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 성향이 비슷한 지인A를 만났다. 자연스레 이석기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더러운 NL새퀴들을 까기 시작했다(...)
나:누구는 그러더라고요. 이 참에, 적의 칼을 빌리는 한이 있다 해도 우리 내부의 암부를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고.
지인A:사슴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 사자가 멧돼지를 처리해준다고 해도 그 뒤 사슴을 잡아 먹으려 들지 않는다는 법이 없어요.
나:우리 말고도 숲에 사슴은 많아요. 앞으로 태어날 사슴들도 있고.
나는 진영논리에 기대서는 안 된다, 지금 진보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그게 올바른 가치라면 우리 다음 세대들이 일어날 거다, 천천히 가야한다는 의도로 한 이야기였는데... 그 사람의 표정은 좀 미묘하더라. 지인A는 운동권이고, 나보다 나이는 좀 어리지만 조직을 구성하고 세력을 키우고 현장에서 투쟁해 온 경험이 훨씬 더 많다. 누가 '나 예전에 운동했지만 관뒀다'는 이야기를 할 때, 어느 시기에 운동을 관뒀는지만 듣고 그 사람이 속한 계파가 어디였는지 견적이 주르륵 나오는 그 사람과 삼민투와 민민투의 차이조차 제3자에게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나를 비교할 수야 없지ㅋ 그 사람은 자신을 따르는 후배들과, 동지들에 대한 책임감도 있을테고. 그와는 달리 나는 현장 경험이 전무하며, 오직 혼자서 책을 읽고 기사들을 뒤지면서 진보로서의 입장과 관점을 정립했을 뿐 조직이나 전략 같은 부분에 있어서는 아는 바가 미미하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많은 지인A와는 달리 혼자인 나로서는 내 의지만 꺾이지 않으면 된다. 내게 있어 확실한 것은, 잘못된 수단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는 원론 뿐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지인A와 세상에 의해 내가 변하는 걸 막고 싶어하는 나의 차이일테고. 아마도 그 지인A와 내 관점 차이는 거기서 비롯한 것이리라.
...지금 생각해보니 GG때리고 다음 세대들에게 현재의 과업을 미루자는 말처럼 들렸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으? 으?!
역시 정치 성향이 비슷한 또 다른 지인B는 별도의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때, 그 둘이 진보로부터 많이 까였지만 느리게나마 많은 것들이 변했다고. 하지만 MB가 집권하면서 그게 한 방에 우르르 무너졌다고. 천천히 쌓아올려 봤자 정권 바뀌면 훅 간다고. 난 묻고 싶었다. 그래서, 빨리 바꾸면? 그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지만 만일 빨리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역시 정권교체 한 방에 훅 가지 않는다는 법이 있는가? 한국의 정치 상황 상 시간이 갈수록 전략적으로 진보가 불리한 입지를 강요받게 되리라는 건 사실이지만 '빠르고 쉬워 보이는 수단'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고, 거기에 의존하는 건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소영웅주의 아닌가? 하지만 금방 화제가 바뀌었고, 난 타이밍을 잡는데 실패해 버렸다....'_`
그 지인B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현장 경험에 있어선 넘사벽이다. 분명 객관적인 지식량이나 경험치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을 그 사람도 지인A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는 건.... 아마도 그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옳고', 쟁의 현장에서 함께 굴러본 경험 한 번 없고 밤새 토론해본 적 한 번 없는 내 관점은 '알맹이 없는 이상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알맹이 없는 이상론이라도 괜찮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최소한 올바른 방식으로 패배해야 한다. 나는 그런 헛된 이상이라도 품어야 할 나의 이유가 있다.
나는 두 번 다시, 내가 한 때 그러했던 것처럼 야비하고 비굴하게 살지 않을 거다.
2)
반한 분을 만났다. 확실하진 않지만, 남자 친구가 있는 모양이다. 뭐... 연예인이나 뭐 그런 사람들을 통틀어, 지금까지 내가 만나 본 여자들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니 그럴 만하지ㅋ 지금까지 알지 못한 면모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영업본능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행본능이라거나, 의외의 과격한 면모라거나, 판치라를 좋아하신다거나, 노래를 못 부른다거나... 보는 입장에서 재미있었다.
