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친구한테, 오랜만에 한 번 보자고 메일을 보내놨다. 아무래도 역시, 직접 만나서 사과해야할 거 같다. 시간도 제법 지났고, 그 친구를 볼 낯이 없기도 하고, 나도 이젠 그 때 같지 않으니 그냥 묻어 버릴까 싶기도 했는데... 그랬다가는 아주 오랫동안 후회하게 될 것 같다. 어쩌면 그 친구는 날 딱히 친구라고 여기지 않을 지도 모른다. 굳이 내가 그 친구한테 한 바보 같고 한심한 짓거리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예 터무니 없는 경우는 제끼고... 현실성 있는 여러 경우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가장 나쁜 가능성은 역시... 그 친구는 내가 한 일에 대해 딱히 마음에 두고 있지 않되, 용서해서가 아니라 그냥 나를 친구라고 여기지 않고 있어서- 그냥 취미도 같고 취향도 비슷해서 예전에 잠깐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굳이 관계를 지속할 가치는 없는 사람 A로 여길 뿐인 상황이다. 많이 슬프겠지만... ....뭐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있고.
더욱 나쁜 가능성도 있긴 한데.... 그 가능성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다시 그 날을 반복하게 된다면, 그 때는 견딜 자신이 없다.
...그 가능성만 피한다면, 역시 그 친구와는 나쁘게 끝나도 나한테 있어선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그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시린 이유는 아마도 내가 아직 人間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무렵 만나 친해진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나쁘게 끝난다면, 그 미련을 떨치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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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가능성 하나가 더 떠올랐다. 그냥 그 메일을 무시하는 것. 그렇게 되면... 나한테 정 떨어졌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되겠지, ....그래도, 예상 가능한 범위 내다. 진짜 최악의 경우는 아니다.
'갑옷'을 두껍게 입으면 커다란 검에 맞아도 약간 아프고 만다. 어떨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그 갑옷이 벗겨져 있는 상황에서라면 손바닥만한 단도에 한 번 찔려도 치명타가 된다.
갑옷을 입지 않고, 그냥 남들이 입고 있는 수준의 평상복 정도만 걸친 채 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