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잘 지내길, 나의 친구.
옛 친구 하나가.... 나한테 거리를 둔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리도 아니다, 몇 년 동안이나 변변히 연락을 한 것도 아니고, 자기 일로도 바쁠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가 나를 아예 남처럼 여기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나와의 관계를 유지보수할 만한 동기까지는 없을 것이다. '가끔 연락 오면 반갑고, 종종 생각나기도 하지만 다른 친구들도 있겠다 굳이 일부러 시간을 내 만난다거나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까진 아닌 옛 친구' 딱 그 정도겠지.
한 마디 한 마디의 의미를 깊게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편집증이나 피해망상이 어떤 식으로 생기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난, 지금도 내 정신 상태가 어느 정도 병들어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 지금도 상당히 애를 써야 비교적 평범하게 사회활동이 가능한 상태인데, 더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이대로 멀어지려니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 좀 많이 마음 아프지만...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태가 된 적이 있다. 난 그 때 이대로 멀어지다가 언젠가는 완전히 남이 될 거라는 걸 받아 들이지 못했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친구로서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고. 상대가 부담스러울 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그 때도 했었지만.... 나한테 있어 '人間이 되고 싶다'는 욕구는 너무나도 절실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그 날의 절망을 다시 한 번 겪느니, 이대로 멀어지다가 오래지 않아 잊혀지는 쪽이 낫다. 나로선 앞으로도 계속 그 친구가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놀고 싶겠지만 그 친구에게 있어선 별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람끼리 주고 받는 감정의 농도는, 그 감정이 같은 종류의 것이라 해도 결코 완전히 같을 수 없다. 난 그 사실을 납득하고 있다.
난 절대로 그 날을 반복해서 겪지 않을 것이다. 오직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차악을 쫓을 뿐 아닌가 싶어서... 허무하기도 한데.
행복하게 잘 지내라, 친구야. 그리울 거다.
2)
신해철 장례식 갔을 때... 30일날 밤 10시 경 잠실나루 역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막 내리던 참이었다. 옆 칸에 반한 분과 닮은 여자 분이 연인인 듯한 남자랑 같이 올라타는 게 얼핏 보였다. 혹시 그 분인가 싶어서 멈춰 서서 좀 지켜봤는데.... 정말 그 분인지 그 분과 닮은 다른 사람인지는 결국 확인 못했다. 하지만 활짝 웃으면서 옆에 남자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면서 그 분이 떠올랐다. 나는 그 분이 그렇게 웃는 모습을, 그 웃음이 나한테 향하는 걸 아마도 결코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새삼 들어 살짝 울적해졌다. ....뭐, 닮은 다른 사람이겠지. 바로 그 타이밍에 우연히 옆 칸에 타던 사람이 그 분일 가능성은 한 없이 낮다.
....정말로 만에 하나 그 분이었다면, 행복해 보였으니 그걸로 괜찮다.
그리고 빈소와 영결식장에서 시야 내에 들어오는 낯선 젊은 여자들이 죄다 순간적으로 그 분처럼 보여 정신이 산란했다. ...또 꿈에 나오겠네, 아오 샹. 꿈 따위.
꿈 속에서조차, 난 그 분과 함께 하지 못하리라는 걸 안다.
그 분이 보고 싶기에, 보고 싶지가 않다.
+
써놓고 보니 나놈이 무슨 엄청난 일편단심 순정파 같아 보이네ㅋ 그럴 리가 없다. 첫 눈에 반했을 뿐 그 분과 난 평범한 친구 사이조차 아니고, 난 그 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내 안에 있는 그 분은, 그저 내 환상과 희망, 기대, 욕구가 뒤엉켜 있는 막연한 이미지일 뿐이고... 실제의 그 분은 내가 멋대로 만든 그 이미지와는 아마도 꽤나 다를 것이다.
스토커는, 자신이 내면에서 구축한 대상에 대한 이미지에 대상의 실제 모습을 끼워 맞추기 위해서 대상에게 집착한다. 내가 그런 스토커와 다른 건, 그 분에 대한 내 이미지가 진짜 그 분과 다를 거라는 걸 막연히나마 자각하고 있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않고 의식적으로 계속 그 분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것 뿐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 감정은 그 분에 대한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진 그 막연한 이미지에 대한- 궁극적으로는 어딘가 병적인 집착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그게 정말로 완전한 망집으로 타락하는 걸 막기 위해선 더 거리를 둬야 한다. 건전하게 해소하려면 가끔 공적으로 얼굴 볼 일 있으면 만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친해지면서 내 이미지와 진짜 그 분의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되겠지만... 난 그 분 앞에서, 그 분이 위화감이나 거북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내 감정을 잘 숨길 자신이 없다.
그토록 자기본위적인, 절대로 상대와 공유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걸 아는데도, 사실은 그립다. ....한심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