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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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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2009.04.10
    시 관련 수업 레포트를 쓰다 생각난 생뚱맞은 것
지난 크리스마스를 반지의 제왕과 함께 보내고서 며칠 뒤... 문득 몇 년 전 웹에서 읽고는 미친듯이 웃었던 개그 팬픽이 생각나 구글신님께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BL 필터링이 잔뜩 거쳐져 있어서 몇 년 전에 봤을 때는 웃으면서도 살짝 거북했는데 나이가 들고 관대해진 이제는 뭐(...)

다시 봐도 걸작이다. 엘론드 편이나 반지악령 넘버5 편도 비범하지만 특히 아라곤의 비밀일기 편과 사루만의 비밀일기 편, 간달프의 비밀일기 편 셋은 그야말로 압권.

원문은 여기

http://www.livejournal.com/users/cassieclaire/

And
http://www.ucnovel.com/story.php?query=story_view&subtitle=ucnovel&uid=10790

UC노블엔 한참 전에 가입해서 이거저거 만들어 본 것도 좀 있었지만, 건드리지 않은지 한참 됐었는데... 아는 사람이 'UC노블에서 대단한 작품을 발견했다'면서 설레발치길래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

아직 중간까지밖에 안 읽어서 뭐라고 하긴 힘들지만... 포스 쩐다. 뭐 스토리 자체야 평이하다고 할 수 있긴 한데, 채팅창을 캡처해서 만든 배경과 마치 채팅창에서 타이핑하듯 대사 하나 단위로 출력되는 문장들로 인한 연출 효과는 실로 ㅎㄷㄷ. 완전 몰입해서 읽는 중이다. 난 원래 소설을 읽을 때는 특정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하거나 하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는 객관적으로 사건의 전후 관계나 인물들 간의 상관 관계를 분석해 가며 읽는 스타일이며, 작품 내에 완전히 동화되는 건 내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다.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는 설정이나 인물 묘사 없이 탁월한 상황 연출만으로도 몰입시킬 수 있는 재주는 대단히 훌륭하다.

방 밖에서 어머니가 심부름 시키려고 부르시는 중... 인데 조금만 있다 가겠다고 대답만 하는 중. 눈을 못 떼겠다 헉헉(...)

PS=라운드 6-a에서 막힘. 아놔 어째서 무슨 선택지를 고르건 데드엔드임?
And
And

   ‘국민 작가’ 피천득의 진실과 권정생

  -시대가 외면한 아동작가, 시대를 외면한 수필문학가의 삶



  정문순



  지난 5월, 두 명의 문인이 세상을 떠났다. 권정생과 피천득, 각각 한국의 아동문학과 수필문학을 대표하는 별로 추앙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비슷한 시기에 세상과의 인연을 놓았지만, 이들이 이승에서 누린 삶의 행보와 문학 세계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병고와 극빈 등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행의 삶과,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다가 장수의 복을 누린 두 문인의 대조적인 이력은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한 사람의 문학은 피를 토하듯 처절하여 가슴을 서늘하게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담백하고 고상한 취향에 몰두했다. 또 한 사람의 문학적 업적에 관해서는 이의 제기하는 목소리를 찾기 힘든 데 반해 다른 한 사람은 평가가 분분하다는 점에서도 서로 대비를 이룬다. 생전에 전혀 교류가 없었으리라 짐작될 만큼 문학적 행보가 조금도 일치하지 않은 두 사람이지만, 두 사람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데는 서로를 참조 사항으로 끌어 와야 할 듯하다. 피천득 문학을 둘러싸 소음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라도 권정생을 불러오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권정생이 아동문학의 빛나는 별임을 부정하는 이는 찾기 힘들다. 고인의 생전에, 평론가 김상욱은 이 땅에서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 별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처지가 대견스러워질 정도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고인의 문학 세계를 평론하는 자리에서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현 밖에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작품이 내뿜는 광휘에 압도되어 평론가의 필력은 날을 세우지 못하고 꼬리를 감춰 버린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평생을 괴롭힌 처절한 병고에도 불구하고, 무소유와 무욕의 삶과 어린 아이 같은 영혼을 일생토록 견지한 고인에게 ‘우리 시대의 스승’이라는 헌사를 바쳤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찬사가 지나치지 않을만큼 권정생 문학은 특이하고 이채롭다. 권정생의 작품은 어린이를 계몽과 훈계의 대상으로 보는 뎃 헤어 나오지 못했던 끈질긴 한국 아동문학의 관습을 답습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세상이 밝고 아름답다고만 가르쳐야 한다는 강소천 등 주류 작가들의 고집과도 그는 처음부터 결별했다.

  코흘리개들에게까지 냉전적 사고와 호전 의식을 주입하는데 열을 올렸던 당대의 다른 작가들과 달리 권정생은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위시한 전쟁의 폭력성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 중 <패랭이 꽃>은 아이들과 꽃을 사랑하는 착한 청년이 아무런 마음의 갈등 없이 베트남 전쟁에 징집되어 가는 모순을, 6․25 전쟁 때 월북한 아버지를 둔 여자 아이의 항변을 통해 그리고 있다. 소설이 세상에 나온 때가 1970년대임을 생각하면 시대를 훌쩍 앞서 평화와 탈냉전을 탐색한 그의 선견이 돋보인다.

  고전으로 대우받는 외국의 명작 동화들이 그렇듯 권정생의 동화는 아이들만 읽는 기존의 아동 문학을 넘어섰다. <<몽실 언니>>와 <<강아지 똥>> 등이 가진 철학적 깊이는 어른의 독서를 요구한다. 그에게 ‘어린이’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소수자의 이름이었고, 밑바닥에서 짓밟히면서도 맑은 영혼을 잃지 않은 민중의 상징이었다. 그의 작품에 가난하고 헐벗은 하층민과 여성들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강아지똥은 쓸모없다고 천대받았지만 노란 민들레 꽃을 활짝 피워 내지 않았는가. 권정생은 민중이 남긴 구술 문학을 활자로 옮기는 것이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마을 할머니, 시장터 술장수 할머니, 공사판 노동자 아저씨들까지 읽어 주는” 문학을 쓰는 것이 작가적 소임이라고 했으며, 미완성작으로 남은 <<한티재 하늘>>에서 구술형 문학이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구술 문학의 복원 시도와 더불어 내가 생각하는 권정생 문학의 가장 큰 미덕은 생생한 현재형이라는데 있다. 리얼리즘 정신에 투철한 문학이라는 평가가 대세를 이루긴 하지만, 그의 문학은 생태주의, 여성주의 등 다양한잣대로 읽을 수 있는 열린 텍스트로 살아 있다.

  그러나 세상은 권정생을 제때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삶과 문학의 비주류성은 제도권 문학이 환영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있었다. 데뷔 초기의 일화는 그와 주류 문단의 거리를 잘 말해 준다. 문학상에 입선하여 문단에 나왔을 즈음 그는 시상식에 입고 갈 옷이 없어 여기저기 기운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아는 사람이 그것을 보고 바지 한 벌을 구해 억지로 덧입게 했는데, 입성이 얼마나 초라해 보였는지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행사가 끝나자마자 등을 치며 빨리 떠날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의 등을 떠밀었던 문단은 코흘리개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몽실 언니>>와 <<강아지똥>> 등을 읽고 눈물을 흘리는 것과는 반대로 교과서에서 오래도록 그를 소외시켰다.

  피천득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 엘리트 출신에다 춘원의 제자였으며 해방 이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한 후 백수에 가까운 나이까지 수복을 누린 문인이다.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월드컵 대회 때 붉은 티셔츠를 입고 대표 팀을 응원했다고 할 정도로 정정한 만년을 보냈다. 평탄한 인생만이 아니라 수필문학가라는 타이틀로도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문인들이 가문의 영광이라 부를 정도로 영예로 삼는 교과서 작품 수록에서 피천득은 인세 수입이 가장 많을 만큼 해방 이후 교과서에서 단골로 만나는 작가다.

  피천득의 문학은 자신이 <수필>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말한 대로 ‘청자연적’ ‘학’ ‘난초’ 등의 온아우미한 세계를 지향한다. 호흡이 짧고 간결하며 화려한 비유를 자제한 그의 문장은 크게 욕심 부리지 않는 담백한 성정을 느끼게 한다. 피천득은 ‘마음의 여유’가 글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꽃잎 하나가 비뚤어진 연꽃 모양의 청자 연적에서 흠이 아닌 파격을 발견하는 태도처럼, 그의 글은 무미건조하고 천편일률적인 일상에서 각별한 멋을 발견하는 삶의 태도를 드러낸 것들이 많다. 그의 글에는 정치․사회적인 논점이 등장하는 일은 드물다. 평온한 일상에서 포착한 새로움, 신변과 관련된 소소한 화젯거리가 작품의 주조를 이룬다.

