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소설 다시 써야지.... 아오 나도 얼른 데뷔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초조함만 쌓이네.
인터넷 방송인 '쉐리'님의 엑스컴2 중계(정확히는 3개월이나 전의 것이 유튜브에 올라온 것)를 보다가 2지구가 터지는 걸 보고는(...) 앉은 자리에서 쓴 글. 좀 건성으로 써서 배경 묘사 같은 건 거의 없지만 워밍업에는 좀 도움이 된 거 같기도 하다. 실제 게임 내의 상황과는 좀 다르다(예를 들어 예의 플레이에서 엘레나는 막스보다 먼저 어새신에게 끔살당했다).
원래는 더 어둡고 씁쓸한 분위기를 생각하다가 크리스마스에 너무 암울한 내용도 좋지 않다 싶어서 좀 전개를 바꿨는데 영 부자연스럽다. 게임에서 사령관은 플레이어 본인이고 감정 이입을 위해 얼굴은 개뿔도 안 나오고 대사도 없고 성별도 모호하게 처리됐다는 걸 고려해서 여성적인 해요체 말투를 쓰는 한편 책상에 발얹고 담배 피워대는 식의 주로 남캐들이 자주 하는 제스처를 취하게끔 서술했는데 막판에 그 바뀐 전개에 개연성을 주입하기 위해서 사령관에게 대사를 많이 주다보니 그 모호성이 약해진 느낌. 글을 끝까지 완성하는 지구력이 후달려서 그렇지 테크닉은 나쁘지 않다고 자평하고 있었는데 녹슨 느낌이다...
레이몬드 셴 박사가 외계인의 수송선을 개조해 만든, 신 엑스컴의 비행기지- 어벤저의 새벽은 어둡다. 브래포드는 날로 삼엄해지는 어드벤트 정부의 감시 하에 언제 외계인들에게 위치를 추적당할지 모르는 상황 상 등화관제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굳이 그 이유가 아니어도 어벤저는 만성적인 전력 부족 상태였다. 거의 항상 과열 상태인 전력 계전기에서 나오는 에너지 대부분은 새로운 무기 및 장비들의 연구 개발과 의무실 설비들의 유지보수에 돌려지고 있었고, 그래서 어벤저의 내부는 항상 어두침침했다. 어벤저의 장병들은 이런 곳에서는 마음까지 침울해지는 느낌이라고 종종 농담 섞인 불평을 늘어놓곤 했지만, 그들 역시 내심으로는 화려한 빛과 풍요가 넘쳐나는 이면에 엘더의 형언할 수 없는 악의가 도사리는 도심에서 사육되기보다는 늘 어두운 데다 비좁고 불편한 어벤저에서 인류 해방의 대의를 위해 싸우는 게 훨씬 낫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새벽 3시 반, 당직병들이나 경계인원들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인원이 잠들어 있을 시각. 어벤저의 그 어두침침한 복도를 가로지르는, 젊고 날씬한 여성이 있었다. 리퍼들의 수장 콘스탄틴 볼리코프가 우애와 협력의 증표로서 엑스컴에 파견한 리퍼- 엘레나 드라구노바, 콜사인 ‘아웃라이더’는 지난 전투에서 어새신에게 입었던 부상이 채 낫지 않은 몸을 이끌고 추모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엘더 자신이 직접 주조하고 사이오닉 에너지를 불어넣어 어새신에게 하사했다는 소문이 도는 카타나에 내장이 헤집어졌던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나갔지만, 그녀는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2번에 걸친 대수술이 끝나고 회복기에 들어선 그녀를 찾아온 동료들 틈에 익숙한 모습이 보이지 않길래 베테랑 돌격병인 니콜레타에게 그 재수 없는 스커미셔는 어딜 갔냐고 물었던 그녀는 믿기지 않는 대답을 들었다. ‘쿠거’라는 콜사인에 어울리는, 사나우면서도 호방한 성격에 안 어울리게 잠시 침울한 표정으로 침묵하던 그녀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네가 어새신에게 당하고 난 뒤 바로 다음번에... 기밀 시설 습격작전이 있었어. 막스 녀석은 그 작전에서... 죽었어. 매복하고 있던 뮤톤이 던진 수류탄에 당해서.... 즉사였어, 시신조차도 회수 못했지. 그래도 녀석이 시간을 끌어준 덕에 우리는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할 수 있었어. 작전은 실패했고, 지금쯤 경계는 더욱 강화됐겠지만.”
최소한 고통은 없었을 거야. 쓴웃음을 짓는 니콜레타에게 엘레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사고가 끊기고, 다음번에 그녀에게 찾아 온 감정은 분노였다. 그 재수 없는 외계인 잡종놈이 결국!
