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과에 여자 후배 애가 하나 있었는데 애가 인상이 뭐랄까... 좀 동남아스러운 느낌이 있어서 '베트남'이라고 별명을 붙여서 그렇게 불렀다. 그 애는 그럴 때마다 눈을 흘기며 "그렇게 부르지 마요 선배님" 했지만 솔직히 별로 신경 안 썼다.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문득 그 때 일이 기억나서 '내가 외모드립에다가 지역드립까지 끼얹어서 혐오발언 했었구나' ‘내가 남자인데다가 한참 선배라서 크게 싫은 티 못 냈던 거겠지’ 싶어서 엄청나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을 때쯤에는 걔도 이미 졸업하고도 남았을 무렵이고 연락처도 몰라서 끝내 사과하지는 못했다(만에 하나 이 글 보게 될 지도 모르니까... 여기서라도 사과한다. 변명 따위 안 하마. 정말 미안하다, 그 때는 내가 잘못했어. 그리고 혹시나 이 글을 보게 될 지도 모르는 베트남 분들께도 사과드립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난 얼추 고등학교 무렵부터 내내 정치적으로 좌파였고, 인권이나 노동 문제 등의 이슈에 대해서도 나름 일찍부터 의식이 생긴 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저 장난삼아 가볍게 그랬고, 그게 잘못이라는 걸 자각하는 데에는 몇 년이나 걸렸다. 삼일한이니 보... 어쩌고 하는 노골적으로 쓰레기 같은 드립만 여성혐오가 아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 온 남자 입장에서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자연스러움 자체가 일종의 여성혐오이며 나 역시도 거기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사실은 바로 오늘도 짧은 옷 입은 예쁜 여자보고 무심코 흘끔거렸다가 다음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으윽.
나는 평소에 진보입네 하면서도 정작 일상에서는 그 가치를 썩 잘 실천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 대해 여자들에게 항상 부채감을 느끼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내가 페미니즘을 지지할 이유는 충분히 있다.
2)
메갈리아가 주로 인터넷 상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역시 미러링이다. 그런 걸 접하면 당연히 나도 일단 불쾌하긴 하다. 이미 자살 시도를 해 본 적 있는 내 입장에서 재기 운운은 특히 극혐이다. 하지만,
메갈리아는 그러한 감정적인 불쾌감을 주는 것 외에는 진짜 ‘범죄적 행위’ 내지는 ‘악행’을 변변히 한 적이 없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메갈은 같은 소수자 입장인 게이들에 대해서도 ‘다 똑같은 한남충’이라면서 혐오한다고. 그러니 메갈은 악이라고. 하지만 게이 커뮤니티에서도 여자를 잠재적인 성적 라이벌로 취급하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게이 입장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은어도 있는 것 같고.
지극히 당연하게도, ‘억압당하는 소수’라고 해서 그들이 선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하는 다수에 대항해 억압당하는 소수의 편에 서는 것’은 그 자체가 정의로운 일이다. 그 중에서 누군가는 ‘선하니까’ 편을 들고, ‘악하니까’ 배제한다는 것은.... 으음. 한국사회에서는 남자인 쪽이 여러모로 더 유리하다.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단순한 사실이다. 그러한 한국사회에서 태어나, 미미하게나마 꾸준히 남자로서 수혜를 입어 온 입장에서... 상대의 ‘선’과 ‘악’을 가려가면서 편을 들거나 배제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오만한 태도다.
누군가는 또 그렇게 말한다. 미러링의 의도는 알겠는데 그래도 악을 악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제3자가 무책임하게 내 뱉을 수 있는, 판에 박힌- 아무 의미도 없이 ‘좋기만 하고 알맹이 없는 말’이기도 하다. 난 남자로서, 도저히 메갈리아 여자들에게 저 따위 흰 소리 못하겠다.
인간의 도덕성은 어지간해서는 다 거기서 거기다. 그리고 나 역시도 딱히 대단치 않은 도덕성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고(이건 겸손이 아니다. 난, 내가 결코 선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아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20여 년 동안 나는 내가 선인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이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 사회를 좀 더 낫게 하고 싶다면 ‘절대적으로 불쌍하고 절대적으로 착하고 절대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아니면 연대하지 않겠다’고 하는 건 투정에 불과하다. 지금 메갈은 기껏해야 인터넷 상에서만 좀 목소리를 내고 뉴스에서 몇 번 다뤄졌을 뿐, 사회적으로 딱히 대단한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에서도 메갈을 까기 위해 일베와 오유가 연합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판이고.
