 현실적으로 결코 동등하지 않다. 그러한 우월한 위치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할 수 있기에 그들이 '강자'인 거다.
말할 것도 없다시피, '강자'라고 해서 딱히 개인적으로 악인이라는 법은 없고 '약자'라고 해서 서로에 대한 연대와 우애의식으로 가득 찬 선인이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강자는 적고 약자는 많을 수밖에 없는 게 논리적 귀결이고, '강자'는 자신의 그러한 강함을 동원해 스스로의 그 우월한 위치를 추가로 강화하고 지속하려고 한다. 모든 종류의 집단은 그 목적과 형태를 불문하고 규모가 커지고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그 자신의 유지보수에 가장 많은 리소스를 쓰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생물학적 법칙에 가까운 것이기에, 몇몇 강자들이 가진 '개인적인 레벨의 선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정 많고 너그러운 경영자가 정기적으로 자선 단체에 거액을 기부하고 명절 때는 사원들에게 넉넉하게 보너스를 쏘고 쓸 데 없는 회식 따위를 삼가하게끔 지시하고 가능한 잔업과 야근을 최소화한다고 가정하자. 그 경영자는 물론 책임 의식을 가진 기업인이며 선량한 개인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비로운 오너와 여유 있는 사내 문화'를 가진 회사에 다니는 몇 안 되는 이들의 행운일 뿐 궁극적으로는 소수의 강자가 상황과 필요에 따라 일방적으로 수많은 약자들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만일 오너가 도덕성이 높다면 가능한 그런 상황에 처하는 걸 피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기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에서 그는 견제를 거의 받지 않고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있다).
강자와 약자의 도덕성과는 별개로, 소수의 강자가 임의적인 판단에 따라 일방적으로 수많은 약자를 억누르지 못하게 하는 것. 강자가 약자에게 "열심히 일하고 나한테 충성하면 그에 걸맞는 대가를 주마. 섭섭케 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여야 하고 넌 나보다 밑이어야 하며 넌 내가 시키는 것에 토 달면 안돼."라는 식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현실에서의 정의'다. 초월적 깨달음이나 철학적인 진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방식을 통해 강자에 의해 자의적으로 규정된 관념으로써의 '정의'의 오만함과 독선성, 억압성을 경계해 왔다. 그러한 경계는 충분히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의의 가치 자체를 퇴색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은 정의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워낙 없어서 문제인 거지, 하나의 단일하고 확고한 '정의'가 다른 모든 것들을 억눌러서 문제가 아니다. "정의의 반댓말은 불의가 아니라 또다른 정의다." 같은 경구는 그 자체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정의의 상대성이 바로 지금의 현실에 엄존하다 못해 넘쳐나는 불의에 대해 침묵하게끔 하는 핑계가 되어선 안 된다.
큰 틀에서 궁극적으로 보자면, 인간끼리 오직 인간 세상에서만 적용되는 '정의'를 논해봤자 별로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우주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우주의 관점- 혹은 세상 만물에 대해 초탈한 현자나 성자의 관점이며, 현자나 성자가 될 것도 아니면서 그러한 관점을 섣불리 자신의 관점인양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이 오만하고 비겁한 태도다.
지금의 현실을 사는 인간이라면, 모순과 한계에 처할 것을 각오하고 '정의'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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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신뢰하는 친구도 열정을 바칠 연인도 갖지 못할 내가, 때때로 엄청난 고독감과 두려움에 짓눌려 가면서도, 나한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진심과 선의를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그 손을 잡지 못하는 내가 아직도 추구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내가 별로 오래 살 팔자가 아니라는 근거 없는 예감이 요즘 유달리 자주 든다.
어르신들이 "XX도 이제 결혼 해야지?" 하고 묻길래 때 되면 하겠다고 웃어 넘겼다. 사촌형은 행복해 보였다, 형수님도 싹싹하고 처신 잘 하는 게 괜찮은 분 같아 보였고.
