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이번에는 뭔가 되겠다' 싶어 열심히 쓰던 소설 하나가 룬썩10 정권의 문화계 예산 삭감 때문에 계약이 꼬이고, 올 여름 무렵 마음 다잡고 새로 쓰던 소설 하나도 결과가 안 좋아서... 그 후 내내 무기력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나도 마개를 다시 한 번 열어볼까 생각 중이다.
이오리 준페이는 눈을 떴다. 익숙한 기숙사의 자기 방 천정이 희미하게 보였다. 코로마루를 뒤로 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처음 이 꿈을 꿨을 때는 아침까지 침대 속에서 웅크려서 눈물흘렸었다. 켄은 마코토의 꿈을 꿀 때마다 즐겁다가도 깨어날 때마다 슬퍼진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자신은 꿈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그저 둔중한 고통이 가슴을 짓누르는 걸 느끼며 스스로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끝없이 되새길 뿐이었다. 그럭저럭 학교를 다니면서도, 가끔 치도리의 면회를 가서 웃으며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조차도 그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준페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아무렇게나 던져 둔 옷가지, 잡지, 게임기, 기타 잡동사니들이 발에 채였지만 아직도 꿈 속에 있는 것처럼 의식이 뿌옇고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마치, 정처 없이 밤거리를 헤매다가 들른 편의점에서 처음 섀도타임에 빠져 들었던 그 날처럼. 계단에 발을 딛었다. 여자들 방이 있는 3층을 지나, 작전실이 있는 4층을 지나, 옥상으로 나갔다.
기숙사 옥상에서 재배하던 텃밭 옆에는 모종삽과 장갑, 씨앗 주머니, 물뿌리개 등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마코토가 죽은 그 날 이후로, 아무도 돌보지 않은 것이다. 마코토와 함께 돌봤을 때 "다음에 보자 채소들아, 한가할 때 또 얼굴 비칠께"라고 콧노래를 부르며 채소들에게 말을 걸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옥상 난간을 짚고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기숙사 앞 도로에는 차들이 오가고, 도로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 직원이 나와서 지루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골목 모퉁이에서 취객이 벽에 기대어 토하고 있었다. 노숙자 하나가 신문지를 휘감고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있었다. 도로 저 만치에서 젊은 커플이 소리지르며 싸우는 게 보였다. 그걸 보면서, 불현듯 이오리 준페이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화내고, 울고, 먹고, 자고 있었다. 지구 상의 50억 명이 넘는 그 숱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오늘도 무심하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올 죽음을 억지로 외면하면서.
우리는 닉스와 싸워 이겼고 세상은 안전해졌다. 사람들 모두가 아무 것도 변한 것 없이, 평소대로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세상은 이제 괜찮은 것 같았다. 비록 여전히 어딘가 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있지만 아무튼....
남겨진 우리는 괜찮지 않아, 마코토. 전혀.
밤 12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섀도타임은 오지 않는다. 대신 탁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는가 싶더니 이내 빗발이 굵어졌다. 그 비를 맞으면서 준페이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얼굴에 넘쳐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귓전에 메아리치는 것이 빗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빗줄기와 더불어 시간이 조용히, 느리게, 결코 멈추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고 흘렀다. 모든 것을 평등한 종말로 인도하는 그 시간 속에서, 미래의 희망은 그 누구도 갖고 있지 못했다.
죽음을 맹목적으로 두려워하고 피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에 이끌리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없는 본성. 그 본성에 새겨진 필연적인 나약함과 비겁함, 무책임함이 모든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을 하나로 잇는 마음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어둡고 거대한 '악의'의 태풍이 되었다. 그 태풍의 눈 속에서, '그것'이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웃고 있다. '그것'이 포효한다. '그것'이 춤을 춘다. '그것'이 오고 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 속에서, 마치 환상처럼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푸른 나비 하나가 기숙사 옥상에 엎드려 통곡하는 준페이의 머리 위를 잠시 맴돌다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러나 준페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밤하늘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유독한 녹황색으로 물들어서 일렁거리고, 그 하늘 가운데에서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색의 만월이 떠올라 세상을 비춘다. 섀도타임. 원래는 있을 수 없는, 매일 밤 자정이 되는 순간 펼쳐지는 13번째 시간. 타로 카드의 메이저 아르카나 13번, '죽음'에 대응하는- '현실'에 속하지 않는 초현실의 시간. 모든 전자기기가 작동을 멈추고, 인간이건 짐승이건 할 것 없이 모든 생명체가 검은 관으로 변해 침묵하는 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세상은 현실감을 잃어 버리고서 원래 모습의 기괴하고 음울한 반영으로 변한다. 오직 달빛만이 음산하게 내리쬐는 거리 저 편에서 총성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인다. 우리는 그 악몽 같은 거리를 내달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광경을 목격한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 가운데에서, 그 강력하던 아이기스가 반파되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아이기스를 내려다 보는, '그'의 모습을.
"섀도 반응... 료지 군에게서 느껴져요!" "그럴 리가! 료지가 섀도라니?"
경악하는 후카와 유카리. 그리고, '그'의 단아한 입술이 열린다.
"정확히는 달라. 나는 섀도보다 더 위의 존재. 12개의 아르카나가 전부 합쳐져서 태어나는, '선고자야."
모치즈키 료지. 갑작스럽게 전학을 온 이후 고작 1달 남짓한 시간 동안 친구로 지냈던 소년. 늘 쾌활하고, 가볍고, 여자를 밝히고, 그러면서도 가끔은 사려깊고 따뜻한 면모를 보여주던 소년. 그 순간 준페이는 속으로 탄식한다.
또, 이 꿈을 꾸는구나.
료지의 모습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검은 망토를 두른 해골을 닮은 기괴한 형체로 변한다. 우리는 각자 페르소나를 소환해 덤벼들지만, 료지는 엄청난 힘을 발휘해 혼자서 우리 모두를 순식간에 제압하고는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문라이트 브릿지를 부숴버린다. 발 바로 앞에서 무너져 내린 문라이트 브릿지를 보며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자기 자신을, 준페이는 마치 타인의 몸 속에 갇혀 그의 말과 행동, 감정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본다. 요사하게 빛나는 만월을 배경으로 공중에 떠 있는 그의 나직한 음성이, 박살난 콘크리트와 철근 덩어리가 도쿄만으로 떨어지는 요란한 소음을 뚫고 우리들 모두의 뇌리로 파고든다.
"안심해, 지금 너희를 죽일 생각은 없어. 그저 알아두길 바랐어. 나라는 존재가 곧 멸망의 약속이며, 멸망 그 자체에 맞서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걸."
꿈 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하는 그 날의 기억, 그리고 모든 것이 늘 그 때와 같다. 료지는 담담한 태도로 우리에게 고한다. 태고에 이 별에 도착해 모든 생명에 '죽음'의 운명을 선사한 존재이며 모든 섀도들의 어머니인 닉스에 대한 것, 닉스가 눈을 뜨면 이 별의 모든 생명체가 섀도 피플이 되어 자기보존 본능을 잃어 버리고 죽을 거라는 것, 닉스는 모든 생명의 끝이라는 개념 그 자체이며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닉스의 도래를 알리는 존재라는 것. 이 세계는 다음 봄을 보지 못할 테지만, 선택지는 줄 수 있다는 것. 순간 그의 무표정이 가면처럼 벗겨지고, 형언할 수 없이 엄청난 슬픔과 고뇌, 그리고 연민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그 선택지를 제시한다. 선고자인 자신을 죽이고 섀도타임과 섀도, 페르소나, 우리의 지난 싸움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다가 조용히 종말을 맞이하느냐 아니면 자신을 죽이지 않고 공포와 무력감에 떨다가 고통스럽게 종말을 맞이하느냐.
너무 따라잡기 힘든 이야기라고 키리조 선배가 보기 드물게 당황한다. 유카리는 덜덜 떨면서도 그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 따위 믿을 수 없다고 외친다. 코로마루가 등의 털을 세우고 거칠게 으르렁거린다. 후카는 눈물흘리며 외면한다. 켄은 료지에게 창을 겨누지만 그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린다. 사나다 선배가 증거를 보여보라고 이를 악물고 따진다. 그러나 료지는 슬픈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 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럼, 닉스가 강림했을 때의 미래를 약간 너희에게 보여줄게."
.... ...... ........
"여, 좀 잡힙니까 어르신?"
한 노인이 강둑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낚시를 하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중년 남자였다.
"그냥저냥허지... 그나저나 자주 보이는구만 자네? 회사는 어쩌고?" "사실은 얼마 전에 회사에서 잘렸거든요. 그 놈의 무기력증 때문에 일감이 줄어들어서... 마누라에겐 도저히 솔직히 말할 엄두가 안 나서, 여기서 시간이나 때울까 해서요." "거 안 됐구만. 와서 앉게."
노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중년 남자는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줬다.
"요즘 세상 분위기가 영 흉흉하지?" "망할 무기력증... 이유는 모르겠고, 인터넷에선 믿기 힘든 소문은 넘치고, 이상한 사이비종교도 요즘 유행하는 모양이고.... 세상이 망하기라도 하려는 건가 모르겠어요." "아직 젊은 친구가, 재수 없는 소리 말게."
노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며 강둑에 심어진 가로수들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요즘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해. 자네, 저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아나?" "어... 나무는 잘 모르지만, 소나무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왜 저렇게 시들시들하죠? 소나무는 사철나무잖아요." "그래, 보다시피 잎이 전부 갈색으로 죽어있어. 몇 달 전만 해도 녹색이었는데." "매연 때문이 아니겠어요?" "바보 같은 소리 말게. 내가 여기로 낚시하러 나온 게 몇 년 째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 응?"
단호한 태도로 말하던 노인의 발 앞에 죽은 새 한 마리가 툭 떨어졌다.
"뭐야, 재수 없게..."
중년 남자는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그 목소리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저 만치서 날아가던 새 한 마리가 비틀거린다 싶더니, 공중에서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는 그대로 지면으로 추락하는 게 보였다. 뒤이어, 저만치에서 어슬렁대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저, 저거!"
노인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툭 떨어졌다. 노인은 경악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남자의 뒤쪽을 가리켰다. 중년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기겁을 하며 주저앉았다. 강 위에 죽은 물고기 떼들이 배를 뒤집고 떠올라 있었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 순간, 노인이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크흑...?" "어, 어르신?" "크억!"
노인은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긴급 속보입니다, 시민 여러분. 전 세계적으로 동식물들의 갑작스런 죽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화분의 꽃부터 시작해서, 개나 고양이 등의 반려동물, 농가의 가축들, 어린이, 노인을 거쳐 최근 성인들까지..." "아직까지 이 연쇄적인 대규모 사망의 원인은 불명입니다. 밀과 벼, 보리 등의 필수작물들이 전부 말라죽어, 유래 없는 세계적 식량난이 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대국민 담화 도중 총리가 쓰러지면서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총리는 즉각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예후가 썩 좋지 않다고..." "의사들마저 연이어 갑작스레 죽음을..." "일종의 생물학 테러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UN 총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은 서로를 배후로 의심하면서 고성을...." "패닉에 빠진 시민들이 폭도가 되어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대규모 인원이 세계 각지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닉스'라는 알 수 없는 이름을 외치면서..." "자유공영당 소속 시도 마사요시 의원은 자위대를 출동시켜 일본의 강함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 "현 시간 부로 긴급조치가 발령되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이 방송을 보고 계시는 모든 시민 여러분들은 출입을 자제하고....." "전기와 가스, 수도 공급 여부가 불확실... 어쩌면 이것이 최후의 방송...."
..................................
도시의 빛이 꺼졌다. 도쿄, 서울, 샌프란시스코, 상하이, 모스크바, 델리, 파리, 런던... 세계 유수의 대도시들이 하나 둘 어둠에 잠겨갔다. 중간 중간 땅 위에서, 바다 위에서 큰 섬광이 번뜩였다. 핵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유도 목적도 없는 거대한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고 그렇게 미친 사람들은 그 공포를 떠넘길 상대를 필요로 했다. 마치 얇은 종이 위에 떨어뜨린 먹물 방울이 퍼져 나가듯 어둠이 세상을 잠식했다. 그 어둠은 결코 멈추지 않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문명의 빛, 생명의 빛을 하나씩 확실히 꺼뜨려갔다. 결국 지구 전체가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막막한 우주의 바다를 떠도는 유령선처럼. 결코 걷히지 않을 그 영원한 어둠 위로, 오직 달만이 무서우면서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현실로 돌아온다. 모두가 창백한 안색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런 우리를 내려다 보면서, 그는 더 없이 슬프면서도 다정한 어조로 덧붙인다.
"아이기스가 나를 마코토의 내면에 봉인했었기에 그의 영향을 받아서, 난 인간의 감정이 생겼어. 너희를,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어 버렸고.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진심으로 부탁할께, 날 죽이고 모든 걸 잊어버려줘. 그렇게 하면 최소한 그런 고통은 없을 테니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끝날 거야."
풍경이 바뀐다. 이번엔 기숙사 로비다. 키리조 선배는 그간 조사한 이쿠츠키 슈지의 일지 속에서 료지, 아니 선고자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걸 뒷받침할 단서들을 발견했다고 이야기해준다. 죽음에 매료되어 있던 조부 키리조 코우에츠가 섀도들을 모은 것 역시 닉스를 불러들이기 위한 시도였으며 마코토가 월광관 고등학교로 전학을 와서 기숙사로 들어온 것도 이쿠츠키가 손을 쓴 걸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그리고 나 자신은...
"따지고 보면 전부 네 탓이잖아! 그런 걸 속에 품고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낸 거냐?"
이 꿈을 꿀 때마다 그 날, 그 순간을 반복한다. 마코토의 멱살을 잡고 비명을 지르듯 절망과 공포를 토해낸다. 패닉으로 갈라진 자신의 목소리를 마치 남의 목소리처럼 듣는다. 마코토는 상처받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슬픔, 고통, 두려움, 고독감, 죄책감, 의무감, 온갖 감정이 깃들어 흔들리는 그 눈동자에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이 비친다. 아니야, 마코토.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네가 그걸 키워낸 거나 다름 없잖아!"
몇 번이나 이 꿈을 꾸고, 몇 번이나 이걸 반복해서 겪는다.
"책임지고 해결해, 넌 특별하잖아!"
난 죽는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를 외면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게 그렇게 말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
마코토가 슬프게 중얼거린다. 이 모든 것이 이 날 일어났던 일이다. 결국 마코토는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닉스를 막아낸 뒤, 마치 벚꽃이 지듯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 날 그에게 한 말과 행동을... 되돌리지 못한다. 꿈 속에서조차.
"아, 아얏! 아파라!" "하여간, 준페이 형은 그 나이 먹고 왜 그렇게 엄살이 심해요?" "사나다 선배는 복싱부 에이스거든! 진심으로 때린 게 아니어도 웃어 넘길 수 있는 데미지가 아니긴 마찬가지거든! 만성용왕권에 맞으면 뼈와 살이 분리되지만, 붕권도 뼛속까지 아픈 정도는 되거든!" "타르타로스에서 싸우던 때에는 섀도에게도 여러 번 얻어맞았잖아요. 적당히 좀 해요."
켄은 준페이의 볼에 반창고를 붙여 주면서 투덜거렸다.
"이빨 흔들리는 데는 없죠? 연고를 발랐으니 곧 나을 거에요, 며칠 동안 붓기야 하겠지만. 입 안이 터진 건 알보칠에 물 좀 섞어서 머금고 있으면..." "아, 안돼 아마다 소년! 사람은 그런 거 머금으면 죽어!"
켄은 한심하다는 심정을 굳이 숨기지 않는 눈으로 호들갑을 떠는 준페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준페이는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근데 켄, 어쩌다 구급약 같은 걸 방에 챙겨두고 있는 거냐? 보통 초딩 방에 있을 물건은 아니잖아?" "저는 특별과외활동부에 들어오기 전부터 통신교육으로 창술을 단련했거든요. 어머니의 일 때문에."
준페이는 침묵했다.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 아라가키 신지로. 전 월광관 고등학교 재학생. 사나다 아키히코와는 같은 고아원 출신의 친구로, 키리조 미츠루와 더불어 셋은 특별과외활동부의 창설 멤버였다. 그러나 섀도타임 도중 섀도가 민가에서 날뛰었고, 그와 싸우던 도중 신지로의 페르소나 카스토르가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는 바람에 상징화가 돼지 않은 채 섀도타임에 휘말린 켄의 어머니가 살해당했다. 죄책감을 느낀 신지로는 도망치듯 특과부 활동을 관두고 학교도 휴학했다. 그리고 켄은 고아가 됐고, 친척 집에 얹혀 살며 월광관 초등부에 다니다가 페르소나 구사 재능이 있다는 걸 파악한 이사장의 눈에 띄어 기숙사에 들어왔다. 아직 어린 켄이 페르소나 구사 재능이 있었던 건 아마도 복수라는 명확한 삶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전에 미츠루가 추측한 적 있었다.
