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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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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피부 흰 자들은 왜 이토록 우리를 증오하는 겁니까?”

 

 

어린 시절, 나는 스승께 그렇게 여쭸었다. 스승은 천애고아이던 나를 거둬 키우고, 신비한 지식을 가르치고, 공부 시간이 끝나고 나면 내 손을 잡고 저녁 장을 보러 가거나 놀아주곤 했다. 엄격하면서도 온화했던 스승은 내게 있어 친부모나 다름없었다.

 

 

내 고향과, 피부 흰 자들이 사는 서방 국가들은 항상 전쟁 중이거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무렵 스승은 군의 겸 특수 자문으로 군대에 고용되어 있었고, 나도 조수로서 함께 전투가 끝난 전장을 돌며 부상병의 응급처치와 후송을 감독하곤 했다. 드넓은 사막의 모래가 전부 피로 붉게 물든 걸 보며 창백하게 질려 한참 구역질을 하던 내가 던진 질문에 스승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었다.

 

 

알하자드,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겉으로 드러난 면과 뒤에 감춰진 면이 존재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 스승님. 그리고 두 면모를 모두 살필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도요.”

그 자들이 우리에게 품는 증오와 원한도 마찬가지란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그 자들은 으로 상징되는 어떤 신을 섬기고 우리는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우리가 사막에서 살면서도 풍요를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인 오아시스들 근처에 빛 신앙을 대륙 서부에 퍼뜨린 고대 제국의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도. 그들은 그곳을 성지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무단으로 성지를 점령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우리가 동방과 교역을 하며 얻은 재물을 탐내고 있기도 하고. 물론 그것들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긴 하단다. 그리고 감춰진 이유는.”

 

 

순간, 스승의 눈빛이 변했다. 언제나 따뜻하던 그 눈이 형언할 수 없이 깊은 증오로 번뜩였다.

 

 

빛 신앙에서 섬기는 그 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피부 흰 자들의 왕과 귀족, 성직자들도 무의식적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단다, 알하자드. 하지만 빛으로 상징되는 신이라는 이름의 권위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또한 그 사회의 정점에 있는 그들의 권력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그에 매달리고 우리를 사악한 불신자 취급하는 것이지.”

그들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난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붉은 사막에 해가 저물고, 우리와 함께 나온 병사들은 시신들 사이를 헤매며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들을 찾아 낙타가 끄는 수레에 싣는 모습이 배경으로 보였다. 황혼의 빛을 얼굴 절반으로 받으며, 스승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평생 존경하며 따라왔지만, 빛과 어둠이 반씩 나뉜 그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낯설어 보였다.

 

 

아직은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란다. 하지만 너도 알 때가 됐지. 머지않아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알게 될 게야. 이번 일이 끝나면 내가 나의 스승님께, 그리고 스승님이 그 스승님께, 다시 그 스승님께 진실을 배워 온 곳으로 널 데려가마.”

 

 

+

 

 

그러나 그 약속은 이후 몇 년이나 지켜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나자, 스승은 더욱 바빠졌다. 나도 학자로서 한 사람 몫을 하게 되어 독립할 자격을 얻었지만 난 여전히 스승의- 내 가족의 수발을 들며 함께 지내는 것이 행복했다. 지금도 여전히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읽고 쓰기와 숫자 계산을 가르치고, 세계 각지를 오가는 유물 수집상에게서 희귀한 책을 사들이고, 청소와 요리를 하고, 짧으면 며칠에서 길면 한 달 정도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는 스승을 기다리던 그 나날들을 그리워한다. 해가 저물 무렵이 되면 이 집 저 집에서 등불이 밝혀지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거리에서 뛰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던 그 날들이.

 

 

스승이 나도 거의 잊어버리고 있던 그 약속을 입에 올린 건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였다. 이번에도 몇 달이나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 온 스승은 그날따라 몹시 기분이 좋아보였다. 스승은 서방 대륙의 나라들 사이에서도 빛 신앙의 교리가 거짓된 것이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평소엔 입에 대지 않던 야자술을 잔뜩 마시고는 취한 채 물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실 이번엔, 피부 흰 자들의 왕 중 하나가 나를 불렀다. 왕자가 큰 병이 걸렸으니 낫게 해달라고 부탁하더구나. 난 왕자를 치료해주는 대신,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우리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단다.”