나로선, 결코 갖지 못할 행복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텅 빈 식장을 둘러 보면서 내가 저 길을 걸을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천천히 되새겼다.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많은 적과 많은 친구를 갖는 것. 人間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고, 그게 옳은 거라고 지금도 여전히 생각한다. 다만 나는 지치고 좌절한 끝에 그렇게 되는 걸 거의 체념했을 뿐이다.
종종... 생각한다. 만일 내가 연애를 하게 된다면, 나는 아마도 상대방이 양다리 걸치지 않을까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걸핏하면 우울한 속내를 토로하고, 내가 부담스럽거나 감당하기 어렵다면 헤어져도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서 상대를 지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진짜 짜증나네 그거... 그런 상황에서 애정이 지속될 리 만무하고, 지속된다 해도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나 의무감 같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난 나 자신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런 뒤틀리고 병적인 관계로 묶어 두고 싶지 않다. 난, 내 사랑이 그렇게 타락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혼자 살다가 혼자 죽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은 평범하게 좋은 남자와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고, 시간과 더불어 쌓여간 그 人間됨 속에서 행복하길 바란다.
그 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영 없어 보인다는 게 좀... 많이 그렇다. 평범한 친구 사이기라도 했으면 종종 만나서 이야기 들어주고, 소소하게 이거 저거 챙겨주고, 그렇게라도 할 텐데. ...아니, 만일 그랬다면 그 때는 그 때 대로 내 마음을 잘 숨기지 못하거나 섣불리 불쑥 고백 같은 거 해 버리는 바람에 불편하게 해 드렸을지도 모르겠다.
썩어 들어가는 수족을 추스리는 짓도 포기한지 오래,
지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목 아래에 걸터 앉아
빛나던 이들을 생각한다...
...새삼 대체 언제까지 견디고 살아야 할까 싶어서 확 우울해졌다. 안 그래도 요즘 아무 이유도 없이 문득문득, 내가 별로 오래 살 팔자는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 아 샹,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버텨야 되는 거지? 대체 언제까지?
쓰다가 말아 버린 소설 다시 잡았다가 더럽게 집중 안 되서 던져 버리고 놀기만 했다. ...원래 반한 분 보여 드리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던 건데... 그 분이 보실 수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르는데 이게 다 뭔가 싶은 생각이 슬슬 든다. 그 분 취향에 잘 맞을지도 모르겠고.
내 사랑은 결국 그 분에게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고 내 안에 갖혀서 이대로 식어 갈 거라는 생각과, 비록 절반의 사랑이나마 내 안에 속한 부분만은 소중히 지키겠다는 생각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무슨 시계추도 아니고ㅋ
새삼 엄청 바보 같다. 내가 사랑한다고 여기고 있는, 내 안에 있는 그 분의 모습 대부분은 어디까지나 내가 임의로 상상하고 추측한 이미지일 뿐 진짜 그 분과는 꽤 다르리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게 사랑은 무슨 놈의 사랑이야, 쯧.
1)
잘 지내길, 나의 친구.
옛 친구 하나가.... 나한테 거리를 둔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리도 아니다, 몇 년 동안이나 변변히 연락을 한 것도 아니고, 자기 일로도 바쁠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가 나를 아예 남처럼 여기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나와의 관계를 유지보수할 만한 동기까지는 없을 것이다. '가끔 연락 오면 반갑고, 종종 생각나기도 하지만 다른 친구들도 있겠다 굳이 일부러 시간을 내 만난다거나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까진 아닌 옛 친구' 딱 그 정도겠지.