  피천득 수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신변잡사나 일상적인 것들은 마치 수필문학의 본디 특성인양 알려져 왔고, 제도권 교육을 통해 굳혀져 왔다. 그러나 일상의 시시콜콜한 가벼움을 다루는 것만이 수필의 전부는 아니다. 정치적이고 논쟁적인 무거운 글들도 수필의 한 식구에 들어가는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수필은 정치 연설, 철학자의 사변적 글, 학술 논문 같은 딱딱한 글에서부터 잡담 수준의 글까지 산문에 해당하는 글을 모두 포괄한다. 수필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여 ‘붓가는 대로 쓴 글’이라고 정의해 놓고서도 정작 비정치적이고 신변잡기적인 글들이 전부인 것처럼 가르치고 유포해 온 데는 제도권 문학의 책임이 크다.

  수필의 영역이 제한을 받게 된 것은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이고 친체제적인 문인들이 문단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과 관계가 있다. 김진섭, 이양하, 유치진 등 1930년대 프로 문학과 각을 세운 해외 문학파의 후예들이 해방 이후의 문단을 틀어쥔 세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영미 유학을 통해 영문학을 배워 온 사람들로 구성된 해외 문학파들은 독립적인 문학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수필을 개쳑하는 데 힘써 해방 이후 교과서에 수록된 수필들을 자신의 것들로 채웠다.

  자족적이고 비정치적인 피천득의 글은 이들의 구미에 들어맞는 것이었고 오랜 세월 동안 중등학교 과과서에서 그의 작품은 해외 문학파들과 함께 빠지지 않고 실렸다. 김진섭, 이양하, 이하윤 등의 해외 문학파 작가들과 피천득의 글은 오늘날에도 중등 교육과정 6년 동안 학생들이 만날 수 있는 수필 작가의 전부나 다름 없다. 피천득은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이기도 했다. 왕성한 전업 작가로 활동했다고 보기 힘든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수필문학가로 만인에게 각인되어 이쓴 것은 <인연> 등 교과서에 실린 4~5편의 작품들에 힘 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피천득 수필의 비정치성은 삶과 현실의 일치를 강조하는 리얼리스트들에게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 많다. 제도권 교과서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피천득의 작품은 야유에 가까울 정도의 비판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의 대표작이자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일본 유학 당시 하숙집 딸과의 추억을 회고한 <인연>은 태평양 전쟁 같은 엄혹한 현실을 사적인 추억의 들러리로 치부했다는 격한 비판을 받는다.

  전쟁의 광풍이 몰아친 뒤 재회하고 보니 그녀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그래서 “십년 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그녀와의 결혼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움을 나타내는 대목이 있다. 전쟁이 미리 났더라면 운운하는 진술은 분명 경박하고 무책임한 발어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전쟁 같은 극단의 비극이 ‘일어나지 말았으면’이 아니라 미리 일어나기를 바랄 수도 있다는 것에서 그의 현실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는 태평양 전쟁의 비극을 고스란히 감당한 식민지를 나라로 둔 사람이라는 작품 외적인 면까지 고려하면 전쟁을 쉽게 입에 올린 실수는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되 버리기도 한다.

  현실에 무책임에 보이는 그의 이런 태도는 삶이 정치와 무관하다는 의식이 작용한 탓이라고 본다. 정치가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믿는 태도는 순진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딸이 장성하여 집을 떠나자 딸에게 어릴 때 사 준 인형을 목욕시키며 딸처럼 대할 정도로 아이 같은 순진함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순진함은 전쟁의 비극성에 눈감은 데서 드러나듯 대체로 정치적 무책임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인연>이란 작품의 치명적인 약점은 상대 여성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짝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미화한 데 있다. 고작 세 번의 만남에다 악수도 나누지 않고 어색하게 이별했다고 하면서도, 작가는 결혼까지 진전할 수도 있었던 애틋한 사랑이라 말하고 있고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가르쳐 왔다. 이만한 작품이 교과서에 단골로 올라 그에게 대표적인 수필문학가라는 위상을 부여해 준데는 씁쓸한 마음이 인다.

  권정생과 피천득 두 사람의 문학에서 순수함이나 천진함이란 낱말을 떠올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정생의 순백함은 강아지똥처럼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오물덩이처럼 뒹굴며 피워 낸 민들레 꽃인 반면 피천득의 그것은 혼탁한 현실의 접근을 처음부터 배제한 바탕 위에 가능한 것이어서 격이 서로 다르다. 현실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태도는 대체로 안정된 물적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피천득 문학의 여유와 너그러움, 담백한 풍취가 과연 그가 궁핍한 처지였어도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피천득이 세상을 떠나자 언론들은 국민 수필가가 부음했다고 앞 다투어 소식을 전했다. 국민이라는 낱말이 국정교과서 편수자들의 선호를 받아 교과서에 붙박이로 자리를 차지한 작가가 아니라,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만인의 사랑을 받은 작가에게 붙일 수 있다면 정작 그 호칭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고 본다.

  <<몽실 언니>>의 작가는 생전에 이웃의 가난한 할머니들이 그 소설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변한 작가를 통해 해갈되지 못한 독서 욕구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었다. 독서 시장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는 서민 노인들까지도 독자로 둔 이는 <<몽실 언니>> 작가 외에는 찾기 힘들 것이다.(*)



  -인터넷 신문 대자보 2007. 6. 15.

And
종강할 때까지 블로그질 안 할 생각이었는데 기록해 두고 싶은 일이 있어서 슥슥.

친한 동기놈 및 후배놈 하나랑 어제 술을 마시러 갔었다. 졸업한 선배 및 동기들에 대한 추억, 이번 학기 여러 모로 망가져 있던 나에 대한 충고, 내년 임원을 누구 뽑을지, 마음에 안 드는 선배 및 만학도에 대한 뒷담화 등이 오가다가... 화제가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으로 옮겨 갔다.


나:나 같은 경우에는 입장이 되게 미묘해. 내가 쓰는 소설은 명백히 순수 문학이라고 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판타지도 아니란 말야. 일종의 경계 지대에 있지. 순수 문학? 물론 먹고 살기 힘들지, 하지만 그들은 하다 못해 가시밭길을 간다는 명예와 사람들의 찬사라도 받을 수 있지, 하지만 나나 나와 비슷한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그렇지도 못해. 문단에서는 정통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까이고, 기존 장르 팬들에게는 고루하고 보수적이라고 까인다고. 나 학교에서는 교수님들에게 독창적이지만 기본이 부족하다는 이야기 자주 듣지? 하지만 서울 쪽에 친하게 지내는 형들이 몇 명 있는데, 그 형들은 라이트 노벨 쓰거든? 난 그 형들한테는 순문학하는 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는 소리 듣는다고, 망할.

후배:형, 형 말도 이해가 가긴 하는데, 그거 피해 의식 아니에요? 솔직히 나도 순수 쪽이고, 시 전공이니 형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교류를 거부하고 있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로 보여요.

나:피해 의식이 어느 정도는 깔려 있어, 나도 인정해. 하지만 너무 속터진다고. 이영도나 듀나 같은 작가들은 10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계속 새로운 작품을 내놓고 있고, '우리들'의 내부 기준에서 보자면 명백히 진화하고 있단 말야. 하지만 문단은 그들에게 '참신하고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갖고 있다고는 평할 망정 장르 소설들도 고유한 법칙과 논리가 있고, 또한 그것들이 나름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외면한단 말이다. 다만 '참신하고 재기발랄하다'라는 평가 하나만을 내리고서는 그 이후의 보다 진보된 작품들에 대해서도 계속 그 이미지만을 덧씌우고 있을 뿐이지.

후배:장르 문학이 홀대 당한다는 건 일리가 있어요. 형 말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고. 그래도 불구하고, 교류하고자 하는 노력- 한발 더 나아가 스스로의 저변을 넓히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건 장르 문학 쪽도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봐요. 물론 원인을 제공한 건 기성 문단의 권위적인 태도일지 몰라도,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문을 닫고 있는 건 똑같아 보여요.


