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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웩, 너무 많이 퍼마셨어. 죽겠구만 아주. 푸하핫, 용병 숙소는 그 방향이 아니야! 그래 그래, 부축해 줄테니 팔 이리 달라고. 고귀하신 성전사께서도 한 번 술 꼴면 나 같은 강도 새끼랑 별로 다를 것도 없구만 그래? 으으, 그 도굴꾼 계집은 대체 얼마나 술이 센 거야? 전혀 취하는 기색이 없던데 말이지. 그 년 제법이야, 입 터는 것도 한 가닥 하고. 숙소 들어가기 전에 우물가에 좀 들러서 찬물에 머리 좀 담그고 가자고. 내일은 머리가 깨질 것 같겠지. 분명 오늘 밤을 후회할테고. 하지만 그렇다고 술을 끊지도 않을 거야. 아무렴 개가 똥을 끊겠어? 댁도 이젠 나 엔간히 알잖아 성전사 나리, 응?
후우, 이제야 좀 살겠구만. 개좆 같은 괴물들이 사방에 넘쳐나는 이 영지에서도 밤 하늘의 별빛만은 참 예뻐. 이 구질구질한 곳에선 별을 볼 기회도 자주 생기는 게 아니니까. 그녀도 정말 예뻤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내가 이래뵈도 좀 감성적인 구석이 있거든. 취한 김에 하는 소린데 말야, 사실은 시를 쓰는 취미도 있어, 안 믿어지지? 최근 영지에 온 그 문둥이 말야, 소문을 듣기론 어느 나라의 왕이었다더라고. 하! 개소리지. 국왕 폐하께서 뭐 볼 게 있으셔서 혼자 이런 썩창까지 오겠어? 뭐 그래도 나름 교양은 있으신 거 같으니까, 기회가 있으면 내 시를 한 번 봐달라고 할 생각이야. 흠, 설마 비웃진 않겠지? 응? 그녀가 누구냐고?
하 씹... 구질구질하게 그런 거 왜 묻고 그래? 자자, 아편이나 한 대씩 피우고 들어가서 잠이나 쳐자자고. 어 씨, 다 피웠네. 나리, 혹시 아편 좀 쎄벼둔 거 없어? 뭐? 그 손버릇 고쳤다고? 에헤이 별로 안 믿어지는데... 하하, 그래 그래, 나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그녀에 대해 듣고 싶다고? 아놔 나리 이런데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뭐 술 깰 겸 옛날 이야기나 좀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응, 일종의 고해성사라고 생각해도 될 거야. 빛을 섬긴다는 종교쟁이들은 위선자가 많아서 맘에 안 들지만 나리라면 뭐 참아줄 만하기도 하고.
난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있는 편이었고, 혼자 날 키우시던 어머니는 날 초장이의 도제로 들여보냈어. 매일 싸구려 기름 젓고 심지 꼬는 날이었지만 내가 철이 없었거든. 난 영웅담 속, 모험과 낭만으로 가득 찬 의적을 동경했어. 나리도 알지? 재수 없는 부자들 털어서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나도 좀 챙기고. 뭐 그 나잇대 남자애들 꿈이란 게 뭐 뻔하잖아? 그래서 뒷골목 친구들과 어울렸어. 단도질도 그 때 익혔고. 낮에는 공방에서 기술을 배우고, 밤에는 친구들과 밤이슬 맞고... 그러다가 시집 읽는 걸 좋아하는 동네 빵집 아가씨랑 눈이 맞았지 뭐야.
주제 넘는다고 웃어도 좋아 나리. 답잖게 사랑 따위를 하게 되니까... 행복하긴 했어. 하지만 그게 참,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게 되더라고. 초장이는 안정된 일자리긴 하지만 수입이 좋다고는 하기 힘들고, 좀도둑질 따위로는 모을 수 없는 큰 돈이 필요했어. 밤일을 나가는 횟수가 많아졌고, 점차 난 거칠어졌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로를 오가며 오가는 행인을 덮치기 시작했지. 부자만이 아니라 만만해 보이는 목표라면 아무에게나 손을 댔고, 좀 다치게 하는 것 정도는 망설이지도 않게 됐어. 의적? 얼어죽을.