"반드시 어머니의 원수를 찾아내서 죽이고, 그 뒤엔 저도 죽을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필사적으로 단련했고... 그러다 보니 손바닥이 벗겨진다거나 해서 다치는 일도 가끔 있었거든요." "......"
켄의 눈은 소년답지 않게 어둡고 탁했다. 준페이는 그 눈을 바라보며 가슴 한 구석이 싸해지는 걸 느꼈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라서.... 감당을 하지 못하겠어.
그 때 톡톡하고 뭔가 두들기는 소리와 부스럭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준페이는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의 케이지 안에서 통통한 갈색 햄스터가 뒷발로 일어나 뭔가 보채듯 작은 앞발로 창살을 두들기고 있었다. 켄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야식을 안 챙겨줬네요. 저 녀석, 해바라기씨를 좋아하거든요."
몸을 일으킨 켄은 책상 서랍에서 해바라기씨가 든 캔을 꺼내어, 케이지 위쪽을 열고는 몇 알을 넣어줬다. 햄스터는 눈을 빛내며 그걸 갉아먹기 시작했다.
켄은 볼을 부풀렸다. '떼렛떼떼! 이오리 준페이는 화제를 돌리는데 성공했다!' 준페이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안도했다.
"이름이 뭐야?" "햄버그에요." "맛있어 보이는 이름이네 거. 아, 그렇다고 잡아먹고 싶다는 뜻은 아니고." "마코토 형도 똑같은 말을 했었어요."
아. 웃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진다. 켄은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해바라기 씨를 갉는데 열중하는 햄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검은 눈동자에는 어떤 기쁨이나 즐거움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만일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 대신 햄버그를 맡아 키워달라고 마코토 형에게 조른 적 있었어요. 결국 저는 살아남았고, 햄버그도 건강한데... 이젠 마코토 형이 없네요." "...."
작게, 거의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가끔 마코토 형 꿈을 꿔요. 그 꿈 속에서, 저는 마코토 형과 같이 보낸 시간을 반복하고 있어요. 같이 라멘집에 갔던 일, 영화축제에 갔던 일, 아라가키 씨가 죽은 이후 옆에 있어줬던 일, 기숙사 옥상에서 특훈 상대가 되어줬던 일... 준페이 형도 기억나죠?" "아아, 그 때. 마지막에는 결국 네가 녀석에게 한 방 먹이는데 성공했었지." "솔직히, 마코토 형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즐거우면서도 내내 마음 속에 응어리가 있었어요. 아라가키 씨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난 복수를 해야 하니 이런 걸 즐겨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를 지키고 죽은 후에도 감정이 복잡했었죠. 하지만 그 꿈 속에서는 정말로 행복해요. 그리고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알게 되는 거에요. 마코토 형은 이제 죽었고, 더 이상 없다는 걸. 잠에서 깰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차라리 그런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간절하게. 엄마가 죽었을 때 한참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도, 그 꿈 속에서는 즐겁고 기쁘다는 걸... 도저히 부정하지 못하겠어요." "그렇구나....." "저도 사나다 형이 요즘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하지만 역시 저도 좀 이상해 보이죠?" "이상하지 않아, 켄. 다들 같은 기분이니까. 키리조 선배도, 유카리도, 후카도. 물론 나도. 그 날 이후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이기스도, 가끔 기숙사를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는 코로마루도 그렇겠지." "엄마가 죽었을 때 어른들은 다들 그렇게 말했어요, 어찌 됐건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아마도 그 말이 맞을 거에요.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도저히 그 맞는 말대로 하지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아라가키 씨가 저 자신을 위해서 살라는 유언을 남긴 것 옆에서 들었었죠? 1월 31일 그 날, 두렵지만 그래도 닉스와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심하고 타르타로스로 가기 직전 저는 아라가키 씨와 찍었던 사진 앞에서 기도했어요. 이것은 죽은 아라가키 씨의 영혼을 위한 싸움인 동시에, 살아 있는 저 자신을 위한 싸움이라고. 그러니까 함께 해달라고. 하지만 제게 용기를 준 마코토 형까지 죽은 지금 저는 삶도 죽음도,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준페이는 이를 악물었다. 삶과 죽음이 같을 리가 없다. 같아선 안 되는 거다. 하지만 도저히 켄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준페이 형. 만일 아라가키 씨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저를 보면 화를 낼까요?" "글쎄다... 나는 아라가키 선배가 아니니까. 강하고 멋지고 남자다운 선배라고 생각했고 죽었을 때도 무척 슬펐지만 진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준페이는 잠시 신지로의 생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깊이 눌러 쓴 비니 아래 빛나는 형형한 눈. 낮은 목소리. 언제나 입고 있던 겨울용 코트. 그리고 아주 가끔씩 볼 수 있던, 능숙한 솜씨로 국자를 휘젓던 모습.
"요리하는 걸로 봐서 겉보기보다 섬세한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마코토 녀석과 나름 인연을 맺은 모양이니 우리와 똑같이 슬퍼했을지도 모르지. 솔직히 그에 대해선 도저히 뭐라고 말 못해주겠다야, 하지만 말이야."
준페이는 아마다의 어깨를 두들겼다.
"나는 화내고 싶지 않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준페이 형."
켄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은 한참 우두커니 서 있었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
켄의 방을 나선 준페이는 문득 자신이 여자들이 지내는 3층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이 혼탁했다. 어른이 되어도 술은 절대 입에 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아마도 술에 잔뜩 취하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계단 옆 자판기와 의자가 놓여 있는 휴게장소를 지나서,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아이기스의 방 앞이었다.
"아이기스, 있어? 자는 중이야?"
겉모습은 금발 벽안의 미소녀로 보이지만, 그녀의 정체는 야쿠시마에 소재한 키리조 그룹 산하 비밀 연구소에서 제작된 대 섀도 특별 제압병기 7식. 잠을 잘 필요가 없다. 인간이 잠을 자면서 피로를 회복하고 기억을 정리하는 것처럼, 절전 모드에 들어가서 회로를 식히고 기판을 세척하고 데이터를 정리할 뿐이며 그 상태에서도 주변 상황을 알 수 있다. 준페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기계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아이기스는 방에 틀어박혀서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달라질 리도 없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을 계속했다.
"요즘 들어서, 다들 이상해. 슬픈 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뭔가... 너무 이상해 모두들. 그나마 후카는 슬픈 와중에도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 같지만 말야. 유카리는 이성적인 척하지만 사실 무리하고 있어. 키리조 선배는 한 술 더 떠서 부서지기 직전 같아 보이고. 사나다 선배는 마음을 닫아 버렸고, 켄도 자포자기한 것 같더라. 나도 갈피를 잡지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아무 이야기라도 하고 싶어서. 아이기스, 넌 어때? 억지로 나올 필요는 없어. 그럴 때도 있는 거겠지. 그냥, 목소리만이라도 들려주면 안 될까?"
잠시 대답을 기다렸지만, 역시나 문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면서 문에 기대어 복도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것조차 싫다면, 내 이야기라도 들어줄래? 엄청 창피하지만, 솔직히 말할께. 아이기스, 난 말야, 처음 페르소나 능력에 각성하고 남 몰래 섀도와 싸워 사람들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슈퍼 히어로가 된 것 같아서 엄청 들떴어. 마침 내 페르소나 헤르메스는 생긴 것도 멋있었고, 화염을 다뤘고, 아, 만화나 게임 주인공들은 불 속성인 경우가 많거든. 내가 적성을 갖고 있던 무기도 마침 그런 주인공들이 자주 사용하는 양손검이었고. 검술 같은 건 모르는 나로선 야구 배트마냥 힘껏 휘두를 뿐이었지만. 크흠, 말하자면 뽕이 엄청나게 찼단 말이지 그게. 하지만 마코토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고는 녀석을 질투하기도 했고, 페르소나 능력을 빼면 내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어. 그런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준페이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다들 같이 어둡고 위험한 타르타로스를 오르면서 싸우던 시절이... 사신 타입이라고 했던가, 몸에 사슬을 감고 쌍권총 같은 걸 든 그 더럽게 강하던 섀도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내가 레벨업해가고 있다는 걸 느끼던 그 시간들이 그리워. 그 공포와 고통마저도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의미기도 했으니까."
이 시작도 끝도 없는 무력감과 폐색감으로 가득 찬 현재와는 달리.
그 때였다.
"유감이지만, 그녀는 듣지 못하는 것 같군. 관절 가동음도 들리지 않고 오일 냄새도 나지 않는 걸로 봐서, 아예 스스로 전원을 내려버린 모양이야."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옆에 흰 알비노 시바견이 다가와 있었다. 코로마루는 작게 재채기를 하더니 뒷발을 들어 귀를 긁었다. 준페이는 그걸 보며 멍하니 눈을 껌벅거렸다. 방금, 코로마루가 말을 한 게 맞나? 어, 혹시 내 망상인가? 놀랐지만 동시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마루는 도저히 보통 개라고 생각되지 않는 수준의 지혜와 판단력을 갖고 있다. 애초에 페르소나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평범한 동물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자아의식이 있다는 의미다. 아이기스는 코로마루의 '말'을 자주 통역해주곤 했고, 유카리는 코로마루가 너보다 더 똑똑할 거라고 놀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코로마루는 준페이의 놀라움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다가와서 몸을 비볐다.
"하지만 나는 들었다. 나라도 괜찮다면, 잠시 어울려주지." "어... 고마워 코로마루... 씨?"
어색하게 대답하자 코로마루는 크게 하품을 했다.
"치워라, 그냥 코로마루로 충분해."
코로 준페이의 어깨를 쿡 밀었다. 준페이는 손을 들어 코로마루의 등을 긁었다.
"시원하군. 그 녀석이 긁어주던 것보단 못하지만." "...." "옆구리도 좀 긁어봐라."
코로마루는 준페이 옆에 발라당 드러누워 헥헥거렸다. 준페이는 코로마루의 흰 털을 쓰다듬으며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어, 음.... 코로마루, 오늘 하루 동안 후카부터 해서 켄까지 모두를 한 번씩 만나봤는데, 내가 무심코 마코토 녀석을 떠올리게 하는 바람에 괜히 다들 아픈 곳을 찌른 것 같더라고. 나란 놈도 참 한심하게스리..." "좀 더 힘줘서 긁어 봐." "넌 아무렇지도 않아?" "확실히 넌 많이 성장했다, 이오리 준페이. 하지만 성장했다고 해서 없던 눈치가 갑자기 생기는 건 아니거든. 그게 너답고."
코로마루의 입꼬리가 웃는 것처럼 말려올라갔다. 그러나 가늘게 뜬 그 붉은 눈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나라고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있겠냐? 다들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어. 이 기숙사 안은, 슬픔과 상실감의 냄새로 가득해. 견디기 힘들 정도로." "......" "주인님이 돌아가셨을 때, 내 마음 속은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그게 내 삶의 이유가 됐지. 내 페르소나에도 영향을 줬고. 하지만 증오와 복수는 삶을 지탱하는 이유는 될 수는 있어도, 삶을 이끄는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거다." "아, 그 대사 어떤 만화에서 본 거 같아." "그런가? 난 글은 읽지 못하니까. 아무튼 나는 한 때, 주인님과 함께 살고 죽는 미래를 원했다. 주인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섀도 근절을 원하게 됐고. 그래서 이 기숙사에 들어와 너희들과 함께 싸우고, 함께 산책을 하고, 맛있는 밥을 먹고... 그러다 보니 어느 샌가 목적이 생겼어. 이 싸움을 끝내고 모두 함께, 우리가 연 내일을... 그림자 없는 세상을 본다는 목적이."
준페이는 다시 슬픔이 목구멍을 꽉 메워오는 걸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특히 마코토에게는, 주인님이 내게 주셨던 목걸이를 맡기려고 했어. 그라면 내 두 번째 주인으로 인정할 만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코로마루는 눈을 감았다.
"나 역시 극복하지 못하고 있어. 모두와 마찬가지로.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코로마루는 뒹구르르 몸을 굴려서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두 귀가 축 늘어졌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슬픔과 상실감이 몰아닥쳤을 때는, 그저 그걸 인정하고 견딜 수밖에 없다는 거야." "아, 그것도 어디선가 본 대사 같네... 어떤 게임에서 나온 거 같기도 하고." "시끄러. 그래서 그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는 나도 알지 못해. 어쩌면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어 무너질지도 모르지. 그렇기 때문에, 너나 다른 녀석들에게 당장 듣기만 좋을 뿐인 위로 따위는 할 수 없어."
코로마루는 일어나서 몸을 부르르 털더니, 준페이의 손등을 부드럽게 핥았다.
"다들 함께... 그저, 어떻게든 견디고 있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뭔가 계기가 생기지 않을까. 나 역시, 그 희박한 가능성에 걸어볼 수밖에 없다. 지금은 말이지. 네가 견디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깨 정도는 빌려주마." "...고마워."
준페이는 주저앉은 채 코로마루의 목을 끌어안고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그 따스하고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에, 에취!" "끼잉..."
잠시 얌전히 안겨 있던 코로마루는 준페이가 재채기를 해대기 시작하자 몸을 비틀어 그 팔 안에서 빠져나왔다. 준페이는 킁 하고 코를 들이마시며 물었다.
"어... 코로마루? 너 방금까지 사람 말 하지 않았어?" "와웅?"
코로마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본 준페이는 피식 웃어버리곤 다시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또 혼자서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응, 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준페이는 몸을 일으키고는 등 뒤의, 여전히 굳게 닫힌 방문을 흘긋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아이기스가 네 말을 전해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네가 하는 말처럼 들린 것도 아마도 전부 내가 멋대로 상상한 거겠지. 음, 나 만화랑 게임 좋아하니까. 아마도 너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하다 보니, 무심코 평소에 봤던 만화나 게임 주인공 대사들을 끼워맞춘 것일 꺼야. 누구 대사인지는 일일이 기억할 수 없지만. 이 이오리 준페이 님은 야구 실력만큼이나 상상력도 뛰어나거든! 아무튼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코로쨩!"
일부러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전혀 즐겁지 않았다.
준페이는 아래층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잠이 들고, 내일이 밝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시간이 흐르겠지만, 우리들의 시간은 거대한 무덤 같은 이 기숙사 안에서 멈춰 버렸다. 너무도 많은 추억과 기억들 속에 파묻혀 버린 채로. 삶도 죽음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채, 과거에 남지도 못하고 미래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그 사이에서 그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부유하면서. 그 추억과 기억들만을 끝없이 곱씹으면서.
준페이는 준페이다 보니까, 코로마루의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이 알 리 없다는 사실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교정으로 나온 준페이는 혼잣말을 하며 찡그린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잔뜩 낀 우중충한 날씨는 마치 자신의 기분 같았다.
"개구리라도 튀어나올 것 같구만."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움찔했다. 불현듯 이쿠츠키 슈지 전 이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개자식 덕에 호된 꼴을 봤었지. "내가 이쿠츠키냐, 젠장!" 짜증이 치솟은 준페이는 마치 그 자리에 이쿠츠키의 얼굴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기둥을 거칠게 걷어찼다. 하늘을 향해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준페이는 교정을 가로질러 통학용 모노레일에 올라탔다. 오늘은 공부 안 한다. 새로 개봉한 영화나 조지러 가야지. 포트 아일랜드 역 근처에 있는 영화관, 스크린 샷에는 최근 개봉한 마블 히어로 영화의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그걸 보며 머리를 좀 비워야겠다. 영웅은 공부 따위 안 한다네!
"...얼레."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영화관 앞 분수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띄는, 성숙하고 이지적이면서도 화사한 미모의 소녀. 그러나 그 미모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준페이는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키리조 선배, 여기서 뭐하세요?" "으, 응?"
그녀, 키리조 미츠루는 화들짝 놀라면서 준페이를 바라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영화 리플렛이 떨어졌다. 미츠루는 헛기침을 했다.
"이오리로군. 아버님이 남기신 서류를 검토하다가 바람을 쐬러 나왔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여기더군." "우연이네요.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죠 키리조 선배?"
준페이는 허리를 굽혀 리플렛을 집어 미츠루에게 건네며 거기 적힌 문구를 흘낏 보았다. 화려하고 풍요롭지만 갑갑한 삶을 살던 엘리트가 어느 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걸 버리고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미츠루는 헛기침을 하며 그걸 받아들었다.
"마.... 유키와 이 영화를 본 적이 있었어. 으흠, 그냥 그 때 일이 기억났을 뿐이다. 내용이 조금... 와닿았거든."