한 마디 한 마디의 의미를 깊게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편집증이나 피해망상이 어떤 식으로 생기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난, 지금도 내 정신 상태가 어느 정도 병들어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 지금도 상당히 애를 써야 비교적 평범하게 사회활동이 가능한 상태인데, 더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이대로 멀어지려니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 좀 많이 마음 아프지만...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태가 된 적이 있다. 난 그 때 이대로 멀어지다가 언젠가는 완전히 남이 될 거라는 걸 받아 들이지 못했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친구로서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고. 상대가 부담스러울 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그 때도 했었지만.... 나한테 있어 '人間이 되고 싶다'는 욕구는 너무나도 절실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그 날의 절망을 다시 한 번 겪느니, 이대로 멀어지다가 오래지 않아 잊혀지는 쪽이 낫다. 나로선 앞으로도 계속 그 친구가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놀고 싶겠지만 그 친구에게 있어선 별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람끼리 주고 받는 감정의 농도는, 그 감정이 같은 종류의 것이라 해도 결코 완전히 같을 수 없다. 난 그 사실을 납득하고 있다.
난 절대로 그 날을 반복해서 겪지 않을 것이다. 오직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차악을 쫓을 뿐 아닌가 싶어서... 허무하기도 한데.
행복하게 잘 지내라, 친구야. 그리울 거다.
2)
신해철 장례식 갔을 때... 30일날 밤 10시 경 잠실나루 역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막 내리던 참이었다. 옆 칸에 반한 분과 닮은 여자 분이 연인인 듯한 남자랑 같이 올라타는 게 얼핏 보였다. 혹시 그 분인가 싶어서 멈춰 서서 좀 지켜봤는데.... 정말 그 분인지 그 분과 닮은 다른 사람인지는 결국 확인 못했다. 하지만 활짝 웃으면서 옆에 남자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면서 그 분이 떠올랐다. 나는 그 분이 그렇게 웃는 모습을, 그 웃음이 나한테 향하는 걸 아마도 결코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새삼 들어 살짝 울적해졌다. ....뭐, 닮은 다른 사람이겠지. 바로 그 타이밍에 우연히 옆 칸에 타던 사람이 그 분일 가능성은 한 없이 낮다.
....정말로 만에 하나 그 분이었다면, 행복해 보였으니 그걸로 괜찮다.
그리고 빈소와 영결식장에서 시야 내에 들어오는 낯선 젊은 여자들이 죄다 순간적으로 그 분처럼 보여 정신이 산란했다. ...또 꿈에 나오겠네, 아오 샹. 꿈 따위.
꿈 속에서조차, 난 그 분과 함께 하지 못하리라는 걸 안다.
그 분이 보고 싶기에, 보고 싶지가 않다.
+
써놓고 보니 나놈이 무슨 엄청난 일편단심 순정파 같아 보이네ㅋ 그럴 리가 없다. 첫 눈에 반했을 뿐 그 분과 난 평범한 친구 사이조차 아니고, 난 그 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내 안에 있는 그 분은, 그저 내 환상과 희망, 기대, 욕구가 뒤엉켜 있는 막연한 이미지일 뿐이고... 실제의 그 분은 내가 멋대로 만든 그 이미지와는 아마도 꽤나 다를 것이다.
스토커는, 자신이 내면에서 구축한 대상에 대한 이미지에 대상의 실제 모습을 끼워 맞추기 위해서 대상에게 집착한다. 내가 그런 스토커와 다른 건, 그 분에 대한 내 이미지가 진짜 그 분과 다를 거라는 걸 막연히나마 자각하고 있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않고 의식적으로 계속 그 분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것 뿐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 감정은 그 분에 대한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진 그 막연한 이미지에 대한- 궁극적으로는 어딘가 병적인 집착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그게 정말로 완전한 망집으로 타락하는 걸 막기 위해선 더 거리를 둬야 한다. 건전하게 해소하려면 가끔 공적으로 얼굴 볼 일 있으면 만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친해지면서 내 이미지와 진짜 그 분의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되겠지만... 난 그 분 앞에서, 그 분이 위화감이나 거북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내 감정을 잘 숨길 자신이 없다.
그토록 자기본위적인, 절대로 상대와 공유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걸 아는데도, 사실은 그립다. ....한심하구나.