자리가 파한 뒤, 기숙사로 올라오며 여러 생각을 했다. 후배놈의 말도 확실히 일리가 있긴 하다. 대체로 장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반권위적인 경향이 있는 편이고, 어떤 이들은 평론가 따위 전부 잉여 쓰레기 취급하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물론 순문학을 하는 작가들에게서도 나타나긴 한다. 훗날 공개된, 유명한 작가들의 일기나 편지를 보면 '평론가 XX가 감히 내 소설을 깠다, 나중에 나 잘 나갈 때 두고보자' '자신은 소설 한 줄도 못 쓰는 주제에 남 씹는 걸로만 연명하는 개객기' 등등으로 적어 놓은 게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순문학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체계화된 이론적 기반 위에서 평론가의 권위가 확고히 자리 잡아 왔으며, '평론가를 싫어하는 작가'들도 명료한 기준을 통해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판단할 수 있는 일정한 권위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보자면, 장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권위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며, 장르의 형식에 특화된 비평 이론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경향이 있다. 그들은 대개 '예술성 따지는 건 순문학에서나 하라고 해, 우리는 독자에게 재미를 주는 걸로 만족한다능'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술성과 오락성은 서로 배치되는 가치가 아니다.

후배와의 대화에서도 한 이야기지만, 나 자신을 포함해 장르 문학(그리고 거기에 큰 교집합 부분이 있는 '경계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순문학에 대해 필요 이상의 피해 의식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나도 대학에 와 문예창작을 전공하면서 비로소 느낀 것이지만, 일선의 교수님들은 장르 문학을 생각보다 '하급하게' 취급하지는 않는다-물론 하이틴 로맨스나 이고깽물, 게임 판타지 같은 건 아예 논외다-. 다만 장르 문학을 읽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전공인 순문학을 연구하는 걸 우선시 하며, 장르 문학 고유의 코드나 기반에 깔린 정서를 잘 이해하기 힘들어할 뿐이다.

그 후배는 '순문학도, 장르 문학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폐적인 세계에 갖혀 있다'고 지적했다. 아마도 그 분석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웹진 거울 쪽에서도 여러 차례 이야기가 나왔다시피, 장르 문학도 스스로의 기반을 확장시키고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하기 위해서는 고유한 문학 이론을 정립하고 그를 체계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내부적으로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가름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고, 잘 팔린다고 해서 그것이 독자와 소통이 된다는 증거인지에 대해 토론이 오가고,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문학상도 제정하고(이건 소규모로 하고 있긴 하지만... 너무 불안정하다, 역시 큼직한 재단 같은 게 필요해OTL).

'순수 문학'에도 '장르 문학'에도 속하지 못하는 나와 같은 입장, '경계 문학'을 하는 입장에 있다는 건- 관점을 바꿔보면 양쪽 모두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강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들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일상의 공포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기형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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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큰 행사 하나를 마치고, 애들과 술을 마셨다. 헤어진 뒤 홀로 기숙사로 올라오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지난 여름 생겼던 그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번민하게 만들고 있다. 어떻게든 견딜 수 있으라리고 여겼지만 역시 좀 무리였던 모양이고, 이번 학기는 벌써 절반 이상이 지나가 버렸다.


솔직해지자. 지금도... 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벌써 몇 달이나 시달림 받아 온 지금도 여전히 견디기 힘든가?


답은, '아니오'였다.

인정한다. 아직도 아프다. 하지만,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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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도 어김없이 거울 대표 중단편선 출간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2009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은 21분이 참여한 22편의 작품이 수록되었습니다. 총 60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 속에서 지난 한 해 거울이 이룬 성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외에도 거울이 지난 2년간 준비해 온 새로운 소재별 앤솔러지 [타로카드 22제]도 함께 만나실 수 있습니다.

22명의 거울 필진이 각기 메이저 아르카나 타로 이미지를 가지고 작품을 썼습니다. 총 22편 중 20편이 미공개 신작으로, 모두 [타로카드 22제]를 위해 준비한 글입니다.

예약 판매 기간 동안 구입하시는 분들은 각 권 1,000원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이번 예약 판매 기간 (10월 24~12월 15일)에는 거울 우송비를 3,000원에서 2,000원으로 낮춥니다.

거울의 신화, 거울을 이끄는 힘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2009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소설로 다시 태어난 예언과 환상의 타로카드
[타로카드 22제]


거울 종이책 게시판에서 예약 받습니다.

http://mirror.pe.kr/zboard/zboard.php?id=books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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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 카드 22제>에는, 오랫동안 힘겹게 써 내려 간 내 글이 들어가 있다.

어디 가서 자랑하거나 할 일은 아니긴 하다. 정식 등단도 아니고, 출판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니. 하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읽히는 첫 글이 되는 셈이니 내게는 결코 작지 않은 의미가 될 것이다. 아무래도 좀 부끄럽기도 해서... 그냥 편집장 누님에게 닉네임으로 올려달라고 할까 하다가 본명으로 올리기로 마음 먹었다.

비록 아픈 상태지만 좋은 소식이다. 드디어, 책이 나왔다. 일단 내 것 하나랑... 교수님들께 드릴 것까지 해서 3권은 사야지. 거울 주문확인 게시판에 익숙한 이름(이나 닉)들이 보여서... 졸업한 동기들이나 마지막으로 본지 1년이 넘은 고등학교 동창들에게까지 연락해 광고한 보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좀 뿌듯하다(....)

+

맛뵈기용 본문 인용 몇 개:


  <...시작의 날, 신은 빛이 있으라는 선언을 통해 밝음과 어둠을 나누었다. 만유의 혼돈으로 가득하던 빈 공간 속에서 로고스와 질서가 태어났고, 신은 새로이 태어난 이 세계에 무한한 사랑과 영광에 찬 그 존재를 투영했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신이 발하는 장엄한 광휘의 파편이며, 인간은 믿음과 경배로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켜 신에게 돌아간다. 그것은 거룩한 유일자로의 회귀인 동시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 영지(靈知)를 잃어버린 인간이 신의 영광을 어둡고 혼탁한 세상에서 재발견하는 행위다. 신의 영광은 오로지 겸허한 믿음으로만 이 땅에 현현한다. 갈망에 의해서가 아니다...>


  <...시간은 느리게,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지금보다 훨씬 더 긴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내가 바라보는 이 세상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바뀔 것이고, 내가 화폭 위에 펼쳐낸 모습들도 빛이 바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내게 결코 변치 않을 영원을 그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언젠가 죽을 그 날까지 이 세상에 속한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한히 불변할 저 별빛들 사이의 공간을 그 유한한 꿈들로 덧칠하는 일일 것이다. 누가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가?...>


  <...말라디앙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끝도 없이 펼쳐진 광대무변의 푸름은 영원할 것처럼 뻗어나가, 종국에 이르러서는 결국 하늘도 바다도 아니게 된다. 이렇게 바다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말라디앙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소실되는 그 마지막 한 점이 신이 머무는 곳- 살아 있는 인간의 몸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을 낙원으로 향하는 문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밑으로는 하루에 십만 번을 울어 스스로를 증명하는 파도들이 하얗게 포말로 부서져 가고, 갈매기들이 그 끄트머리를 차고 날며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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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요즘 아픈 상태라서 일리단이라고 쓸 뻔 했다). ...이틀 늦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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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어스시 전집이 드디어 6권 『또 다른 바람』이 출간되며 완간되었습니다. 어스시 전집을 처음 접하게 된 한국 독자에게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A : 어스시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시작한 게드의 이야기가 그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적들과 함께 오랜 세월을 거쳐 드디어 마지막 여섯 번째 권 『또 다른 바람』에 이르렀습니다. 어스시 이야기 여섯 권은 제가 30년이 넘게 쓴 책입니다. 모두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Q : 어스시 전집은 다른 판타지 소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의 소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왕자』처럼 읽을 때마다 작품에 녹아든 저자의 생각을 새삼 이해하고 감탄하곤 합니다. 어스시 전집을 처음 집필하게 된 동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A : 어스시 이야기의 첫째 권을 쓸 때 맨 처음 떠올린 생각은 ‘위대한 마법사가 어린 소년이었을 적의 이야기를 써보자’ 하는 것이었어요. 당시(1968년)에는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쓰지 않았거든요. 그 시절의 마법사는 하나같이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지요. 전 이렇게 자문해 보았어요. ‘그 사람들은 어떤 수업을 거쳐 마법사가 되었을까? 마법사 학교라도 다녔을까?’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어떤 책을 써야 할지 알겠더군요. 사실 여러 권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첫째 권을 다 쓰고 보니 자꾸만 생각이 나더군요. 어스시의 수많은 섬들, 카르그 4대도…… ‘그곳에는 누가 살았을까? 어스시의 어느 여인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지요. 그래서 둘째 권인 『아투안의 무덤』을 썼고…… 이야기가 자라나면서 한 권 또 한 권 쓰게 되었어요. (셋째 권*(『머나먼 바닷가』)*과 넷째 권*(『테하누』)*을 쓰는 사이에 제 인생은 17년이나 흘러가 버렸더군요……. 하지만 어스시의 시간은 조금도 흐르지 않았어요! 어때요, 이거야 말로 진짜 마법 아닌가요?)

