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아얏! 아파라!"
"하여간, 준페이 형은 그 나이 먹고 왜 그렇게 엄살이 심해요?"
"사나다 선배는 복싱부 에이스거든! 진심으로 때린 게 아니어도 웃어 넘길 수 있는 데미지가 아니긴 마찬가지거든! 만성용왕권에 맞으면 뼈와 살이 분리되지만, 붕권도 뼛속까지 아픈 정도는 되거든!"
"타르타로스에서 싸우던 때에는 섀도에게도 여러 번 얻어맞았잖아요. 적당히 좀 해요."
켄은 준페이의 볼에 반창고를 붙여 주면서 투덜거렸다.
"이빨 흔들리는 데는 없죠? 연고를 발랐으니 곧 나을 거에요, 며칠 동안 붓기야 하겠지만. 입 안이 터진 건 알보칠에 물 좀 섞어서 머금고 있으면..."
"아, 안돼 아마다 소년! 사람은 그런 거 머금으면 죽어!"
켄은 한심하다는 심정을 굳이 숨기지 않는 눈으로 호들갑을 떠는 준페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준페이는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근데 켄, 어쩌다 구급약 같은 걸 방에 챙겨두고 있는 거냐? 보통 초딩 방에 있을 물건은 아니잖아?"
"저는 특별과외활동부에 들어오기 전부터 통신교육으로 창술을 단련했거든요. 어머니의 일 때문에."
준페이는 침묵했다.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 아라가키 신지로. 전 월광관 고등학교 재학생. 사나다 아키히코와는 같은 고아원 출신의 친구로, 키리조 미츠루와 더불어 셋은 특별과외활동부의 창설 멤버였다. 그러나 섀도타임 도중 섀도가 민가에서 날뛰었고, 그와 싸우던 도중 신지로의 페르소나 카스토르가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는 바람에 상징화가 돼지 않은 채 섀도타임에 휘말린 켄의 어머니가 살해당했다. 죄책감을 느낀 신지로는 도망치듯 특과부 활동을 관두고 학교도 휴학했다. 그리고 켄은 고아가 됐고, 친척 집에 얹혀 살며 월광관 초등부에 다니다가 페르소나 구사 재능이 있다는 걸 파악한 이사장의 눈에 띄어 기숙사에 들어왔다. 아직 어린 켄이 페르소나 구사 재능이 있었던 건 아마도 복수라는 명확한 삶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전에 미츠루가 추측한 적 있었다.
"반드시 어머니의 원수를 찾아내서 죽이고, 그 뒤엔 저도 죽을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필사적으로 단련했고... 그러다 보니 손바닥이 벗겨진다거나 해서 다치는 일도 가끔 있었거든요."
"......"
켄의 눈은 소년답지 않게 어둡고 탁했다. 준페이는 그 눈을 바라보며 가슴 한 구석이 싸해지는 걸 느꼈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라서.... 감당을 하지 못하겠어.
그 때 톡톡하고 뭔가 두들기는 소리와 부스럭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준페이는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의 케이지 안에서 통통한 갈색 햄스터가 뒷발로 일어나 뭔가 보채듯 작은 앞발로 창살을 두들기고 있었다. 켄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야식을 안 챙겨줬네요. 저 녀석, 해바라기씨를 좋아하거든요."
몸을 일으킨 켄은 책상 서랍에서 해바라기씨가 든 캔을 꺼내어, 케이지 위쪽을 열고는 몇 알을 넣어줬다. 햄스터는 눈을 빛내며 그걸 갉아먹기 시작했다.
"오오, 햄스터를 키우고 있었구나. 다행히 주인을 닮지 않아서 귀여운데."
"귀여워보이고 싶지도 않거든요!"
켄은 볼을 부풀렸다. '떼렛떼떼! 이오리 준페이는 화제를 돌리는데 성공했다!' 준페이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안도했다.
"이름이 뭐야?"
"햄버그에요."
"맛있어 보이는 이름이네 거. 아, 그렇다고 잡아먹고 싶다는 뜻은 아니고."
"마코토 형도 똑같은 말을 했었어요."
아. 웃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진다. 켄은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해바라기 씨를 갉는데 열중하는 햄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검은 눈동자에는 어떤 기쁨이나 즐거움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만일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 대신 햄버그를 맡아 키워달라고 마코토 형에게 조른 적 있었어요. 결국 저는 살아남았고, 햄버그도 건강한데... 이젠 마코토 형이 없네요."