“‘우리라고요?”

 

 

난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스승의 말투로 보아 자신과 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지칭하는 듯했다. 말하자면 어떤 조직 같은. 스승은 허공에 흰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젠 이야기할 때가 되었구나. 곧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한 규모의 결사단이 조직될 게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을 틔우고, 지금까지 스스로를 구속하게 만들던 신이 존재하지 않는 미래로 인도할 게야. 그 전장에서 했던 약속을 기억하느냐? 그곳으로, 널 데려가마.”

영광입니다, 스승님.”

 

 

난 그제야 그 날의 약속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사실 거창한 대의보다는, 그저 계속 지금처럼 스승과 함께 살며 공부를 하는 날들이 지속되는 걸 내심 더 원했다. 고고학, 종교학, 수학, 의학, 건축학, 인류가 대대로 발전시켜 온 그 많은 지식의 정수들에 둘러싸여 스승과 이렇게 식사를 하고,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는 이 날들이.

 

 

하지만 말이다, 알하자드. 그 전에 치러야 할 시험이 있다. 지금의 너라면 분명 통과할 수 있을 거다.”

 

 

+

 

 

스승이 날 데려간 곳은, 대사막 어딘가 있는 황량한 탑이었다. 마치 가시가 돋아난 후광 같은 장식이 달린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가면으로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와 태도에서 대단히 젊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그러나 난 어딘지 모르게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자태에는 어딘지 모를 독기가 깃들어 있었다.

 

 

여기서, 우린 어떤 실험을 하고 있단다. 과연 이 인간이 우리가 열 미래로의 길을 걸을 자격이 있는지를 말이다.”

 

 

스승의 미소는 언제나처럼 따뜻했지만, 난 불길한 한기만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 실험을 보았다. 쇠사슬과, 각종 의료도구와, 독약들을. 그리고 유리관 속에서 끓어 넘치는 유독한 녹황색 증기와, 머리칼 절반이 깎여 나가고 고문이나 다름없는 실험을 거치며 피폐해진 실험체, 그리고 스승이 섬기고 있던- 더 없이 강대하고, 도저히 표현할 단어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불경하고 끔찍한 존재의 모독적인 편린들을 보았다. 방에 단 둘만이 남게 되자, 스승은 충격을 받은 날 설득하려고 했다.

 

 

이제 곧 실험의 마지막 단계란다. 저것에게 이 약을 주사하는 거야. 견딜 수 있다면 저것은, 인간이 다음 단계로 진보할 수 있다는 증명이 될 테지. 신이 없는 세상을 거닐 자격이 있다는 증명 말이다. 네가 직접 해야 한다, 알하자드. 이건 너에게 주어진 시험이기도 하다.”

 

 

난 격노해서 대들었다. 이전의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이게 대체 다 뭡니까? 스승님은, 인간이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거짓말이었습니까? 피부 흰 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저지르는 일과 이게 뭐가 다릅니까!”

 

 

그러나 내가 지금껏 알아 온, 따스하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스승은 대답했다.

 

 

바로 그게 피부 흰 자들이 눈 멀고 귀 멀었다고 하는 이유다. 그들은 자신들의 광신으로 서로를, 그리고 자신들을 망가뜨리고 있어.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건 신이 아니다. 그 이상의 존재지.”

 

 

나는 미친 듯이 분노했고, 슬퍼했고, 절망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사실만은 너무도 뚜렷이 깨달았다. 스승이- 그리고 이 정체 모를 비밀결사가 인류를, 그리고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란 사실을.

 

 

내게 있어서도 넌 특별해. 난 네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 없다. 난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 미쳐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재산에 미쳐서 전쟁을 저지르는 피부 흰 자들의 지배층을 혐오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조종당하는 수많은 이들은 진심으로 동정하고 있어. 난 그들이,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로워지길 원한단다 얘야.”

 

 

스승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신보다도 위대한 그 분의 이름 아래, 인간을 구속하는 어떤 법도 교리도 도덕도 관습도 없는- 모두가 환희 속에서 서로 빼앗고 범하고 죽일 수 있는 세상이 내가 꿈꾸는 미래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란다. 그곳으로 함께 가자꾸나, 알하자드.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난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직감했다. 나에 대한 그 엄청난 사랑을 느끼면서, 눈물 흘리며 단검을 뽑아들어 내 아버지의 심장을 찔렀다. 그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흘린 마지막 눈물이기도 했다.