준페이는 팔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미츠루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언제나 냉철하고 당당한, 그리고 한없이 고고한 키리조 선배도 후카나 유카리와 마찬가지로, 그 녀석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거 물어봤다가 화내면 어쩌지? 수학여행 때처럼 처형당하지 않을까? 그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준페이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 때는... 마코토도 있었고.... 료지도 있었고..... 새삼 다시 침울한 감정이 되살아나는 걸 느끼며 준페이는 입맛을 다셨다. 어두침침한 오후, 사람들은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 군중의 바다 속에서 준페이와 미츠루는 한 쌍의 작은 섬처럼 나란히 앉아 있었다. 미츠루는 나직하게,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인간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에 속박당한다... 귀한 것과 지킬 것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와 권력자, 이른바 엘리트일수록 그 귀한 것과 지킬 것들의 노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영화였어." "솔직히 난해하네요 거..." "그, 그렇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해서 미안하군."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미츠루였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군. 조만간 특과부 전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데, 만난 김에 네게 먼저 해도 상관 없겠지. 아버님 대신 너희에게 사과하고 싶다. 키리조 코우에츠... 할아버님이 저지른 짓을 말이야."
"음? 그거야 그 영감ㅌ... ...어르신... ...사람이 저지른 짓이고, 전 총수님과 선배는 그걸 몰랐고, 안 뒤에는 수습하려고 노력한 입장이잖아요?" "하지만 나와 아버님은 그 사실을 숨기고, 무기력증 확산을 막기 위해서일 뿐인양 너희를 이용했지. 보수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아니 뭐 그건 전에도 사과하셨잖아요? 전 괜찮아요 선배, 뭣보다 굳이 따지자면 제일 큰 피해자는 마코토 녀석인데, 녀석도 뭐...."
그 이름을 말한 순간, 미츠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준페이는 그걸 보며 키리조 선배가 어떤 슬픔과 죄책감을 짊어지고 있는지, 동시에 자신이 어떤 말실수를 한 건지 깨달았다. 드헉.
"그래.... 녀석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서, 그런...." "죄, 죄송함다..........."
준페이는 야구모자를 벗어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하여간 나새끼는 입방정이 문제라니까. 유카리한테도 그것 때문에 꼽 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창피해하는 준페이의 귓전에, 평소와 마찬가지로 침착한 미츠루의 음성이 들렸다.
"지금은 슬픔에 잠길 때가 아니지. 할 일이 많으니까. 아무튼 너희에게도 좀 더 이해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그래서 설명하자면... 이오리?" "말씀하세요 선배. 아, 잠시만요."
준페이는 얼른 일어나서는 분수대 맞은 편의 자판기로 뛰어가서 캔음료 2개를 뽑아와서 하나를 내밀었다.
"마시면서 이야기하시죠. 헤헷, 아무리 귀한 집 아가씨여도 후추 박사나 255차 캔 정도는 딸 줄 아시겠죠?"
일부러 깐죽거리는 준페이를 보며 미츠루는 처음으로 작게 미소지었다.
"관대하게 처형은 참아주마. 배려 고맙군, 이오리."
준페이는 히죽 마주 웃어보였다. 캔을 따서 차 한 모금을 마신 미츠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여하간 아버님은 10년 전의 사고를 비롯해서 섀도 관련 피해자들에게 최대한 보상하는 방침을 세우고 싶어하셨지만 생존한 관련자들은 할아버님의 죄를 덮어 버리고 침묵하는 걸 선택했어. 진상을 모르는 다른 임원들도 우리 책임이 아닌 걸로 얼버무릴 수 있다면 굳이 돈을 쓸 필요 없다고 강경하게 반대했었지. 일반 사회에 섀도나 페르소나 같은 이야기가 새나가기라도 하면 패닉이 발생할 것, 법적인 문제들도 지나치게 복잡해질 것도 고려해야 하다 보니 아무리 아버님이어도 독단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었어. 너희에게 급료나 본격적인 장비를 지급하지 못하고 매번 쿠로사와 씨를 거쳐야 했던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이야. 나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키리조 그룹 내부에 적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됐다. 아버님은 내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던 거야." "솔직히 좀 많이 난해하네요 거......"
미츠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곧 모두에게 할 이야기다. 그 때 다시 설명해주지. 그나저나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것만으로도 꽤 스트레스 해소가 되는군."
말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에 깃든 수심은 걷히지 않았다. 준페이는 그녀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먼 곳을 응시하며 거의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유키가 남긴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만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나는 일종의 노예라는 걸.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고, 내 의무이며, 내 숙명이야. 절대로, 절대로 도망칠 수는 없어..."
그 목소리를 들으며 준페이는 깨달았다. 1년 전에 비해 키리조 선배의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진 것은 좋지만, 지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부드러움이나 온화함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슬픔과 두려움,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이었다. 준페이는 이를 악물었다. 이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무엇이 아닌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것은 분명 아니었다. 어떻게든 기운을 북돋아주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 개그를 할 수는 없잖아.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 분위기 파악은 한다고. 젠장, 마코토,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준페이는 잠시 고민했지만, 한발 앞서 미츠루가 말을 돌렸다.
"참, 이야기하는 걸 잊을 뻔했군. 닉스를 물리치고 모든 것이 끝났으니, 이젠 특별과외활동부도 해산이다." "음? 며칠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완장과 페르소나 소환기도 회수한다고..." "아, 이미 했던가?"
미츠루는 약간 허둥거렸다. 그걸 보며 준페이는 힘들게 웃어보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럴 리가 없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랬었지. 이번 달 말일... 3월 31일에 전부 걷어서 연구소로 보낼 예정이야.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내 개인적인 감정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알겠어요. 그래도, 앞으로도 다들 가끔 만나면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요. 많이 바쁘실 거라는 건 알지만요 뭐, 그냥 전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목이 잠기는 느낌이 들었지만 간신히 대답했다. 미츠루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멀어져갔다. 준페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불러세웠다.
"키리조 선배!" "뭐지?" "우리는 함께 큰 일을 해냈잖아요! 힘들 때는 좀 더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해도 돼요. 저야 미덥지 못하겠지만, 사나다 선배도 있잖아요!"
미츠루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약간 슬프게 웃어보였을 뿐이었다.
이미 주변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미츠루의 뒷모습을 보며 준페이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토록 강하던 키리조 선배가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어쩌면.... 키리조 선배는 지나친 슬픔과 두려움,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무너지지 않을까? 예전의 키리조 선배는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에 종종 강압적인 면을 보이곤 했다. 유카리는 내내 그걸 불만스러워했었고, 자신도 종종 약간 거북하긴 했다. 작년 수학여행 이후로 그런 면이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은 그 때와는 정반대의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나 같은 놈이 생각해 봤자 뭐 별 수 있나...."
이런 생각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키리조 선배가 그렇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라고, 그녀의 이성과 자제력을 믿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머릿속도 마음속도 끝없이 복잡했고 주변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밤이 오고 있었다.
+
혼자 영화를 보고 나와, 와카츠의 DHA 정식으로 저녁을 해결한 뒤 폴로니안 몰의 오락실에서 시간을 죽이던 준페이가 기숙사에 도착한 건 밤 9시가 넘어서였다.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서며 힘껏 외쳤다.
"어이, 나 왔다!" '응, 왔구나.'
로비의 소파에 앉은 채 특유의 무표정에 가까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친구가 대답한다. 자신은 그 곁으로 걸어가 소파에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는 옆에 털썩 앉아 리모컨을 집어들고 TV 채널을 돌리면서 불평한다. 유카리와는 한 교실에 앉아 있어도 멀리 있는 것 같다, 후카도 얼굴 보기 힘들다, 자신도 미래라는 걸 조금은 생각하게 된 이후 나름 공부를 좀 하게 돼긴 했는데 진도 쫓아가기 어렵다, 평화가 온 건 좋지만 가끔은 그 지겹던 타르타로스의 복도가 조금 그립기까지 하다, 뭐 그런 아무 말을 늘어놓는다. 그런 알맹이 없는 말을 친구는 옆에 앉아 조용히 듣고 있다. 얼핏 보면 그저 무표정하고 무관심해 보이는 인상이다. 하지만 녀석을 아는 사람이 좀 자세히 살피면 녀석은 항상 보일락 말락한 엷은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른쪽 눈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면서 녀석은 나직하게 말한다.
'열심히 잘 살고 있구나 준페이, 안심이야.' "난 괜찮아! 치도링도 이제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 곧 휠체어 졸업할 수 있을 거라더라. 그러니까 너는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이거야! 이 이오리 준페이 님은...."
그리고, 백일몽에서 깨어난다.
텅 빈 로비는 어둡고 쌀쌀했다. 그리고 자신은 소파에 홀로 앉아 마치 녀석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중얼대고 있었다.
"꼭 미친 놈 같네... 하, 하하하..."
콧등이 시큰해 오는 걸 느끼면서 준페이는 로비를 둘러보았다. TV에서는 주식시장이 활황이라고 뉴스 앵커가 떠들고 있었다. 무기력증이 사라지고 섀도 피플이 됐던 사람들이 원 상태로 돌아와 각자 직장으로 복귀한 결과가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뉴스가 끝나고 나자, 요즘 한참 인기 상승세인 리세치라는 신인 아이돌이 나오는 광고가 이어졌다.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그 활력이 넘치는 세상은...
"보고 있냐, 마코토... 우리가, 그리고 네가 구한 세상이야..."
시끄럽고, 시끄럽고, 시끄럽고,
공허하다.
뉴스에서도, 시사 대담 프로에서도, 이제는 작년 한 해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집단 무기력증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다들 지난 1년을 잊어버리자고 암묵적으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세상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평하고 요란스러웠다. 마치 혼자 떠들고 있는 저 TV처럼. 준페이는 그 헛헛한 소음을 견딜 수 없어서 귀를 틀어막았다. 그 때 기숙사 문이 열리며 사나다 아키히코가 들어섰다. 내내 뛰어왔는지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어, 왔어요 선배? 지금까지 체육관에 계셨던 거에요?" "...그래."
아키히코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준페이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로비를 가로질러 냉장고 문을 열고 이온음료를 꺼내 들이켰다. 그런 그에게 준페이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사나다 선배... 많이 바쁘세요?" "무슨 일이지 준페이?" "저기 말이죠... 요즘 키리조 선배 표정이 많이 어두워 보여서요..."
준페이는 약간 두서없이 낮에 미츠루를 만났던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래서, 좀 걱정돼서요. 키리조 선배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 선배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후로 처음 봤어요. 제가 섣불리 위로 같은 거 할 주제는 못돼지만, 사나다 선배는 키리조 선배와 중학교 때부터 친했으니까..."
소파 맞은 편에 앉아 묵묵히 준페이의 이야기를 듣던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약해졌군, 미츠루 녀석. 한심하긴." "네?" "못 알아들었냐? 한심하다고 했다."
준페이는 잠시 멍하니 아키히코를 바라보았다. 사나다 선배도 키리조 선배도, 둘 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서로 은근히 칭찬하기도 하고 옛 이야기를 주고 받는 걸 종종 곁귀로 듣기도 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쌀쌀맞게 말하는 거지? 그러나 준페이의 당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힘들겠지. 하지만 우리는 키리조 그룹 내부의 일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라.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스스로 해낼 수 밖에 없는 일이라면, 스스로 해내야만 해."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함께 사선을 넘어 온 동료고, 게다가 사나다 선배와는 친구잖아요?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미츠루는 어린애가 아냐. 오래 봐왔으니 아는 거다. 얄팍한 동정 따위 해봤자 의미 없어. 미츠루는 자신의 눈물은 스스로 닦아낼 줄 아는 녀석이다." "어른도 아니잖아요! 키리조 선배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사나다 선배도 그랬잖아요, 강한 녀석인 건 알지만 그 심지가 부러져 버렸다고! 그 땐 그렇게 걱정해 놓고 지금은 왜 그래요 도대체? 자기 눈물이야 스스로 닦는다 쳐도, 위로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걸 꼭 얄팍한 동정이라고 폄하해야 돼요?"
준페이는 화가 치미는 걸 느끼며 버럭 소리질렀다. 그러나 아키히코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런 일까지 겪었는데도 극복했기에 난 미츠루를 인정하고 존경할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네 이야기대로라면 실망스럽고 한심할 뿐이야. 시합에서 졌다면 패자로 끝나지만, 그 때문에 마음이 꺾였다면 두 번 다시는 이길 수 없는 약자가 돼. 난, 약자가 싫어. 그 뿐이다." "!"
준페이는 사나다 아키히코의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한없이 차가웠다. 자신이 헛소리를 할 때마다 핀잔을 주고 짜증을 내면서도 챙겨주던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할 이야기 끝났으면 가겠다, 피곤해. 씻고 자야겠어."
그는 몸을 일으켜서 계단으로 향했다. 그 등을 잠시 바라보던 준페이는 소리를 질렀다.
"사나다 선배도 약하잖아요!" "뭐?"
아키히코는 거칠게 몸을 돌렸다. 그러나 준페이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료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닉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사나다 선배도 좌절했잖아요! 우리가 뭘 할 수 있냐, 그런 것과 어떻게 싸우냐고! 우리 모두 겁나긴 마찬가지였어요, 특히 저는 마코토 탓을 하면서 억지를 부리기까지 했고! 하지만 결국 정신을 차리고 싸우기로 한 건 저마다 싸울 이유를 찾아낸 서로를 믿어서였잖아요! 지금 이런 선배 꼴을 보면 그 녀석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아키히코의 눈빛이 변했다.
"마코토 이야기는 하지 마!"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준페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 녀석을 떠올리면 미칠 것 같다고! 미키가 죽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 녀석이 날아올라서, 혼자 닉스를 향해갈 때 나는 아무 것도 못했어! 내가... 내가 약해서 그 녀석이 그렇게 된 거라고! 또 그 때처럼!" "제기랄, 선배는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달에서 진짜 닉스가 나타난 그 순간, 아무 것도 못한 건 다들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니까,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집어치워, 패배자들끼리 서로 상처를 핥아주기라도 하자는 거냐?"
퍽.
아키히코는 준페이의 볼을 후려갈겼다. 준페이는 크게 휘청대면서 물러나다가 소파를 짚고 간신히 섰다. 아키히코 역시 당황했다.
"....미안하다, 준페이.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준페이는 머리가 어지럽고 입 안에서 피가 차오르는 걸 느끼며 찡그렸다. 나도 타르타로스를 오르면서 본의 아니게 꽤 단련이 된 거 같은데 역시 대단한 주먹이야, 진심으로 때렸다면 분명 기절했겠지.
"확실히 약해졌네요, 사나다 선배. 저 정도는 일격에 KO시켜야 정상일텐데.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죠? 닉스에 대해 들은 뒤 기숙사로 돌아와서... 그 때도 바로 이 로비였었죠, 헤헷." "...." "그 때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맞고 나서도 납득했어요. 엄청나게 아팠지만. 하지만 지금은 선배, 망가져 있어요. 키리조 선배나 유카리처럼. 건방 떠는 저도 한 방에 눕히지 못할 정도로."
아키히코는 어두운 표정으로 준페이를 외면했다.
"지금은 선배도 이래저래 버거운 거 같으니까... 뭐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거 같네요."
준페이는 천천히 말하고는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고 몸을 돌렸다. 계단 위에서 켄이 자신과 아키히코를 슬픈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이쿠, 보고 있었구나 아마다 소년? 언제부터였냐? 설마 처음부터?"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입안이 무시무시하게 쑤시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가 없어도 세상은 변한 것 없이 시간이 흘렀고, 3학기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준페이와 유카리, 후카, 아이기스, 그리고 켄은 진급을 앞두고 있었고, 미츠루 선배와 사나다 선배는 졸업했지만 계속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유를 모두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월광관 고등학교 2학년생, 이오리 준페이는 점심 시간에 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 계단을 밟으면, 그 흐리고 쌀쌀하던 겨울날이 떠오른다. 그 때도 옥상이었다. 자신은.... 그에게 널 만나서 다행이라는 속내를 털어놓고는, 이 싸움이 끝나도 여전히 친구인 거냐고 물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뻔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웃으면서 내민 손을 맞잡아왔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전을 마치고 모두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았을 때- 자신이 이 옥상에 다시 올랐을 때 본 것은....
"...후카?"
후카는 옥상 난간에 기대서서 도시의 풍경을 내다 보고 있었다. 후카의 시선이 향한 저 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준페이는, 키리조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건설회사에 의해 한참 재건 공사 중인 문라이트 브릿지를 발견하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작년 12월, 죽음의 선고자로서 가진 원래 힘의 편린을 드러낸 모치즈키 료지가 그걸 단 일격으로 부숴버리던 광경이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언론에서는 작년 말 짧은 시간 동안 큰 위세를 떨쳤던 닉스 광신도들의 테러로 추측하고 있었지만, 길게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 안녕 준페이..."