"...."
작게, 거의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가끔 마코토 형 꿈을 꿔요. 그 꿈 속에서, 저는 마코토 형과 같이 보낸 시간을 반복하고 있어요. 같이 라멘집에 갔던 일, 영화축제에 갔던 일, 아라가키 씨가 죽은 이후 옆에 있어줬던 일, 기숙사 옥상에서 특훈 상대가 되어줬던 일... 준페이 형도 기억나죠?"
"아아, 그 때. 마지막에는 결국 네가 녀석에게 한 방 먹이는데 성공했었지."
"솔직히, 마코토 형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즐거우면서도 내내 마음 속에 응어리가 있었어요. 아라가키 씨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난 복수를 해야 하니 이런 걸 즐겨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를 지키고 죽은 후에도 복잡한 감정이 좀 남아있었어요. 하지만 그 꿈 속에서는 정말로 행복해요. 그리고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알게 되는 거에요. 마코토 형은 이제 죽었고, 더 이상 없다는 걸. 잠에서 깰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차라리 그런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간절하게. 엄마가 죽었을 때 한참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도, 그 꿈 속에서는 즐겁고 기쁘다는 걸... 도저히 부정하지 못하겠어요."
"그렇구나....."
"저도 사나다 형이 요즘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하지만 역시 저도 좀 이상해 보이죠?"
"이상하지 않아, 켄. 다들 같은 기분이니까. 키리조 선배도, 유카리도, 후카도. 물론 나도. 그 날 이후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이기스도, 가끔 기숙사를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는 코로마루도 그렇겠지."
"엄마가 죽었을 때 어른들은 다들 그렇게 말했어요, 어찌 됐건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아마도 그 말이 맞을 거에요.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도저히 그 맞는 말대로 하지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아라가키 씨가 저 자신을 위해서 살라는 유언을 남긴 것 옆에서 들었었죠? 1월 31일 그 날, 두렵지만 그래도 닉스와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심하고 타르타로스로 가기 직전 저는 아라가키 씨와 찍었던 사진 앞에서 기도했어요. 이것은 죽은 아라가키 씨의 영혼을 위한 싸움인 동시에, 살아 있는 저 자신을 위한 싸움이라고. 그러니까 함께 해달라고. 하지만 제게 용기를 준 마코토 형까지 죽은 지금 저는 삶도 죽음도,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준페이는 이를 악물었다. 삶과 죽음이 같을 리가 없다. 같아선 안 되는 거다. 하지만 도저히 켄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준페이 형. 만일 아라가키 씨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저를 보면 화를 낼까요?"
"글쎄다... 나는 아라가키 선배가 아니니까. 강하고 멋지고 남자다운 선배라고 생각했고 죽었을 때도 무척 슬펐지만 진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준페이는 잠시 신지로의 생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깊이 눌러 쓴 비니 아래 빛나는 형형한 눈. 낮은 목소리. 언제나 입고 있던 겨울용 코트. 그리고 아주 가끔씩 볼 수 있던, 능숙한 솜씨로 국자를 휘젓던 모습.
"요리하는 걸로 봐서 겉보기보다 섬세한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마코토 녀석과 나름 인연을 맺은 모양이니 우리와 똑같이 슬퍼했을지도 모르지. 솔직히 그에 대해선 도저히 뭐라고 말 못해주겠다야, 하지만 말이야."
준페이는 아마다의 어깨를 두들겼다.
"나는 화내고 싶지 않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준페이 형."
켄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은 한참 우두커니 서 있었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
켄의 방을 나선 준페이는 문득 자신이 여자들이 지내는 3층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이 혼탁했다. 어른이 되어도 술은 절대 입에 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아마도 술에 잔뜩 취하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계단 옆 자판기와 의자가 놓여 있는 휴게장소를 지나서,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아이기스의 방 앞이었다.
"아이기스, 있어? 자는 중이야?"
겉모습은 금발 벽안의 미소녀로 보이지만, 그녀의 정체는 야쿠시마에 소재한 키리조 그룹 산하 비밀 연구소에서 제작된 대 섀도 특별 제압병기 7식. 잠을 잘 필요가 없다. 인간이 잠을 자면서 피로를 회복하고 기억을 정리하는 것처럼, 절전 모드에 들어가서 회로를 식히고 기판을 세척하고 데이터를 정리할 뿐이며 그 상태에서도 주변 상황을 알 수 있다. 준페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기계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아이기스는 방에 틀어박혀서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달라질 리도 없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을 계속했다.
