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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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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없어도 세상은 변한 것 없이 시간이 흘렀고, 3학기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준페이와 유카리, 후카, 아이기스, 그리고 켄은 진급을 앞두고 있었고, 미츠루 선배와 사나다 선배는 졸업했지만 계속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유를 모두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월광관 고등학교 2학년생, 이오리 준페이는 점심 시간에 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 계단을 밟으면, 그 흐리고 쌀쌀하던 겨울날이 떠오른다. 그 때도 옥상이었다. 자신은.... 그에게  널 만나서 다행이라는 속내를 털어놓고는, 이 싸움이 끝나도 여전히 친구인 거냐고 물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뻔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웃으면서 내민 손을 맞잡아왔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전을 마치고 모두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았을 때- 자신이 이 옥상에 다시 올랐을 때 본 것은....      

"...후카?"

후카는 옥상 난간에 기대서서 도시의 풍경을 내다 보고 있었다. 후카의 시선이 향한 저 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준페이는, 키리조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건설회사에 의해 한참 재건 공사 중인 문라이트 브릿지를 발견하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작년 12월, 죽음의 선고자로서 가진 원래 힘의 편린을 드러낸 모치즈키 료지가 그걸 단 일격으로 부숴버리던 광경이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언론에서는 작년 말 짧은 시간 동안 큰 위세를 떨쳤던 닉스 광신도들의 테러로 추측하고 있었지만, 길게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 안녕 준페이..."

후카는 준페이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미안, 바람이 불어서... 눈에 뭐가 들어갔나봐."

준페이는 묵묵히 손수건을 내밀었다. 후카는 눈 주변을 닦아내고는 손수건을 돌려주며 애써 밝은 태도로 물었다. 

"요즘 지내기는 좀 어때?"
"나야 뭐 늘 비슷하지. 새삼스럽지만 학교 공부란 놈 참 쉽지 않네~ 섀도랑 싸우는 게 차라리 더 쉬운 것 같다니깐."
"그래도 성적 많이 올랐잖아? 작년 기말고사 때는 중위권까지 올라갔지? 준페이도 성실해졌으니까,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하하, 나님은 대단하니까!"

둘 사이로 다시 바람이 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준페이는 툭 던지듯 물었다.

"옥상, 자주 올라와?"
"응... 약속했던 곳이니까. 그것 말고도 추억이 많은 곳이라서. 마코토가 내 요리를 맛봐줬던 곳이기도 하고... 나츠키가 전학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눈 곳도 여기거든."
"아... 그 애? 그러고 보니 친해졌었지?" 
"응....."

후카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 때는 나츠키가 멀리 떠나버렸지만, 아무리 멀리 있어도....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심지어 우주 저 멀리 있어도 소중한 상대와 마음만은 이어져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었어. 그걸 계기로 내 페르소나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힘'이라는 걸 깨달았었고. 하지만..."

그녀는 허공을 향해 흰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죽음만은 넘어서지 못하겠어."
"...."

"사실 요즘도 가끔 유노를 써서 마코토를 찾아보곤 해. 영혼이라도 남아 있다면, 유노라면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매번 헛수고로 끝나지만." 

그 손은 허공만을 움켜쥐었다. 준페이는 이해한다고 말하려다가 침묵했다. 그런 말은 어떤 위로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시간이 더 많이 지나고 나면 익숙해지겠지. 나도, 우리 모두도... 어떻게든 각자 삶을 살아갈테고. 하지만... 지금은 역시 좀 힘드네."

후카는 슬프게 웃어보였다. 준페이는 그런 그녀 옆에 서서 오후수업 5분전을 알리는 예령이 울릴 때까지 한참 묵묵히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봄 햇살이 따사로이 내려쬐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며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녀석이 구해낸, 하지만 그 녀석 자신은 영원히 떠나 버린 세계였다. 그 녀석이 없는 우주였다.

+

수업이 끝나고, 종례를 마친 토리우미 선생님이 교실을 나섰지만 준페이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잔뜩 흐려진 하늘 아래 육상부원들이 서둘러서 연습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저만치 미야모토 카즈시와 니시와키 유우코의 모습도 보였다. 그 때, 토모치카 켄지가 준페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집에 안 가냐?"
"어, 으응... 가야지..."

애매하게 대답하는 준페이를 바라보며 켄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키 일 때문이냐?"
"...."

준페이는 대답대신 모자를 푹 눌러썼다. 

"독서실 가려던 참인데 그 전에 하가쿠레에 들를래? 공부도 배는 좀 채우고 나서 하든가 해야지."

