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지인을 만나 인사를 주고 받았다. 최규석 작가님께 가져갔던 책들에 사인도 받았다. 다 끝나고 난 뒤 하종강 선생님께 질문을 하나 했다.
나:노동운동에 있어서, 노 측을 '선' 사 측을 '악'으로 규정하는 프레임은 위험하다고 보는데요. 그간 운동 해오시면서 노동자들끼리도 서로 벼라별 괴이한 이유들...출신 지역이라거나 종교 같은 걸로 싸우고 대립하는 경우 숱하게 보셨을 거 같은데...
하종강 선생님:숱하진 않아요, 가끔...(웃음)
나:그런 경우를 보다 보면, 실망스럽기도 하고 종종 진짜 정 떨어지거나 하지 않나요?
하종강 선생님:어쩔 수 없지요. 잘 이야기해서 하나로 묶어야 해요. 그런 문제 때문에 지쳐서 운동 그만 두는 활동가 분들도 많아요. 그래도 해야죠. 그런 걸 너무 많이 접하면, 운동을 관둬야 해요. 인간이 파괴되어 버리거든요.
나:그걸 머리로 알아도 그런 상황을 계속 겪다 보면 지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냥 견디는 것 밖에 방법이 없나요?
하종강 선생님:네.
인간이 파괴된다는 말씀을 하실 때, 문득 '이 분은 그런 상황에 처해서 좌절한 동지에게 운동 그만 두라고 직접 설득하신 적 있지 않을까' '고양이 손이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동지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운동을 관두라고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각오가 필요할까' 라는 생각이 들어 숙연해졌다.
나는, 좌파임을 자임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상에 의해 바뀌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人間 간의 신뢰와 연대가 어떤 힘이나 지식, 논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지향에 있어서 그러할 뿐 누군가와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다거나...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는다.
...사실은, 그러고 싶지가 않다.
<송곳>에서, 구고신 소장이 이수인에게 "직원들이랑 호형호제 안 하죠? 밥부터 같이 먹어요,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을 듣지." 라는 대사를 할 때, 그걸 보면서 약간 슬퍼졌다. 난 얼추 중학생 때부터 막연히나마 정치 성향이 굳기 시작했고 군대를 제대할 때 쯤 확실히 '아, 난 좌파구나'라는 걸 자각했다. 그리고 대학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큰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자가 되기에는... '사람'을 너무도 믿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내가 느꼈던 절망이, 人間이 되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들이 하찮고 무가치한 게 되었다는 느낌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하종강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이미 파괴되어 있다.
난 이성적으로는 나의 그 절망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서투름과 불운에서 비롯한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며, 사람과 사람 간의 신뢰와 연대는 여전히 고귀한 가치라고 여긴다. 하지만 누군가를 믿고 손을 잡는 건 도저히 할 수 없다. 정 필요하다면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웃고, 농담하고, 친한 척하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장일 뿐 진심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사회주의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하는 주제에 인간불신이라니ㅋ
...괜히 반한 분 생각난다. 모든 것이 잘 되어서 그 분과 자주 볼 기회를 만들면서 친분을 쌓고, 고백하고, 그래서 그 분이 내 마음을 받아 주셨다고 해도 이렇게 사람을 믿지 못하는 내가 연애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분이 남자 친구가 있는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부디, 행복하시기를. 부디. 부디.
시간이 더 지나고, 그 분에 대한 내 감정이 전부 사라지고 나면 그 후로는... 누군가에게 반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