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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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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기분 꿀꿀한데 날씨 한 번 개구리네...."

교정으로 나온 준페이는 혼잣말을 하며 찡그린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잔뜩 낀 우중충한 날씨는 마치 자신의 기분 같았다. 

"개구리라도 튀어나올 것 같구만."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움찔했다. 불현듯 이쿠츠키 슈지 전 이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개자식 덕에 호된 꼴을 봤었지. "내가 이쿠츠키냐, 젠장!" 짜증이 치솟은 준페이는 마치 그 자리에 이쿠츠키의 얼굴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기둥을 거칠게 걷어찼다. 하늘을 향해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준페이는 교정을 가로질러 통학용 모노레일에 올라탔다. 오늘은 공부 안 한다. 새로 개봉한 영화나 조지러 가야지. 포트 아일랜드 역 근처에 있는 영화관, 스크린 샷에는 최근 개봉한 마블 히어로 영화의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그걸 보며 머리를 좀 비워야겠다. 영웅은 공부 따위 안 한다네!  

"...얼레."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영화관 앞 분수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띄는, 성숙하고 이지적이면서도 화사한 미모의 소녀. 그러나 그 미모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준페이는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키리조 선배, 여기서 뭐하세요?"
"으, 응?"

그녀, 키리조 미츠루는 화들짝 놀라면서 준페이를 바라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영화 리플렛이 떨어졌다. 미츠루는 헛기침을 했다.

"이오리로군. 아버님이 남기신 서류를 검토하다가 바람을 쐬러 나왔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여기더군."
"우연이네요.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죠 키리조 선배?"

준페이는 허리를 굽혀 리플렛을 집어 미츠루에게 건네며 거기 적힌 문구를 흘낏 보았다. 화려하고 풍요롭지만 갑갑한 삶을 살던 엘리트가 어느 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걸 버리고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미츠루는 헛기침을 하며 그걸 받아들었다.

"마.... 유키와 이 영화를 본 적이 있었어. 으흠, 그냥 그 때 일이 기억났을 뿐이다. 내용이 조금... 와닿았거든."

준페이는 팔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미츠루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언제나 냉철하고 당당한, 그리고 한없이 고고한 키리조 선배도 후카나 유카리와 마찬가지로, 그 녀석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거 물어봤다가 화내면 어쩌지? 수학여행 때처럼 처형당하지 않을까? 그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준페이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 때는... 마코토도 있었고.... 료지도 있었고..... 새삼 다시 침울한 감정이 되살아나는 걸 느끼며 준페이는 입맛을 다셨다. 어두침침한 오후, 사람들은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 군중의 바다 속에서 준페이와 미츠루는 한 쌍의 작은 섬처럼 나란히 앉아 있었다. 미츠루는 나직하게,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인간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에 속박당한다... 귀한 것과 지킬 것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와 권력자, 이른바 엘리트일수록 그 귀한 것과 지킬 것들의 노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영화였어."
"솔직히 난해하네요 거..."
"그, 그렇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해서 미안하군."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미츠루였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군. 조만간 특과부 전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데, 만난 김에 네게 먼저 해도 상관 없겠지. 아버님 대신 너희에게 사과하고 싶다. 키리조 코우에츠... 할아버님이 저지른 짓을 말이야."

"음? 그거야 그 영감ㅌ... ...어르신... ...사람이 저지른 짓이고, 전 총수님과 선배는 그걸 몰랐고, 안 뒤에는 수습하려고 노력한 입장이잖아요?"
"하지만 나와 아버님은 그 사실을 숨기고, 무기력증 확산을 막기 위해서일 뿐인양 너희를 이용했지. 보수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아니 뭐 그건 전에도 사과하셨잖아요? 전 괜찮아요 선배, 뭣보다 굳이 따지자면 제일 큰 피해자는 마코토 녀석인데, 녀석도 뭐...."
   
그 이름을 말한 순간, 미츠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준페이는 그걸 보며 키리조 선배가 어떤 슬픔과 죄책감을 짊어지고 있는지, 동시에 자신이 어떤 말실수를 한 건지 깨달았다. 드헉. 

"그래.... 녀석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서, 그런...."
"죄, 죄송함다..........."

준페이는 야구모자를 벗어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하여간 나새끼는 입방정이 문제라니까. 유카리한테도 그것 때문에 꼽 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창피해하는 준페이의 귓전에, 평소와 마찬가지로 침착한 미츠루의 음성이 들렸다. 

"지금은 슬픔에 잠길 때가 아니지. 할 일이 많으니까. 아무튼 너희에게도 좀 더 이해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그래서 설명하자면... 이오리?"
"말씀하세요 선배. 아, 잠시만요."