Q : 어스시 전집에서 게드는 아주 특별한 인물이죠. 게드라는 캐릭터를 창조할 때 특별히 신경쓴 부분이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A : 첫째 권을 쓰기 시작할 당시에는 게드에 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어요. 강한 힘을 지녔으나 무지하고 완고한, 그래서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지요.
게드가 나이를 먹을수록 그의 의지는 더욱 강고해졌고, 저는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어스시 이야기가 어떻게 풀릴지 아는 사람은 바로 게드였거든요. (저는 몰랐는데 말이에요!)

Q : 그렇다면 어스시 전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이 이다면요? 역시 게드인가요?

A : 그럼요, 게드가 가장 마음에 들지요. 하지만 어스시에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게드 말고도 여럿 있답니다. 테나는 제가 무척이나 아끼는 사람이에요. 여섯째 권 『또 다른 바람』에 나오는 세세락 공주는 제게 놀라움이자 기쁨이었어요. 제 말을 안 듣는 점이 게드 하고 똑같았거든요! 하지만 공주 덕분에 웃기도 했어요. (제 손녀들 중 한 명하고 조금 닮았어요.)



Q : ‘어스시(Earthsea)'라는 이름은 그 말 그대로 대지와 바다라는 뜻인데요, 만들 때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고 만든 것인지요?

A : 그저 드넓은 바다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을 가리키기에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땅 조각들이라는 뜻으로 말이지요.

Q : 게드의 스승인 오지언이 다른 마법사들처럼 비구름을 마법으로 쫓지 않고 그냥 맞고 있는 걸 한심해 하는 어린 게드의 모습을 보면 노자의 무위자연이 떠오르는데요, 다른 책에서도 가끔 동양 사상에 대해 선생님의 관심이 드러나곤 합니다. 동양 사상이 실제로 어스시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인가요?

A : 제 작품은 모두 노자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들이에요. 노자의 사상과 정신은 제가 소녀였을 적부터 저의 길잡이였지요.
『도덕경(道德經)』을 영어로 옮겨 발표한 적도 있어요. (그 책은 머지않아 미국의 샴발라 프레스 출판사에서 다시 출판할 예정이에요.) 중국어를 하지는 못하지만 단어 대 단어로 직역을 하는 등 여러 번역 방식을 동원했고, 고대 중국 문헌을 읽을 수 있는 학자이자 시인인 지인과 힘을 모아 작업했어요.

Q : 어스시 전집은 여러 차례 영상화가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작자의 작품이 영상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건 작가에게 꽤 독특한 경험일 거 같아요. 최근 할리우드가 SF나 판타지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영상화를 시도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데요, 이런 현상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혹시 들을 수 있을까요? 또한 긍정적이라면 개인 작품 중 영상화된 걸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작품이 있는지요?

A : 아쉽게도 할리우드와 일본에서 ‘어스시’라는 이름으로 만든 영화들은 책에 담긴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고, 등장인물의 성격까지 바꿨어요. 게다가 영화에 나오는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폭력은 경악스럽고 화가 날 정도이더군요.
저는 영화를 하나의 매체로서 무척 좋아하고, 영화 극본도 두 편 써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영화 제작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배신당하고 보니 앞으로는 제 글을 영화로 만들도록 허락할 때 아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Q : 『테하누』가 1990년에 출판되고 11년만에 단편집인 『어스시의 이야기들』과 『또 다른 바람』이 출간되었습니다. 제목으로 추측해 보건데 『테하누』를 쓸 당시만 해도 원래 『또 다른 바람』은 계획에 없던 작품 같은데요, 『또 다른 바람』을 구상하게 된 계기나 동기를 알고 싶어요. 

A :  전에는 『테하누』가 어스시 이야기의 마지막 책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틀렸더군요! 몇 해가 지나고 나서 어스시의 여러 섬과 사람들이 또다시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야기를 어떻게 계속해야 할지 깨닫게 되었지요. 못 다한 시작(『어스시의 이야기』)과 진정한 끝(『또 다른 바람』)을 함께 찾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Q : 오랜 세월 어스시 전집을 완성하면서 작품의 세계관이나 주제 면에서 작가 본인이 생각하기에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는지, 그렇다면 그것이 어떤 점인지, 그것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A : 어스시 전집 여섯 권에서 어스시는 모두 똑같은 세계예요. 오직 등장인물들만이 성장하고, 살아가고, 더 많이 배워가지요……. 어느 영국 시인이 말했듯이, 그들은 “슬픔을 알아가면서 현명해지는” 거예요.
하지만 어스시 이야기의 마지막 책은 기쁨을 주었어요. 저한테는요.

Q :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과는 그동안 인터뷰나 팬레터를 통해 몇 차례 교감을 나눈 적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인터뷰가 가장 최신 인터뷰가 될 테니, 한국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근황과 집필 중인 작품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 새 책 『라비니아』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쓴 걸작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읽다가 쓰기로 마음먹었어요. 주인공 라비니아는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인물로서, 영웅 아이네이아스와 결혼할 운명을 타고난 젊은 왕녀이지요. 『아이네이스』에는 라비니아가 한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어요. 『아이네이스』의 이야기를 ‘그녀 자신’이 본 대로 얘기해 준 거예요. 그래서 저는 자리에 앉아 그녀한테 들은 얘기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로 즐거운 경험이었지요.
저는 오는 10월에 여든 살 생일을 맞게 되었어요. 갈수록 조금씩 게을러지는 기분이 들어요. 소설은 안 쓰고 시만 쓰는 것 같거든요. 하지만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법! 노자는 이렇게 말했지요.

“조금만 갖고,
적게 원하라.
규칙을 잊어라.
근심을 버려라.”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도는 늘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바가 없다.”

친애하는 한국 독자 여러분, 부디 규칙을 잊고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은 이루어질 테니까요.


- 어슐러 K. 르귄


어슐러 K. 르귄은,

1929년 10월 21일, 미국 버클리에서 인류학자 알프레드 크로버와 작가 디어도어 크로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1살에 그녀 최초의 소설을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지에 제출했다. (그 소설은 거절 당했다.) 후일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남편이 될 역사학자 찰스 르 귄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1953년 결혼해 엘리자베스, 캐롤라인, 디어도어 세 아이를 낳았다.

그녀의 가장 이른 작품들은 <오시니아의 이야기>와 <말라프레나> 등에서 다시 보게 되듯 가상의 나라를 배경으로 하기는 하나 판타지가 아니었다. 관심사를 살려 출판할 방법을 찾던 르귄은 과학소설에 대한 관심을 돌이켰고, 1960년대 초반부터 정기적으로 출판을 하기 시작했다. 르귄은 1969년에 출간한 유명한 과학소설 <어둠의 왼손>으로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수상하였다. 최초로 그녀의 책이 출판된 1960년부터, 그녀는 최고의 과학소설과 판타지 문학 작가로 주목받았으며, 훌륭한 문체와 도교, 무정부주의, 여성주의, 정신적이거나 사회적인 테마에 대해 주목받게 된다.

미국과 영국에서 백만 부 이상 판매되고 16개국에 번역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더불어 세계 3대 판타지 소설로 꼽힌다. 르귄의 저작은 판타지와 SF가 중심이지만 그 외에도 에세이, 어린이를 위한 책, 비평, 시 등 백여 편이 넘는 작품을 통해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거론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휴고상', '네뷸러상'을 십여 차례, 그 외에도 '세계 환상문학상', '카프카상', '필그림상' 등을 수상했으며 세계 과학소설 연맹에서 수여하는 '간달프상' (1979년), 과학소설과 판타지 소설에 기여가 큰 작가에게 수여하는 '그랜드 마스터 상' (2003)을 수상하기도 했다.


