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른 옛날 친구들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약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다들 각자 자기 길 가고 있는데, 나만 혼자 뒤에 남아 옛 추억에만 매달리는 기분'을 털어놨다. 다들 성심껏 들어주고, 각자 자신들의 힘든 부분이나 약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기분은 한결 나아졌지만, 사실 내심으로는 여전히 나만이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다른 친구들의 고민과 힘겨움은 어디까지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에서 겪을 만한 것이지만 나는 아니었기에.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내가 제일 불행하고 힘들다'는 생각에 빠져들어 망가질 거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 없다면 적어도 억누르기라도 해야 한다.
연평도 포격 때는 반사적으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이걸 계기로 해서 이명박 정권을 어떻게든 족칠 방법이 없을까' 였다. 다음 순간에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할 만한 생각이냐' 싶어서 엄청 자괴감이 들었었다. 이번엔 그런 식으로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나아진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지금도 '윤뻐커가 억지로 용산으로 집무실 옮겨가고 돈은 있는대로 쓰고 호위인력으로 경찰 빼 갔으니 통제 인력 모자라서 사단이 난 거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생각을 앞세울 때가 아닌 거 같다.
찔끔찔끔 파이널 판타지 10을 하고 있다. 7과 더불어서 가장 스토리가 좋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고, 확실히 괜찮긴 한데 악역의 묘사에 있어서는 내 취향이 아니다. 거의 자연재해나 다름 없는 압도적인 파괴자가 있고, 그 파괴자에게 대적하는 척하면서 대중들에게는 거짓 희망만 주며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종교 집단 '에본 교단'이 악역으로 나오고, 신앙 대신 과학기술로서 그 파괴자에게 맞서는 종족 '알베드 족'이 주인공 파티의 조력자로 나오는데... 나는 과학기술로 대표되는 인간의 이성과 지혜가 인간을 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성과 지혜는 쓰기에 따라서 삶을 개선하는 유용한 도구는 될 수 있어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궁극적 가치는 되지 못한다. 르네상스 지식인들과 좀 더 뒤의 계몽주의자들은 그렇게 믿었지만, 그 알량한 이성과 지혜에 대한 믿음은 제국주의로 시작해 1차 대전을 거쳐 아우슈비츠와 핵미사일로 끝장났거든ㅋ 그 폐허에 뒤이은 냉전의 공포 속에서 태어난 게 포스트 모더니즘이었다. 21세기인 지금은 포스트 모더니즘도 몇 물 간 취급 받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 제기한 '인간의 이성과 지혜에 대한 회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인간으로서 내 눈에는 10의 에본 교단보다 7의 신라 컴퍼니-이익을 위해 자신들이 사는 별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탐욕과 물신의 총화-가 훨씬 악랄해 보인다.
에본 교단이 아무리 틀어막아도 삶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과학의 발전 자체는 막지 못하고, 굳이 알베드 족이 아니어도 그에 불만을 갖는 사람은 반드시 나오게 된다. 소환사의 존재로 대표되는 거짓 희망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도 알베드 족이 아니어도 나올 수 있고(오히려 교단에 의해 종족 전체가 테러리스트 취급 받으면서도 오직 선의로 악명을 감수해 가며 히로인 납치까지 하는 알베드 족의 묘사가 너무 현실감이 없다). 주인공 파티의 활약이 아니었어도 공포로 대중을 억누르는 에본 교단의 방식은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 블리츠볼 경기 같은 빵과 서커스도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신라 컴퍼니가 제공하는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풍요는 그런 것들보다 훨씬 빠르게 대중의 마음에 파고들 수 있다. 사람은 억압에는 저항하지만 이익에는 너무 간단히 포섭된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신라 컴퍼니는 에본 교단보다 훨씬 더악질적이고 위험한 존재다.
민주당과 국혐당이 진심으로 '똑같이 나쁘고 똑같이 더럽다'고 믿는다. 정도 차이나 개선 가능성 같은 건 고려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똑같이 나쁜 두 거대정당이 대립하는 상황이라면 더 강한 쪽 편을 들어서 그 쪽 편이 보장하는 체제 내에서의 입신양명을 위해 노력하는 쪽이, 민주당이 자신의 삶을 개선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믿는다.