듣기로는 이 녀석도 작년에 카노 선생에게 단단하게 반해서 속앓이를 많이 했었는데, 마코토가 상담 상대가 되줬던 모양이었다. 준페이는 기운없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니가 쏘는 거냐?"
"음... 빌리는 걸로 해주마." 

둘은 시시한 잡담을 주고 받으며 교실 문을 나섰다. 

"넌 진로 뭘로 정했냐?" 
"글쎄, 모르겠다야."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고 보니 요즘 다니는 독서실 총무 누님이 미인인데..." 
"아 놔 이 새끼 또 시작이네."
"또래 여자애들은 유치하잖아. 시끄럽고, 연예인이나 밝히고. 여자란 역시 성숙하고 포용력 있는 누님이 최고라니까."
"너 야동도 유부녀 마인드컨트롤 같은 매니악한 거 좋아하지?"
"뭐임마? 난 어디까지나 순애 취향이거든?"

켄지는 찡그리면서 준페이를 노려보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준페이도 낄낄 웃으며 켄지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렇게 일부러 천박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실없이 키들대는 일상의 한 순간도 나쁘진 않다. 마코토 녀석은 이제 더 이상 없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얼레, 저기 타케바잖아?"
"응?"

준페이는 복도 저편을 돌아보았다. 활이 든 가방을 둘러멘 유카리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준페이는 재빨리 말했다.

"미안, 먼저 가라. 라멘은 다음에 먹으러 가자."
"어? 응..."

갸우뚱하는 켄지를 등 뒤에 남기고 준페이는 그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어이, 유카릿치!"
   
묻고 싶다. 너도 후카처럼 아직 슬픔에 젖어 있어? 그 녀석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어?

"응? 안녕 준페이. 어쩐 일이야?"

고개를 돌린 유카리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왔다. 무척 예쁘지만 약간 쌀쌀맞아 보이는, 남자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듯한 특유의 표정. 작년 이 무렵과 똑같았다. 왠지 모를 서운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준페이는 히죽 웃었다.

"어... 별 건 아니고, 오랜만에 만나보고 싶어서."
"같은 반에 같은 기숙사잖아, 보기야 매일 보면서 무슨 소리야?"
"그렇긴 한데, 쉬는 시간에도 점심 시간에도 넌 공부만 하고 있고... 말 걸기가 힘들달까, 말 그대로 얼굴만 마주치는 건 만나는 것과는 좀 다르쥐 아무래도~."
"좀 바쁜데, 할 이야기라도 있어?"

준페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슬픔에만 빠져 있지 않는 건 뭐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좀 그렇지 않나?

"뭐 대단히 할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고... 어 그런데 그거, 활 아냐? 그러고 보니 오늘은 궁도부 활동 있는 날 아니었어? 궁도부실은 반대편인데..."
"곧 3학년이잖아, 입시학원 등록했거든. 졸업할 때까지 궁도는 관두기로 했어. 궁도도 가벼운 마음으로 한 건 아니었고 마음은 아쉽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어... 그러냐."

유카리는 준페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작년에는 특별과외활동부 일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잖아. 너도 이제 마음 잡으라고 준페이. 학교 졸업하고 나서 진학도 취업도 애매하게 붕 떠 버리면 치도리한테 부끄러울 것 아냐?"
"아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타케바 선생님..."
"딱히 더 할 말 없으면 갈게."

유카리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보자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 녀석이 죽은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넌 정말 괜찮은 거냐?"

아차. 말 뱉고나서 준페이는 순간 후회했다. 유카리, 녀석을 좋아했었지. 그 녀석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상처가 될 지도 모른다.

유카리는 고개를 돌려 날카롭게 준페이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차갑고 단호하게,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서 말했다.

"지난 일에 매달려봤자 좋을 것 없어, 이오리 준페이."
"....미안."
"확실히 말해둘게. 마코토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 우리 모두를, 나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의 목숨과 미래를 지켜줬어. 어떻게 한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
"아무리 슬퍼해봤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마코토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주저하지도, 돌아보지도 않을 거야. 오직 앞만 바라보며 살아가겠어. 반드시."

준페이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둔한 그였지만 그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 너머에 깔린 엄청난 슬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괜한 말을 했네, 사과할게 타케바."
"...나도 쏘아붙여서 미안해, 준페이."
"그래... 유카릿치."

준페이는 어설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유카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같이 밥이라도 먹자 준페이. 하지만 오늘은 정말 곤란해. 그럼 간다."
"어, 응."

유카리는 등을 돌려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또각또각 하는 구두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렸다. 그러나 그 등은 작고 연약해 보였다. 준페이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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