* 번역: 장성주

* 도덕경 원문 참조

조금만 갖고 적게 원하라 -> 소사과욕(少私寡慾), 『도덕경』 제19장
규칙을 잊어라, 근심을 버려라 -> 절학무우(絶學無憂), 『도덕경』 제20장
도는 늘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바가 없다 -> 도상무위이무불위(道常無爲而無不爲), 『도덕경』 제 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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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의 집필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새롭게 어스시의 세계에 입성한 독자에게 쾌활한 환영 인사를 날리는 부분, '부디 규칙을 잊고 평안하시기를' 바라시는 부분이 감동적이네요. 인터뷰 기사는 황금가지 출판사 측에서 제공해주셨습니다. (하루 늦었지만) 르 귄 여사의 여든 번째 생신, 축하합니다!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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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송가

귀를 기울여라, 현자의 노래가 쏟아지도다
하늘의 비, 하늘의 눈물처럼
지나간 세월, 쌓이는 전설을 씻어 버리고
드래곤의 옛 이야기를 정화하도다
기억도 말도 닿지 않는 먼 옛날의
이 세상의 첫 번째 석양에
세 개의 달이 숲 가장자리에서 떠오르도다
홀연히 무시무시한 용의 무리
크린의 이 세계에 쳐들어오도다.

그러나 용의 어둠, 그 속으로부터
떠오르는 검은 달의 광막한 표면에
빛을 구하는 우리들의 외침 속으로부터
파묻혀 있는 빛이 소라므니아에서 불타 오르도다
진리와 힘을 갖춘 기사
신들까지도 불러내리고
강한 드래곤 랜스를 날카롭게 하도다
꿰뚫는 것은
용정이므로, 우리들 모두 달아나고
크린의 물가에 찬란하게 빛나도다.

소라므니아의 기사이며
빛의 기수인 최고의 창 장수 휴마
빛을 따라서 카르키스트 연봉의 산기슭으로
신들의 돌의 옷자락으로
그 신전의, 깃들여 있는 정적의 슬하로
창의 장인으로 불리우고
지상의 악까지도 물리치는
지상의 힘을 수여 받도다.
잔뜩 도사리고 있는 암흑을
용의 목구멍으로 되밀어 보내려고 하도다.

위대한 선신 파라다인
휴마 옆에 있으면서 빛을 발하고
그 강한 오른손의 창에 힘을 내려 주도다
천의 달빛을 받은 휴마
암흑의 여왕을 몰아내고
부하의 포효하는 대군을 몰아내도다
처음에 나왔던 혼돈의 왕국으로
그곳이야말로 죽음의 나라
저주도 무를 물려받아서, 무로 돌아가도다
밝아오는 지상의 아득한 아래쪽으로

이리하여, 우뢰 소리 울리고
꿈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열려진 것은 힘의 시대로다
동쪽에 일어난 것은 빛과 진리의 왕국, 이스탈.
백색과 금색의 첨탑은
태양과 그 영광을 향하여 우뚝 솟고
악의 소멸을 선언하도다
선(善)의 긴 여름을 키우는 이스탈은
유성처럼 찬란히 빛나도다
정의의 하얀 하늘에서.

그러나 햇빛 가득 찬 그 속에서
이스탈의 신관왕, 그림자를 보도다
야음에 나무숲은 단검을 가릴 수 있을까
침묵의 달 아래의 흐름은 검게 탁해지는가
신관왕은 글로 묻도다
두루마리, 증표, 주문의 서(書)에
휴마의 길은 어떤 것인가 하고.
가능한 일이라면, 신들에게 재림을 청하고
성스러운 뜻에 도움을 빌고
죄많은 세상을 정화하려고 하도다.

신들이 등을 돌리게 되면
이 세상에 어둠과 죽음의 시간이 찾아오도다
불의 산은 혜성처럼 이스탈을 쓰러뜨리고
도시는 불꽃에 태운 해골처럼 갈라지고
산은 비옥한 골짜기로부터 쪼개지고
바다는 산의 묘소로 흘러 들고
사막은 내버려진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도다
크린의 대로는 산산조각이 나고
사자의 좁고 험한 길로 변하도다.

이리하여 절망의 시대가 시작되도다
길은 난마처럼 뒤엉키고
성터에 사는 것은 바람, 모래 폭풍
우리들은 산과 평원에 거처를 구하도다
옛날 신들은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들의 호소는 텅 빈 하늘
차갑게 가르는 박명에
새로운 신들의 귀에 들리기나 하겠는가
하늘은 고요하게 침묵하며 움직이지 않도다
대답은 더 오래 기다려야 하리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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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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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 새벽으로부터 1년.

병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 분이 사시던 집으로 향했다. 푸른 대문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 대 피우고는 발길을 돌렸다. 나란히 걸었던 길을 홀로 걸어서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난 더 이상, 저 대문 너머에는 그 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주 조금, 울었으면 싶었다.


저 멀리서 천천히 겨울이 굴러오는 소리가 들린다. 기형도의 시들을 읽을 때다.
 
And
  앙트완 드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는 무척 아름다운 우화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오직 순수함과 명료함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러나, 난 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매함과 탐욕스러움으로 요약되는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나름의 인정할 만한 비판이나 사막의 황량한 아름다움에 대한 뭉클한 묘사들을 걷어내고 이 우화의 본질을 간략히 요약해 보면, ‘길들여짐’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될 수 있다. 왕자와 여우가 점차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과정은 분명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반대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식의 ‘길들여짐’을 거치지 않은 상대는 어떻게 되건 자신과는 완벽하게 아무 상관도 없는 타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후반에 왕자는 정원에 핀 장미꽃들에게 ‘너희와 나는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내게 있어서는 텅 빈 존재일 뿐이다’라고 선언한다. 어쩌면 그 장미꽃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나마 어떻게든, 또 다른 타자들과 서로 길들여지는 과정을 거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자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는다. 나는 왕자의 이 선언이, ‘내 가족들과 친구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어찌되건 알 바 아니다’라는 말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왕자가 철새들의 운행을 따라 별들 사이를 지나칠 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어느 별 근처를 지나갔다고 가정하자. 왕자는 선량하니까 물론 그 전쟁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의 존재를 슬퍼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별에 내려서 고통에 신음하는 이에게 사소한 도움이라도 베푸는 법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 별의 사람들과 왕자는 서로 ‘모르는 사이’이며 어떠한 종류의 ‘길들여짐’ 과정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밀을 먹지 않기에 밀밭에는 관심이 없는 여우처럼. 이 이야기에서 표현되는 ‘길들여짐’은 어디까지나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관계에만 머물 뿐 ‘대의와 이상을 위한 타자들 간의 연대’라는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나는 이 ‘길들여짐’이라는 것 안에 일상의 무감각함과 무관심함 속에 매몰된 채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지혜는 대단히 편협하고 이기적인 것이기도 하다.

  나는 어른이며, 결코 왕자처럼 순수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어른에게는 어른 나름대로 관철해야만 하는 신념과 부단히 우러러야 할 이상이 있다. 그것은 ‘고난’이라는 한 단어로 쉽사리 요약될 수 없는 모순과 번민으로 가득 찬 힘겨운 것이며, 중간에 지치고 좌절한 나머지 결국 포기하고는 ‘남들이 다들 사는 대로’ 살게 될 가능성도 높다. 나 역시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토록 간절하게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도 분명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며, 또한 그것은 ‘어린’ 채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성격의 가치다. 그리고 어른인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왕자는 너무나도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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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까지 읽은 감상은 본격_자기자랑하는_이야기.hwp

일단 과제 때문에 읽고는 있지만 역시 자서전 같은 글은 통 좋아지지가 않는다. 슈ㅣ발 오글거려;;;;

게다가 난 독립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인디언 부족들을 분열시킨 일 때문에 도저히 프랭클린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인디언들에 대해 갖고 있는 판타지-스스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쯧. 그는 완벽하게 미국적인 영웅이며,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공은 공이고 과는 과이며, 그의 공과는 서로 상쇄되지 않는 성격의 것이다.
And

합평 도중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미화하려고 하는 걸로 보인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무책임함이야말로 현대의 가장 큰 악덕이라고 보며, 애초에 이번 작품을 쓰게 된 동기 자체도 '모든 죄와 책임이 지워지는 곳'이야말로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지옥'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 의식을 작중에서 직접 드러내는 건 결코 좋은 선택이 되지 못하며, 차라리 그러한 본의를 숨기고는 정 반대 방향에서 접근해서 일종의 반어법으로 표현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

애초에 진정한 창작 의도를 숨기고자 했고, 그게 먹혔다는 면에 있어서는 성공한 글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가 그걸 캐치하지 못한 직접적인 이유는, 탐미적인 문장과 찌질하고 마초적인 주인공이라는 부조화 때문이었다. 그런 문장으로 씌어져야 했던 이유의 절반은 반어법이었기 때문이고, 나머지 절반은 나 자신이 글의 성격에 따라서 문체를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의도를 숨기고자 했던 의도'는 제대로 먹혔지만...  글을 읽고 난 뒤 독자가 스스로 '언덕'의 진정한 의미에 이르게끔 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애초에 그러한 방식을 채택했던 이유 중 하나가 내 문장력의 미숙함 때문이었다는 점 두 가지로 인해 미묘한 느낌이 든다. 작가의 변 시간에는 생각이 잘 정리가 되질 않아서... 대단히 미묘한 평이라는 이야기만 했을 뿐, 그걸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평이 끝나고, '작은 이야기로도 큰 통찰을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작은 이야기를 써 보라'는 권유를 들었다. 스스로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던 문제이며, 겹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다른 쪽 합평 자리에서도 같은 권유를 들었다. 그리고 두 모임의 참가자들 대부분이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꾸준히 읽고 써온 사람들이다. 그것은 분명 올바른 충고일 것이다.