감정적으로 껄끄럽고 불편한 상대여도 그가 진짜 범죄자 레벨이 아닌 이상, 그리고 억압당하는 소수인 이상 함께 하는 것이 정의다. 정의는 원래 그렇게 어려운 거다.
누군가는 또 그렇게도 말한다. 일베나 메갈이나 다 같은 혐오 집단일 뿐이고 둘 다 상종 못할 쓰레기들이라고. 그러나 내가 보기엔 다르다. 단편적인 발언 수위만 보자면 ‘전라도 출신과 좌좀들은 다 죽여야 한다’는 일베나 ‘한남 전부 재기해라’하는 메갈이나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부분을 놓친 착시현상이다. 일베의 핵심적인 멘탈리티는 이승만에서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강하고 지배적인 가부장적 남성상에 의해 주도되는, 엄격한 통제에 기반한 반공&경제 부흥의 신화’다. 일종의 정신적 마조히즘 비슷한 건데.... 진짜 문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집권 기간을 다 합치면 거의 40년이고 한국 역사는 정부 수립 선포를 기준으로 이제 겨우 70년 좀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역사의 과반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확립한 그 신화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공고하고 일베는 그에 편승해 있다는 점이다(국정원에서는 일베 놈들 대상으로 초청씩이나 했다). 그 신화를 추종한다는 것은, 곧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과 여성 운동, 환경 운동이- 그를 위해서 싸우고 죽어간 이들의 목숨이 알량한 국가와 성장의 광휘보다 하찮다는 선언이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일베는 메갈보다 훨씬 더 강하다. 한 쪽은 말로만 ‘한남 재기해’라고 한다. 한 쪽은 말로 ‘전라도 출신과 좌좀을 다 죽여야 한다’고 할 뿐 아니라, 그 강고한 구체제의 신화에 기대어 있다. 어느 쪽이 더 큰 위협인지, 어느 쪽과 싸워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같은 이야기 계속 반복하는 느낌인데... 메갈은 말할 것도 없이 ‘정의의 집단’이 아니다. 세력이 약해서 두드러지지 않을 뿐, 미러링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쳐도 분명히 어두운 면- 특히, 남자들 중에서도 도태되고 약한 상대를 골라 물어뜯는 경향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메갈의 악함’이 아니라, ‘인간의 악함’이다.
‘그래도 도저히 메갈과 연대하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남자라면 그에게는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그렇다면 메갈을 미워하는 데에서 그칠 게 아니라 스스로 선을 행해보지 않겠냐고. 메갈이 게이 혐오를 한다? 그럼 너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해라. 메갈이 다 같은 한남이라면서 독립 운동가를 깐다? 그럼 너는 존경하는 독립 운동가의 생애와 사상을 공부해서는 니가 배운 걸 UCC로 만들어 업로드해라. 메갈이 커피 심부름 시키는 남자 상사 커피에 부동액 넣는다는 글을 돌려본다? 네 커피는 직접 타 마셔라. 메갈은 여성 우월이고 진짜 페미니즘은 다르다? 그럼 네가 그 진짜 페미니즘을 실천해라.
수많은 사람들이 '특정 악행을 하는 집단이 사라진다면 악 역시도 사라질 테니까, 그 집단만 없애면 된다'고 너무나도 자주 착각한다. 악을 없앨 수 있는 건 선이다. 자꾸 도덕론 들먹이자니 나 스스로도 좀 짜증나긴 하는데, 선과 악이라는 프레이밍이 대중적이니까 거기 맞춰서 제안하는 거다. 정말로 '메갈은 악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네가 증오하는 게 그 악이라면 네가 직접 선을 행해라.
3)
...이렇게 길게 썼지만, 메갈의 대두 이후로, 그리고 김자연 성우 사건이나 초여명 김성일 사장님의 간접적인 메갈 인정 트윗, 이런 저런 사람들의 메갈 긍정 내지 옹호 발언(왠지 모르게 아는 이름들-특히 작가들-이 많더라) 이후 최근 남자들이 왜 예스컷이다 뭐다 해가며 화를 내고 있는 지도 이해는 된다.
