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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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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년차-

한동안 잠잠하다고 여겼는데,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짧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살던 마을에도 징집령이 떨어졌고, 나 역시 성지의 수복을 위해 검을 다시 찼다. 아내는 솔직히 이 전쟁이 성스러운 것인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디 몸 성히 돌아오기만 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짐짓 화내는 척했지만 아내가 진심으로 날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코흘리개 아들 녀석도 아비가 먼 곳으로 떠난다는 걸 눈치챘는지 오늘은 조용했다. 언제나처럼 간소한 식사를 마친 뒤 아내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마굿간에서 말을 끌어냈다. 아내는 웃으면서 나를 전송했지만 밤새 울었는지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아들은 날 빤히 올려다 보며 손을 흔들었다. 반드시 돌아와서 다시 아내와 아들을 안아줄 것이다.

 

전장으로 향하는 동안 수많은 징집병들이 곁을 지나쳤다. 나는 모아둔 돈이 좀 있어서 검과 말이라도 챙길 수 있었지만, 저들은 보병으로서 조잡한 창과 가죽갑옷만 지급받고 최전선에 내몰릴 것이다. 다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성전에 동참한다는 자긍심이 뒤섞인 눈을 하고 있었다. 이들 중 몇이나 살아남을까?

 

1년차-

전쟁터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이교도들을 베어 넘기면서, 그들의 얼굴에 가득한 분노와, 두려움과, 고통과, 슬픔, 그리고 놀랍게도 연민을 보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다. 그들을 사악한 이교도들이라고만 여겼지만 이 전장에서 마주치는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이 전장에 신은 없으며, 오직 다 같은 인간만이 존재한다. 싸우고 싶지 않다, 죽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입은 기도문을 외우고, 등자에 얹힌 내 발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내 손에 들린 검은 적의 목숨을 앗아간다. 내가 방금 베어 죽인 이조차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 나를 미치게 한다.

 

2년차-

부대를 지휘하던 십부장이 전사하는 바람에 최선임이었던 내가 십부장이 되었다. 이제는 내 명령을 따르고 내게 의지하는 부하들이 있다. 지금까지 싸워오며 깨달은 것은, 칼날을 날카롭게 하는 것만큼이나 스스로의 정신을 둔탁하게 만들어야만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적에 대한 연민을 버려야 한다. 오직 승전 후의 약탈이 주는 쾌감과, 신에 대한 신앙으로 자신의 정신을 무디게 해야 한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하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해가 불그스레하게 저물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아내와 아들이 그립다.

 

3년차-

또 다시 진급했다. 이제 난 부사관이다. 오늘은 오전 내내 요새 건설을 감독하고, 오후에는 포로로 잡은 적병을 심문한 뒤 처형했고, 저녁 때는 보고서를 썼다. 더 이상 이교도들에 대한 동정심 같은 것도 들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적일 뿐이고, 적은 죽여야 할 상대일 뿐이다. 내일 새벽,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 때 기습 작전이 있다. 남자건 여자건, 어리건 늙었건, 건강하건 병들었건, 이교도는 모두 죽일 것이다, 만에 하나 그 중에 의로운 자가 있다면 신께서 골라내시리라.

 

4년차-

어제 사령관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의외로 전혀 떨리지 않았다. 사령관은 무릎을 꿇은 내 머리와 양 어깨를 칼등으로 한 번씩 살짝 두들기고는 "성스러운 빛의 전사" 같은 말을 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지만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서임식을 마치고 술을 마시면서 농부 레이널드는 죽었고, 이제 여기엔 기사 레이널드가 남았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창문 밖의 하늘이 온통 검붉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내와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5년차-

전쟁이 끝났다. 이번에도 성지의 수복은 실패했다. 양측 총사령관은 휴전 협정서에 서명한 뒤 악수를 나눴다. 부대는 해체되었고, 나는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는, 약간 주름이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눈을 가진 소년이 내게 인사하고는 정중하게 묻는다. "고귀하신 기사님, 혹시 저희 아버지를 아십니까? 레이널드라는 분입니다만..." 달콤한 바람이 깔끔하게 개간된 밭 위로 불고, 활짝 핀 꽃들이 정원에 넘실거린다. 그림으로 그린 듯이 완벽한 평화와 행복의 모습이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보면 하늘은 끝없이 검붉게만 보인다. 이제 나는 안다. 저 하늘의 색은, 살육과 약탈, 고문, 강간, 수많은 죄악으로 점철된 성기사의 영혼의 색깔임을. 저 평화와 행복 속에 스스로를 끼워넣을 수는 없다. 농부 레이널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기사 레이널드는 불가능하다.

 

 

나는 투구를 벗고 여인과 청년을 껴안는 대신, 그런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언젠가 가족에게 돌아가면 이걸로 다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하며 약탈한 금화와 보석이 가득 담긴 자루를 반강제로 청년에게 건네 준 나는 말머리를 돌려, 전쟁 중에 얼핏 소문을 들은 한 영지로 향한다. 소문에 따르면 그 영지를 다스리던 선대 가주가 방탕한 삶에 질린 끝에 흑마법에 손을 댔고, 고대의 악마를 깨웠다고 한다. 한 때는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그 영지는 이제 끔찍한 괴물과 산적으로 넘쳐나는 지상의 지옥이 되었고, 현 가주는 영지를 수습하기 위해 용병을 모으는 중이라고 한다.

 

나는, 그 지옥이야말로 성기사 레이널드가 진정 가야할 곳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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