"요즘 들어서, 다들 이상해. 슬픈 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뭔가... 너무 이상해 모두들. 그나마 후카는 슬픈 와중에도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 같지만 말야. 유카리는 이성적인 척하지만 사실 무리하고 있어. 키리조 선배는 한 술 더 떠서 부서지기 직전 같아 보이고. 사나다 선배는 마음을 닫아 버렸고, 켄도 자포자기한 것 같더라. 나도 갈피를 잡지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아무 이야기라도 하고 싶어서. 아이기스, 넌 어때? 억지로 나올 필요는 없어. 그럴 때도 있는 거겠지. 그냥, 목소리만이라도 들려주면 안 될까?"
잠시 대답을 기다렸지만, 역시나 문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면서 문에 기대어 복도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것조차 싫다면, 내 이야기라도 들어줄래? 엄청 창피하지만, 솔직히 말할께. 아이기스, 난 말야, 처음 페르소나 능력에 각성하고 남 몰래 섀도와 싸워 사람들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슈퍼 히어로가 된 것 같아서 엄청 들떴어. 마침 내 페르소나 헤르메스는 생긴 것도 멋있었고, 화염을 다뤘고, 아, 만화나 게임 주인공들은 불 속성인 경우가 많거든. 내가 적성을 갖고 있던 무기도 마침 그런 주인공들이 자주 사용하는 양손검이었고. 검술 같은 건 모르는 나로선 야구 배트마냥 힘껏 휘두를 뿐이었지만. 크흠, 말하자면 뽕이 엄청나게 찼단 말이지 그게. 하지만 마코토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고는 녀석을 질투하기도 했고, 페르소나 능력을 빼면 내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어. 그런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준페이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다들 같이 어둡고 위험한 타르타로스를 오르면서 싸우던 시절이... 사신 타입이라고 했던가, 몸에 사슬을 감고 쌍권총 같은 걸 든 그 더럽게 강하던 섀도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내가 레벨업해가고 있다는 걸 느끼던 그 시간들이 그리워. 그 공포와 고통마저도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의미기도 했으니까."
이 시작도 끝도 없는 무력감과 폐색감으로 가득 찬 현재와는 달리.
그 때였다.
"유감이지만, 그녀는 듣지 못하는 것 같군. 관절 가동음도 들리지 않고 오일 냄새도 나지 않는 걸로 봐서, 아예 스스로 전원을 내려버린 모양이야."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옆에 흰 알비노 시바견이 다가와 있었다. 코로마루는 작게 재채기를 하더니 뒷발을 들어 귀를 긁었다. 준페이는 그걸 보며 멍하니 눈을 껌벅거렸다. 방금, 코로마루가 말을 한 게 맞나? 어, 혹시 내 망상인가? 놀랐지만 동시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마루는 도저히 보통 개라고 생각되지 않는 수준의 지혜와 판단력을 갖고 있다. 애초에 페르소나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평범한 동물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자아의식이 있다는 의미다. 아이기스는 코로마루의 '말'을 자주 통역해주곤 했고, 유카리는 코로마루가 너보다 더 똑똑할 거라고 놀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코로마루는 준페이의 놀라움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다가와서 몸을 비볐다.
"하지만 나는 들었다. 나라도 괜찮다면, 잠시 어울려주지."
"어... 고마워 코로마루... 씨?"
어색하게 대답하자 코로마루는 크게 하품을 했다.
"치워라, 그냥 코로마루로 충분해."
코로 준페이의 어깨를 쿡 밀었다. 준페이는 손을 들어 코로마루의 등을 긁었다.
"시원하군. 그 녀석이 긁어주던 것보단 못하지만."
"...."
"옆구리도 좀 긁어봐라."
코로마루는 준페이 옆에 발라당 드러누워 헥헥거렸다. 준페이는 코로마루의 흰 털을 쓰다듬으며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어, 음.... 코로마루, 오늘 하루 동안 후카부터 해서 켄까지 모두를 한 번씩 만나봤는데, 내가 무심코 마코토 녀석을 떠올리게 하는 바람에 괜히 다들 아픈 곳을 찌른 것 같더라고. 나란 놈도 참 한심하게스리..."
"좀 더 힘줘서 긁어 봐."
"넌 아무렇지도 않아?"