후카는 준페이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미안, 바람이 불어서... 눈에 뭐가 들어갔나봐."
준페이는 묵묵히 손수건을 내밀었다. 후카는 눈 주변을 닦아내고는 손수건을 돌려주며 애써 밝은 태도로 물었다.
"요즘 지내기는 좀 어때?" "나야 뭐 늘 비슷하지. 새삼스럽지만 학교 공부란 놈 참 쉽지 않네~ 섀도랑 싸우는 게 차라리 더 쉬운 것 같다니깐." "그래도 성적 많이 올랐잖아? 작년 기말고사 때는 중위권까지 올라갔지? 준페이도 성실해졌으니까,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하하, 나님은 대단하니까!"
둘 사이로 다시 바람이 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준페이는 툭 던지듯 물었다.
"옥상, 자주 올라와?" "응... 약속했던 곳이니까. 그것 말고도 추억이 많은 곳이라서. 마코토가 내 요리를 맛봐줬던 곳이기도 하고... 나츠키가 전학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눈 곳도 여기거든." "아... 그 애? 그러고 보니 친해졌었지?" "응....."
후카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 때는 나츠키가 멀리 떠나버렸지만, 아무리 멀리 있어도....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심지어 우주 저 멀리 있어도 소중한 상대와 마음만은 이어져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었어. 그걸 계기로 내 페르소나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힘'이라는 걸 깨달았었고. 하지만..."
그녀는 허공을 향해 흰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죽음만은 넘어서지 못하겠어." "...."
"사실 요즘도 가끔 유노를 써서 마코토를 찾아보곤 해. 영혼이라도 남아 있다면, 유노라면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매번 헛수고로 끝나지만."
그 손은 허공만을 움켜쥐었다. 준페이는 이해한다고 말하려다가 침묵했다. 그런 말은 어떤 위로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시간이 더 많이 지나고 나면 익숙해지겠지. 나도, 우리 모두도... 어떻게든 각자 삶을 살아갈테고. 하지만... 지금은 역시 좀 힘드네."
후카는 슬프게 웃어보였다. 준페이는 그런 그녀 옆에 서서 오후수업 5분전을 알리는 예령이 울릴 때까지 한참 묵묵히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봄 햇살이 따사로이 내려쬐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며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녀석이 구해낸, 하지만 그 녀석 자신은 영원히 떠나 버린 세계였다. 그 녀석이 없는 우주였다.
+
수업이 끝나고, 종례를 마친 토리우미 선생님이 교실을 나섰지만 준페이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잔뜩 흐려진 하늘 아래 육상부원들이 서둘러서 연습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저만치 미야모토 카즈시와 니시와키 유우코의 모습도 보였다. 그 때, 토모치카 켄지가 준페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집에 안 가냐?" "어, 으응... 가야지..."
애매하게 대답하는 준페이를 바라보며 켄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키 일 때문이냐?" "...."
준페이는 대답대신 모자를 푹 눌러썼다.
"독서실 가려던 참인데 그 전에 하가쿠레에 들를래? 공부도 배는 좀 채우고 나서 하든가 해야지."
듣기로는 이 녀석도 작년에 카노 선생에게 단단하게 반해서 속앓이를 많이 했었는데, 마코토가 상담 상대가 되줬던 모양이었다. 준페이는 기운없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니가 쏘는 거냐?" "음... 빌리는 걸로 해주마."
둘은 시시한 잡담을 주고 받으며 교실 문을 나섰다.
"넌 진로 뭘로 정했냐?" "글쎄, 모르겠다야."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고 보니 요즘 다니는 독서실 총무 누님이 미인인데..." "아 놔 이 새끼 또 시작이네." "또래 여자애들은 유치하잖아. 시끄럽고, 연예인이나 밝히고. 여자란 역시 성숙하고 포용력 있는 누님이 최고라니까." "너 야동도 유부녀 마인드컨트롤 같은 매니악한 거 좋아하지?" "뭐임마? 난 어디까지나 순애 취향이거든?"
켄지는 찡그리면서 준페이를 노려보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준페이도 낄낄 웃으며 켄지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렇게 일부러 천박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실없이 키들대는 일상의 한 순간도 나쁘진 않다. 마코토 녀석은 이제 더 이상 없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얼레, 저기 타케바잖아?" "응?"
준페이는 복도 저편을 돌아보았다. 활이 든 가방을 둘러멘 유카리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준페이는 재빨리 말했다.
"미안, 먼저 가라. 라멘은 다음에 먹으러 가자." "어? 응..."
갸우뚱하는 켄지를 등 뒤에 남기고 준페이는 그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어이, 유카릿치!"
묻고 싶다. 너도 후카처럼 아직 슬픔에 젖어 있어? 그 녀석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어?
"응? 안녕 준페이. 어쩐 일이야?"
고개를 돌린 유카리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왔다. 무척 예쁘지만 약간 쌀쌀맞아 보이는, 남자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듯한 특유의 표정. 작년 이 무렵과 똑같았다. 왠지 모를 서운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준페이는 히죽 웃었다.
"어... 별 건 아니고, 오랜만에 만나보고 싶어서." "같은 반에 같은 기숙사잖아, 보기야 매일 보면서 무슨 소리야?" "그렇긴 한데, 쉬는 시간에도 점심 시간에도 넌 공부만 하고 있고... 말 걸기가 힘들달까, 말 그대로 얼굴만 마주치는 건 만나는 것과는 좀 다르쥐 아무래도~." "좀 바쁜데, 할 이야기라도 있어?"
준페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슬픔에만 빠져 있지 않는 건 뭐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좀 그렇지 않나?
"뭐 대단히 할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고... 어 그런데 그거, 활 아냐? 그러고 보니 오늘은 궁도부 활동 있는 날 아니었어? 궁도부실은 반대편인데..." "곧 3학년이잖아, 입시학원 등록했거든. 졸업할 때까지 궁도는 관두기로 했어. 궁도도 가벼운 마음으로 한 건 아니었고 마음은 아쉽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어... 그러냐."
유카리는 준페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작년에는 특별과외활동부 일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잖아. 너도 이제 마음 잡으라고 준페이. 학교 졸업하고 나서 진학도 취업도 애매하게 붕 떠 버리면 치도리한테 부끄러울 것 아냐?" "아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타케바 선생님..." "딱히 더 할 말 없으면 갈게."
유카리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보자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 녀석이 죽은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넌 정말 괜찮은 거냐?"
아차. 말 뱉고나서 준페이는 순간 후회했다. 유카리, 녀석을 좋아했었지. 그 녀석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상처가 될 지도 모른다.
유카리는 고개를 돌려 날카롭게 준페이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차갑고 단호하게,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서 말했다.
"지난 일에 매달려봤자 좋을 것 없어, 이오리 준페이." "....미안." "확실히 말해둘게. 마코토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 우리 모두를, 나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의 목숨과 미래를 지켜줬어. 어떻게 한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 "아무리 슬퍼해봤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마코토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주저하지도, 돌아보지도 않을 거야. 오직 앞만 바라보며 살아가겠어. 반드시."
준페이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둔한 그였지만 그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 너머에 깔린 엄청난 슬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페르소나 3 본편과, 후일담 에피소드 아이기스의 사이 시점이 배경. 이오리 준페이의 시점에서 본 특과부 동료들의 일상. 일부 묘사는 게임 본편이 아니라 극장판에서의 묘사를 차용했기에 게임과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다(그 김에 내가 지어낸 내용도 좀 있다). 3 엔딩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3 본편을 클리어한 사람만 읽기를 권한다.
이오리 준페이는 그 날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봄이 온 하늘은 한없이 맑고 드높았고, 그 하늘 아래 불어오는 미풍에 실려 벚꽃잎들이 휘날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돌았고, 거리는 떠들썩했다.
3월 5일. 지난 1년 동안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의문의 대규모 무기력증 발발 사건과 광적인 종말 숭배는 깨끗하게 가라앉은, 속된 활력과 열정이 넘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도쿄 미나토구 타츠미 포트 아일랜드에 소재한 월광관 고등학교의 2010년도 졸업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졸업생 대표로 전 학생회장 키리조 미츠루가 기념사 낭독을 위해 학생회관 단상에 올라서는 걸 지켜보며 준페이는 늘 쓰고 다니던 야구모자를 벗어들고 거칠게 머리를 긁었다. 옆에 앉아 있던 클래스메이트, 타케바 유카리가 작게 핀잔을 줬다.
"얌전히 좀 앉아 있어, 준페이. 딱히 친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1년 동안 같이 기숙사 쓴 선배잖아, 다시는 볼 일 없을텐데 예의는 지켜야지." "어, 그래."
준페이는 다시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입맛을 다셨다. 장내를 둘러보다가 저 만치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얌전한 인상의 소녀-분명 옆 반의 야마기시였지, 기숙사에서도 몇 번 본 적 있었다-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준페이는 다시 눈을 돌려 따로 앉아 있는 졸업생들을 살펴보다가 움찔했다. 복싱부의 주장이며 에이스인 사나다 선배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기숙사였고, 멋지고 강한 선배로서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오가면서 인사 정도만 몇 번 주고 받았던 사이일 뿐이었다. 얼른 시선을 피한 준페이는 모자 챙을 잡아당기며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마치면서 돌아보니, 1년 전 이 단상에서 저는 이렇게 말했었죠. 미래의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고....
키리조 선배의 차분한 음성을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약간 걱정스런 기색으로 유카리가 작게 소근거렸다.
"아까부터 답잖게스리 뭐야, 준페이 주제에. 몸이라도 안 좋아?" "유카릿치, 우리... 뭔가 굉장히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병으로, 아버지를 잃는 시련에...
유카리의 예쁜 얼굴에 그늘이 스쳐갔다. 그 표정을 보며 준페이는 확신했다. 나도, 유카리도, 약속을 했었다. 바로 이 날, 3학년들의 졸업식날.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약속을.
-병으로, 잃어...?
주변에서 나직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별일이네, 회장이 이런 자리에서 말이 막히다니." "자리가 이런 자리니까... 아버지의 추억이 떠올라 그런 거 아니겠어?" "회장도 인간이구나, 헤."
키리조 미츠루. 이 월광관 고등학교의 출자기업인 일본 굴지의 대기업 키리조 그룹의 계승자인 동시에 문무재색을 모두 갖춘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언제나 당당하고 단호하던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가슴의 고동이 격해지는 걸 느끼며 준페이는 거칠게 모자를 벗어들고 재차 물었다.
"마코토 녀석, 어디 있는지 알아?" "어머?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키리조 선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더 이상 졸업식 기념사가 아니었다.
-기억났어... "어...? 나 뭔가 중요한 걸..."
유카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준페이는 등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는 걸 느꼈다. 단단하고 확신에 찬 손길이었다.
"사나다 선배...!"
어느새 다가온 사나다 아키히코 선배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지는 내가 이어가겠어.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반드시 맞서 싸우겠어!
그 순간, 모든 것이 기억났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지구 상 모든 생명체의 확고하고 절대적인 '죽음'에 최후의 최후까지 맞서기로 했던 그 순간.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떨리다 못해 부서져 나갈 듯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 속의 결의를 끌어올려 맹세했었다.
'다시 평온을 찾은 이 거리가 잘 보이는 장소에서, 결코 돌아보지 않겠다는 지금의 결의를 기억과 함께 잃어버리지 않도록 꼭 거기서 다시 만나자.' '언제나 하던 것처럼.' '멍!' '같이.' '싸우겠어요.' '너만 믿는다!' '낙승이야.'
준페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나다 선배는 씨익 웃어 보였다. 어느새 후카도 다가와 있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유카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약속!" -내겐 소중한 친구들이 있고...
키리조 선배가 말을 맺지 못하고 단상에서 뛰어내리며 외쳤다.
"...그리고 어떤 미래가 오더라도 외면치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키리조 선배의 머리칼이 물결쳤다. 처음 보는 듯한, 순수한 기쁨이 담긴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가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그런데 만나기로 한 곳이..." "어디였었죠 선배님...? 그건 아무래도 아직..."
사나다 선배와 후카가 일순 주저했지만 유카리가 외쳤다.
"이 거리가 잘 보이는 곳!"
그 말을 듣는 순간, 준페이는 앞장서서 학생회관을 뛰쳐 나갔다. 자신도 그게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따라와!" 가슴이 터질 듯한 온갖 감정이 맹렬히 솟구쳤다.
"컹!"
코로마루가 헥헥대며 뛰어오고 있었다. 켄이 얼굴이 빨개진 채 숨을 헐떡이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저 뒤에서 수위가 쫓아오고 있었다. "얘들아! 거기 개랑 초등부 꼬마 좀 막아다오!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준페이는 외쳤다.
"가자, 약속을 지키러!" "죄송합니다, 잠시만 주무세요!"
사나다 선배의 외침과 함께 퍽 소리가 들려왔다. 준페이는 선두에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맹렬히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저 앞에, 이렇게나 모자라고 한심한 나를- 추한 질투심과 자격지심에 휘둘리던 나를 친구라고 부르며 웃어주던 녀석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야 나도 가슴을 펴고 녀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나 자신을 녀석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렇기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절대 멈출 수 없다.
"어이-!"
월광관 고등학교 옥상.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벤치에 앉은 아이기스의 무릎을 베고 친구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희디 흰 얼굴을 보는 순간, 아주 잠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마코토..."
아이기스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워들어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많이 피곤했나봐요, 지금은... 그를 좀 쉬게 해주세요." "아, 뭐야 마코토 녀석! 거하게 뒷풀이하려고 했는데!"
준페이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옆에서 유카리가 팔꿈치로 준페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얏." 머쓱하게 머리를 긁는 동안 코로마루가 다가가 꼬리를 흔들며 마코토의 볼을 핥았다.
"그간의 긴장이 뒤늦게 풀린 모양이야. 자게 두자고, 준페이."
사나다 선배가 쓴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키리조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날씨지만 이렇게 두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일단 기숙사에 눕혀두자, 내가 차를 부르지." "고마워요. 사나다 선배님은 졸업 후에도 당분간 근처에 머무를 거죠?" "그래, 타케바. 마코토가 깨어나고 나면 크게 파티를 하지." "본가는 좀 떨어져 있지만 날짜가 잡히면 언제든 오겠다. 선약을 취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라가키 씨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켄이 말끝을 흐렸다. 사나다 선배는 빙그레 웃으며 그런 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헝클어 뜨렸다.
"어린애 취급 마시라니까요."
켄은 볼멘 소리를 했지만 그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런 둘을 보며 후카가 활짝 웃었다.
"사나다 선배님도 많이 부드러워지셨네요." "글쎄... 내가 변했다면 마코토 녀석과 함께 한 시간 때문이겠지."
대화를 들으며 준페이는 아이기스와 마코토에게 다가갔다.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쌔근쌔근하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오고, 가슴이 작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래, 좀 자라. 아이기스, 도와줘."
준페이는 조심스레 마코토의 상체를 일으켜세워 업었다.
"제가 하는 쪽이 낫지 않겠어요, 준페이 님?" "아니. 내가 하게 해줘. 부탁해, 아이기스."
사나다 선배와 키리조 선배는 다시 졸업식장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기숙사에 도착했다. 아이기스가 도와주겠다고 한번 더 제안했지만 준페이는 끝까지 거절하고는 마코토를 업고 2층으로 올라가, 그를 침대에 눕혔다.
햇볕이 비스듬히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마코토의 볼을 쓰다듬었다. 준페이는 깊이 잠든 친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자식... 잘 생기긴 참 잘 생겼어, 좀 기생오라비같아서 부럽지는 않지만. 역시 남자라면 아라가키 선배처럼 키 큰 근육질 마초여야지! 뭐, 나는 치도링에게만 잘 생겨 보이면 되니까 괜찮아."
가는 숨소리가 곧 끊어질 듯 희미하게 들린다.
"그러고 보니 나도 너도 서로 방에 놀러간 적은 한 번도 없구나. 남자끼리는 같이 밤새 게임하거나, 만화책 보거나, 야한 거 보거나, 그러면서 노는 것도 재미인데 말이지. 뭐 그 동안은 통 여유가 없었으니까. 다음엔.... 꼭 같이 놀자. 아 참, 그러고 보니 넌 토못치와도 친하지? 셋이서 말이야. 미야모토 녀석도 부를까? 그 녀석 땀내나는 열혈바보라서 좀 노잼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은 녀석이니까. 데빌버스터 온라인2 같이 할래? 아니면 과자 먹으면서 슈퍼 히어로 영화 DVD나 볼까? 영화관과는 달리 늘어져서 떠들며 보는 재미가 또 각별하거든. 그것도 아니면 이오리 준페이 아워 한 번 더 해볼까?"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창백하다.