하지만, 모르겠다. '작은 이야기'를 쓴다는 건 어떠한 것인지. 그것은 내게 있어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좋은 친구를 만나고,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의 소소한 기쁨들을 알아야만 가능한 종류의 것일 듯 하다.

<논어>의 위정편 첫 구절에는 그런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마음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기쁨이고 외부의 사물에 대해 느끼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기쁨은 주로 '자기 만족'이나 깨달음'에서 오고 즐거움은 '감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자기 만족이나 깨달음의 순간은 여러 번 있었다. 그 때마다 난 조금씩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내게 찾아오는 것은 '이해'였지 '기쁨'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단 한 번도.


.........

난, '기쁨'을 알지 못한다.

And


*인물과 서술이 일치하지 않음. 인물은 3류 깽깽이 인생인데 그의 고뇌를 보면 고매한 예술가가 젊은 시절 돈을 위해 작품을 팔아본 경험에서 느끼는 듯한 종류의 고뇌. 주인공이 자신의 죄와 삶을 미화하고 있다는 느낌. 이런 식으로 ‘속죄’가 주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물의 시각을 따라 가는 것치고는 대단히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묘사와 동물적이고 끈끈한 묘사가 같이 나오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

  *고양이에게 욕설을 퍼붓는 장면에서 대사가 부자연스러움.

  *인물의 시선과 작가의 시선 간의 불일치가 지적됨. 공감되기도 힘들고 주인공의 죄책감에 대해서도 잘 이입되지 않는다. 딱히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읽기 거북했다.

  *읽으며 불편했음. 남성적이고 성욕을 부각하는 묘사가 중간에서 튄다. 화자의 말이나 묘사가 그렇게 튀는 게 거슬리며 내용도 불편.

  *과거 회상이 대사로만 나온다. 중요한 정보는 가리면서도 최소한의 서술은 함께 해주어야 한다. 이 부분을 보강해야 할 듯

  *인물이 상당히 찌질한데도 폼도 잡고, 의외로 찌질한 행동을 잘 안 한다. 입체적이라기 보다는 분리된 두 인물의 면모를 억지로 묶어 놓은 듯.

  *주인공이 시달리는 ‘현실’이 현실감이 부족하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현실을 옮겨 놓은 듯해 보인다. 주인공이 속해 있는 현실과 안개 끼는 언덕이라는 패러다이스의 대비가 극대화되기 위해선 그야말로 현시창이어야만 하는데 두 공간의 층위 차이가 적다.

  *일상적인 대사, 흔히 하는 말들, 그러한 리얼리티의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작가가 더 치밀해야 했다.

  *평범하게 서술하고 끝내 버린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작가가 왜 이런 설정을 했는지에 대해 공감을 하기 힘들다. 독자는 내부에 이입이 되기보다는 관찰하는 입장이 된다. 독자가 주인공에게 이입하기 힘든 이유는, 그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고 서술에 있어 대단히 피상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작가가 중점적으로 하려고 했던 묘사는 대단히 탐미적인데도 전체적으로 보자면 형상화가 잘 되어 있지 않다.

  *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게 좀 더 찌질하게 보여줘야 했다. 인물이 자기 연민에 빠져 버둥거린다면 괜찮았는데 서술이 그렇지 못하다. 서술이 힘을 받으려면 폭력 장면을 리얼하게 묘사해야 했다.

  *죽음에 대해 탐미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안개 너머에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거나. 묘사도 그런 쪽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런 면 때문인 듯. 죽음을 보다 더 탐미적으로 접근했다면 어땠을까.

  *옛 친구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그냥 잠시 멍하다가 끝나 버린다. 힘을 줘야 하는 부분에서 주지 않았다.

  *감정의 클라이막스가 없음. 인물들의 심리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성과 폭력에 좀 더 어우러져 있어야 할 듯. 내용상으로는 성과 폭력이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작중에서 그것이 잘 얽혀 있지 않다.

  *주인공이 다시 술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설득력이 부족. 주인공과 술집 여자가 자고 난 뒤 갈등 장면에서의 리얼리티가 부족하다. 아무리 악에 받친 여자라도 일단 몸싸움은 최후까지 피하는 법인데. 특히 담배빵 장면.

  *주인공이 예전에 행했던 폭력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 그런 게 아닐까? 잘 설득은 되어 있지 않지만. 뜬금 없다.

  *주인공이 계속 내몰린다는 걸 표현하기 위한 장치인 듯.

  *실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를 잘 이해해야만 그걸 소설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쪽에서 작가의 노력이 필요.

  *주인공이 전혀 자살을 생각한 적 없다는 면에서 감명 받았다. 님 좀 개새낀 듯. 죄책감도 느끼고 어설픈 속죄도 하지만 본격적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면모는 잘 드러난 듯.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지는 알겠는데, 그 작품이 그 모티브를 잘 살렸다고 해서 그에 영향을 얻은 자신의 작품도 모티브를 잘 살릴 수 있다는 법은 없다. 상징과 사유가 많은 글일 수록 과연 이것이 소설적으로 잘 형상화가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치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후대의 글은 계속 선대의 글을 배우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데 70년대 글의 냄새가 난다 킁킁.

  *현실에서 유리된 공간을 상정하려고 했다면 불명확한 존재에 대한 공포나 경외가 보다 더 잘 나타나야만 했다.

  *모든 게 지워질 수 있는 장소라는 걸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선 주인공의 죄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강렬해야만 한다.

  *작가와 비슷한 나이 대의 인물을 등장시켜 그 나이 대에 할 만한 고민, 할 만한 고뇌를 이야기해 보는 시도가 어떨까?


 

And

애초부터 각 잡고 까려는 목적으로 쓴 풍자 소설이나 그런 게 아니라도, 하다 못해 주변 인물들 대사나 TV 광고 등 짧게 지나가는 소도구를 통해서라도 2메가 정부를 까는 부분은 내 소설에서 꼭 들어간다(...) ....아니 딱히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써놓고 보면 그런 부분이 꼭 있다=.=

2메가를 까는 게 이젠 본능으로 승화된 것인가! 그랬쿠나, 무서운 쿠믈 쿠었....