그 구 시가지의 폐허에서 로스트 무리에 둘러싸였을 때, 놈은 자신에게 말했다. 파이어브랜드가 대기하고 있으니 먼저 가라고, 자신은 오늘 죽을 생각은 없다고. 파이어브랜드에 오르면서 그녀는 불쾌함이 치미는 걸 느꼈다. 자신과 다른 리퍼 동지들은 황무지에서, 더러운 외계인들이 인류에게 제공한 그 모든 위선적인 편의와 안전을 포기한 채 절망적인 항거를 계속했다. 많은 동지들이 죽어갔고, 그 죽음에는 한 때 놈이 어드벤트의 장교로서 이끌었던 죽음의 부대도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나는 오늘 죽을 생각이 없다’? 내 동지들은 죽을 생각이 있었기에 죽었던가? 놈의 사각에서 로스트 한 놈이 덮쳐드는 걸 보며 순간 갈등했었다. 저 재수 없는 등을 쏴버린다면 참 기분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갈등과는 달리 자신의 손은 로스트를 향해 벡터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었고, 놈은 그 때 흘낏 뒤를 돌아봤다. 그 마스크 너머에서, 순간 놈이 웃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새신에게 납치당했던 놈의 구출 작전에 자원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위기에 처한 그 놈을 직접 구해냄으로써 자신이- 그리고 리퍼들이 외계인 잡종 따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로 하여금 그 기분 나쁜 웃음이 걷힌 얼굴로 자신이 죽였던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 때까지, 네 놈은 죽어선 안 돼, 스커미셔. 그런 생각을 하며 추모관이 설치되어 있는 바 앞까지 도착한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황무지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마된, 거의 사이오닉에 가까운 리퍼 특유의 예민한 감각이 문 너머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렸다.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어새신이나 다른 선택된 자가 경계망을 뚫고 어벤저에 잠입했을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이내 엘레나는 자신이 과민했음을 깨닫고 피식 웃어 버렸다. 만일 그렇다면 아예 사령관을 암살하러 갔거나 어벤저 내의 훨씬 더 중요한 다른 시설을 사보타주할 기회를 노릴 것이다, 물론 이 바는 어벤저의 몇 안 되는 위락시설 중 하나로서 장병들의 사기 유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라면 겨우 그 정도를 노릴 리가 없다. 다음으로 떠오른 가능성은 악몽과 불면에 시달리던 병사 중 누군가가 불침번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서는 한 잔 하러 온 것일 가능성이었다. 엘레나는 문을 열었고, 한층 의아함이 더해지는 걸 느꼈다. 바 내부의 조명은 꺼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이 기척은 외계인들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좀 달랐다. 그렇다면....!
“.....살아 있었군 스커미셔, 질 나쁜 농담을 들었다. 네가 죽었다는...”
말을 건네던 엘레나는 멈칫했다. 빠르게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며 바의 추모관 앞에 묵묵히 서 있던 자의 윤곽이 보였다. 스커미셔 특유의, 어드벤트 장갑복을 개조한 복장과 크고 노랗게 빛나는 두 눈.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프라탈 목스의 모습과 매우 비슷했지만 동시에 뭔가가 달랐다. 그의 손이 움직이고, 영정들이 걸린 벽 위의 작은 조명이 켜졌다.
크고 노란 눈과, 낮은 코. 유전자 조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친 피부. 그리고 목스보다 좀 더 작고 벌어진 체격. 그는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며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그 코트 차림... 아아, 엑스컴에 리퍼가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지. 네가 바로 그인가 보군.”
“........”
“내 이름은 볼토스 에임. 전사한 프라탈 막스의 후임으로 베토스 자매가 나를 보냈다. 뭐, 피차 불편한 관계긴 하지만 일단 지금은 공통의 적이 눈앞에 있으니 그 감정은 젖혀두지.”
대답대신 엘레나는 그의 앞에 있는 영정에 시선을 던졌다. VIGILO CONFIDO-‘경계’와 ‘신뢰’. 언제까지고 외계인들의 준동을 경계하고 인류에 대한 신뢰를 고수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엑스컴의 모토가 새겨진 검은 사진틀 속에, 익숙한 마스크를 쓴 얼굴이 자리하고 있고 그 밑에 사령관의 친필로 적힌 메시지가 있었다. ‘대위 프라탈 막스. 그의 희생을 기억하겠다.’
엘레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벽을 짚었다. 그는, 정말로 죽은 것이다. 그 기분 나쁜 웃음도,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도, 로스트 떼와 정화자 부대를 한꺼번에 날려 버리던 무모함도 이제는 없다.