"이젠 정말로 모든 싸움이 끝났으니까... 마음 편하게.... 실컷 노는 거다, 마코토. 알겠지?"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꼭이다, 친구. 푹 자고, 내일 보자고."
준페이는 불을 끄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아이기스가 침대 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는 그를 발견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오리 준페이는 그 날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봄이 온 하늘은 한없이 맑고 드높았고, 그 하늘 아래 불어오는 미풍에 실려 벚꽃잎들이 휘날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
그 날 이후의 나날들은, 기억이 흐릿하고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억지로 기억하려고 해봤자 희미하게 떠오르는 건 마치 빛바랜 옛날 사진들처럼 중간중간 끊긴 풍경들 뿐이었다.
녀석의 장례식. 관을 껴안고 통곡하던 유카리. 조용히 흐느끼던 후카. 검은 베일을 쓴 채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던 키리조 선배. 어두운 표정으로 조문객을 응대하던 사나다 선배. 하늘을 향해 슬프게 포효하던 코로마루. 평소와 달리 어른스러운 척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소리내어 울던 켄. 아이기스는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다. 방문을 닫아 걸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코토 녀석의 폰에 저장되어 있던 번호들을 통해 전체 메일로 부고를 전했더니, 많은 이들이 찾아왔었다. 늘 조용하고 쿨해 보이던 그 녀석의 인간관계가 이렇게 다양했나 놀랄 정도로.
쿠로사와 순경은 정복 차림으로 나타나 영정 앞에 서서 경례를 붙였다. 상복을 입은 마요이당 점주 역시 이제 행복해질 때도 됐는데 허무하게 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와일덕 버거 옆의 헌책방 노부부 내외는 아들도 늙은 우리보다 먼저 가버렸는데 왜 손주 같던 애까지 먼저 가는 거냐면서 눈물흘렸다. 토모치카 켄지는 하가쿠레에서 녀석과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학생회의 오다기리 히데토시는 정중히 예의를 갖췄지만 눈이 빨개져 있었다. 함께 온 후시미 치히로라는 1학년생은 아무 말도 못하고 울다가 기절했다. 히라가 케이스케라는 선배는 녀석의 주치의가 되겠다고 약속한 바로 다음 날 죽어버렸다고 한탄했다. 미야모토 카즈시는 자신도 무릎이 거의 다 나았는데 왜 넌 근성 없이 꼼짝 못하고 누워 있냐고 울먹거렸다. 토리우미 이사코 선생님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게 "거짓말쟁이"라고 중얼거렸다. 니시와키 유우코는 조문객 응대와 식탁 정리를 하며 쉴 새 없이 돌아다녔지만 눈빛이 텅 비어 있었다. 학교에서 몇 번 본 앙드레인가 하는 프랑스 유학생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고 했다. 앙드레는 프랑스에서 열린 청소년 패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받은 거라면서 입선 트로피를 녀석의 영전에 바쳤다. T라는 명의를 쓰는 정체모를 누군가가 최고급 화환과 함께 40만 엔이나 되는 조의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낯선 초등학생 소녀가 어머니와 함께 찾아와서는 "마이코가 크면 결혼하기로 했잖아"라면서 내내 울다가 지쳐 잠들어 버리기도 했다. 스에미츠 노조미라는 뚱뚱한 동급생은 "이 세상 모든 맛있는 걸 먹어봤다고 자랑할 상대가 하나 더 늘었지만, 이런 식으로 늘어나길 바라지는 않았다"고 탄식했다. 무타츠라고 하는 낯선 스님은 생전 녀석과 인연이 있었다면서 돈을 받지 않고 밤새 경을 읊어 주었다. 녀석의 육상 라이벌이었다던, 하야세 마모루라는 타 학교 학생은 "언젠가 네가 있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내 삶을 열심히 달리겠다"고 영정 앞에서 맹세했다. 카미키라고 성을 밝힌 중년 여인은 녀석이 자신의 죽은 아들과 친구였다고 했다. 카미키 부인은 밤새 일을 돕고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아들이 살면서 많은 걸 나에게 줬듯, 유키 군도 여러분에게 많은 걸 줬을 것이니 그걸 소중히 하라"고 당부했다.
오랫동안,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미지'이며 '영원히 해명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 범위에는 한계가 있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정신은 이미 온갖 세속적, 물질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도 그에 종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만큼 죽음과 그 이후에 있는 것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는 힘도 약해지고, 그걸 현실감 있는 공포로 받아들이는 감각 자체가 약해지지 않을까? 요즘 범죄자가 발각될 것 같자 자살했다는 뉴스가 유독 자주 보이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감옥에 가고 이후의 삶이 꼬일 거라는 공포가 죽음과 그 이후에 있는 것에 대한 공포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저 죽음에 대한 공포 자체가 둔감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 사람이 더 이상 후자를 상상할 수 없게 된 거라면?
그것이 극한 상태에 몰린 범죄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미 한국은 OECD 가입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찍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현 대통령은 천박하고 우둔하기 그지 없는 윤석열이고, 그를 바지사장으로 삼아서 이 나라의 옛 기득권은 남은 2년 반 동안 최대한 해 먹고 이 나라를 뜨겠다는 기세로 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다.
한동안 잠잠하다고 여겼는데,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짧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살던 마을에도 징집령이 떨어졌고, 나 역시 성지의 수복을 위해 검을 다시 찼다. 아내는 솔직히 이 전쟁이 성스러운 것인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디 몸 성히 돌아오기만 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짐짓 화내는 척했지만 아내가 진심으로 날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코흘리개 아들 녀석도 아비가 먼 곳으로 떠난다는 걸 눈치챘는지 오늘은 조용했다. 언제나처럼 간소한 식사를 마친 뒤 아내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마굿간에서 말을 끌어냈다. 아내는 웃으면서 나를 전송했지만 밤새 울었는지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아들은 날 빤히 올려다 보며 손을 흔들었다. 반드시 돌아와서 다시 아내와 아들을 안아줄 것이다.
전장으로 향하는 동안 수많은 징집병들이 곁을 지나쳤다. 나는 모아둔 돈이 좀 있어서 검과 말이라도 챙길 수 있었지만, 저들은 보병으로서 조잡한 창과 가죽갑옷만 지급받고 최전선에 내몰릴 것이다. 다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성전에 동참한다는 자긍심이 뒤섞인 눈을 하고 있었다. 이들 중 몇이나 살아남을까?
1년차-
전쟁터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이교도들을 베어 넘기면서, 그들의 얼굴에 가득한 분노와, 두려움과, 고통과, 슬픔, 그리고 놀랍게도 연민을 보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다. 그들을 사악한 이교도들이라고만 여겼지만 이 전장에서 마주치는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이 전장에 신은 없으며, 오직 다 같은 인간만이 존재한다. 싸우고 싶지 않다, 죽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입은 기도문을 외우고, 등자에 얹힌 내 발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내 손에 들린 검은 적의 목숨을 앗아간다. 내가 방금 베어 죽인 이조차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 나를 미치게 한다.
2년차-
부대를 지휘하던 십부장이 전사하는 바람에 최선임이었던 내가 십부장이 되었다. 이제는 내 명령을 따르고 내게 의지하는 부하들이 있다. 지금까지 싸워오며 깨달은 것은, 칼날을 날카롭게 하는 것만큼이나 스스로의 정신을 둔탁하게 만들어야만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적에 대한 연민을 버려야 한다. 오직 승전 후의 약탈이 주는 쾌감과, 신에 대한 신앙으로 자신의 정신을 무디게 해야 한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하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해가 불그스레하게 저물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아내와 아들이 그립다.
3년차-
또 다시 진급했다. 이제 난 부사관이다. 오늘은 오전 내내 요새 건설을 감독하고, 오후에는 포로로 잡은 적병을 심문한 뒤 처형했고, 저녁 때는 보고서를 썼다. 더 이상 이교도들에 대한 동정심 같은 것도 들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적일 뿐이고, 적은 죽여야 할 상대일 뿐이다. 내일 새벽,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 때 기습 작전이 있다. 남자건 여자건, 어리건 늙었건, 건강하건 병들었건, 이교도는 모두 죽일 것이다, 만에 하나 그 중에 의로운 자가 있다면 신께서 골라내시리라.
4년차-
어제 사령관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의외로 전혀 떨리지 않았다. 사령관은 무릎을 꿇은 내 머리와 양 어깨를 칼등으로 한 번씩 살짝 두들기고는 "성스러운 빛의 전사" 같은 말을 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지만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서임식을 마치고 술을 마시면서 농부 레이널드는 죽었고, 이제 여기엔 기사 레이널드가 남았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창문 밖의 하늘이 온통 검붉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내와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5년차-
전쟁이 끝났다. 이번에도 성지의 수복은 실패했다. 양측 총사령관은 휴전 협정서에 서명한 뒤 악수를 나눴다. 부대는 해체되었고, 나는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는, 약간 주름이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눈을 가진 소년이 내게 인사하고는 정중하게 묻는다. "고귀하신 기사님, 혹시 저희 아버지를 아십니까? 레이널드라는 분입니다만..." 달콤한 바람이 깔끔하게 개간된 밭 위로 불고, 활짝 핀 꽃들이 정원에 넘실거린다. 그림으로 그린 듯이 완벽한 평화와 행복의 모습이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보면 하늘은 끝없이 검붉게만 보인다. 이제 나는 안다. 저 하늘의 색은, 살육과 약탈, 고문, 강간, 수많은 죄악으로 점철된 성기사의 영혼의 색깔임을. 저 평화와 행복 속에 스스로를 끼워넣을 수는 없다. 농부 레이널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기사 레이널드는 불가능하다.
나는 투구를 벗고 여인과 청년을 껴안는 대신, 그런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언젠가 가족에게 돌아가면 이걸로 다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하며 약탈한 금화와 보석이 가득 담긴 자루를 반강제로 청년에게 건네 준 나는 말머리를 돌려, 전쟁 중에 얼핏 소문을 들은 한 영지로 향한다. 소문에 따르면 그 영지를 다스리던 선대 가주가 방탕한 삶에 질린 끝에 흑마법에 손을 댔고, 고대의 악마를 깨웠다고 한다. 한 때는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그 영지는 이제 끔찍한 괴물과 산적으로 넘쳐나는 지상의 지옥이 되었고, 현 가주는 영지를 수습하기 위해 용병을 모으는 중이라고 한다.
시장에서의 수요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족성을 우선하면서 그걸로 먹고 살 만큼 벌고 싶다는 건 지나친 욕심이 맞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지 않은 글은 쓰지 못하는 인간인 것도 맞다.
나는 내가 그러하다는 사실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간신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서, 쓰고 싶은 소설을 쓰고 싶은 방식대로 쓰다가 죽는 것도 나름 낭만이야. 난 부양해야 할 가족도, 나를 걱정할 만한 친구도 없으니까. 한 번 뿐인 삶이라면, 이것도 이것대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왕이면 빨리 죽어서, 아무 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으면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스승께 그렇게 여쭸었다. 스승은 천애고아이던 나를 거둬 키우고, 신비한 지식을 가르치고, 공부 시간이 끝나고 나면 내 손을 잡고 저녁 장을 보러 가거나 놀아주곤 했다. 엄격하면서도 온화했던 스승은 내게 있어 친부모나 다름없었다.
내 고향과, 피부 흰 자들이 사는 서방 국가들은 항상 전쟁 중이거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무렵 스승은 군의 겸 특수 자문으로 군대에 고용되어 있었고, 나도 조수로서 함께 전투가 끝난 전장을 돌며 부상병의 응급처치와 후송을 감독하곤 했다. 드넓은 사막의 모래가 전부 피로 붉게 물든 걸 보며 창백하게 질려 한참 구역질을 하던 내가 던진 질문에 스승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었다.
“알하자드,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겉으로 드러난 면과 뒤에 감춰진 면이 존재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예, 스승님. 그리고 두 면모를 모두 살필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도요.”
“그 자들이 우리에게 품는 증오와 원한도 마찬가지란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그 자들은 ‘빛’으로 상징되는 어떤 신을 섬기고 우리는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우리가 사막에서 살면서도 풍요를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인 오아시스들 근처에 빛 신앙을 대륙 서부에 퍼뜨린 고대 제국의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도. 그들은 그곳을 성지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무단으로 성지를 점령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우리가 동방과 교역을 하며 얻은 재물을 탐내고 있기도 하고. 물론 그것들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긴 하단다. 그리고 감춰진 이유는….”
순간, 스승의 눈빛이 변했다. 언제나 따뜻하던 그 눈이 형언할 수 없이 깊은 증오로 번뜩였다.
“빛 신앙에서 섬기는 그 ‘신’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피부 흰 자들의 왕과 귀족, 성직자들도 무의식적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단다, 알하자드. 하지만 빛으로 상징되는 신이라는 이름의 권위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또한 그 사회의 정점에 있는 그들의 권력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그에 매달리고 우리를 사악한 불신자 취급하는 것이지.”
“그들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난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붉은 사막에 해가 저물고, 우리와 함께 나온 병사들은 시신들 사이를 헤매며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들을 찾아 낙타가 끄는 수레에 싣는 모습이 배경으로 보였다. 황혼의 빛을 얼굴 절반으로 받으며, 스승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평생 존경하며 따라왔지만, 빛과 어둠이 반씩 나뉜 그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낯설어 보였다.
“아직은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란다. 하지만 너도 알 때가 됐지. 머지않아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알게 될 게야. 이번 일이 끝나면 내가 나의 스승님께, 그리고 스승님이 그 스승님께, 다시 그 스승님께 진실을 배워 온 곳으로 널 데려가마.”
+
그러나 그 약속은 이후 몇 년이나 지켜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나자, 스승은 더욱 바빠졌다. 나도 학자로서 한 사람 몫을 하게 되어 독립할 자격을 얻었지만 난 여전히 스승의- 내 가족의 수발을 들며 함께 지내는 것이 행복했다. 지금도 여전히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읽고 쓰기와 숫자 계산을 가르치고, 세계 각지를 오가는 유물 수집상에게서 희귀한 책을 사들이고, 청소와 요리를 하고, 짧으면 며칠에서 길면 한 달 정도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는 스승을 기다리던 그 나날들을 그리워한다. 해가 저물 무렵이 되면 이 집 저 집에서 등불이 밝혀지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거리에서 뛰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던 그 날들이.
스승이 나도 거의 잊어버리고 있던 그 약속을 입에 올린 건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였다. 이번에도 몇 달이나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 온 스승은 그날따라 몹시 기분이 좋아보였다. 스승은 서방 대륙의 나라들 사이에서도 빛 신앙의 교리가 거짓된 것이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평소엔 입에 대지 않던 야자술을 잔뜩 마시고는 취한 채 물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실 이번엔, 피부 흰 자들의 왕 중 하나가 나를 불렀다. 왕자가 큰 병이 걸렸으니 낫게 해달라고 부탁하더구나. 난 왕자를 치료해주는 대신,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우리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단다.”
“‘우리’라고요?”
난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스승의 말투로 보아 자신과 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지칭하는 듯했다. 말하자면 어떤 조직 같은. 스승은 허공에 흰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젠 이야기할 때가 되었구나. 곧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한 규모의 결사단이 조직될 게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을 틔우고, 지금까지 스스로를 구속하게 만들던 신이 존재하지 않는 미래로 인도할 게야. 그 전장에서 했던 약속을 기억하느냐? 그곳으로, 널 데려가마.”
“영광입니다, 스승님.”
난 그제야 그 날의 약속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사실 거창한 대의보다는, 그저 계속 지금처럼 스승과 함께 살며 공부를 하는 날들이 지속되는 걸 내심 더 원했다. 고고학, 종교학, 수학, 의학, 건축학, 인류가 대대로 발전시켜 온 그 많은 지식의 정수들에 둘러싸여 스승과 이렇게 식사를 하고,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는 이 날들이.
“하지만 말이다, 알하자드. 그 전에 치러야 할 시험이 있다. 지금의 너라면 분명 통과할 수 있을 거다.”
+
스승이 날 데려간 곳은, 대사막 어딘가 있는 황량한 탑이었다. 마치 가시가 돋아난 후광 같은 장식이 달린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가면으로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와 태도에서 대단히 젊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그러나 난 어딘지 모르게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자태에는 어딘지 모를 독기가 깃들어 있었다.
“여기서, 우린 어떤 실험을 하고 있단다. 과연 이 인간이 우리가 열 미래로의 길을 걸을 자격이 있는지를 말이다.”