상술했다시피 나는 한국 사회에서 남자로 사는 게 여자로 사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거고... 취업률은 계속 떨어지고 세금은 오르고 간신히 취업해도 비정규직 신세로 박봉 받아가며 매일 야근해야 하는 경우가 태반인 이 헬조선에서는 남자라고 해서 딱히 엄청난 특권 계급인 것까지는 아니다. 대개의 남자들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빡세 뒈지겠는데+딱히 적극적으로 여혐을 한 것도 아닌데(물론 자각이 없다고 해서 여혐이 여혐 아닌 게 되는 건 아니다. 나만 해도 베트남 운운했을 당시에는 자각 없었다) ‘실ㅈ한남 재기해라’ 같은 소리를 들으니 빡치는 거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남자들은 메갈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를, 메갈에 대한 분노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다. 분노할 대상은 지금의 헬조선을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씨발 개좆같은 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이끈 한국의 구체제와 그 권화인 새누리당인데 일개인 입장에서 집권 여당에게 각잡고 저항하기엔 겁이 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니 괜히 웹툰 작가가 독자들을 개돼지 취급했네 뭐했네 하며 ㅂㄷㅂㄷ거리는 거지.
4)
말 나온 김에 개인적인 취미 관련해서 약간 첨언. 초여명 출판사의 김성일 사장님은 트위터에서 ‘메갈리아의 모든 활동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페미니즘의 한 갈래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트윗을 했다. 하지만 관련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사람들이 당시 펀딩이 완료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초여명의 콜 오브 크툴루 룰북에 대해 환불신청을 넣었다(누구 하나는 초여명에 실망했답시고 겁스 분서 인증도 했지 아마ㅋ).
김사장님은 두 말 없이 환불 요청을 받아 들였는데... 평소 종종 가던 DC TRPG 갤에서 ‘초여명은 프로의식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왔다. 뭔 소린가 싶어서 글들을 좀 읽어보니 대충 ‘민감한 사안에 대해 사장의 개인적인 신념을 공공연히 표방하여 고객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환불 사태를 초래하고, 게다가 예정에 없던 추가 펀딩까지 받았으니 프로의식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누군가는 자기파괴라는 소리도 했고. 그거 보자마자 진짜 육성으로 이랬다.
“ㅋ”
민감한 사안에 대해 사장의 개인적 신념을 표방한 것에 대해:그게 어때서. 김사장님이 공무원이냐? 미국은 헐리웃 배우들도 공공연히 정치적 스탠스를 밝히고 선거 기간에는 지지 연설도 하는데. 공무원도 배우도 아닌 출판사 사장일 뿐인 김사장님은 책 잘 만들어서 제 값 받고 팔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초여명은 지금까지 책의 질에 있어서 실망시킨 적이 없다. 프로가 할 일은 자기 원래 일을 잘 해내는 거지, 일과는 관련 없는 사안에 있어서까지 남들 기분 살피는 게 아니다.
환불 사태에 관해:김사장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면서 소소한 불평도 없이 환불 절차와 기한을 상세히 공지하고 수수료도 일괄 부담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작업이 늦춰질 수도 있는데도 김사장님은 텀블벅을 통해 무리해서라도 애초에 예정된 기한에 맞출 것임을 밝혔다. 대체 뭐가 문젠데?
추가 펀딩에 관해:제일 웃기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 추가 펀딩 좀 하면 어때. 그런다고 당초에 받기로 했던 물건이 없어지거나 질이 폭락하는 것도 아니고 배송이 지연되는 것도 아니고. 이 기간이 아니면 펀딩 못한다는 생각에 밥값 아껴가면서 질렀다는 사람도 있긴 있더라. 그 사람에게는 안 됐지만, 이렇게 될 줄은 진짜 아무도 몰랐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고, 실질적인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추가 펀딩 받는다고 해서 욕먹을 이유는 없다. 누구는 ‘환불 좀 당해도 추가 펀딩으로 메꿀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저러는 거다’라던데 턀갤질 하면서 본 온갖 개소리 중 제일 웃겼다. 그런 계산 있었으면 애초에 RPG 출판사 안 하는 게 합리적이다. 지금껏 봐온 바로는, 김사장님과 사모님은 RPG로 수익을 내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5)
1)에서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하겠다고 했다. 2)에서는 메갈리아의 ‘암’에도 불구하고 ‘명’을 우선시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내가 사회주의를 긍정하면서도 스스로가 사회주의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러한 가치들은, 결국 인간에 대한 애정을 대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사람이 싫다. 그래서 반한 분한테도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고(...눈치채셨을 거 같기도 하지만. 부디 나로 인해 그 분이 불편하지는 않으셨길, 그리고 행복하게 잘 사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실패한 지금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때 죽어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늘 있다.
난 사람이 싫지만, 정작 그런 사람이 모여서 이루는 유대는 좋다. 모순인 것은 알고 있다. 그 모순이, 내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