민주당의 부정에는 공정을 외치면서 국혐당의 더 큰 부정에는 침묵하는 데에는 대강 이런 심리가 작용하는 것 아닌가 싶다. '어차피 똑같이 더러운 놈들이 위선 떤다' '내가 보기에도 진짜 완벽하게 선하고 정의롭다면 인정해주겠지만 민주당은 아니다' '나도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같은 층에 내 세금 낭비하지 마라, 그 핑계로 해먹기나 하겠지' 뭐 그런 심리.
이들이 전통적인 민정당 계열 지지 세대와 다른 점은, 군사독재의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향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들이 보기에 그런 건 촌스러울 뿐이고, 노년층이 박정희 영정 앞에서 제사 지내는 사진은 조롱의 대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운동이니 민주화운동 경력 같은 거 걸어놓고 성추행이나 하는' '스펙 쌓기 위한 노력은 안 하고 데모나 하며 꿀 빨다가 편하게 좋은 직장 잡고 부동산으로 돈 번' '값싸게 쓰고 버릴 수 있는 비정규직을 만들어낸' 민주당 586세대에 대해선 조롱이 아니라 극도의 증오로 대한다.
내가 이렇게 추측하는 근거는, 디씨나 에펨코리아 같은 데서도 민주당과 노무현 문재인 욕하는 글은 념글 치트키 취급을 받지만 윤썩과 '그 당'이 깨끗하고 정의롭다거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선 '그 당'이 이겨야 한다는 식의 글은 그것대로 또 컨셉 취급받으며 비웃음당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윤썩 찍은 젊은 세대는 나라를 위해 국힘당을 찍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국힘의 도덕성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다. 다만 자신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선 국힘당이 정권을 잡는 게 그나마 좀 더 유리하다고 믿으며, 무엇보다 민주당이 증오스러울 뿐이다. 이들의 세계관에선 '국힘은 부패하고 천박하지만 민주당보다 더 강하며, 최소한 자신에게 성공의 기회라도 주는 정당'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국힘보다 강한 것도 아닌 주제에 위선적이고 혐오스러운 정당'이다.
사람을 가장 강하게 결집시키는 건 애정이 아니라 증오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앞으로도 어디에 투표할지는 명백하다. 기본적으로 '둘 다 똑같이 더럽다'는 믿음이 베이스에 깔려 있고, 당장 별 힘이 없는 소수정당은 애초에 관심 밖이기 때문에 누가 국혐당의 온갖 추잡한 면을 비판하면 반사적으로 상대를 민주당 지지자로 간주하고 '민주당도 똑같다'면서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는 거지.
좀 더 자기관리에 노오력을 기울였으면 그런 꼴 안 당했을 거라는 인알들이 많던데,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한 이유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그럭저럭 보통 정도의 외모였다 해도 어떤 꼬투리든 잡혔으면 그런 꼴을 당하긴 마찬가지였을 거다. 원래 따돌림 내지 집단 괴롭힘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기도 하고.
사람은 그저 상대가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상대를 증오할 수 있다. 남자건 여자건 마찬가지다. 난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가해자이기도 했었고, 그 사실을 아주 잘 안다.
종종 꾸곤 한다. 한 때 가깝게 지냈던, 그러나 이제는 내가 너무 많이 변해 버리는 바람에... 여전히 그립긴 하지만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다시 그 때처럼 웃으면서 볼 자신이 없는 친구들의 꿈을. 그 꿈 속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 친구들과 웃고 떠들면서 어울리고, 그러다 깰 때마다 마음이 아팠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꿈 속에서도, 그 친구들은 멀리서 웃고 있고 나는 일부러 그 친구들을 피했었다.
가끔 극도로 짜증나는 점은, 그들 역시 노동이나 환경, 나아가 계급 이슈에 대해 나름 진심으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치더라도 그 근본에 일종의 도덕적 나르시시즘과 어쩔 수 없는 쁘띠 부르주아지 근성 같은 게 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혐당이 노동자 착취적인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고 하고, 민주당이 그보다는 좀 순한맛 법안으로 대응하고, 정의당이나 노동당은 둘 다 조까라고 하는 상황. 이럴 때 그런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이나 노동당 지지자들에게 "하나씩 고쳐나가야지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실질적으로 '그 당'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진 건 민주당이다"라는 논리로 침묵을 요구한다. 그러나 노동당이나 정의당을 지지하는 일선의 노동자들은 그 불완전한 면 때문에 오늘도 죽어나가고 있다.