준페이는 얼른 일어나서는 분수대 맞은 편의 자판기로 뛰어가서 캔음료 2개를 뽑아와서 하나를 내밀었다. 

"마시면서 이야기하시죠. 헤헷, 아무리 귀한 집 아가씨여도 후추 박사나 255차 캔 정도는 딸 줄 아시겠죠?"

일부러 깐죽거리는 준페이를 보며 미츠루는 처음으로 작게 미소지었다.

"관대하게 처형은 참아주마. 배려 고맙군, 이오리."

준페이는 히죽 마주 웃어보였다. 캔을 따서 차 한 모금을 마신 미츠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여하간 아버님은 10년 전의 사고를 비롯해서 섀도 관련 피해자들에게 최대한 보상하는 방침을 세우고 싶어하셨지만 생존한 관련자들은 할아버님의 죄를 덮어 버리고 침묵하는 걸 선택했어. 진상을 모르는 다른 임원들도 우리 책임이 아닌 걸로 얼버무릴 수 있다면 굳이 돈을 쓸 필요 없다고 강경하게 반대했었지. 일반 사회에 섀도나 페르소나 같은 이야기가 새나가기라도 하면 패닉이 발생할 것, 법적인 문제들도 지나치게 복잡해질 것도 고려해야 하다 보니 아무리 아버님이어도 독단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었어. 너희에게 급료나 본격적인 장비를 지급하지 못하고 매번 쿠로사와 씨를 거쳐야 했던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이야. 나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키리조 그룹 내부에 적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됐다. 아버님은 내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던 거야."
"솔직히 좀 많이 난해하네요 거......"

미츠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곧 모두에게 할 이야기다. 그 때 다시 설명해주지. 그나저나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것만으로도 꽤 스트레스 해소가 되는군."

말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에 깃든 수심은 걷히지 않았다. 준페이는 그녀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먼 곳을 응시하며 거의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유키가 남긴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만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나는 일종의 노예라는 걸.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고, 내 의무이며, 내 숙명이야. 절대로, 절대로 도망칠 수는 없어..."

그 목소리를 들으며 준페이는 깨달았다. 1년 전에 비해 키리조 선배의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진 것은 좋지만, 지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부드러움이나 온화함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슬픔과 두려움,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이었다. 준페이는 이를 악물었다. 이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무엇이 아닌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것은 분명 아니었다. 어떻게든 기운을 북돋아주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 개그를 할 수는 없잖아.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 분위기 파악은 한다고. 젠장, 마코토,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준페이는 잠시 고민했지만, 한발 앞서 미츠루가 말을 돌렸다. 

"참, 이야기하는 걸 잊을 뻔했군. 닉스를 물리치고 모든 것이 끝났으니, 이젠 특별과외활동부도 해산이다."
"음? 며칠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완장과 페르소나 소환기도 회수한다고..."
"아, 이미 했던가?"

미츠루는 약간 허둥거렸다. 그걸 보며 준페이는 힘들게 웃어보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럴 리가 없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랬었지. 이번 달 말일... 3월 31일에 전부 걷어서 연구소로 보낼 예정이야.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내 개인적인 감정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알겠어요. 그래도, 앞으로도 다들 가끔 만나면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요. 많이 바쁘실 거라는 건 알지만요 뭐, 그냥 전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미츠루는 몸을 일으켰다.  
 
"어울려줘 고맙다 이오리. 다시 들어가봐야겠어."
"예. 그럼 기숙사에서 봐요 키리조 선배."

목이 잠기는 느낌이 들었지만 간신히 대답했다. 미츠루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멀어져갔다. 준페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불러세웠다.

"키리조 선배!"
"뭐지?"
"우리는 함께 큰 일을 해냈잖아요! 힘들 때는 좀 더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해도 돼요. 저야 미덥지 못하겠지만, 사나다 선배도 있잖아요!"

미츠루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약간 슬프게 웃어보였을 뿐이었다. 

이미 주변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미츠루의 뒷모습을 보며 준페이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토록 강하던 키리조 선배가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어쩌면.... 키리조 선배는 지나친 슬픔과 두려움,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무너지지 않을까? 예전의 키리조 선배는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에 종종 강압적인 면을 보이곤 했다. 유카리는 내내 그걸 불만스러워했었고, 자신도 종종 약간 거북하긴 했다. 작년 수학여행 이후로 그런 면이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은 그 때와는 정반대의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나 같은 놈이 생각해 봤자 뭐 별 수 있나...."

이런 생각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키리조 선배가 그렇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라고, 그녀의 이성과 자제력을 믿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머릿속도 마음속도 끝없이 복잡했고 주변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밤이 오고 있었다.    
 