내가 죽였던 리퍼들에게 사죄한다, 그렇게 말해야만 했던 자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머리 속이 새카맣게 변했다 다시 새하얗게 변해갔다. 그리고 잠시 물러났던 붉은 분노가 다시 그 자리에 거칠게 쇄도해왔다. 그 잡종놈이 뻔뻔하게,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은 채 죽었어.
“그 충격 받은 표정은 뭐지, 리퍼. 내 전임자와 친해지기라도 했었나? 웃기지도 않는군, 살금살금 숨어 다닐 줄이나 아는 쥐새끼 같은 리퍼와 친구였다니.”
그 음성이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엘레나는 맹렬한 분노 속에서도 자세를 똑바로 했다. 스커미셔 놈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하여간 막스 녀석, 아르콘 정도라면 또 모를까 고작 뮤톤 따위에 당하다니 허약하긴. 그렇게 안 봤는데 인간들과 어울리며 나약해지기라도 했나.”
“...닥쳐.”
“베토스 자매 생각도 모르겠다니까. 애초에 나를 보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뭐?”
한 달음에 그의 앞으로 쇄도한 엘레나의 주먹이 그의 턱 옆쪽을 후려쳤다. 퍽. 둔중한 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엘레나 역시 봉합한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걸 느끼며 그 고통에 머리 속이 새하얘졌지만 치솟는 아드레날린이 그 고통을 지워버렸다.
“프라탈 막스는 훌륭하게 잘 싸웠다. 그의 희생을 모욕하지 마라.”
그렇게 내뱉은 엘레나는 자신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겉보기보다 꽤 하는군... 재미있군, 리퍼. 성격 마음에 들어.”
볼토스 에임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 스커미셔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더니 바 카운터 앞의 의자에 앉았다.
“모욕할 생각 따윈 없다. 그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었고, 우리 모두는 그걸 기억할 거다.”
“네놈은, 전혀 슬퍼하지 않잖아.”
엘레나는 이를 악물고 힐문했다. 자신 내부에서 차오르는 이 분노가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죽은 프라탈 막스를 향한 건지, 눈앞의 이 불손한 스커미셔를 향한 건지, 이 감정이 정말 분노가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머릿 속 한 구석에서 의문이 스쳤다. 나는 왜 이 자의 말에 분노한 걸까. 그러나 볼토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외계인 유전자가 섞인 잡종 주제에 인간이 의구심을 느낄 때와 너무나도 똑같은 그 제스처에 더욱 화가 치밀었지만 필사적으로 자제했다.
“왜 슬퍼해야 하지? 내가 듣기로 막스는 너희들 중에서도 선봉에 서서 거짓된 신들의 파멸을 위해 싸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던데. 거기에 슬퍼할 부분이 뭐가 있나? 내가 아쉬운 건 녀석이 너무 빨리 죽었다는 것뿐이라고. 더 많은 일을 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죽었잖아! 슬퍼하는데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하지?”
“그래, 죽었지. 하지만 그가 개죽음을 했나? 그의 죽음이 무가치했나?”
“!”
“녀석은 내 친구였다, 리퍼. 그간 녀석 옆에서 싸워 온 네가 봤을 때 막스는 싸워야 할 때 그 싸움을 피하는 자였나? 모두를 위한 대의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챙기는 놈이었나? 내가 보기로는 아니었는데.”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그 스커미셔를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여러 번 함께 임무를 하며 서로 지켜준 적도 몇 번이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오월동주의 일환이었을 뿐 자신은 절대로 이 잡종에게 마음을 열 수 없을 거라고 여겼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어, 절대로.”
“그거면 된 거잖아, 리퍼. 나의 벗, 프라탈 막스는 한 때 빌어먹을 엘더 놈들의 지배에 꼭두각시처럼 휘둘렸던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리고 아직도 어드벤트 군에서 그렇게 조종당하는 이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었다.”
볼토스의 음성에 엄숙함이 깃들었다.
“그의 의지는 모든 자유 어드벤트에게 전해질 것이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스의 영정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결국 우리는 엘더들을 파괴하고서, 우리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기 위한 터전을 일굴 것이다. 이 싸움에서 내가 죽어도 그 의지는 또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이어질 것이고, 그 터전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결국 해방된 우리 모두가 지켜볼 것이다.”
방금의 빈정대는 태도와는 달리 그의 옆얼굴에는 20년 전- 외계인들이 지구를 공격해 오기 전에 종교를 가진 인간들이 자신이 섬기는 신 앞에서나 보일 듯한 경건함이 가득했다. 엘레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한 건지 납득은 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불쾌했다. 볼토스는 천천히 말을 마쳤다.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은, 전장에서 마주치는 어드벤트 병력들에게도 자유를 줄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오직 그들을 죽이는 것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 역시 막스와 같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나도 그처럼 영원히 기억되겠지.”