스승의 미소는 언제나처럼 따뜻했지만, 난 불길한 한기만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 ‘실험’을 보았다. 쇠사슬과, 각종 의료도구와, 독약들을. 그리고 유리관 속에서 끓어 넘치는 유독한 녹황색 증기와, 머리칼 절반이 깎여 나가고 고문이나 다름없는 실험을 거치며 피폐해진 ‘실험체’와, 그리고 스승이 섬기고 있던- 더 없이 강대하고, 도저히 표현할 단어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불경하고 끔찍한 존재의 모독적인 편린들을 보았다. 방에 단 둘만이 남게 되자, 스승은 충격을 받은 날 설득하려고 했다.
“이제 곧 실험의 마지막 단계란다. 저것에게 이 약을 주사하는 거야. 견딜 수 있다면 저것은, 인간이 다음 단계로 진보할 수 있다는 증명이 될 테지. 신이 없는 세상을 거닐 자격이 있다는 증명 말이다. 네가 직접 해야 한다, 알하자드. 이건 너에게 주어진 시험이기도 하다.”
난 격노해서 대들었다. 이전의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이게 대체 다 뭡니까? 스승님은, 인간이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거짓말이었습니까? 피부 흰 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저지르는 일과 이게 뭐가 다릅니까!”
그러나 내가 지금껏 알아 온, 따스하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스승은 대답했다.
“바로 그게 피부 흰 자들이 눈 멀고 귀 멀었다고 하는 이유다. 그들은 자신들의 광신으로 서로를, 그리고 자신들을 망가뜨리고 있어.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건 신이 아니다. 그 이상의 존재지.”
나는 미친 듯이 분노했고, 슬퍼했고, 절망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사실만은 너무도 뚜렷이 깨달았다. 스승이- 그리고 이 정체 모를 비밀결사가 인류를, 그리고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란 사실을.
“내게 있어서도 넌 특별해. 난 네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 없다. 난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 미쳐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재산에 미쳐서 전쟁을 저지르는 피부 흰 자들의 지배층을 혐오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조종당하는 수많은 이들은 진심으로 동정하고 있어. 난 그들이,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로워지길 원한단다 얘야.”
스승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신보다도 위대한 그 분의 이름 아래, 인간을 구속하는 어떤 법도 교리도 도덕도 관습도 없는- 모두가 환희 속에서 서로 빼앗고 범하고 죽일 수 있는 세상이 내가 꿈꾸는 미래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란다. 그곳으로 함께 가자꾸나, 알하자드.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난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직감했다. 나에 대한 그 엄청난 사랑을 느끼면서, 눈물 흘리며 단검을 뽑아들어 내 아버지의 심장을 찔렀다. 그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흘린 마지막 눈물이기도 했다.
+
실험체로 잡혀 있던 남자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난 혼자였고, 곧 내가 한 짓을 눈치 챈 자들이 공격해올 게 뻔했다. 내겐 스승의 시체를 둘러매고 탑에서 도망쳐 나올 여유 밖에 없었다.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내 유일한 가족이던 사람의 장례만은 내 손으로 치러주고 싶었다. 미칠 것 같은 감정의 폭풍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였다.
도망쳐 나온 나는 그 어디에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누가 스승이 속해 있던 비밀결사의 조직원인지 겉으로는 전혀 알아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나는 광기에 가까운 절박한 열정에 사로잡혀서 스승이 섬기던 존재에 대해 연구했다. 내가 쌓아둔 고고학과 종교학적 지식은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내 고향과 서방 대륙의 국가들 간에는 또 전쟁이 벌어졌다. 이제 나는 여전히 가는 곳마다 약탈과 강간과 파괴와 살육을 저지르는 피부 흰 자들이 싫을망정, 증오스럽지는 않았다. 전쟁통에 그런 짓은 내 고향의 군대도 똑같이 저지르고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결국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이라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스승이 남긴 일지 속에 암호의 형태로 적혀 있던 대사막 가운데의 피라밋에 대한 내용을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결사의 입문자들이 자신의 영혼을 이물(異物)-원래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부정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밖에는 표현하지 못하겠다-에게 넘기는 의식을 치르는 장소이기도 했다.
다시 몇 년 동안이나 준비를 한 뒤 나는, 상자에 스승의 시신을 넣고 피라밋으로 향했다. 의식의 완성에는 뛰어난 자의 두개골이 필요했고, 난 스승 이상으로 그에 적합한 자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난 그 피라밋 안에서, ‘그것’을 만났다.
아. 나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난 내가 배우고 익혀 온 온갖 지식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대를 이어 그러한 지식을 쌓아 올려 온 인간임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내가 고향을 공격해 오고 온갖 만행을 저지른 서방 대륙의 피부 흰 자들을 싫어하면서도 그들을 진정으로 미워하지 않았던 건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피라밋의 벽화와 먼지 쌓인 고서적들 속에서 내가 본 것은 고고학, 수학, 철학, 신학, 점성학, 동서를 막론하고 그 많은 인간들이 연구해 온 온갖 학문들이 그 궁극의 영역에서 거대한 통섭을 이루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통섭은 한없이 끔찍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모든 별들이 제 자리에 도달하고 나면, 이물들이 이 세상으로 넘어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스승이 꿈꿨던 미래가 실현되리라는 것을. 난 그 기억을 지울 수 없다. 난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난 그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유일하면서도 불안한 희망은, 그러한 이물들조차도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서로 경쟁하고 대립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거대한 붉은 갈고리를 닮은 촉수 형태의 신상 앞에 서서 스승의 두개골을 매개로 삼아 치른 의식을 통해, 그러한 이물들 중 하나를 나 자신의 몸에 강림시켰다. 그리고, 그것과 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힘을 주고, 내가 죽고 나면 내 영혼을 가져간다’는 계약을 맺었다. 유리병에 담겨 있던 모래로 그린 원 안에서 “계약은 성사되었다”고 선언하고 그것과 나의 영혼이 교차하는 순간, 환상을 보았다. 어떤 쇠락한 영지, 방탕한 삶에 질려 버린 사악한 영주가 남긴 끔찍한 유산을.
하여, 이제 나는 홀연히 사막 저 너머의 세상으로 향한다. 그 세상 끝, 그 존재가 기다리는 가장 어두운 곳으로. 결국 그 존재를 물리칠 수 있다 해도, 내 영혼은 내 안의 이물에게 삼켜질 것이다.
난 기쁘게 그 날을 기다릴 것이다. 나 자신이 결코 꺼지지 않는 별의 불꽃이 되어, 지옥의 문을 닫아 걸을 그 날을.
이 공식 만화를 보고 삘 받아 쓴 것. 본문에 언급되는 '사막의 나라와의 전쟁'은 당연히 십자군 전쟁. 이 외에도 성전사 역시 이 때 참전했다거나, 중보병 역시 용병으로 고용되어 참전했었다거나, 본문에 언급되는 흑마법사는 핫ㅅ... ...신비학자의 스승이라거나, 괴인은 흑마법사가 관련된 인체실험의 희생양이었다거나, 야만인의 고향에도 다키스트 던전 지하의 '그것'과 비슷한 악마의 전설이 있다거나 뭐 그런 망상을 좀 해봤다.
잠이 오질 않나 보구나, 얘야. 뭐? 또 그 꿈을 꿨다고? 땅 아래, 끝없는 어둠 속에서 끔찍한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는 그 꿈? 울지 말거라, 걱정할 필요 없단다. 그렇지, 오늘은 옛날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마.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무 걱정도 들지 않을 거다.
옛날, 어떤 왕국이 있었단다. 왕국은 한 때는 강성했지만 오랜 기근과 역병으로 점차 쇠락해가고 있었어. 게다가 왕가에는 오랫동안 후사를 이을 왕자가 태어나지 않았었지. 한 때는 강하고 부유한 나라였으니만큼 그럭저럭 꾸려나가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 보이고 있었지. 왕과 왕비는 왕국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멸망해가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는 그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매일 정무가 끝나고 나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실에 틀어박혀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위대한 빛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 결국 빛조차 그 정성에 감동했는지, 왕자가 태어났어. 어린 왕자는 영리했지만 몸이 무척 약했단다. 그래서 왕과 왕비는 왕자가 잘 자라서 왕위를 이어 받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도 혹시 큰 병에 걸려 죽지나 않을까 걱정했단다.
왕자가 피를 토하며 쓰러져서 의식을 찾지 못한지 열흘째 되던 날, 왕과 왕비는 근심을 억누르다 못해 결국 빛께서 금지한 수단에 손을 대기로 결심했지. 광활한 대사막 건너 동방에 신비한 사막의 나라가 있었는데, 사막의 나라는 빛을 섬기지 않았기에 왕국을 비롯한 서방 대륙의 나라들과는 오래 전부터 적대관계였어. 그 사막의 나라에서 온 흑마법사에게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으니 왕자를 건강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거야.
흑마법사가 대가로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하지만 왕자는 기적처럼 건강해졌어. 몇 년 뒤 왕과 왕비는 승하했고, 왕자는 젊은 나이로 왕좌에 올랐어. 그 후 수십 년 동안이나 왕자는, 아니 이제는 왕이지. 왕은 현명하고 자비롭게 왕국을 잘 다스렸고, 몇 번 정도 사막의 나라와 전쟁도 벌어졌지만 모두 승리했단다. 모든 이들이 왕의 이름을 칭송했지. 왕국의 역사, 나아가 서방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그만큼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왕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거야.
그러면서도 세월이 흘러, 다시 사막의 나라와 전쟁이 벌어졌어. 이번엔 몇 년이나 이어지는 큰 전쟁이었지. 서방 대륙의 나라들은 연합군을 결성해 동쪽으로 파견했고, 이제는 나이가 든 왕도 그 일원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단다. 하지만 큰 전투에서 패배하고, 왕은 소수의 친위대와 함께 고립되었지. 그 때 전장에 흉측한 악마들이 나타났고, 악마들은 끔찍한 힘으로 양 세력을 모두 공격하기 시작했어. 왕은 지금까지 싸우던 사막의 나라 군대 지휘관에게 특사를 보냈고 급히 악마에 대항하는 임시 동맹이 맺어졌단다. 처절한 싸움 끝에 전장에 남은 건 오직 왕과 우두머리 악마 단 둘 뿐이었지. 우두머리 악마는 결국 왕이 휘두르는 육중한 대검의 칼날 아래 쓰러졌지만, 마지막 순간 왕의 이름을 부르며 비웃었지. 우두머리 악마는 바로, 어린 시절 죽을 뻔한 왕을 살려낸 그 흑마법사가 섬기던 존재였던 거야. 악마는 선왕과 왕비가 치렀던 끔찍한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밝히며 너의 존재 자체가 빛에 대한 끔찍한 죄악이라고 왕을 조롱한 뒤 사라졌단다.
사막을 헤매던 왕은 그를 찾아 헤매던 정찰병들에게 발견되어 간신히 주둔지로 돌아왔지. 기나긴 전쟁에 양 세력 모두 지쳐 있었고, 곧 휴전조약이 맺어졌지만 ‘성지’는 사막의 나라가 가져갔지. 말이 좋아 휴전일 뿐 사실 패전이나 다름없었어.
사랑하는 왕국으로 돌아 온 왕은 전처럼 낮에는 국정에 전념하고 밤에는 책을 읽었지만 내심으로는 결코 자신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 왕의 명민하던 눈은 총기를 잃었고, 고뇌와 절망으로 흐려졌어. 게다가 왕의 육체까지 더럽혀지기 시작했단다.
문둥병, 위대한 빛께서 내린 천벌. 피부의 감각이 없어지는 걸로 시작해 산 채로 몸이 썩어 들어가는 무서운 병. 왕은 그 병에 걸렸어. 요즘은 몇몇 의사들이 문둥병도 그저 병일 뿐 천벌이나 저주 같은 게 아니라고 조심스레 주장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만, 왕은 의심을 떨칠 수 없었어. 이 병은 위대한 빛께서 내린 벌이 아닐까? 아니면 이 역시 선왕 폐하와 비 전하가 치러야 했던 그 대가의 일부일까?
처음에는 두꺼운 화장과 의복으로 충분히 증세를 숨길 수 있었지만 잠깐 뿐이었어. 외국의 사절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실수로 나이프에 손을 크게 베었는데도 고통을 느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는 것부터 해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지. 왕은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공식석상에 나갈 수 없다고 선포하고는 장막 뒤로 물러나 통치를 계속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단다. 자신의 병이 퍼져나갈 가능성, 권력 불안정으로 인해 신하들 사이에 암투가 생길 가능성을 걱정한 끝에 결국 힘든 결단을 내렸어. 건강이 나빠져 왕위를 친척에게 양위하고는 요양을 위해 먼 곳으로 떠날 것을 선언한 거지.
아끼던 검을 차고, 붕대를 새로 감고 가면을 고쳐 쓰고, 왕자 시절부터 아끼던 주석 플루트와 즐겨 읽던 시집들 몇 권만을 챙긴 왕이 수도를 떠나는 날이 왔어. 수천, 수만에 달하는 백성들이 거리로 나와 꽃을 뿌리며 눈물을 흘렸단다.
국경까지 마지막으로 왕을 전송했던 수행원이 왕께 청했지.
“제가 섬길 분은 한 분 뿐입니다. 어디까지고 함께 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경의 봉사는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와 백성에게 바쳐져야 하네. 왕은 그를 위한 도구일 뿐이지. 허락하지 않겠네.”
그 분은 고개를 들어 한 때 자신이 왕으로서 다스렸던 나라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말씀하셨단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으로군. 이 풍경을 지키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결심했었고, 이제 마지막으로 나 자신을 바칠 때가 왔네. 난 행복했었어. 하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때로군, 마치 기나긴 밤이 끝나고 아침 햇살이 내리쬐면 밤의 어둠과 함께 사라져야 할 새벽이슬처럼."
“어디로 가실 것인지, 그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아직 정하지 않았네. 다만, 전쟁 도중 어떤 영지의 소문을 들었지. 왕이었던 자가 죽어 묻힐 곳이자… 마지막으로 남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곳.”
왕이셨던 분, 또한 여전히 왕이신 분은 슬퍼 흐느끼는 수행원에게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빛의 경전 구절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축복을 내리시고는 어둠이 내리는 머나먼 땅으로 홀로 떠나셨단다.
편히 잠들거라, 얘야. 그 분은 지금도 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싸우고 계시단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
젊은 가주는 집무실에 앉아 눈 밑에 낀 검은 기미를 쓸어내렸다. 눈꺼풀 안쪽에 모래알이 가득 낀 듯했다. 선조의 편지를 받고 이 영지에 도착한지도 어느덧 몇 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필사적으로 일한 결과 산적 여단이 장악하고 있던 옛 길의 안전은 어느 정도 확보되었고, 그를 통해 외부의 용병 및 상인들도 왕래하기 시작했다. 바로 지난주엔 폐허 깊은 곳에서 시체를 되살리고 있던 사령술사를 쓰러뜨렸다는 낭보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지를 둘러싼 숲에는 독기가 어려 있었고, 저택 지하에 펼쳐진 광대한 폐허에서는 생명 없는 백골들이 헤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으며, 버려진 사육장으로 이어지는 지하도에서는 악취가 풍겨 나왔고, 굳게 입구가 걸어잠긴 안뜰 너머에서는 요사스런 핏빛 안개가 맴돌았다. 해안을 적시는 파도소리는 불길했고, 반쯤 무너진 방앗간이 버티고 선 황폐한 농장에서는 밤마다 섬뜩한 녹색 광채가 일렁거렸다. 선조가 편지에서 경고했던, 가장 어두운 던전 속의 형언할 수 없는 악마를 상기할 때마다 모골이 송연했지만, 해내야만 했다.
가주는 책상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는 품위 있는 동작으로 계약서를 집어 꼼꼼하게 읽었다. 문득, 피로한 와중에도 가주는 남자의 말투나 태도가 굉장히 정중하면서도 고풍스럽다고 느꼈다. 용병은 거칠고 상스런 자들이고, 글 같은 건 아예 모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시스터 주니아나 파라켈수스 양처럼 돈만이 아니라 도덕적 대의나 종교적 신념, 희귀한 지식 등을 원해 영지로 온 이들도 가끔 있었지만, 이 남자의 분위기에는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독특한 데가 있었다. 이제는 몰락했지만 아직 찬란하던 과거의 잔광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이 영지의 저 까마귀 문장처럼.
천천히 저무는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집무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남자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남자는 ‘볼드윈’이라는 이름을 계약서 서명 란에 적어 가주에게 돌려주었다. 힘차면서도 유려한, 서명한 자의 지성과 교양이 묻어나는 필체였다.
