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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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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902155651&Section=03

 

......조너선 코졸은 교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신봉하는지를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둑질을 가르치고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교사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거짓 없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교단에 로봇을 세우지 않고 사람을 세운 이유가 아니겠는가.

아이들 또한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 행동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일인칭'으로 이 세계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인칭으로 존재하고, 살아가고,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무방비 상태에 있는 외국 마을에 폭탄과 네이팜탄 발사 버튼을 누르는 완벽한 일꾼이 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아이들에게 '제3의 입장을 찾아보자'느니, '극단을 경계하자'느니 따위 어설픈 소리를 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중도에 가까울수록 진실하다는 사고방식, '양 극단'에는 늘 끔찍한 무언가가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실은 이 체제를 유지시키려는 기득권자들이 전매 특허로 유포해 온 고약한 언술임은 어디든 다르지 않다.

우리의 경우에도, 1970년대 전태일이 그러했고, 조선 말기 동학 농민군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안중근과 유관순이 그러했듯, 갈지자로 걸어온 우리 역사가 이나마 진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극단의 고통에 대한 이러한 개인들의 극단적 선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극단적 시련에 맞선 극단적 반응은 때로 인류의 고통에 대한 고결한 인간들의 유일하게 윤리적인 반응"이기도 했던 것이다. 교사들이 중립적인 척, 객관적인 척하면서 드러내는 완곡한 표현들은 인내와 절제의 상징이 아니라 문젯거리를 만들지 않고 그저 무난하게 이 상황을 넘어가려는, 무기력과 안일의 적극적인 표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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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적인 관점을 떠나서, 이 구절이 무척 마음에 든다. 내 평소 믿음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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