“기억이라고...”
“그래, 리퍼.”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의 노란 눈동자가 엘레나를 향했다.
“우리 동족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인 너 같은 리퍼와는 다르다. 사이오닉에 미친 것 같긴 하지만 최소한 아직은 인간인 템플러 녀석들과도 다르지. 우리는 이제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외계인도 아니야. 새로운 종족이지. 비록 저 저주받을 엘더 놈들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우리가 열망하는- 엘더들이 파멸하고 우리가 이 땅을 자기 발로 걷는 미래가 오고 나면, 우리의 자손들에게는 신화가 필요해. 뭐, 인간들은 이미 오랫동안 스스로의 역사를 쌓아올린 종족이니 신화 같은 게 없더라도 별 상관없겠지만.”
“신화...라.”
“그렇다. 아, 스스로 신이 되어 숭배 받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 최소한 내 입장에서는 죽으면 그냥 끝일뿐이니까. 하지만 우리의 자손들은, 엘더들에 대한 예속이 끝난 뒤에도 분명히 이질적인 신생 종족으로서 인간들에게 차별받겠지. 그들을 위해선 구심점이 되어줄 종족적 신화가 있어야 해. 그리고 그 신화의 기억 속에서 우리 자손들은 우리의 싸움과 죽음을 기리며 힘을 얻을 거야. 인간과는 너무도 다른, 이 피 속에서...”
볼토스는 오른 팔뚝의 립잭을 뽑아내어 반대편 팔뚝을 가볍게 그었다. 노란 핏방울이 립잭의 날 끝에서 반짝거렸다. 그는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그 방울을 응시했다.
“이 전쟁에서 죽어간 형제자매들은 무수히 기려지며 무한히 다시 살겠지.”
엘레나 드라구노바는 주먹의 힘을 풀었다. 맹렬한 분노는 그 짧은 시간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알 수 없는 슬픔이 마음을 가득 메워왔다.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우리 종족과 너희 종족이 싸울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오, 이기면 될 거 아냐. 자신 없나?”
“집어치워.... 우리도 지난 20년 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어. 이 전쟁이 끝나면 인류도, 특히 리퍼들에게도 안식처가 필요해. 이더리얼이라는 사악한 태양이 영원히 저문... 더 이상 크리살리드가 덮치거나 바이퍼에게 목을 졸리는 악몽 따위를 꾸지 않는 평온한 밤이 말이야.”
엘레나의 음성에 물기가 배어들었다.
“평온한 밤... 직장이나 학교로 지친 몸을 쉬면서, 저녁 식사로 뭘 해먹을지 따위의 사소한 고민을 하고, 친구들과 전화로 잡담을 하고, 자기 전까지 고양이를 끌어안고 TV를 보는 그런 밤.”
볼토스는 피식 웃었다.
“괜찮게 들리는군. 그런데 고양이라니, 어드벤트 정부가 지구 짐승들은 전부 살처분하지 않았던가?”
“황무지에는 아직 좀 남아 있어, 멍청한 녀석아.”
볼토스는 바 카운터 뒤로 돌아가서는 버번 위스키 한 병을 꺼내들었다.
“마시겠나? 뭐, 딱히 네 녀석과 친하게 지낼 마음은 없지만 말이야. 이름이 뭐지?”
“...마찬가지다. 난 엘레나 드라구노바. 아직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 한 잔만 하지. 네 녀석과 함께 하면 골칫거리가 늘어날 것 같은데 거기다 숙취까지 추가하는 건 안 내키기도 하고.”
“골칫거리라, 리퍼놈의 골칫거리가 되는 건 마음에 드는데. 아직 콜사인을 못 정했는데 그걸로 하지.”
그리고 바깥의 바 문 옆에 기대 선 채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존 브래포드, 엑스컴의 부사령관은 마음 깊이 안도하며 사령관 집무실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사령관- 경애하는 엑스컴의 지휘자는 그를 맞아 들였다. 브래포드의 보고를 들은 사령관은 나직하게 웃으며 책상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거봐요, 브래포드.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 개입하지 말랬죠?”
“놀랐습니다, 사령관님. 그 둘이 싸우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몰랐어요, 전 사이오니스트가 아니니까.”
“...네?”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브래포드의 표정을 바라보며 사령관은 깊이 담배를 빨아들이며 책상 위에 발을 얹었다.