...꽥ㅇ<-<

And

*인물 묘사나 사건 진행이 김기덕 영화 같은 느낌. 좀 불편하긴 했지만 스토리 라인은 마음에 들었음. 음산한 분위기가 여성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 등과 어우러져 미묘한 느낌.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다
  *지금까지의 글들은 중세 유럽이나 2차 세계대전 말의 일본 배경으로 대단히 미려한 문장을 구사해 왔는데 이번 글은 한국 독립 영화 삘이 났음. 개강하면서 교수님들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었다.
  *작가에게 뭔 일 있었나 싶었다. 문장을 대단히 공들였다는 느낌. 뭔가 이전에 자기 영역이 아니던 것을 개척하고자 한 듯한 느낌.
  *이전 작품들과 전체적인 경향성은 일관되게 유지되지만 보다 더 깊이 들어갔다는 느낌. 한국적이다(보통 쓰이는 의미와는 좀 다른 의미로).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두고 남자들이 정말로 이렇게 생각하나 싶었다. 주인공의 심리가 평범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추리 소설이나 스릴러의 이상 성격자를 다룬 느낌. 공감이 잘 되지 않고 그런 일을 저지르는 인형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다소 상투적인 느낌.
  *주인공의 행동에 리얼리티가 부족. 아내와의 갈등이나 부장과의 다툼 등은 그의 ‘일상’으로 이해가 되는데 후반에 나타나는 행동들은 인간성이 지워지고 소설을 위해 움직인다는 느낌. 그런데도 표현력이 좋아서 역시 학교를 다녀야겠구나 싶었다..
  *주인공이 대단히 순수한데, 이를 어쩌나... 싶음.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으면 아예 차단해 버리고 멀리서 지내거나 근처를 지날 경우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능글거리곤 하는데 주인공은 이곳을 찾는다. 무의식적인 죄책감에 의한 게 아닐까 생각해 봤다. 처해 있는 상황에 비해 대단히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느낌.
  *여태 살아 있는 게 신기함(...)
  *주인공이 대단히 마초적이고 편협함.
  *주인 여자의 이전 써빙하던 애에 대한 표현이 이해가 안 됨.
  *관계 묘사나 남자의 시선 처리에 있어서 대단히 마초적.
  *이런 마초성을 갖고 있다가 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눈물을 흘릴 뻔 하는 게 잘 이해가 안됨.
  *자살한 남자에 대해 물어보는 게 작위적인 소설적 장치로 느껴짐.
  *주인 여자와 잔 뒤 주인 여자가 담배로 지지는 장면이 ‘헐퀴!’ 그 뒤 돈을 자기 브래지어에 쑤셔 넣는 장면이 뜨악함.
  *주인 여자가 죽기를 바랬는데...
  *성적인 묘사 부분에서 남자의 심리가 설정과는 달리 첫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계를 마치고 난 뒤 둘의 관계가 이유 없이 지나치게 상호 적대적. 전체적으로 이러한 군상들이 이 ‘안개 끼는 언덕’이라는 장소의 분위기를 강화시키는 소도구로 이용됐다는 느낌.
  *김기덕 영화 등에서 나타나는 ‘한국적 요소’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 실험적으로 시도해 본 느낌.
  *문장은 지금껏 읽어본 중 가장 뛰어나다. 
  *내 소설에서 작가와 비슷한 나이대의 인물들이 나와 그 나이대에 맞는 고민을 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 XX님 소설은 정말 그 나이 대에 걸맞는다는 느낌인데.
  *그건 좀 안 어울리는 듯. 내 소설은 전체적으로 ‘나이가 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의 정서나 구체적인 사상이 드러나는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대체적으로 내 작품은 장르에서 한 발짝 비켜나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 부분을 잘 모르겠다. ‘목소리’의 대사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결말만 약간 다른 느낌이랄까, 좀 헛도는 느낌이 든다.
  *인생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것에 대한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데 앞 쪽과는 너무 색깔이 다르다. 천천히 그라데이션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확 달라지는 느낌.
  *색깔이 다르다기보다는 채도가 다르다는 느낌.
  *죽은 용수가 다른 용수인지 진짜 그 용수인지 애매하다.
  *20년 전 그 여중생을 죽인 이유가 뭘까? 이런 의문이 나온다는 상황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죽이려면 사이코패스여야 하는데 주인공은 사이코패스가 아니지 않은가?
  *주인공이 왜 20년이나 지나서 여기 왔는지가 작품 내에서 제시되어 있지 않다.
  *용수도 주인공과 똑같은 테크를 타서 죽은 게 아닐까? 이 모든 게 죽은 이의 저주라거나 하는 메커니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히 비 장르적인 이 작품에서 이런 장르적 코드를 발견한 게 의외였음.
  *죄를 지어놓고 살아가는데 그걸 묻어두기 힘든 상황. 그런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주인공은 이상심리 맞는 거 같음. 자신의 죄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으니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정상으로 사는 게 매우 무리일텐데.

And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라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정호승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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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인간을 人間이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건은, 수많은 다른 人間 속에서 기쁨과 슬픔, 애정과 분노, 희망과 절망을 두루 겪어가면서,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결코 피할 수 없을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그에 더럽혀짐 없이 보다 더 진보해 가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

테드 창은, 그의 단편 <이해>에서 그렇게 적었다. "...나는 유교의 인(仁) 개념을 머리에 떠올린다. 박애(Benevolence)라는 불충분한 표현으로는 충분히 그 뜻을 전달할 수 없는 이 개념은 인간성의 정수를 이루는 특질이며, 오로지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서만 함양되고, 고립된 개인이 실현할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다..."

한 때, 나는 모든 이들에게 냉담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나의 내면 뿐이었다. 시간이 지났고, 나는 그 때의 자신을 후회하게 되었다. 나는 비로소 인간의 요건을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타인을 이해하고 연민할 수 있다면 눈먼 고슴도치 꼴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 자신도 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실패했다.

지금보다 훨씬 전부터, 나는 결국 이렇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슬픔이나 절망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사실 그러하다, 모든 게 '원래대로' 되었을 뿐이다- 처신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허무하다.

 
And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과 영지주의적 세계관이 같이 나오는데, 영지주의적 세계관과는 엇갈리는 부분이 좀 있다. 영지주의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충돌이 모호함. 후반 악마와의 계약은 파우스트적인 세계관인데 이게 또 앞서의 둘과 충돌을 일으켜서 모호하게 읽힌다.

*주인공이 이 세상에 없는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은 일관되게 이어지고 그를 둘러싼 상황이 바뀌는 형태인데 왜 악마인가...?

*문단을 좀 띄워주었더라면 좋을텐데. 너무 빽빽하다. 동어 반복이 많다. ‘바다 역시도 역시 이 지상에 속해 있기는 마찬가지며, 삼라만상이 모두 그러하듯 무명(無明)의 영역이다.’라는 문장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추구의 플롯이라고 생각했는데 말라디앙이 거기까지 가닿는 과정이 너무 모호하다. 추구의 플롯이라면 그를 향한 과정이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문둥병에 걸린 이후에서야 그 구체성이 잡힌다.

*말라디앙이 문둥병에 걸리는데, 필연적인 게 아니라 고난을 주고자 하는 작위적인 장치로 보인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풀리다가 발병률도 낮은 문둥병에 덜컥 걸리게 되는 게 설득력이 부족함. 지나치게 기능적인 느낌.

*대단히 오랫동안 공들여 쓴 티가 난다. 하지만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다는 느낌. 하나만 떼놓고 보면 아름다운데 전체적으로 삐걱대거나 군더더기 같은 표현이 많다. 말라디앙이 무엇을 추구하며 그를 위해 어떤 역경을 겪는지가 설득력이 부족함. 후반에 병에 걸린 이후에야 그 느낌이 드는데 그 전까지는 희미하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는 평에는 동의하지만 진을 빼는 소설도 필요하다. 아쉬웠던 점은 그 힘의 배분이 잘 안되어 있어 균형감이 부족하다.

*넣고 싶었던 게 대단히 많았다는 기색이 있음. 단편이라면 하나의 구체적인 기둥을 놓고 그걸 집중적으로 타고 가야하는데 곁다리가 너무 많다.

*억지로 철학적이려고 하는 느낌. 말라디앙의 심리를 쫒기 힘들다.

*주인공의 여정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설명을 통해서 세계관을 제시해 보이는 부분 때문에 독자들은 집중도를 유지하기 힘들다. 지루해지기 쉬움.

*버리는 연습이 필요함.

*왜 그림을 그리냐는 부르뮈에의 질문. 말라디앙이 왜 그림을 그리느냐에 대해 충분히 설득력이 부여되어 있지 못하다.

*문장 하나하나에 지나치리만큼 심혈이 배어 있어 리듬감이 부족하다. 여백이 좀 더 있었어야 할 듯.

*그 세계관을 설명조로 드러내는 것은 작가가 그걸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경우가 많다. 좀 더 잘 요리를 했어야 했다.

*세계관들이 충돌하고, 누군가가 그걸 지적한다면 작가는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영원의 세계에 닿기 위해선 악마의 손을 빌어야 한다는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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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중으로 한번 더 고쳐서 보내 드려야 할 듯. 일단 시간선을 과거로 당기고, 에 또....-_-

And
...반상이 곧 우주라면 그 어디엔가는 찍혀 나간 틈이 있을 것이다. 반상이 인생이라면 이 상처는 실금으로 남을 것이다. 세상을 버티는 줄은 하나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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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소설을 쓰면서 느낀 건데 말이지,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충분히 내용 구상하고 플롯을 전부 꼼꼼하게 짜 놔야 될 거 같아.

그런데 난 본작 집필 상태가 아니면 글을 제대로 못 쓰잖아?

난 안될 꺼야, 아마.


...........

아놔 십라OTL
And
나온 평들을 한줄 요약해 보면:"구성 상의 흐름에 따라 2, 3, 5, 7, 10으로 무게 중심을 배분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9, 10, 8, 9, 10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읽어내기가 어렵다."