신해철 장례식 갔다 왔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위 질환 때문에 투병 중이라는 뉴스는 얼핏 봤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었다. 그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8일 날 사망 소식을 듣고 멘붕했다가, 멘탈이 좀 회복되자 마자 반사적으로 든 생각이...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 추모용 단편 소설 하나 써서 유가족들한테 건네줘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식음을 전폐... ...까진 아니고, 서너 시간 눈 붙였다가 일어나 밥 먹으면서 글 쓰고, 다시 대 여섯 시간 잤다가 일어나 글 쓰고를 이틀 간 반복했다. 그리고 어제 저녁인 30일, 예의 소설은 2/3 정도가 완성되어 있었지만 더 이상 완성이 늦춰졌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난 31일 오전 9시까지 일반인 조문객을 받는다... 는 기사만 확인한 뒤 출발해 밤 10시 반을 좀 넘어서 잠실나루 역 도착, 아산 병원으로 향했다. 전에 이모가 거기서 수간호사로 일한 적이 있었고, 어렸을 때 팔이 부러져서 거기 한 달 정도 입원한 적도 있었는데... 워낙 오랜만인데다, 이사를 한 이후로는 처음이라 좀 헤맸다(...)
병원에 먼저 들러 빈소 위치를 확인한 뒤, 다시 잠실나루 역으로 돌아와 근처 PC방에 들어가서는 메일로 보내 놓은 소설을 마저 쓰기 시작했다. 새벽 4시 쯤, 소설은 거의 완성됐지만 이제 슬슬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묘한 촉이 잠깐 왔는데, 조금만 더 고치면 급조한 작품치곤 괜찮은 게 나올 것 같았다. 어쩔까 잠깐 고민하다가... '마왕 횽아 가시는 길인데 성의는 보여야지!' 싶어서 좀 더 고치는 걸 택했다.
아침 7시 쯤 드디어 완성, 프린트로 뽑고는(새삼스럽지도 않지만 PC방에서 프린트는 할 게 못 된다) 이제 이걸 유가족 분들께 위로 건네면서 같이 주면 된다, 만일 그럴 만한 타이밍이 안 되면 조의금 봉투에 같이 넣어두면 나중에 볼 거다.... ....라는 가뿐한 심정으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빈소에 사람이 없어
......9시까지 일반인 조문 받는다면서;ㅁ;!!!!!!!!!!!!!
일하던 사람에게 늦게 도착해서 헌화는 커녕 조의금조차 아직 못 냈는데 유가족 분들 뵐 수 없냐고 하니, 아래 영결식장으로 가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려가 봤더니...
이미 신부님이 장례미사를 시작해 버렸어
미사 끝나고 물어 물어서 조의금하고 소설 쓴 거 건네 드려야겠다.... 싶어서 기다렸다(신해철은 무신론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천주교 세례명까지 있더라). 장례미사가 끝나고 이 타이밍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싶어서 어느 분이 유가족 분이시냐고 물어물어 찾아가.... ...려고 했는데, 경호원인 듯한 사람이 날 제지했다. 기자 내지는 조문 온 다른 가수들 구경 온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상황 설명을 하려다가 지금은 유가족들도 한참 바쁘고 정신 없을텐데 내 딴에는 좋은 의도였어도 이런 상황에선 오히려 민폐일 수도 있고, 경호원 입장에서는 나를 통과시켜 줄 이유가 못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침 미사 집전 하시던 신부님이 옆에 지나 가셔서 대충 사정을 말씀드리자 바깥에 유가족들이 있을 테니 얼른 나가 보라고 말씀해 주셨다. 캄사합니다! 라는 심정으로 장례식장을 나가 보니....