“볼드윈 씨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혹시 예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 그저 개인적 흥미일 뿐이니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영주님. 전 죽을 곳을 찾아 온 병든 떠돌이일 뿐입니다. 예전에는 어쨌건, 지금의 저는….”
...이글루릭 섬에 사는 이누이트 족 노인에게는 (조상 대대로 이어 온 능력을 감퇴시키는) GPS 기술 도입이 문화적 비극이라며 안타까워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방향표시가 잘 되어 있는 대로들이 종횡으로 놓여 있고, 주유소, 모텔, 세븐 일레븐 편의점들이 즐비한 곳에 사는 우리는 대부분 이미 오래 전 놀랄 만한 길찾기 기술 활용 관습과 능력을 모두 잃어 버렸다. 특히 자연적 상태에서 지형을 인식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많이 축소됐다. 우리가 더 쉽게 길찾기를 할 수 있다면 더 줄어들거나 아예 없어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더 이상 길찾기 능력을 보존하는데 문화적 차원에서 큰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여전히 개인적 차원에서는 그 능력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는 결국 지구의 피조물들이며 컴퓨터 스크린에 뜬 가느다란 파란 선을 따라 이어진 추상적 점들이 아니다.실제 장소에 존재하는 실제 몸을 가진 실제 존재들이다. 한 장소를 알기 위한 노력은 성취감과 지식을 안겨 준다. 개인적 성취감과 자율성을 선사하고 더불어 소속감- 즉 어떤 장소를 그냥 지나쳐 가기보단 그곳에서 집에 있는 것과 같은 안도감을 느낀다.
부빙 위에서 활동하는 순록 사냥꾼이나 도심에서 싸고 질 좋은 물건을 찾아 다니는 사람 중 누구에게나 길찾기는 소외에서 애착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정체성 찾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인상을 찌푸릴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모호하고 진부해도 그런 비유적 표현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우리가 오래 고민한 문제와 얽혀 있다. 우리는 중요한 걸 포기하지 않고선 자아를 주변 환경과 분리할 수 없다.
(중략)
구글의 맵핑 전담 부서의 임원인 마이클 존스는 '구글 맵이 깔린 휴대폰을 갖고 있으면 지구 위 어디라도 돌아다니며 구글이 안전하고 편하게 가고 싶은 방향을 알려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 '이젠 누구도 다시는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의 말은 매력적인 선언처럼 들린다. 마치 우리의 몇 가지 기본적인 존재론적 문제가 영원히 해결된 것 같다. 그리고 이 선언은 사람들의 삶에서 '마찰'을 제거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사용에 집착하는 실리콘 밸리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이 선언에 대해 생각해 볼수록, 절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영원히 위치 감각을 상실한 상태에서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현재 위치를 몰라도 걱정 없다면, 굳이 현재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어진다. 즉, 휴대폰과 앱의 보호 속에서 늘 그들에게 의존하는 상태로 살게 된다는 걸 뜻한다....
1)로란:검을 휘두르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짧게 다듬은 붉은 머리. 다갈색 눈동자(계약 당시 화룡이 가져간 쪽 눈은 로란이 용의 힘을 쓸 때마다 붉게 빛난다). 웬만한 남자들만큼 큰 키에 잘 짜여진 근육질. 굳은 살이 박힌 손. 강인하고 당당한 인상의 30대 초반 여성.
2)케인:매우 짧게 다듬은 갈색 머리칼. 명석하면서도 고집스러워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다리 부러진 안경. 전체적으로는 평범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인상. 비교적 작은 키에 깡마른 체격을 가진 20대 초반 남성.
3)아리엔:목을 좀 넘는 아마색 단발 머리에 해맑으면서도 당돌한 느낌을 주는 푸른 눈동자. 약간 젖살이 남은 통통한 얼굴, 희미한 주근깨. 꽤 미소녀지만 계속 들려오는 엘드레드의 목소리 때문에 평소엔 늘 살짝 찌푸리고 다닌다(이후 마음의 방에 클레톤을 들이면서 표정이 풀린다).
번외-
유마:새카만 장발 머리에 검은 눈동자, 가는 눈매에 짧은 콧수염을 기르고 판초를 두른 동유럽 풍 중년 남자.... ....라고 상상했었다(............)
이영도 소설(특히 폴라리스 랩소디를 거쳐 눈마새, 피마새)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관념은 니체식 허무주의다. 니체의 허무주의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원래 철학이란 게 이런 식으로 요약하면 안 되는 거긴 한데).
1)이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보편적으로 '위대하다'거나 '고귀하다'거나 '선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 역시 외부의 권위에 입각한 것이기에 허무주의자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3)개인이 철저하게 자신의 자유 의지로 '나에게 의미가 있다' '내 욕망의 대상이다'라고 결정한 제일가치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
4)도덕이 되었건 종교가 되었건 사회적 합의가 되었건 모든 종류의 관념적 권위(그의 저서에서 신, 우상이라고 계속 비유하는 그것)를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자신이 제일가치로 삼은 그 무언가를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인간이 바로 초인(위버멘쉬)이며, 모든 인간은 그러한 초인을 지향해야 한다
5)초인이 발견한 자신의 제일가치가 결과적으로 기존의 도덕이나 진리와 비슷할 수는 있어도 그저 권위에 맹종해서 그걸 따르는 것과 초인이 주체성을 갖고 제일가치라고 판단해서 따르는 건 완전히 다르다
6)각자의 제일가치가 충돌하는 두 초인이 만나면 높은 확률로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산 쪽은 계속 살아서 자신의 제일가치를 추구할 수 있으므로 좋고 죽은 쪽도 죽음을 통해 자신의 제일가치가 그만큼 의미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했으므로
결과적으로 허무주의자(특히 니체식 허무주의자)는 극한의 개인주의자가 된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제일가치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지만(물론 타인을 존중하기 때문에 강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제일가치는 오직 그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이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특히 신이나 도덕, 전통, 충성 등을 이유 삼아 그렇게 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다. 그리고 그 제일가치를 위해 남에게 위해를 가해야만 한다면 거리끼지 않고 그를 행한다.
폴랩의 경우, 데스필드가 '사람들은 정의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하는 건 좋아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일이라고 말하는 건 꺼려한다, 그런 건 불한당의 화법이라고 여긴다'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상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라고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휘리 노이에스 역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내내 괴로워하다가 파킨슨 신부와의 고해성사, 율리아나 공주와의 만남을 거치며 그러한 컴플렉스와 죄의식에서 해방되어(니체 식으로 표현하자면 노예의 도덕을 벗어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군사적 재능-증오하는 아버지의 유산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동안 억눌러 온-을 마음껏 발휘하게 된다. 눈마새의 주퀘도 사르마크가 갈로텍에게 하는 "도덕을 요구하는 나약한 것들의 천박한 투정 따위 무시해. 그것들은 도구인 도덕을 삶의 목적으로 만들고 삶을 도덕의 도구로 바꾸지."라는 조언에서 그러한 주제가 특히 두드러진다.
그러한 니체식 허무주의가 싫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영도의 소설들을 꼼꼼하게 읽어 보면 이영도 스스로가 작가로서 그러한 허무주의를 긍정 내지 옹호한다고 볼 수 없다. 그의 소설 대부분이 허무주의에 기반하고 있으며 허무주의자 캐릭터들도 다수 등장하지만 그 중 특정 캐릭터가 이영도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근거는 없다. 드래곤 라자부터 피마새(약간 확장해서 보자면 오버 더 시리즈의 첫 작품인 오버 더 호라이즌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에서 내내 가장 직접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한 초인의 위대한 여정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교류와 이해, 변화의 중요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교류와 이해, 변화가 다만 긍정적으로만 묘사되지 않는다는 것, 피마새에 이르러선 작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전쟁 장면을 통해 그러한 '교류와 이해, 변화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부정적인 면면'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독자를 마음 편하게 하는 일차원적 해피 엔딩'으로 결말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 이영도의 독보적인 점이다.
만일 이영도가 그런 작가였다면 퓨처워커의 미 그라시엘(주연급 캐릭터 중 하나로서 많은 비중과 매력적인 캐릭터성으로 독자의 인기를 얻기에 충분한 캐릭터)은 자신의 비참한 미래를 알면서 세상의 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를 담담히 받아 들이는 대신 어떤 식으로든 미래가 바뀌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캐릭터가 되었을 테고, 눈마새의 케이건도 작품 최후반 나가에 대한 증오를 버린 이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묘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영도는 그렇게 하는 대신 쳉이 (돌아온다 해도 함께 오랫동안 행복하지는 못할) 미를 기다리며 오두막을 짓는 모습, 폴라리스가 멸망하는 모습, 나무가 되어 버린 륜의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깊은 여운을 남긴다. 새 시리즈를 벗어나, 이영도의 작품세계 한 축을 지탱하기도 하는 오버 더 시리즈의 주인공 티르 스트라이크는 허무주의를 배격하는 인물이기도 하고(오버 더 호라이즌에서 티르와 루레인이 대화하며 티르가 "그 때문에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 악기는 입다물어야 합니다"라고 단언하는 장면을 상기하라).
그러한 철학이 이야기 내에서 자연스럽게 형상화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이영도의 소설을 비판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이영도가 같은 주제만 반복한다'는 식의 비판은 동의하기 어렵다. 그가 내내 하고 있는 주제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것은 평생을 바쳐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미흡했던 드래곤 라자부터 시작해 피마새에 이르기까지 내내 그가 다루는 세계는 넓어지고 있다.
이영도 비평 관련해서는 거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영도의 문장력도 높게 평가하는 편이다. 눈마새를 거쳐 피마새로 오면서 점차 건조해지는 경향이 있지만 퓨처워커나 폴랩에서는 굉장히 시적이고 유려한 미문들이 많다. 피마새의 전쟁 묘사는 그 반대로 지극히 담담하고 건조하다. 그토록 메마르게 온갖 참상을 독자의 하트에 직격으로 쏟아 부을 수 있는 작가는 잘 없다.
....이제 내 소설 다시 써야지.... 아오 나도 얼른 데뷔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초조함만 쌓이네.
인터넷 방송인 '쉐리'님의 엑스컴2 중계(정확히는 3개월이나 전의 것이 유튜브에 올라온 것)를 보다가 2지구가 터지는 걸 보고는(...) 앉은 자리에서 쓴 글. 좀 건성으로 써서 배경 묘사 같은 건 거의 없지만 워밍업에는 좀 도움이 된 거 같기도 하다. 실제 게임 내의 상황과는 좀 다르다(예를 들어 예의 플레이에서 엘레나는 막스보다 먼저 어새신에게 끔살당했다).
원래는 더 어둡고 씁쓸한 분위기를 생각하다가 크리스마스에 너무 암울한 내용도 좋지 않다 싶어서 좀 전개를 바꿨는데 영 부자연스럽다. 게임에서 사령관은 플레이어 본인이고 감정 이입을 위해 얼굴은 개뿔도 안 나오고 대사도 없고 성별도 모호하게 처리됐다는 걸 고려해서 여성적인 해요체 말투를 쓰는 한편 책상에 발얹고 담배 피워대는 식의 주로 남캐들이 자주 하는 제스처를 취하게끔 서술했는데 막판에 그 바뀐 전개에 개연성을 주입하기 위해서 사령관에게 대사를 많이 주다보니 그 모호성이 약해진 느낌. 글을 끝까지 완성하는 지구력이 후달려서 그렇지 테크닉은 나쁘지 않다고 자평하고 있었는데 녹슨 느낌이다...
레이몬드 셴 박사가 외계인의 수송선을 개조해 만든, 신 엑스컴의 비행기지- 어벤저의 새벽은 어둡다. 브래포드는 날로 삼엄해지는 어드벤트 정부의 감시 하에 언제 외계인들에게 위치를 추적당할지 모르는 상황 상 등화관제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굳이 그 이유가 아니어도 어벤저는 만성적인 전력 부족 상태였다. 거의 항상 과열 상태인 전력 계전기에서 나오는 에너지 대부분은 새로운 무기 및 장비들의 연구 개발과 의무실 설비들의 유지보수에 돌려지고 있었고, 그래서 어벤저의 내부는 항상 어두침침했다. 어벤저의 장병들은 이런 곳에서는 마음까지 침울해지는 느낌이라고 종종 농담 섞인 불평을 늘어놓곤 했지만, 그들 역시 내심으로는 화려한 빛과 풍요가 넘쳐나는 이면에 엘더의 형언할 수 없는 악의가 도사리는 도심에서 사육되기보다는 늘 어두운 데다 비좁고 불편한 어벤저에서 인류 해방의 대의를 위해 싸우는 게 훨씬 낫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새벽 3시 반, 당직병들이나 경계인원들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인원이 잠들어 있을 시각. 어벤저의 그 어두침침한 복도를 가로지르는, 젊고 날씬한 여성이 있었다. 리퍼들의 수장 콘스탄틴 볼리코프가 우애와 협력의 증표로서 엑스컴에 파견한 리퍼- 엘레나 드라구노바, 콜사인 ‘아웃라이더’는 지난 전투에서 어새신에게 입었던 부상이 채 낫지 않은 몸을 이끌고 추모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엘더 자신이 직접 주조하고 사이오닉 에너지를 불어넣어 어새신에게 하사했다는 소문이 도는 카타나에 내장이 헤집어졌던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나갔지만, 그녀는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2번에 걸친 대수술이 끝나고 회복기에 들어선 그녀를 찾아온 동료들 틈에 익숙한 모습이 보이지 않길래 베테랑 돌격병인 니콜레타에게 그 재수 없는 스커미셔는 어딜 갔냐고 물었던 그녀는 믿기지 않는 대답을 들었다. ‘쿠거’라는 콜사인에 어울리는, 사나우면서도 호방한 성격에 안 어울리게 잠시 침울한 표정으로 침묵하던 그녀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네가 어새신에게 당하고 난 뒤 바로 다음번에... 기밀 시설 습격작전이 있었어. 막스 녀석은 그 작전에서... 죽었어. 매복하고 있던 뮤톤이 던진 수류탄에 당해서.... 즉사였어, 시신조차도 회수 못했지. 그래도 녀석이 시간을 끌어준 덕에 우리는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할 수 있었어. 작전은 실패했고, 지금쯤 경계는 더욱 강화됐겠지만.”
최소한 고통은 없었을 거야. 쓴웃음을 짓는 니콜레타에게 엘레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사고가 끊기고, 다음번에 그녀에게 찾아 온 감정은 분노였다. 그 재수 없는 외계인 잡종놈이 결국!
그 구 시가지의 폐허에서 로스트 무리에 둘러싸였을 때, 놈은 자신에게 말했다. 파이어브랜드가 대기하고 있으니 먼저 가라고, 자신은 오늘 죽을 생각은 없다고. 파이어브랜드에 오르면서 그녀는 불쾌함이 치미는 걸 느꼈다. 자신과 다른 리퍼 동지들은 황무지에서, 더러운 외계인들이 인류에게 제공한 그 모든 위선적인 편의와 안전을 포기한 채 절망적인 항거를 계속했다. 많은 동지들이 죽어갔고, 그 죽음에는 한 때 놈이 어드벤트의 장교로서 이끌었던 죽음의 부대도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나는 오늘 죽을 생각이 없다’? 내 동지들은 죽을 생각이 있었기에 죽었던가? 놈의 사각에서 로스트 한 놈이 덮쳐드는 걸 보며 순간 갈등했었다. 저 재수 없는 등을 쏴버린다면 참 기분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갈등과는 달리 자신의 손은 로스트를 향해 벡터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었고, 놈은 그 때 흘낏 뒤를 돌아봤다. 그 마스크 너머에서, 순간 놈이 웃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새신에게 납치당했던 놈의 구출 작전에 자원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위기에 처한 그 놈을 직접 구해냄으로써 자신이- 그리고 리퍼들이 외계인 잡종 따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로 하여금 그 기분 나쁜 웃음이 걷힌 얼굴로 자신이 죽였던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 때까지, 네 놈은 죽어선 안 돼, 스커미셔. 그런 생각을 하며 추모관이 설치되어 있는 바 앞까지 도착한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황무지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마된, 거의 사이오닉에 가까운 리퍼 특유의 예민한 감각이 문 너머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렸다.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어새신이나 다른 선택된 자가 경계망을 뚫고 어벤저에 잠입했을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이내 엘레나는 자신이 과민했음을 깨닫고 피식 웃어 버렸다. 만일 그렇다면 아예 사령관을 암살하러 갔거나 어벤저 내의 훨씬 더 중요한 다른 시설을 사보타주할 기회를 노릴 것이다, 물론 이 바는 어벤저의 몇 안 되는 위락시설 중 하나로서 장병들의 사기 유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라면 겨우 그 정도를 노릴 리가 없다. 다음으로 떠오른 가능성은 악몽과 불면에 시달리던 병사 중 누군가가 불침번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서는 한 잔 하러 온 것일 가능성이었다. 엘레나는 문을 열었고, 한층 의아함이 더해지는 걸 느꼈다. 바 내부의 조명은 꺼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이 기척은 외계인들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좀 달랐다. 그렇다면....!