“만일 그들이 진심으로 서로 증오해서 싸웠다면 상당히 귀찮아졌겠죠. 볼크와 베토스에게도 상황을 잘 전해야 하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미워하고 불신해왔어요. 공통의 적이라는 요소 하나만으로 그들의 마음을 묶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령관님. 물론 지금은 상황이 워낙 절박하니 마지못해 협력하겠지만 단지 거기까지겠죠.”
사령관은 허공에 담배 연기를 훅 내 뿜었다.
“20년 만에 피운다고 생각하니 각별하네요... 아무튼, 하려고만 하면 전장에서 실수인 척하고 한 쪽이 슬쩍 다른 한 쪽을 쏴버리거나, 표면상으로는 친밀한 척하면서 상대 조직에 대한 정보를 캐낸다거나 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우리도 그걸 전부 막을 수 없어요. 그렇다면 차라리 믿어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믿는다... 고요.”
“그래요, 볼크의 리퍼와 베토스의 스커미셔... 가이스트의 템플러들... 그들 모두 엑스컴의 중재 하에 대립을 관뒀지만,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갈등이 있을 거에요. 바로 지금도요. 엑스컴이 그 모든 걸 파악하고 해결할 수 없는 한, 그들의 인간성에 믿어보는 건 어떨까 싶었어요.”
“그들이 정말로 서로 죽고 죽였다면요?”
“그럴 경우에는 개입하라고 했잖아요?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억지로 뜯어말린다 해도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다면 우리는 막을 수 없어요.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적당히 서로 주먹다짐도 하고 욕설도 하면서 서로 이해해 가도록 하는 게 바람직해요.”
“언제까지고 외계인들의 준동을 경계하고...”
“인류에 대한 신뢰를 고수하겠다. 그거에요.”
브래포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였다면 계속 외계인 놈들의 위협을 강조하고 그들을 새 임무로 보내면서 바쁘게 만들어 서로 싸울 틈조차 없도록 했을 겁니다.”
“그 방법도 생각은 해봤어요. 그게 더 안정적이긴 하죠. 다만 지금의 상황...”
사령관은 목소리를 낮췄다.
“새로운 선택된 자... 워록이라고 했던가요. 그 자가 각지의 저항군에 대한 탄압을 더 강화했다는 소식 들으셨죠? 그래서 다음 달 보급품 지원이 더 줄어들 것 같다는 것도?”
“...예.”
“그리고 지금 어벤저의 가용 자원은 이미 한계이며, 기술진들은 각성제에 의존해 일해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대변인이 보급품이나 외계 자원에 관련된 내부 정보를 곧 주지 않으면 위험하지요. 계전기도 과열이 심하고요.”
“우리는 그동안 병사들의 생존률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무기 개발은 미루고 있었죠. 그리고 어드벤트 군사령부가 예하 병력에 강화된 방어장구를 지급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살아남을 수 있어도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의미가 없죠. 그리고 숫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에 있는 이상, 적의 지원군이 계속 전장에 밀어닥치기 시작하면 힘들게 개발한 방어장구들도 한계에 도달할 테고요.”
“어드벤트가 발렌 박사가 창조한 외계인 지배자들을 붙잡아 조종할 가능성에 대해서는요?”
“....네..........”
대답하면 할수록 브래포드의 얼굴은 참담해졌다. 사령관은 담배를 깊이 빨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우리는 인간으로서 더욱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아참, 저는 스커미셔들도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현생 인류와는 다르지만... 20년도 훨씬 전부터 이미 외계인들을 해부해 얻은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사이오닉 실험을 실시하며 기존의 인간성을 어느 정도 벗어나기 시작한 우리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겠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인간성이라는 건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달렸다는 것. 그리고 저는 그러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인간다움의 요체라고 생각해요.”
브래포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만 눈 좀 붙여야겠어요. 브래포드도 좀 자둬요, 눈 밑이 새카맣네요.”
사령관은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브래포드는 정중히 경례를 하고는 사령관 집무실을 나서기 직전에 미소지으며 한 마디를 했다.
“앞으로도 행운을 빕니다, 사령관님.”
혼자 남은 집무실에서 사령관은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었다. 브래포드에게는 그럴싸하게 말했지만, 20년 전에 그랬듯, 낯선 시간에 깨어난 지금도 자신은 여전히 수많은 병사들을 죽여가면서 싸우고 있었다. 병사들은, 자신을 얼마나 신뢰할까. 이 길고 어두운, 출구가 보이지 않는 끝없는 전쟁의 여정- 숱한 시체로 포장된 여정 속에서.
사령관은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프라탈 막스의 사망 보고서였다. 그 사진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복스 탈라 포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