그런 민주당 지지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나름의 '선의'를 가지고 진보적 의제에 관심을 가지긴 하되, 스스로는 집 있고 차 있고 결혼해서 자식 낳아 키우고 은퇴한 부모님 용돈 드리고 예금도 좀 있고 남는 돈으로 주식 같은 것도 할 만한 여유 정도는 있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스스로 그런 위험에 처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정작 가장 절박한 사람들의 요구를 비현실적인 것 취급하며 내려다 보는 태도로 설교하거나 비웃는 꼴 보면 '니들이 노동 의제에 신경쓰는 건 자신들이 그 당 지지자들보다 정의롭다고 믿고 싶어서냐 노동자들을 위한 거냐'고 묻고 싶어진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거 묻기 전에 한 대 치고 싶다. 그래도 짜증스러워할 뿐 증오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증오는 스스로에게도 매우 해로운 감정이고, 난 그 사실을 아주 잘 안다. 대상을 굳이 더 늘릴 필요는 없다.
민주당 지지자들 일부가 '너희 때문에 진 거다'라고 정의당이나 여타 소수정당 지지자들에게 화풀이하는 게 그려진다. SUCK은 대통령이 됐고, 가족 중 코로나 감염된 게 어머니까지 2명 째다. 지금 창 밖에서 해가 뜨는 게 보인다. 잔인한 여명이다. 졸라 즐겁네 썅....
사실 이건, 저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볼 분들은 없으려니 생각하면서도 몇 자 적습니다.
윤석열을 막기 위해선 이재명을 찍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재명을 찍는 이유가 '윤석열이 되면 나라를 조질 것'이라는 공포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윤이 나라를 조질 것이라는 징후는 수없이 많습니다만, 일단 그건 둘째 치고요.
왜냐하면 공포를 동력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상대가 누구를, 어떤 이유로 찍었건 간에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 모두를 한데 묶어서 ‘배제해야만 할 사악한 적’으로 규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두려워하는 대상이 자신보다 약하면 잔인해지고, 자신보다 강하면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개인적으로 전 인간의 도덕성에 큰 기대가 없고,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언제 어디나 다 비슷비슷하게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인이나 군자가 결코 아닌, 그런 탐욕과 이기심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너도 나도 그런 평범한 사람들인 만큼 민주주의는 결국 그 정도 수준에 맞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가치 있는 이유는, 그런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끝없이 서로 갈등하고 대립해가면서도 그 과정에서 조금씩 서로 좀 더 배우고 나아질 기회를 주는 유일한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의 무수한 시행착오, 서로에 대해 쌓이는 오해와 편견, 불신이 매우 비싼 사회적 비용인 건 사실이고, 그게 민주주의가 가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만.
역시 개인적으로 저는, 현 제1야당이 보수 정당이 아니라 퇴행적이고 수구적이며 반드시 박멸해야 할 사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윤을 앞세운 ‘그 당’이 나라를 조질 것이라는 공포심 때문에 이재명을 찍었는데도 그가 당선되지 못했다면, 그 공포심에 잡아먹혀 윤을 지지한 모든 이들을 증오하게 될 겁니다. 그들 역시 앞으로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만일 바뀌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이 나라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민주주의 하의 동료 시민인데도 불구하고요. 어쩌면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과 저 자신)이 잘못된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러한 증오는 '개빻은 저들을 전부 속 시원하게 쓸어버릴 착한 독재'에 대한 욕망을 부추길 겁니다.
사실, 저 역시 윤의 당선이, 그리고 ‘그 당’이 집권여당이 되는 미래가 두렵습니다. 그러나 윤이 아니라 이재명을 찍는 이유가 오직 그러한 공포심 때문만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한 표에 싣는 게 더 나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예를 들어 여성정책에 있어서는 심상정이 이재명보다 더 낫습니다. 심상정은 예일 뿐, 자신의 계급과 입장을 더 잘 반영하는 다른 제3의 후보에 힘을 실어주는 것 역시 가치 있는 선택입니다. 당선이 되지 않는다 해도 득표율은 그 후보가 표방하는 가치를 대외적으로 증명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집결시킵니다. 무효표를 던지거나 투표를 포기하는 건, 아무 것도 나타내지 못합니다.