“.....살아 있었군 스커미셔, 질 나쁜 농담을 들었다. 네가 죽었다는...”
말을 건네던 엘레나는 멈칫했다. 빠르게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며 바의 추모관 앞에 묵묵히 서 있던 자의 윤곽이 보였다. 스커미셔 특유의, 어드벤트 장갑복을 개조한 복장과 크고 노랗게 빛나는 두 눈.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프라탈 목스의 모습과 매우 비슷했지만 동시에 뭔가가 달랐다. 그의 손이 움직이고, 영정들이 걸린 벽 위의 작은 조명이 켜졌다.
크고 노란 눈과, 낮은 코. 유전자 조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친 피부. 그리고 목스보다 좀 더 작고 벌어진 체격. 그는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며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그 코트 차림... 아아, 엑스컴에 리퍼가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지. 네가 바로 그인가 보군.”
“........”
“내 이름은 볼토스 에임. 전사한 프라탈 막스의 후임으로 베토스 자매가 나를 보냈다. 뭐, 피차 불편한 관계긴 하지만 일단 지금은 공통의 적이 눈앞에 있으니 그 감정은 젖혀두지.”
대답대신 엘레나는 그의 앞에 있는 영정에 시선을 던졌다. VIGILO CONFIDO-‘경계’와 ‘신뢰’. 언제까지고 외계인들의 준동을 경계하고 인류에 대한 신뢰를 고수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엑스컴의 모토가 새겨진 검은 사진틀 속에, 익숙한 마스크를 쓴 얼굴이 자리하고 있고 그 밑에 사령관의 친필로 적힌 메시지가 있었다. ‘대위 프라탈 막스. 그의 희생을 기억하겠다.’
엘레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벽을 짚었다. 그는, 정말로 죽은 것이다. 그 기분 나쁜 웃음도,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도, 로스트 떼와 정화자 부대를 한꺼번에 날려 버리던 무모함도 이제는 없다.
내가 죽였던 리퍼들에게 사죄한다, 그렇게 말해야만 했던 자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머리 속이 새카맣게 변했다 다시 새하얗게 변해갔다. 그리고 잠시 물러났던 붉은 분노가 다시 그 자리에 거칠게 쇄도해왔다. 그 잡종놈이 뻔뻔하게,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은 채 죽었어.
“그 충격 받은 표정은 뭐지, 리퍼. 내 전임자와 친해지기라도 했었나? 웃기지도 않는군, 살금살금 숨어 다닐 줄이나 아는 쥐새끼 같은 리퍼와 친구였다니.”
그 음성이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엘레나는 맹렬한 분노 속에서도 자세를 똑바로 했다. 스커미셔 놈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하여간 막스 녀석, 아르콘 정도라면 또 모를까 고작 뮤톤 따위에 당하다니 허약하긴. 그렇게 안 봤는데 인간들과 어울리며 나약해지기라도 했나.”
“...닥쳐.”
“베토스 자매 생각도 모르겠다니까. 애초에 나를 보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뭐?”
한 달음에 그의 앞으로 쇄도한 엘레나의 주먹이 그의 턱 옆쪽을 후려쳤다. 퍽. 둔중한 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엘레나 역시 봉합한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걸 느끼며 그 고통에 머리 속이 새하얘졌지만 치솟는 아드레날린이 그 고통을 지워버렸다.
“프라탈 막스는 훌륭하게 잘 싸웠다. 그의 희생을 모욕하지 마라.”
그렇게 내뱉은 엘레나는 자신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겉보기보다 꽤 하는군... 재미있군, 리퍼. 성격 마음에 들어.”
볼토스 에임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 스커미셔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더니 바 카운터 앞의 의자에 앉았다.
“모욕할 생각 따윈 없다. 그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었고, 우리 모두는 그걸 기억할 거다.”
“네놈은, 전혀 슬퍼하지 않잖아.”
엘레나는 이를 악물고 힐문했다. 자신 내부에서 차오르는 이 분노가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죽은 프라탈 막스를 향한 건지, 눈앞의 이 불손한 스커미셔를 향한 건지, 이 감정이 정말 분노가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머릿 속 한 구석에서 의문이 스쳤다. 나는 왜 이 자의 말에 분노한 걸까. 그러나 볼토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외계인 유전자가 섞인 잡종 주제에 인간이 의구심을 느낄 때와 너무나도 똑같은 그 제스처에 더욱 화가 치밀었지만 필사적으로 자제했다.
“왜 슬퍼해야 하지? 내가 듣기로 막스는 너희들 중에서도 선봉에 서서 거짓된 신들의 파멸을 위해 싸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던데. 거기에 슬퍼할 부분이 뭐가 있나? 내가 아쉬운 건 녀석이 너무 빨리 죽었다는 것뿐이라고. 더 많은 일을 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죽었잖아! 슬퍼하는데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하지?”
“그래, 죽었지. 하지만 그가 개죽음을 했나? 그의 죽음이 무가치했나?”
“!”
“녀석은 내 친구였다, 리퍼. 그간 녀석 옆에서 싸워 온 네가 봤을 때 막스는 싸워야 할 때 그 싸움을 피하는 자였나? 모두를 위한 대의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챙기는 놈이었나? 내가 보기로는 아니었는데.”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그 스커미셔를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여러 번 함께 임무를 하며 서로 지켜준 적도 몇 번이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오월동주의 일환이었을 뿐 자신은 절대로 이 잡종에게 마음을 열 수 없을 거라고 여겼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어, 절대로.”
“그거면 된 거잖아, 리퍼. 나의 벗, 프라탈 막스는 한 때 빌어먹을 엘더 놈들의 지배에 꼭두각시처럼 휘둘렸던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리고 아직도 어드벤트 군에서 그렇게 조종당하는 이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었다.”
볼토스의 음성에 엄숙함이 깃들었다.
“그의 의지는 모든 자유 어드벤트에게 전해질 것이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스의 영정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결국 우리는 엘더들을 파괴하고서, 우리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기 위한 터전을 일굴 것이다. 이 싸움에서 내가 죽어도 그 의지는 또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이어질 것이고, 그 터전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결국 해방된 우리 모두가 지켜볼 것이다.”
방금의 빈정대는 태도와는 달리 그의 옆얼굴에는 20년 전- 외계인들이 지구를 공격해 오기 전에 종교를 가진 인간들이 자신이 섬기는 신 앞에서나 보일 듯한 경건함이 가득했다. 엘레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한 건지 납득은 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불쾌했다. 볼토스는 천천히 말을 마쳤다.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은, 전장에서 마주치는 어드벤트 병력들에게도 자유를 줄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오직 그들을 죽이는 것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 역시 막스와 같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나도 그처럼 영원히 기억되겠지.”
“기억이라고...”
“그래, 리퍼.”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의 노란 눈동자가 엘레나를 향했다.
“우리 동족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인 너 같은 리퍼와는 다르다. 사이오닉에 미친 것 같긴 하지만 최소한 아직은 인간인 템플러 녀석들과도 다르지. 우리는 이제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외계인도 아니야. 새로운 종족이지. 비록 저 저주받을 엘더 놈들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우리가 열망하는- 엘더들이 파멸하고 우리가 이 땅을 자기 발로 걷는 미래가 오고 나면, 우리의 자손들에게는 신화가 필요해. 뭐, 인간들은 이미 오랫동안 스스로의 역사를 쌓아올린 종족이니 신화 같은 게 없더라도 별 상관없겠지만.”
“신화...라.”
“그렇다. 아, 스스로 신이 되어 숭배 받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 최소한 내 입장에서는 죽으면 그냥 끝일뿐이니까. 하지만 우리의 자손들은, 엘더들에 대한 예속이 끝난 뒤에도 분명히 이질적인 신생 종족으로서 인간들에게 차별받겠지. 그들을 위해선 구심점이 되어줄 종족적 신화가 있어야 해. 그리고 그 신화의 기억 속에서 우리 자손들은 우리의 싸움과 죽음을 기리며 힘을 얻을 거야. 인간과는 너무도 다른, 이 피 속에서...”
볼토스는 오른 팔뚝의 립잭을 뽑아내어 반대편 팔뚝을 가볍게 그었다. 노란 핏방울이 립잭의 날 끝에서 반짝거렸다. 그는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그 방울을 응시했다.
“이 전쟁에서 죽어간 형제자매들은 무수히 기려지며 무한히 다시 살겠지.”
엘레나 드라구노바는 주먹의 힘을 풀었다. 맹렬한 분노는 그 짧은 시간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알 수 없는 슬픔이 마음을 가득 메워왔다.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우리 종족과 너희 종족이 싸울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오, 이기면 될 거 아냐. 자신 없나?”
“집어치워.... 우리도 지난 20년 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어. 이 전쟁이 끝나면 인류도, 특히 리퍼들에게도 안식처가 필요해. 이더리얼이라는 사악한 태양이 영원히 저문... 더 이상 크리살리드가 덮치거나 바이퍼에게 목을 졸리는 악몽 따위를 꾸지 않는 평온한 밤이 말이야.”
엘레나의 음성에 물기가 배어들었다.
“평온한 밤... 직장이나 학교로 지친 몸을 쉬면서, 저녁 식사로 뭘 해먹을지 따위의 사소한 고민을 하고, 친구들과 전화로 잡담을 하고, 자기 전까지 고양이를 끌어안고 TV를 보는 그런 밤.”
볼토스는 피식 웃었다.
“괜찮게 들리는군. 그런데 고양이라니, 어드벤트 정부가 지구 짐승들은 전부 살처분하지 않았던가?”
“황무지에는 아직 좀 남아 있어, 멍청한 녀석아.”
볼토스는 바 카운터 뒤로 돌아가서는 버번 위스키 한 병을 꺼내들었다.
“마시겠나? 뭐, 딱히 네 녀석과 친하게 지낼 마음은 없지만 말이야. 이름이 뭐지?”
“...마찬가지다. 난 엘레나 드라구노바. 아직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 한 잔만 하지. 네 녀석과 함께 하면 골칫거리가 늘어날 것 같은데 거기다 숙취까지 추가하는 건 안 내키기도 하고.”
“골칫거리라, 리퍼놈의 골칫거리가 되는 건 마음에 드는데. 아직 콜사인을 못 정했는데 그걸로 하지.”
그리고 바깥의 바 문 옆에 기대 선 채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존 브래포드, 엑스컴의 부사령관은 마음 깊이 안도하며 사령관 집무실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사령관- 경애하는 엑스컴의 지휘자는 그를 맞아 들였다. 브래포드의 보고를 들은 사령관은 나직하게 웃으며 책상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거봐요, 브래포드.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 개입하지 말랬죠?”
“놀랐습니다, 사령관님. 그 둘이 싸우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몰랐어요, 전 사이오니스트가 아니니까.”
“...네?”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브래포드의 표정을 바라보며 사령관은 깊이 담배를 빨아들이며 책상 위에 발을 얹었다.
“만일 그들이 진심으로 서로 증오해서 싸웠다면 상당히 귀찮아졌겠죠. 볼크와 베토스에게도 상황을 잘 전해야 하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미워하고 불신해왔어요. 공통의 적이라는 요소 하나만으로 그들의 마음을 묶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령관님. 물론 지금은 상황이 워낙 절박하니 마지못해 협력하겠지만 단지 거기까지겠죠.”
사령관은 허공에 담배 연기를 훅 내 뿜었다.
“20년 만에 피운다고 생각하니 각별하네요... 아무튼, 하려고만 하면 전장에서 실수인 척하고 한 쪽이 슬쩍 다른 한 쪽을 쏴버리거나, 표면상으로는 친밀한 척하면서 상대 조직에 대한 정보를 캐낸다거나 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우리도 그걸 전부 막을 수 없어요. 그렇다면 차라리 믿어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믿는다... 고요.”
“그래요, 볼크의 리퍼와 베토스의 스커미셔... 가이스트의 템플러들... 그들 모두 엑스컴의 중재 하에 대립을 관뒀지만,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갈등이 있을 거에요. 바로 지금도요. 엑스컴이 그 모든 걸 파악하고 해결할 수 없는 한, 그들의 인간성에 믿어보는 건 어떨까 싶었어요.”
“그들이 정말로 서로 죽고 죽였다면요?”
“그럴 경우에는 개입하라고 했잖아요?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억지로 뜯어말린다 해도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다면 우리는 막을 수 없어요.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적당히 서로 주먹다짐도 하고 욕설도 하면서 서로 이해해 가도록 하는 게 바람직해요.”
“언제까지고 외계인들의 준동을 경계하고...”
“인류에 대한 신뢰를 고수하겠다. 그거에요.”
브래포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였다면 계속 외계인 놈들의 위협을 강조하고 그들을 새 임무로 보내면서 바쁘게 만들어 서로 싸울 틈조차 없도록 했을 겁니다.”
“그 방법도 생각은 해봤어요. 그게 더 안정적이긴 하죠. 다만 지금의 상황...”
사령관은 목소리를 낮췄다.
“새로운 선택된 자... 워록이라고 했던가요. 그 자가 각지의 저항군에 대한 탄압을 더 강화했다는 소식 들으셨죠? 그래서 다음 달 보급품 지원이 더 줄어들 것 같다는 것도?”
“...예.”
“그리고 지금 어벤저의 가용 자원은 이미 한계이며, 기술진들은 각성제에 의존해 일해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대변인이 보급품이나 외계 자원에 관련된 내부 정보를 곧 주지 않으면 위험하지요. 계전기도 과열이 심하고요.”
“우리는 그동안 병사들의 생존률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무기 개발은 미루고 있었죠. 그리고 어드벤트 군사령부가 예하 병력에 강화된 방어장구를 지급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살아남을 수 있어도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의미가 없죠. 그리고 숫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에 있는 이상, 적의 지원군이 계속 전장에 밀어닥치기 시작하면 힘들게 개발한 방어장구들도 한계에 도달할 테고요.”
“어드벤트가 발렌 박사가 창조한 외계인 지배자들을 붙잡아 조종할 가능성에 대해서는요?”
“....네..........”
대답하면 할수록 브래포드의 얼굴은 참담해졌다. 사령관은 담배를 깊이 빨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우리는 인간으로서 더욱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아참, 저는 스커미셔들도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현생 인류와는 다르지만... 20년도 훨씬 전부터 이미 외계인들을 해부해 얻은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사이오닉 실험을 실시하며 기존의 인간성을 어느 정도 벗어나기 시작한 우리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겠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인간성이라는 건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달렸다는 것. 그리고 저는 그러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인간다움의 요체라고 생각해요.”
브래포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만 눈 좀 붙여야겠어요. 브래포드도 좀 자둬요, 눈 밑이 새카맣네요.”
사령관은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브래포드는 정중히 경례를 하고는 사령관 집무실을 나서기 직전에 미소지으며 한 마디를 했다.
“앞으로도 행운을 빕니다, 사령관님.”
혼자 남은 집무실에서 사령관은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었다. 브래포드에게는 그럴싸하게 말했지만, 20년 전에 그랬듯, 낯선 시간에 깨어난 지금도 자신은 여전히 수많은 병사들을 죽여가면서 싸우고 있었다. 병사들은, 자신을 얼마나 신뢰할까. 이 길고 어두운, 출구가 보이지 않는 끝없는 전쟁의 여정- 숱한 시체로 포장된 여정 속에서.
사령관은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프라탈 막스의 사망 보고서였다. 그 사진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악인'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가 어쩌다 악인이 되었는지 그의 유년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하는+한 발 더 나아가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구체제의 신화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은유를 섞는 우화적 성격의 호러물이다. 내가 좋아하는 크툴루 신화스러움도 슬쩍 첨부되어 있고. 크툴루 신화의 소재를 일부 차용해 오긴 했지만 이 단편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는 클라이브 바커고, 클라이브 바커의 작품들이 대개 그렇듯 이 단편도 최소한 겉으로 드러나는 묘사나 사건은 성적이고 폭력적이다. 포르노를 쓸 생각은 없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한국은 그렇게 기괴하고 잔혹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유형의 '악인' 중에서도 내가 특히 혐오하는 부류(동시에 내 안에도 그러한 악성이 있지 않을까 가장 고민하게 되는 부류)의 악인 내부로 들어가서 그 심리를 나름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극도로 힘든 작업이라서... 단편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쓰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다시 읽어 보니 새삼 걱정스럽다. 시부엉 나한테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 해도 포르노로 읽히면 어쩌지? 묘사를 좀 더 완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