"확실히 넌 많이 성장했다, 이오리 준페이. 하지만 성장했다고 해서 없던 눈치가 갑자기 생기는 건 아니거든. 그게 너답고."
코로마루의 입꼬리가 웃는 것처럼 말려올라갔다. 그러나 가늘게 뜬 그 붉은 눈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나라고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있겠냐? 다들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어. 이 기숙사 안은, 슬픔과 상실감의 냄새로 가득해. 견디기 힘들 정도로."
"......"
"주인님이 돌아가셨을 때, 내 마음 속은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그게 내 삶의 이유가 됐지. 내 페르소나에도 영향을 줬고. 하지만 증오와 복수는 삶을 지탱하는 이유는 될 수는 있어도, 삶을 이끄는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거다."
"아, 그 대사 어떤 만화에서 본 거 같아."
"그런가? 난 글은 읽지 못하니까. 아무튼 나는 한 때, 주인님과 함께 살고 죽는 미래를 원했다. 주인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섀도 근절을 원하게 됐고. 그래서 이 기숙사에 들어와 너희들과 함께 싸우고, 함께 산책을 하고, 맛있는 밥을 먹고... 그러다 보니 어느 샌가 목적이 생겼어. 이 싸움을 끝내고 모두 함께, 우리가 연 내일을... 그림자 없는 세상을 본다는 목적이."
준페이는 다시 슬픔이 목구멍을 꽉 메워오는 걸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특히 마코토에게는, 주인님이 내게 주셨던 목걸이를 맡기려고 했어. 그라면 내 두 번째 주인으로 인정할 만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코로마루는 눈을 감았다.
"나 역시 극복하지 못하고 있어. 모두와 마찬가지로.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코로마루는 뒹구르르 몸을 굴려서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두 귀가 축 늘어졌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슬픔과 상실감이 몰아닥쳤을 때는, 그저 그걸 인정하고 견딜 수밖에 없다는 거야."
"아, 그것도 어디선가 본 대사 같네... 어떤 게임에서 나온 거 같기도 하고."
"시끄러. 그래서 그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는 나도 알지 못해. 어쩌면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어 무너질지도 모르지. 그렇기 때문에, 너나 다른 녀석들에게 당장 듣기만 좋을 뿐인 위로 따위는 할 수 없어."
코로마루는 일어나서 몸을 부르르 털더니, 준페이의 손등을 부드럽게 핥았다.
"다들 함께... 그저, 어떻게든 견디고 있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뭔가 계기가 생기지 않을까. 나 역시, 그 희박한 가능성에 걸어볼 수밖에 없다. 지금은 말이지. 네가 견디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깨 정도는 빌려주마."
"...고마워."
준페이는 주저앉은 채 코로마루의 목을 끌어안고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그 따스하고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에, 에취!"
"끼잉..."
잠시 얌전히 안겨 있던 코로마루는 준페이가 재채기를 해대기 시작하자 몸을 비틀어 그 팔 안에서 빠져나왔다. 준페이는 킁 하고 코를 들이마시며 물었다.
"어... 코로마루? 너 방금까지 사람 말 하지 않았어?"
"와웅?"
코로마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본 준페이는 피식 웃어버리곤 다시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또 혼자서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응, 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준페이는 몸을 일으키고는 등 뒤의, 여전히 굳게 닫힌 방문을 흘긋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아이기스가 네 말을 전해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네가 하는 말처럼 들린 것도 아마도 전부 내가 멋대로 상상한 거겠지. 음, 나 만화랑 게임 좋아하니까. 아마도 너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하다 보니, 무심코 평소에 봤던 만화나 게임 주인공 대사들을 끼워맞춘 것일 꺼야. 누구 대사인지는 일일이 기억할 수 없지만. 이 이오리 준페이 님은 야구 실력만큼이나 상상력도 뛰어나거든! 아무튼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코로쨩!"
일부러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전혀 즐겁지 않았다.
준페이는 아래층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잠이 들고, 내일이 밝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시간이 흐르겠지만, 우리들의 시간은 거대한 무덤 같은 이 기숙사 안에서 멈춰 버렸다. 너무도 많은 추억과 기억들 속에 파묻혀 버린 채로. 삶도 죽음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채, 과거에 남지도 못하고 미래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그 사이에서 그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부유하면서. 그 추억과 기억들만을 끝없이 곱씹으면서.
준페이는 준페이다 보니까, 코로마루의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이 알 리 없다는 사실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