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때,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생각했다. 난 아마도 변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정답이 없는 문제고, 만일 정답이 있다 해도 내가 진정으로 이해하고 납득한 게 아니라 외부의 누군가가 '계시'를 내려준 결과라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난 설령 오답이라 해도 내가 찾아낸 답을 밀어 붙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들어오자, 맞은 편에 앉아 계시던 ida님이 마치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보시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머리 위에 먹구름이 가득해요, 보통 먹구름도 아니고 번개를 잔뜩 품은 뇌운이에요. 그 먹구름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는 마세요."
......
ida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다. 나는, 뼛속까지 에고이스트다. 내가 새누리당과 MB, 그리고 레이디 가카로 상징되는 현대 한국의 망틸리떼를 혐오하고 절대 거기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진심으로 '진보'의 신념과 이상을 믿어서가 아니다. 다만 자기만족일 뿐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것도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내 안에 쌓여 있는 것들, 들어줄 사람이 없었던 말들, 홀로 되삼켜야 했던 생각들을 분출하기 위해서일 뿐이다(가능한 보기좋게 배열하려는 노력은 하지만 그래봤자 '분출'이긴 마찬가지다). 내 안에는, '我'가 너무도 많다. '他'에 대한 사랑이 싹 정도는 틔울 수 있어도 도저히 견고히 뿌리박지 못할 정도로.
돌아오며 지하철 안에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제 내가 한 때 간절히 원했던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는 지금... 아직 그렇게까지 감정의 농도가 짙지는 않지만-즉 아직은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숨길 수 있는 수준이지만-, 반한 상대가 생겼다는 것은.... 나도 변할 수 있다는 마지막 가능성의 입구 같은 게 아닐까. 전에 반했던 사람이 생겼을 때, 고민만 하다가 결국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그 사람의 결혼식 날 밤새 술을 퍼마시며 혹시 다음에 반하게 되는 사람이 있으면 이거저거 재지 말고 적극적으로 어프로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겨야 하지 않을까. 구질구질하게 고민만 하다가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건 이미 겪어봤으니, 이번엔 어떻게든 '我'를 비워내고 '그 사람'을 채워넣어야 하지 않을까,..
그 때, 어느 한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내게 속삭이는 느낌이 들었다.
"네가 '죽고 싶다'라는 수준을 넘어 '죽어야겠다'고 느꼈을 때. 진짜 극한 상황에 직면했던 그 순간들에. 자살하거나 미치지 않게 해준 유일한 끈이 뭐였지? '나는 강하다'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 '이대로 끝을 맺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같은 생각들 아니었어? 너의 에고가 사랑의 방해물일지는 몰라도, 그 에고 덕에 너는 지금도 살아 있는 것 아니야?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인 명예 역시 그 에고에서 비롯한 것 아니야?"
ida님이 말씀하신 그 먹구름의 정체가 정말로 내 에고라면, 내가 그걸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내가 타로를 봐달라고 부탁하면서 어느 정도 내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고... 아마도 ida님은 분명 좋은 의도를 가지고 진심을 담아... 친구나 잘 아는 지인이 아닌,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와 더불어 그렇게 조언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난 진심과 선의가 가끔은 얼마나 치명적인 독이 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독을 다시 한 번 들이킨다면, 이번에는 견딜 자신이 없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잘못되도 잘못된 대로 어떻게든 견디고 살 수 있다. 반한 그 분? 아직 그렇게까지 강한 감정은 아니니 어떻게든 감정을 정리할 수 있다. 함께 이야기와 웃음을 나누고,'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라는 질문을 받고 난처해하고, 작고 가냘픈 어깨를 주무르고, 긴 갈색 머리칼에 코를 묻고, 옅은 쌍꺼풀이 드리워진 눈꺼풀에 입을 맞추는 꿈을 가끔 꾸고, 깨고 난 다음에는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스스로를 책망하고, 길을 걷다 뒷모습이 닮은 사람만 봐도 무심코 앞질러 가서는 얼굴을 확인하고, 그런 날들이 좀 이어지다가 말겠지. 그 정도는 아직 통제 가능한 범주 내다. 내 에고를 비워낸다는 게... 정말로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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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강해야만 한다, 혼자서 세상 전체와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세상이 무수한 창끝을 내게 겨누고 다가올 때 그를 마주해서 한 번의 칼질 쯤은 하고 죽을 정도 기개는 있어야 한다고 되뇌다가도- 가끔은 내가 인간이 아니라 한 줄기 빗방울이나, 스쳐가는 바람이나, 깨져서 사방으로 튀는 바위 조각 하나였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