그만큼 낮의 일엔 소홀해졌지. 결국 실수로 불을 내고는 공방에서 쫓겨났어. 집에서도 쫓겨났고. 아가씨도 내가 위험한 일을 한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챘고, 제빵기술을 배워보라고 권했지만 난 무리하는 한이 있어도 큰 돈을 벌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협박과 폭력으로 상대를 꺾고 짓밟는 게... 내심 즐거웠던 걸지도 몰라. 나리, 그 옛날 이야기 들어봤어? 니미럴 양심이란 건 마음 속 삼각형 같은 거라서, 험하게 굴리면 마음 속을 아프게 찌르지만 계속 굴리다 보면 모서리가 닳아 버려서 아무렇지도 않아진다는 그 이야기. 단도와 권총을 휘둘러 돈을 빼앗은 손으로 그녀를 안으면서도, 난 아무런 모순이나 가책을 느끼지 않았어. 씨발 꺼.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어. 강직하고 청렴한 걸로 이름 높던 보안관에게 덜미를 잡혔지. 보안관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의 개를 잊어버리는 실수를 저질렀고, 내 몸에 밴 화약 냄새를 개가 알고 있었거든. 뭐, 그래서 결국 큰 집 신세를 지게 됐지. 바로 그 보안관 양반과 이 세상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재회하게 될 줄은, 그리고 그 짜증나게 올곧던 양반이 나 이상의 막장 주정뱅이가 되어 있을 줄은 전혀 예상 못했어. 헤헤... 모든 길은 끝이 있는 법이고, 그 양반도 예외는 아니었던 거지. 오, 방금 이 표현 괜찮지 않았어 나리? 잊어 버리기 전에 적어놔야지...
얼레, 그거 아편 아냐? 뭐? 손버릇 고치기 전에 챙겨놨다가 잊어버리고 있던 거라고? 응 그래 정말로 그렇겠지, 킥킥킥... 아, 고마워. 한 대 빠니까 기분이 좀 낫구만, 후우. 아무튼, 그 안에서 그녀 소식을 들었어. 돈 많은 귀족의 첩이 되어서 애를 낳았다더라고. 그리고 나는 살인도 태연히 저지르는 개자식이 되어 있었어. 사막의 나라와 전쟁 중이었고, 또라이 흉악범들은 질리게 많았고, 주변엔 온통 그런 년놈들이었으니까.
그 개자식은, 어느 날 죄수 폭동이 일어난 틈에 교도관을 처치하고 탈옥했어. 갈망하던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춥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악에 받쳐 있었지. 세상 모두가 밉고 원망스러웠어. 수배령을 피해 하수도에서 숨어지내며 쥐를 잡아 산 채로 뜯어먹던 중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 보니 흐린 하늘에 가득한 구름이 잠시 걷히고, 별빛이 보이더군. 그래, 마치 오늘 밤의 바로 저 별빛 같은. 그 빛을 보는 순간...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지겨워졌어. 아무도 이 개자식을 모르는 먼 곳으로 도망쳐서, 그래도 아직은 젊고 튼튼한 편이니까 막일이라도 하면서 더 이상 범죄 따위 저지르지 말고 자유롭게 살자고 결심했어.
하지만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도 돈이 필요했고, 할 줄 아는 거라곤 하나 뿐이었어. 무기와 정보를 마련하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마지막이라고 결심하고는 한 탕을 준비했어. 너무나 절박했고 다른 수가 없었지. 그래... 그 땐 그렇게 생각했어. 그리고 산길에 숨어 있다가, 화려한 문장이 찍힌 마차를 덮쳤어.
너무 쉬웠어. 몇 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머리는 팽팽 돌고, 팔다리엔 힘이 넘쳤지. 우선 마부의 대가리부터 날려 버리고,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경비의 목을 순식간에 따고, 멈춘 마차에서 인기척이 났어. 생각할 틈도 없었어. 순전히 몸에 익은 행동이었지. 한 순간, 반사적으로... 정말이야, 나리. 성스러운 빛에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진짜 저절로.... 손이 움직여서 방아쇠를 당겼어. 단 한 방.
모든 게 조용해졌지. 어두운 만족감이 마음 속에 차오르는 그 순간 묘한 충동에 사로잡혔어. 이 마지막 강도질에 죽은 사람이 누군지 얼굴을 봐두고 싶다는 충동. 마차에 다가가서 문을 열었어.
익숙한 얼굴이 거기 있었어. 한 때 사랑했던, 그녀의 얼굴. 공포로 차갑게 굳은 채 식어가는 그 얼굴에 피가 튀어 있었어.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몸통에 커다란 총알 구멍이 뚫린 어린애.
어딘지 모르게, 나를 닮았었어.
이게, 내가 이 영지로 온 이유야. 속죄? 난 그런 같잖은 걸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냐, 나리. 그 따위 것, 해서 뭐해? 내가 진심으로 내 잘못을 뉘우친다고 치자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아이가...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 빌어먹을 개자식은... 결코 용서 받지 못할 쓰레기는... 바로 나는... 내 죄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너무도 기나긴 길을 지나 세상 끝까지, 세상의 끝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가장 어두운 던전이 있는 곳까지 그저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서 마침내 여기까지 온 지금, 난 여전히 갇혀 있어. 이제 와서 내가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아무렴 개가 똥을 끊겠어? 댁도 이젠 나 엔간히 알잖아 성전사 나리, 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