+   

혼자 영화를 보고 나와, 와카츠의 DHA 정식으로 저녁을 해결한 뒤 폴로니안 몰의 오락실에서 시간을 죽이던 준페이가 기숙사에 도착한 건 밤 9시가 넘어서였다.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서며 힘껏 외쳤다. 

"어이, 나 왔다!"
'응, 왔구나.'

로비의 소파에 앉은 채 특유의 무표정에 가까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친구가 대답한다. 자신은 그 곁으로 걸어가 소파에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는 옆에 털썩 앉아 리모컨을 집어들고 TV 채널을 돌리면서 불평한다. 유카리와는 한 교실에 앉아 있어도 멀리 있는 것 같다, 후카도 얼굴 보기 힘들다, 자신도 미래라는 걸 조금은 생각하게 된 이후 나름 공부를 좀 하게 돼긴 했는데 진도 쫓아가기 어렵다, 평화가 온 건 좋지만 가끔은 그 지겹던 타르타로스의 복도가 조금 그립기까지 하다, 뭐 그런 아무 말을 늘어놓는다. 그런 알맹이 없는 말을 친구는 옆에 앉아 조용히 듣고 있다. 얼핏 보면 그저 무표정하고 무관심해 보이는 인상이다. 하지만 녀석을 아는 사람이 좀 자세히 살피면 녀석은 항상 보일락 말락한 엷은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른쪽 눈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면서 녀석은 나직하게 말한다.

'열심히 잘 살고 있구나 준페이, 안심이야.'
"난 괜찮아! 치도링도 이제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 곧 휠체어 졸업할 수 있을 거라더라. 그러니까 너는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이거야! 이 이오리 준페이 님은...."

그리고, 백일몽에서 깨어난다.

텅 빈 로비는 어둡고 쌀쌀했다. 그리고 자신은 소파에 홀로 앉아 마치 녀석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중얼대고 있었다. 

"꼭 미친 놈 같네... 하, 하하하..."

콧등이 시큰해 오는 걸 느끼면서 준페이는 로비를 둘러보았다. TV에서는 주식시장이 활황이라고 뉴스 앵커가 떠들고 있었다. 무기력증이 사라지고 섀도 피플이 됐던 사람들이 원 상태로 돌아와 각자 직장으로 복귀한 결과가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뉴스가 끝나고 나자, 요즘 한참 인기 상승세인 리세치라는 신인 아이돌이 나오는 광고가 이어졌다.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그 활력이 넘치는 세상은...

"보고 있냐, 마코토... 우리가, 그리고 네가 구한 세상이야..." 

시끄럽고, 시끄럽고, 시끄럽고,

공허하다. 

뉴스에서도, 시사 대담 프로에서도, 이제는 작년 한 해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집단 무기력증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다들 지난 1년을 잊어버리자고 암묵적으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세상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평하고 요란스러웠다. 마치 혼자 떠들고 있는 저 TV처럼. 준페이는 그 헛헛한 소음을 견딜 수 없어서 귀를 틀어막았다. 
그 때 기숙사 문이 열리며 사나다 아키히코가 들어섰다. 내내 뛰어왔는지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어, 왔어요 선배? 지금까지 체육관에 계셨던 거에요?"
"...그래."

아키히코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준페이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로비를 가로질러 냉장고 문을 열고 이온음료를 꺼내 들이켰다. 그런 그에게 준페이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사나다 선배... 많이 바쁘세요?"
"무슨 일이지 준페이?"
"저기 말이죠... 요즘 키리조 선배 표정이 많이 어두워 보여서요..."

준페이는 약간 두서없이 낮에 미츠루를 만났던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래서, 좀 걱정돼서요. 키리조 선배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 선배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후로 처음 봤어요. 제가 섣불리 위로 같은 거 할 주제는 못돼지만, 사나다 선배는 키리조 선배와 중학교 때부터 친했으니까..." 

소파 맞은 편에 앉아 묵묵히 준페이의 이야기를 듣던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약해졌군, 미츠루 녀석. 한심하긴."
"네?"
"못 알아들었냐? 한심하다고 했다."

준페이는 잠시 멍하니 아키히코를 바라보았다. 사나다 선배도 키리조 선배도, 둘 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서로 은근히 칭찬하기도 하고 옛 이야기를 주고 받는 걸 종종 곁귀로 듣기도 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쌀쌀맞게 말하는 거지? 그러나 준페이의 당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힘들겠지. 하지만 우리는 키리조 그룹 내부의 일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라.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스스로 해낼 수 밖에 없는 일이라면, 스스로 해내야만 해."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함께 사선을 넘어 온 동료고, 게다가 사나다 선배와는 친구잖아요?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미츠루는 어린애가 아냐. 오래 봐왔으니 아는 거다. 얄팍한 동정 따위 해봤자 의미 없어. 미츠루는 자신의 눈물은 스스로 닦아낼 줄 아는 녀석이다."
"어른도 아니잖아요! 키리조 선배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사나다 선배도 그랬잖아요, 강한 녀석인 건 알지만 그 심지가 부러져 버렸다고! 그 땐 그렇게 걱정해 놓고 지금은 왜 그래요 도대체? 자기 눈물이야 스스로 닦는다 쳐도, 위로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걸 꼭 얄팍한 동정이라고 폄하해야 돼요?"