전 내일 ‘착한 독재’를 거부하는, 민주주의의 약점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향하는 사회의 시민이 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그리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최악의 가능성이 현실이 된다 해도 윤이나 ‘그 당’ 의원들, ‘그 당’ 친화적인 고위 관료와 언론은 미워할망정 동료 시민들끼리는 너무 증오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문재인이, 박근혜 사면을 발표했다. 나야 애초에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별 호감은 없었다. '개중 괜찮은 편이고, 코로나 방역도 이 정도면 잘 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보수 대통령' 정도의 인식이기도 했고, 원래 내가 특정 정치인에게 딱히 개인적 호감을 갖고 지지하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렇기에 딱히 엄청나게 배신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5년 전의 그 겨울밤들이 생각나서 초 하나 사왔다.
그 나날들 중 하루는, 그런 일이 있었다. 촛불집회 나가려고 안국역 가는 지하철을 타고, 구석 자리에 앉아서 준비해 온 플라스틱 컵과 플래시, 그리고 비닐봉투를 꺼내 부스럭대고 있었더니 옆에 앉으신 아주머니 한 분이 뭐하고 있는 거냐고 여쭤보시더라. "이렇게 해서 이렇게 만든 뒤 플래시를 켜면 횃불처럼 보여요^^;" 하고 설명드리니까 웃으시면서 수고하라고 하시더라.
굉장히 기분이 더럽지만 그 날들의 기억은, 나 자신에게 있어서만큼은 무가치하지 않다. 차기 대통령이 이재명이 되건 윤석열이 되건, 그 가치는 누구도 내게서 빼앗아가지 못한다.
노태우 국장 결정을 두고, 인터넷 상에서 전라도 광주 출신이라는 어떤 사람이 문재인 정부의 판단을 실드치며 '전노 군사독재에 제일 큰 피해를 입은 광주에서도 이 정도면 ㅇㅋ라고 납득하는 분위기다' '솔직히 타 지역 출신이 에바터는 거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 글을 봤다. 하지만 별로 동의할 수 없는 게,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라인이 저지른 죄는 특정 지역민에 대한 학살과 차별만이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박정희에게 죽을 뻔했지만 미국 도움을 받아 살아남고 훗날 용서와 화해의 의지를 표시하셨던 건 개인적인 레벨에서는 미담일 수 있어도, 군사독재의 피해자가 본인만 있는 것도 아닌 이상 여전히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영웅적인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이뤄낸 성취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노태우를 국장 치르기로 결정한 것 역시 문재인 정부의 과오로 남을 것이다.
전두환에 대해선 뭐... 개인적으로는 어차피 감옥에 가지 않을 거, 한 10년 쯤 고통받다가 뒈지길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그것만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다행히 이번에 전두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결정됐고, 군바리들이나 몇몇 극우 유튜버, 국혐당 내에서도 소수 의원들이나 조문을 가는 분위기다.
하지만 여전히 난 불길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박근혜가 감옥에 갔을 때, 이제 군사독재와 그 부역자 빨아제끼는 패거리들은 더 이상 힘이 없고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탈이념적, '실용적' 탐욕과 이기심만이 대한민국의 가장 큰 적이 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범람하는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그 '실용적' 탐욕과 이기심은 얼마든지 군사독재로 상징되는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힘'에 대한 욕망을 구체화할 그릇으로써 그 망령을 다시 무덤에서 불러낼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국혐당으로 대표되는 구 한나라당 계열 정당에서도 소장파(이준석 등) 의원이나 관료들은 최소한 군바리들과는 선을 긋고 싶어하는 모양이지만, 난 그들의 의지력을 믿지 않는다. 애초에 국혐당 쪽에 가 있다는 거 자체가 문제고, 민주당을 꺾기 위해선 얼마든지 강령술에 손을 댈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하튼.... 근현대 한국사의 헤게모니 대부분을 장악해왔던 군사독재의 수괴라고 할 만한 놈들은 이제 어제자로 다 죽었다. 그 망령들을 다시 불러내는 걸 막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들에게 희생당한 광주 영령들을 비롯해, 민주화 과정에서 억압받고 고문당하고 죽어간 이들의 영혼이 이젠 편히 안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침, 어제 광주 시청 위에는 무지개가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