거울 합평 때 한번 가져가 봐서 2차로 평을 더 들어보고 고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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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해 보이면서도 작가가 지금까지 드러내 보인 일정한 스펙트럼에 속해 있다는 느낌. 상당한 분량인데, 서사의 힘이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다. 10페이지 정도로 줄였다면 어땠을까.

  *어려움.

  *예술가 소설의 일종으로 보인다.

  *의외로 재미있었(....) 하지만 어렵다. 집중하게 할 수 있는 힘이 강해 잘 읽혔다.

  *지금까지의 내 글 중 가장 몰입도가 높았다. 전반적으로 서사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는 느낌. 문장도 술술 잘 읽히고, 여러 모로 완성도가 높은 글.

  *예술가의 집념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고딕적인 색채가 강함. 그런 분위기의 일관성은 잘 이어지고 있지만 주인공의 심리가 그다지 강하게 와닿아 오지 않는다. 부르뮈에에 대한 감정도 다소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말라디앙이 자신의 감정을 다른 인물들에게도, 독자에게도 너무 많이 숨긴다. 중간중간 종교적, 철학적 성찰이 나오는데 그 주체가 불명확함.

  *말라디앙이 나오는 부분은 사건이 좀 더 빨리 진행되었으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만 압축시켰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강한 문장들이 너무 많아 집중도가 덜어진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지가 좀 흐릿함.

  *첫문단부터 부르뮈에에 대한 회상이 나오는데 중반 이후로 그녀의 비중이 사라짐. 둘의 첫만남도 제시되어 있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 등도 나타나 있지 않음. 둘의 감정을 초반에 더 많이 보여줘야 했다. 결과적으로 후반 말라디앙의 감정 변화를 쫒기가 힘들어졌다.

  *말라디앙의 내면- 신앙과, 그녀의 관계에 대한 연결 고리들이 혼돈스럽다. 내면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다 중간중간의 성찰들도 주체가 불확실하다 보니 독자는 더 혼란스럽다.

  *예술가 소설은 예술로 끝나며 모든 걸 종결시키고 확실히 정리를 해주어야 하는데 결과물이 마음을 올리지 못한다.

  *그림을 주제로 하고 있는 소설로써, 문장으로 과연 시각적 매체인 그림을 표현할 수 있는가? 애초부터 주제 자체가 매우 어려운 편.

  *관념적인 사유가 많고 사건들이 소극적이란 느낌.

  *말라디앙이 가지고 있는 신앙심이 잘 드러나 있지 못하다.

  *마지막 그림에 보다 강하게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한방이 필요하다.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은 걸작>, 이외수의 <들개> 참조.

  *왜 예술가는 고통스럽고 처절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작품 자체는 단순해 보이기도 하는데-_- 어려워어려워

  *주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 욕심을 버리고 작고 가벼운 이야기부터 잘 다루는 연습을 해보는 게 어떨까?

  *말라디앙의 심리 변화를 보다 구체적으로.

  *작품의 시대 배경을 몇 백 년 앞으로 당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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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지적은 이 쪽만이 아니라 다른 쪽 모임의 합평이나, 학교에서도 전부터 받아왔다. 그리고 그 지적은 아마도 온당할 것이다. 그런 큰 이야기를 다루기에는 아직 내 작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하기도 하고, 독자 입장에서 아무래도 피곤한 것도 사실이다. 모임의 참가자 한 분이 말했다. "작은 이야기로도 충분히 큰 주제를 담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작은 이야기'를 한다는 건 과연 어떤 것일까. 그걸 알기 힘들다.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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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거울의 올해 단편 앤솔로지에 들어 갈 내 글의 테마. <악마>다.

짤막한 엽편의 형태로 초기 구상에 대해 쓴 건 2006년 가을 강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3년이 지났으며, 난 6개월 째 내 영혼을 깎아내 그 잔재를 불사르는 느낌을 받으면서 고통스럽게 써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난 아직도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완성하고 나면, 내 안에서 무엇이 얼마나 바뀌어 있을까.

잊으려면, 잊을 수 있을까. 그 분을.


ps=참고 작품 몇 가지. <적사병 가면>(에드가 앨런 포), <노란 옷의 왕>, <옐로 사인>, <카르코사의 주민>(로버트 윌리엄 체임버스),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And
...삶이란 팽팽하게 조여진 줄이 하나씩 끊어져 나가는 것을 견디며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아있는 마지막 줄이 언제 끊어질 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당신은 더 이상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끊어질 바엔 마지막 줄만은 당신 손으로 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
...............

하지만... 견뎌야지, 늘 그래왔듯이.

사랑했던 사람도, 친구라고 여겼던 사람도 잃었다. 명예만은 잃을 수 없다.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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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별이 쏟아진다.
부끄러운 나의 심장위로,
날마다 뜨거운 별이 쏟아진다.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잎 마른 풀 뿌리를 씹으며
나는 죽은 시인들의 시를 읽는다
마음의 혓바닥이 마르고
슬픈 용기마저 꺾이어 버릴 때까지
바람은 계속하여 불어 올 것이다.
눈을 감은 나의 비탈,
무서운 폐허가 놓여 있다.
무서운 종이돈의 마른 나뭇잎마다
눈 뜬 폐허의 폐허가 놓여 있다.
깨어진 나의 창문과
부끄러운 나의 더러운 심장 앞에
바다가 출렁인다.
거울 속의 바다, 비참한 진리.
싸움에 진 달밤이 밤의 금밭에 뒹굴고 있다.
뒹굴 수밖에 없는 달밤의 어버이들이여,
왜 물을 퍼붓든가, 불을 뿜지 않는가.
이미 죽은 시인들의 시를 읽기 위하여
학자들의 새빨간 거짓말을 소리내어 읽기 위하여
새벽은 새벽마다 눈을 뜨지만
부끄러운 심장은 나의 심장이다.
고독한 심장은 나의 심장이다.
이웃집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주변에서
사약을 마시는 부스럼 같은 시인들.
꽃은 더 이상 피지 않을 것인가.
씨는 더 이상 거둘 수 없을 것인가.
누가 금밭을 갈고 어여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는가.
썩어 자빠진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아, 푸르지 못한 재화의 구덩이에서
어깨춤 추는 딱정벌레들.
사람이 사람의 이마에 못을 박는다.
하늘이 슬픈 땅을 그지없이 경멸하고 있다.
하늘이 술을 마시고
비틀거린다, 비틀거린다.
가난한 달밤의 어버이들처럼
심하게 비틀거리지만
그러나 하늘은 붕괴하지 않는다.
별이 쏟아진다.
부끄러운 나의 심장 위로
날마다 어제 죽은 별이 쏟아진다.




-김철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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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1주년이 어제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개안했고, 어떤 이들은 절망했고, 어떤 이들은 냉소했고, 훨씬 더 많은 이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의 불꽃은 아직도 적지 않은 이들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고 있다. 그 불꽃은 아직도 현재형이다.

잠수 중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잠시 부상. 다시 꾸륵꾸륵.
And
 

비 온 뒤  / 구민숙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또르르! 굴러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

그것 훔쳐보려 숫총각 강낭콩 줄기는 목이 한 뼘 반이나 늘어나고

처마 밑에 들여 놓은 자전거 바퀴는 달리지 않아도 신이 났다

빗방울의 허물어지지 않은 둥근 선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서른여섯 나는, 물컹해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며

녀석들을 살짝 만져보고도 싶다

그래, 내게도 저런 가슴이 있었지

열일곱,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주눅 들지 않은 노래로 충전되어

금방이라도 둥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던


나는 바구니에 담아 내 온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목욕 수건들과 75 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


심사평:

  <비 온 뒤>는 우선 깨끗하게 정돈된 작품이며 메시지가 분명하고 시적 논리가 합당하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들의 결점을 충분히 뛰어넘고도 남는 작품이었다.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또르르! 굴러/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라는 첫 부분의 표현들에서 보듯 이 시는 어느 날 우연히 목격된 ‘빗방울들’에서 시적 사념을 출발시켜 그것을 약동하는 언어의 충전으로 끌고 나가다가 마침내 그것을 ‘시로써’ 터트릴 줄 아는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선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괜스리 어렵거나 추상적이거나 한 표현 한 구절 없이 자기 소리를 하나의 작품 안에 오롯이 담아낼 줄 아는 그 시적 절제 또한 믿음직스러웠다. 한마디로 싱싱하고 단정하며 마지막 연에서 보듯 장난기 어린 웃음이 배시시 행간 밖으로 삐어져나올 듯한 작품이다. 선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면서 그의 감각이, 그의 언어가 사념과 철학을 동반하며서, 오늘의 유행에 주눅들지 않으면서 더욱 깊은 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오세영,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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