기자들 짱 많아
다른 조문객들 짱 많아
게다가 김세황, 김영석, 싸이, 이승철, 윤도현(얼핏 봐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신대철 옹 닮은 사람과 한대수 옹 닮은 사람도)이 주변에 사람들 잔뜩 데리고 있어
아 ㅅㅂ 이래선 도저히 무리다, 반드시 기한 내로 이 소설 완성해서 유가족 분들께 드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커피를 생수처럼 퍼 마시면서 지난 사흘을 내리 달렸는데 의미가 없어, 조의금 챙겨 왔는데 그것도 못 냈어, 새벽에 슬슬 가야겠다는 촉이 왔을 때 대충 마무리하고 들고 올 걸.... 등등 온갖 생각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차는 발인하러 떠나 버렸고... 정신을 차려 보니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 앉아서 공기를 관찰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프린트 뽑아놓은 거 불에 태울까................. 마왕형 하늘에서 읽어 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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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기사 뜬 거 보니 화장 중단하고 의료 사고 여부를 확실히 검증하기 위해 부검할 모양이다. 본인의 평소 성격이나 행동에 비춰봤을 때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다고 마왕이 돌아올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적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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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 조문객만 1만 명이었다고 한다. PC방에서 밤새 완성한 걸 끝내 건네주지 못한 건 사실 아깝지만, 그 인원을 접대해야 했을 유가족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면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계속 옛 기억이 떠오른다. 떨쳐 내려고 해도 머리 속 한 구석에 달라 붙어 떨어지지가 않는다.
그 때, 난 '친구'와 서로 사과하고 화해했다고 생각했었다. 비온 뒤에 땅 굳는다 운운하는 속담도 떠올렸었고. 비록 오해가 겹쳐 다투긴 했지만 이제는 끝난 일이라고. 여전히 상대방과 난 친구일 거라고. 그 때.... 난 마음 깊이 기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뒤, 그 희망과 기쁨은 모두 아무래도 상관 없는 하찮은 것이 되었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난 단 한 번도 기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안도감이나 즐거움은 느낀 적 있어도 그 기억은 내 안에서 아마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毒이 되리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그 무렵 느꼈던... 그 불안과 두려움, 절망감이 다시 밀려오는 걸 느낀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그 무렵, 아직 내가 人間이 되고 싶다는 갈망을 놓지 않고 있을 때, 희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번민할 때와 한 없이 닮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그 날을 반복하게 된다면 난 더 이상 견딜 자신이 없다.
차라리, 바람이나, 빗방울이나, 모래알 같은 걸로 태어났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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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해지자. 사람이 서로 주고 받는 감정의 농도는 같을 수 없다.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한 두 해 알고 지낸 것도 아니고, 같이 RPG도 했었고, 걔한테 있어서도 내가 '친구'이긴 할 것이다. 다만 내가 느끼는 것보다 정도가 덜할 뿐인 거겠지. 아마도, 이대로 멀어질 것이다. 그래도 걘 여전히 내 친구니까.... 잘 지냈으면 한다. 앞으로도 종종 형언할 수 없는 고독과,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이 밀려올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할 사람 하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하리라는 걸 안다. 좀 섭섭하기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내가 보통 사람의 평균보다 좀 더 인복이 없을 뿐이다.
....나한테 있어서는, 그게 무엇보다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바람이나, 빗방울이나, 모래알 같은 걸로 태어났더라면. 애초에 人間이 되고 싶다는 욕구 따위 가지지 않는.
보고 싶다. 그래서, 보고 싶지 않다.
내 사랑이 끝나가기 시작한다는 막연한 예감이 든다. 거의 1년 간 안 봤으니 그럴 때도 되긴 했지.
....다음엔 이런 일 없었으면 싶은데ㅋ
내 생일이다. 그리고 얼마 뒤면 반한 분 생일이기도 하다. 축하드린다. 그리고 그 분의 생일 선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어 보인다는 것, 내 사랑이 그 분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고서 오직 내 안에서만 이어질 것이며, 그러다가 내 안에서만 끝날 것이라는 게 좀... 많이 그렇다.
....애초에 얼굴 하나만 보고 반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제법 오래 가네ㅋ 지금의 이 사랑이 다 타서 없어져도 살다 보면 또 누군가에게 반할 수도 있는데 그 때마다 또 이런 과정을 반복해야 되나... ....그건 좀 싫은데.
생일 축하드립니다, 모쪼록 행복하시길. 남자 친구분과 함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