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 CLOUD

  • Total :
  • Today :  | Yesterday :



찔끔찔끔 파이널 판타지 10을 하고 있다. 7과 더불어서 가장 스토리가 좋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고, 확실히 괜찮긴 한데 악역의 묘사에 있어서는 내 취향이 아니다. 거의 자연재해나 다름 없는 압도적인 파괴자가 있고, 그 파괴자에게 대적하는 척하면서 대중들에게는 거짓 희망만 주며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종교 집단 '에본 교단'이 악역으로 나오고, 신앙 대신 과학기술로서 그 파괴자에게 맞서는 종족 '알베드 족'이 주인공 파티의 조력자로 나오는데... 나는 과학기술로 대표되는 인간의 이성과 지혜가 인간을 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성과 지혜는 쓰기에 따라서 삶을 개선하는 유용한 도구는 될 수 있어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궁극적 가치는 되지 못한다. 르네상스 지식인들과 좀 더 뒤의 계몽주의자들은 그렇게 믿었지만, 그 알량한 이성과 지혜에 대한 믿음은 제국주의로 시작해 1차 대전을 거쳐 아우슈비츠와 핵미사일로 끝장났거든ㅋ 그 폐허에 뒤이은 냉전의 공포 속에서 태어난 게 포스트 모더니즘이었다. 21세기인 지금은 포스트 모더니즘도 몇 물 간 취급 받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 제기한 '인간의 이성과 지혜에 대한 회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인간으로서 내 눈에는 10의 에본 교단보다 7의 신라 컴퍼니-이익을 위해 자신들이 사는 별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탐욕과 물신의 총화-가 훨씬 악랄해 보인다.
 
에본 교단이 아무리 틀어막아도 삶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과학의 발전 자체는 막지 못하고, 굳이 알베드 족이 아니어도 그에 불만을 갖는 사람은 반드시 나오게 된다. 소환사의 존재로 대표되는 거짓 희망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도 알베드 족이 아니어도 나올 수 있고(오히려 교단에 의해 종족 전체가 테러리스트 취급 받으면서도 오직 선의로 악명을 감수해 가며 히로인 납치까지 하는 알베드 족의 묘사가 너무 현실감이 없다). 주인공 파티의 활약이 아니었어도 공포로 대중을 억누르는 에본 교단의 방식은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 블리츠볼 경기 같은 빵과 서커스도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신라 컴퍼니가 제공하는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풍요는 그런 것들보다 훨씬 빠르게 대중의 마음에 파고들 수 있다. 사람은 억압에는 저항하지만 이익에는 너무 간단히 포섭된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신라 컴퍼니는 에본 교단보다 훨씬 더악질적이고 위험한 존재다.
아, 물론 그런 요소들이 좀 불만스럽긴 하지만 류크는 귀엽다ㅇㅇ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