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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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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inition....

 

아무리 터무니없고, 심지어 악랄하기까지 한 행동도 그를 수행하는 사람은 대체로 그를 정당화할 만한- 제3자 입장에서는 전후 관계와 그 의미를 잘 따져보지 않고서는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그럴싸한 핑계를 갖고 있다. 그 핑계가 '난 악인이 아니며 다만 합리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라는 심리적 알리바이를 스스로에게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건, 외부의 법적인 처벌이나 사회적 비난 같은 압력을 피하기 위한 것이건 그 핑계가 정말로 핑계에 불과한지 아니면 비교적 진심에 가까운 것인지(물론 그게 온전한 진심이건 야비한 거짓말이건 둘 중 하나이기만 한 경우는 잘 없지만 일단 그 사실은 차지하고) 판단하는 기준 중 가장 신뢰도가 높은 잣대가 있다. 

 

그 상황을 거꾸로 적용해서 그가 내세우는 대의나 공익을 위해 그 자신이 지금 남에게 강요하는 것과 똑같은 희생을 요구받는 입장일 때 과연 그가 그러한 희생을 치를 만한 사람인지, 그리고 희생을 거부할 경우 외부의 압력을 똑같이 가할 수 있는 입장인지를 따져 보는 게 바로 그것이다. 회사가 경영난에 봉착했다면, 이 상황에서는 '회사의 생존'이 노사 모두가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의'가 된다. 그리고 노사 양쪽 모두 '회사 전체가 도산하는 걸 피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이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명목 상의 합의를 이룬다. 하지만 그를 위한 수단으로 '노동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늘리고 재계약 기한을 연장한다'는 것을 사측이 선택하고 그것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할 경우, 그 주장이 회사와 그 구성원 모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지 아니면 노동자 측에 일방적으로 책임을 떠 넘기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핑계인지 판단하고 싶다면 이러한 잣대를 적용해 보면 된다. 약자인 노동자 측과 마찬가지로 강자인 회사 측의 고위 임직원들 역시도 부양 가족이 있는 상태에서 갑작스레 해고 통보를 받고, 40이 넘은 나이에 재취업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니며 고개를 숙이고, 같은 위기에 처한 동료들과 함께 이러한 상황의 부당성을 알리고 직장으로 복귀하기 위해 집회를 가지고, 그것이 불법 집회로 신고당해 경찰들이 쏘는 물대포 얻어 맞고, 동료들은 너를 이용하려 들 뿐이니 그들의 이름을 불면 너 하나는 복직시켜 주겠다고 회유 당하고, 그래야 하는 입장이라면 그것이 정말 '유일하게 현실적인 대안'인지는 일단 차지하고 최소한 그들이 진심으로 그걸 믿고 있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는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위 예시에서 회사 측은 노동자들과 같은 입장에서 같은 논리로 같은 희생을 강요당할 때, 그걸 거부하고 노동자들에게 그를 전가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다. 노조를 좋아하는 경영자 따위는 없다. 하지만 경영자 역시 회사의 관리와 운영을 맡는다는 면에 있어 본질적으로 노동자에 해당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경영자들의 모임인 전경련 역시도 일종의 노조에 해당한다. 하지만 전경련과 일반 노조는 법적 위치도 사회적인 시선도 현실적으로 결코 동등하지 않다. 그러한 우월한 위치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할 수 있기에 그들이 '강자'인 거다.

 

말할 것도 없다시피, '강자'라고 해서 딱히 개인적으로 악인이라는 법은 없고 '약자'라고 해서 서로에 대한 연대와 우애의식으로 가득 찬 선인이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강자는 적고 약자는 많을 수밖에 없는 게 논리적 귀결이고, '강자'는 자신의 그러한 강함을 동원해 스스로의 그 우월한 위치를 추가로 강화하고 지속하려고 한다. 모든 종류의 집단은 그 목적과 형태를 불문하고 규모가 커지고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그 자신의 유지보수에 가장 많은 리소스를 쓰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생물학적 법칙에 가까운 것이기에, 몇몇 강자들이 가진 '개인적인 레벨의 선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정 많고 너그러운 경영자가 정기적으로 자선 단체에 거액을 기부하고 명절 때는 사원들에게 넉넉하게 보너스를 쏘고 쓸 데 없는 회식 따위를 삼가하게끔 지시하고 가능한 잔업과 야근을 최소화한다고 가정하자. 그 경영자는 물론 책임 의식을 가진 기업인이며 선량한 개인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비로운 오너와 여유 있는 사내 문화'를 가진 회사에 다니는 몇 안 되는 이들의 행운일 뿐 궁극적으로는 소수의 강자가 상황과 필요에 따라 일방적으로 수많은 약자들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만일 오너가 도덕성이 높다면 가능한 그런 상황에 처하는 걸 피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기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에서 그는 견제를 거의 받지 않고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있다).    

 

강자와 약자의 도덕성과는 별개로, 소수의 강자가 임의적인 판단에 따라 일방적으로 수많은 약자를 억누르지 못하게 하는 것. 강자가 약자에게 "열심히 일하고 나한테 충성하면 그에 걸맞는 대가를 주마. 섭섭케 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여야 하고 넌 나보다 밑이어야 하며 넌 내가 시키는 것에 토 달면 안돼."라는 식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현실에서의 정의'다. 초월적 깨달음이나 철학적인 진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방식을 통해 강자에 의해 자의적으로 규정된 관념으로써의 '정의'의 오만함과 독선성, 억압성을 경계해 왔다. 그러한 경계는 충분히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의의 가치 자체를 퇴색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은 정의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워낙 없어서 문제인 거지, 하나의 단일하고 확고한 '정의'가 다른 모든 것들을 억눌러서 문제가 아니다. "정의의 반댓말은 불의가 아니라 또다른 정의다." 같은 경구는 그 자체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정의의 상대성이 바로 지금의 현실에 엄존하다 못해 넘쳐나는 불의에 대해 침묵하게끔 하는 핑계가 되어선 안 된다. 

 

 

큰 틀에서 궁극적으로 보자면, 인간끼리 오직 인간 세상에서만 적용되는 '정의'를 논해봤자 별로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우주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우주의 관점- 혹은 세상 만물에 대해 초탈한 현자나 성자의 관점이며, 현자나 성자가 될 것도 아니면서 그러한 관점을 섣불리 자신의 관점인양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이 오만하고 비겁한 태도다.

 

지금의 현실을 사는 인간이라면, 모순과 한계에 처할 것을 각오하고 '정의'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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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신뢰하는 친구도 열정을 바칠 연인도 갖지 못할 내가, 때때로 엄청난 고독감과 두려움에 짓눌려 가면서도, 나한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진심과 선의를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그 손을 잡지 못하는 내가 아직도 추구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내가 별로 오래 살 팔자가 아니라는 근거 없는 예감이 요즘 유달리 자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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