준페이는 화가 치미는 걸 느끼며 버럭 소리질렀다. 그러나 아키히코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런 일까지 겪었는데도 극복했기에 난 미츠루를 인정하고 존경할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네 이야기대로라면 실망스럽고 한심할 뿐이야. 시합에서 졌다면 패자로 끝나지만, 그 때문에 마음이 꺾였다면 두 번 다시는 이길 수 없는 약자가 돼. 난, 약자가 싫어. 그 뿐이다."
"!"

준페이는 사나다 아키히코의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한없이 차가웠다. 자신이 헛소리를 할 때마다 핀잔을 주고 짜증을 내면서도 챙겨주던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할 이야기 끝났으면 가겠다, 피곤해. 씻고 자야겠어."

그는 몸을 일으켜서 계단으로 향했다. 그 등을 잠시 바라보던 준페이는 소리를 질렀다. 

"사나다 선배도 약하잖아요!" 
"뭐?"

아키히코는 거칠게 몸을 돌렸다. 그러나 준페이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료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닉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사나다 선배도 좌절했잖아요! 우리가 뭘 할 수 있냐, 그런 것과 어떻게 싸우냐고! 우리 모두 겁나긴 마찬가지였어요, 특히 저는 마코토 탓을 하면서 억지를 부리기까지 했고! 하지만 결국 정신을 차리고 싸우기로 한 건 저마다 싸울 이유를 찾아낸 서로를 믿어서였잖아요! 지금 이런 선배 꼴을 보면 그 녀석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아키히코의 눈빛이 변했다.

"마코토 이야기는 하지 마!"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준페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 녀석을 떠올리면 미칠 것 같다고! 미키가 죽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 녀석이 날아올라서, 혼자 닉스를 향해갈 때 나는 아무 것도 못했어! 내가... 내가 약해서 그 녀석이 그렇게 된 거라고! 또 그 때처럼!"
"제기랄, 선배는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달에서 진짜 닉스가 나타난 그 순간, 아무 것도 못한 건 다들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니까,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집어치워, 패배자들끼리 서로 상처를 핥아주기라도 하자는 거냐?"

퍽. 

아키히코는 준페이의 볼을 후려갈겼다. 준페이는 크게 휘청대면서 물러나다가 소파를 짚고 간신히 섰다. 아키히코 역시 당황했다.

"....미안하다, 준페이.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준페이는 머리가 어지럽고 입 안에서 피가 차오르는 걸 느끼며 찡그렸다. 나도 타르타로스를 오르면서 본의 아니게 꽤 단련이 된 거 같은데 역시 대단한 주먹이야, 진심으로 때렸다면 분명 기절했겠지.

"확실히 약해졌네요, 사나다 선배. 저 정도는 일격에 KO시켜야 정상일텐데.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죠? 닉스에 대해 들은 뒤 기숙사로 돌아와서... 그 때도 바로 이 로비였었죠, 헤헷." 
"...."
"그 때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맞고 나서도 납득했어요. 엄청나게 아팠지만. 하지만 지금은 선배, 망가져 있어요. 키리조 선배나 유카리처럼. 건방 떠는 저도 한 방에 눕히지 못할 정도로."

아키히코는 어두운 표정으로 준페이를 외면했다. 

"지금은 선배도 이래저래 버거운 거 같으니까... 뭐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거 같네요." 

준페이는 천천히 말하고는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고 몸을 돌렸다. 계단 위에서 켄이 자신과 아키히코를 슬픈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이쿠, 보고 있었구나 아마다 소년? 언제부터였냐? 설마 처음부터?"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입안이 무시무시하게 쑤시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 방으로 와요, 준페이 형. 약이 있으니까 발라줄게요."
"기왕이면 치도링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사랑하는 여자에게 걱정끼치느니 남자가 낫지 않아요?"
"그것도 그렇네."     

난간을 짚고 계단을 오르던 준페이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로비에서 아키히코가 이쪽을 등진 채 서 있었다. 그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래도 예전처럼 강하고 올곧은 선배로 돌아가길 기다릴게요, 사나다 선배.' 

준페이는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너무나도 높고 힘든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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