돌아오는 길이 같은 방향이라 함께 지하철을 탔다. 가방에서 쥬스를 꺼내 먹겠냐고 제안하셨지만 괜찮다고 거절했다. 그거 받으면 뚜껑도 못 따고 냉동실 구석에 모셔 놓겠지 분명. 가방 무거우실텐데 받을 걸 그랬나. 옆에 자리가 나자 앉으라고 하셨지만 거절했다. 옆에 앉으면 얼굴을 못 보잖아....
팔 하나 반 정도 거리에 선 채, 알바하는 학원 문제지를 들여다 보는 그 분의 얼굴을, 속으로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지하철이 오늘따라 빨리 간다고 생각하면서 한참 멍하니 쳐다 보았다. 가끔 시선을 느끼셨는지 고개를 돌리셨지만 그 때마다 재빨리 외면했다. 검고 곧은 머리칼에 반쯤 가린 새하얀 얼굴은 초승달을 연상케 한다. 딱 보기 좋은 정도로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갸름한 얼굴선, 볼과 분홍빛 입술 근처에는 작은 점이 박혀 있는 게 보인다. 문제지를 들여다 보며 가끔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가끔은 소리 없이 쿡쿡 웃는다. 맑고 커다란 갈색 눈동자는 조용하게 반짝거린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면서 내가 이 분한테 반한 이유는 역시 얼굴빨이구나 싶더라ㅋ 선생님이 부르신다고 구의역에 내리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셨다. 별 말 없이 문제지만 들여다 본 게 죄송하다는 뜻이겠지. 괜찮다고 했다. 다리 사이에 놓여 있던 묵직한 종이백을 집어 주며, 손가락이 살짝 맞닿았다. 희고 가는, 핏줄이 약간 도드라진 손이라 차가워 보였는데 생각 외로 매우 따뜻했다. 돌아오는 내내 그 손가락을 매만졌다.
.........무슨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ㅋ
내 마음을 알게 하고 싶지 않다. 전에 ida님이 지적하셨던 대로, 내 안에는 '나'가 너무도 많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내가 그 분과 사귀게 된다 하더라도...... 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됐다 싶으면, 내 아집이 애정을 넘어설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나를 이해해줄 것을 먼저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 분도 분명 여러 삶의 신산이 있을텐데, 오직 나의 절망과 나의 고통과 나의 흉터만을 들이대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면 됐다.
오랜만에 창부타령이나 들을까. 가사가 계속 머릿 속을 맴돈다. 창 너머 보이는 달이 그 분 닮아 보인다.
....창문을 닫아도 스며드는 달빛, 마음을 닫아도 파고드는 사랑. 사랑이 달빛인가, 달빛이 사랑인가. 텅 빈 내 가슴 속에, 사랑만 가득히 쌓였구나. 사랑사랑 사랑이려니...
3)
텀블벅을 통해 후원한 던전월드 룰북이 배송되어 왔다. 오오 간지 오오. 책과의 인연에 같은 팀 분이 '세이버는 XXX 마누라'라고 적어 놓은 거 보고 뿜었다. 이 분 실력도 좋고 배울 것도 많고 인성도 뭐 그간 같이 플레이해오며 본 바에 의하면 괜찮아 보이는데 가끔 약간 창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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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 전 잡담하던 중 같이 플레이하는 분이 정유미 이야기를 꺼냈다. 우결에 출연 예정이라더라. 뭐... 애초에 배우로서 좋아한 거고+귀여우니 호감도가 추가로 플러스된 거였을 뿐 '낮은 가능성이나마 나와 사귀거나 할 수도 있는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좋아한 건 아니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싶기도 한데... 막상 누군가와의 유사연애 실황중계를 TV에서 보면 빡칠 거 같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시시덕대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반해 있는 분이 떠오르더라(....................)
...내 이성아 나새끼 좀 어떻게 해봐라 나는 그 분한테 내 감정 드러내면 안 된다는 거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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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이인인 다른 정유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