 

 

+

 

 

실험체로 잡혀 있던 남자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난 혼자였고, 곧 내가 한 짓을 눈치 챈 자들이 공격해올 게 뻔했다. 내겐 스승의 시체를 둘러매고 탑에서 도망쳐 나올 여유 밖에 없었다.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내 유일한 가족이던 사람의 장례만은 내 손으로 치러주고 싶었다. 미칠 것 같은 감정의 폭풍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였다.

 

 

도망쳐 나온 나는 그 어디에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누가 스승이 속해 있던 비밀결사의 조직원인지 겉으로는 전혀 알아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나는 광기에 가까운 절박한 열정에 사로잡혀서 스승이 섬기던 존재에 대해 연구했다. 내가 쌓아둔 고고학과 종교학적 지식은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내 고향과 서방 대륙의 국가들 간에는 또 전쟁이 벌어졌다. 이제 나는 여전히 가는 곳마다 약탈과 강간과 파괴와 살육을 저지르는 피부 흰 자들이 싫을망정, 증오스럽지는 않았다. 전쟁통에 그런 짓은 내 고향의 군대도 똑같이 저지르고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결국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이라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스승이 남긴 일지 속에 암호의 형태로 적혀 있던 대사막 가운데의 피라밋에 대한 내용을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결사의 입문자들이 자신의 영혼을 이물(異物)-원래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부정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밖에는 표현하지 못하겠다-에게 넘기는 의식을 치르는 장소이기도 했다.

 

 

다시 몇 년 동안이나 준비를 한 뒤 나는, 상자에 스승의 시신을 넣고 피라밋으로 향했다. 의식의 완성에는 뛰어난 자의 두개골이 필요했고, 난 스승 이상으로 그에 적합한 자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난 그 피라밋 안에서, ‘그것을 만났다.

 

 

. 나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난 내가 배우고 익혀 온 온갖 지식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대를 이어 그러한 지식을 쌓아 올려 온 인간임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내가 고향을 공격해 오고 온갖 만행을 저지른 서방 대륙의 피부 흰 자들을 싫어하면서도 그들을 진정으로 미워하지 않았던 건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피라밋의 벽화와 먼지 쌓인 고서적들 속에서 내가 본 것은 고고학, 수학, 철학, 신학, 점성학, 동서를 막론하고 그 많은 인간들이 연구해 온 온갖 학문들이 그 궁극의 영역에서 거대한 통섭을 이루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통섭은 한없이 끔찍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모든 별들이 제 자리에 도달하고 나면, 이물들이 이 세상으로 넘어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스승이 꿈꿨던 미래가 실현되리라는 것을. 난 그 기억을 지울 수 없다. 난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난 그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유일하면서도 불안한 희망은, 그러한 이물들조차도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서로 경쟁하고 대립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거대한 붉은 갈고리를 닮은 촉수 형태의 신상 앞에 서서 스승의 두개골을 매개로 삼아 치른 의식을 통해, 그러한 이물들 중 하나를 나 자신의 몸에 강림시켰다. 그리고, 그것과 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힘을 주고, 내가 죽고 나면 내 영혼을 가져간다는 계약을 맺었다. 유리병에 담겨 있던 모래로 그린 원 안에서 계약은 성사되었다고 선언하고 그것과 나의 영혼이 교차하는 순간, 환상을 보았다. 어떤 쇠락한 영지, 방탕한 삶에 질려 버린 사악한 영주가 남긴 끔찍한 유산을.

 

 

하여, 이제 나는 홀연히 사막 저 너머의 세상으로 향한다. 그 세상 끝, 그 존재가 기다리는 가장 어두운 곳으로. 결국 그 존재를 물리칠 수 있다 해도, 내 영혼은 내 안의 이물에게 삼켜질 것이다.

 

 

난 기쁘게 그 날을 기다릴 것이다. 나 자신이 결코 꺼지지 않는 별의 불꽃이 되어, 지옥의 문을 닫아 걸을 그 날을.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