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유독한 녹황색으로 물들어서 일렁거리고, 그 하늘 가운데에서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색의 만월이 떠올라 세상을 비춘다. 섀도타임. 원래는 있을 수 없는, 매일 밤 자정이 되는 순간 펼쳐지는 13번째 시간. 타로 카드의 메이저 아르카나 13번, '죽음'에 대응하는- '현실'에 속하지 않는 초현실의 시간. 모든 전자기기가 작동을 멈추고, 인간이건 짐승이건 할 것 없이 모든 생명체가 검은 관으로 변해 침묵하는 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세상은 현실감을 잃어 버리고서 원래 모습의 기괴하고 음울한 반영으로 변한다. 오직 달빛만이 음산하게 내리쬐는 거리 저 편에서 총성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인다. 우리는 그 악몽 같은 거리를 내달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광경을 목격한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 가운데에서, 그 강력하던 아이기스가 반파되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아이기스를 내려다 보는, '그'의 모습을.
"섀도 반응... 료지 군에게서 느껴져요!"
"그럴 리가! 료지가 섀도라니?"
경악하는 후카와 유카리. 그리고, '그'의 단아한 입술이 열린다.
"정확히는 달라. 나는 섀도보다 더 위의 존재. 12개의 아르카나가 전부 합쳐져서 태어나는, '선고자야."
모치즈키 료지. 갑작스럽게 전학을 온 이후 고작 1달 남짓한 시간 동안 친구로 지냈던 소년. 늘 쾌활하고, 가볍고, 여자를 밝히고, 그러면서도 가끔은 사려깊고 따뜻한 면모를 보여주던 소년. 그 순간 준페이는 속으로 탄식한다.
또, 이 꿈을 꾸는구나.
료지의 모습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검은 망토를 두른 해골을 닮은 기괴한 형체로 변한다. 우리는 각자 페르소나를 소환해 덤벼들지만, 료지는 엄청난 힘을 발휘해 혼자서 우리 모두를 순식간에 제압하고는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문라이트 브릿지를 부숴버린다. 발 바로 앞에서 무너져 내린 문라이트 브릿지를 보며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자기 자신을, 준페이는 마치 타인의 몸 속에 갇혀 그의 말과 행동, 감정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본다. 요사하게 빛나는 만월을 배경으로 공중에 떠 있는 그의 나직한 음성이, 박살난 콘크리트와 철근 덩어리가 도쿄만으로 떨어지는 요란한 소음을 뚫고 우리들 모두의 뇌리로 파고든다.
"안심해, 지금 너희를 죽일 생각은 없어. 그저 알아두길 바랐어. 나라는 존재가 곧 멸망의 약속이며, 멸망 그 자체에 맞서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걸."
꿈 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하는 그 날의 기억, 그리고 모든 것이 늘 그 때와 같다. 료지는 담담한 태도로 우리에게 고한다. 태고에 이 별에 도착해 모든 생명에 '죽음'의 운명을 선사한 존재이며 모든 섀도들의 어머니인 닉스에 대한 것, 닉스가 눈을 뜨면 이 별의 모든 생명체가 섀도 피플이 되어 자기보존 본능을 잃어 버리고 죽을 거라는 것, 닉스는 모든 생명의 끝이라는 개념 그 자체이며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닉스의 도래를 알리는 존재라는 것. 이 세계는 다음 봄을 보지 못할 테지만, 선택지는 줄 수 있다는 것. 순간 그의 무표정이 가면처럼 벗겨지고, 형언할 수 없이 엄청난 슬픔과 고뇌, 그리고 연민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그 선택지를 제시한다. 선고자인 자신을 죽이고 섀도타임과 섀도, 페르소나, 우리의 지난 싸움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다가 조용히 종말을 맞이하느냐 아니면 자신을 죽이지 않고 공포와 무력감에 떨다가 고통스럽게 종말을 맞이하느냐.
너무 따라잡기 힘든 이야기라고 키리조 선배가 보기 드물게 당황한다. 유카리는 덜덜 떨면서도 그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 따위 믿을 수 없다고 외친다. 코로마루가 등의 털을 세우고 거칠게 으르렁거린다. 후카는 눈물흘리며 외면한다. 켄은 료지에게 창을 겨누지만 그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린다. 사나다 선배가 증거를 보여보라고 이를 악물고 따진다. 그러나 료지는 슬픈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 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럼, 닉스가 강림했을 때의 미래를 약간 너희에게 보여줄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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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좀 잡힙니까 어르신?"
한 노인이 강둑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낚시를 하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중년 남자였다.
"그냥저냥허지... 그나저나 자주 보이는구만 자네? 회사는 어쩌고?"
"사실은 얼마 전에 회사에서 잘렸거든요. 그 놈의 무기력증 때문에 일감이 줄어들어서... 마누라에겐 도저히 솔직히 말할 엄두가 안 나서, 여기서 시간이나 때울까 해서요."
"거 안 됐구만. 와서 앉게."
노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중년 남자는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줬다.
"요즘 세상 분위기가 영 흉흉하지?"
"망할 무기력증... 이유는 모르겠고, 인터넷에선 믿기 힘든 소문은 넘치고, 이상한 사이비종교도 요즘 유행하는 모양이고.... 세상이 망하기라도 하려는 건가 모르겠어요."
"아직 젊은 친구가, 재수 없는 소리 말게."
노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며 강둑에 심어진 가로수들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요즘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해. 자네, 저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아나?"
"어... 나무는 잘 모르지만, 소나무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왜 저렇게 시들시들하죠? 소나무는 사철나무잖아요."
"그래, 보다시피 잎이 전부 갈색으로 죽어있어. 몇 달 전만 해도 녹색이었는데."
"매연 때문이 아니겠어요?"
"바보 같은 소리 말게. 내가 여기로 낚시하러 나온 게 몇 년 째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 응?"
단호한 태도로 말하던 노인의 발 앞에 죽은 새 한 마리가 툭 떨어졌다.
"뭐야, 재수 없게..."
중년 남자는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그 목소리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저 만치서 날아가던 새 한 마리가 비틀거린다 싶더니, 공중에서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는 그대로 지면으로 추락하는 게 보였다. 뒤이어, 저만치에서 어슬렁대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저, 저거!"
노인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툭 떨어졌다. 노인은 경악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남자의 뒤쪽을 가리켰다. 중년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기겁을 하며 주저앉았다. 강 위에 죽은 물고기 떼들이 배를 뒤집고 떠올라 있었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 순간, 노인이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크흑...?"
"어, 어르신?"
"크억!"
노인은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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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속보입니다, 시민 여러분. 전 세계적으로 동식물들의 갑작스런 죽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화분의 꽃부터 시작해서, 개나 고양이 등의 반려동물, 농가의 가축들, 어린이, 노인을 거쳐 최근 성인들까지..."
"아직까지 이 연쇄적인 대규모 사망의 원인은 불명입니다. 밀과 벼, 보리 등의 필수작물들이 전부 말라죽어, 유래 없는 세계적 식량난이 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대국민 담화 도중 총리가 쓰러지면서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총리는 즉각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예후가 썩 좋지 않다고..."
"의사들마저 연이어 갑작스레 죽음을..."
"일종의 생물학 테러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UN 총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은 서로를 배후로 의심하면서 고성을...."
"패닉에 빠진 시민들이 폭도가 되어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대규모 인원이 세계 각지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닉스'라는 알 수 없는 이름을 외치면서..."
"자유공영당 소속 시도 마사요시 의원은 자위대를 출동시켜 일본의 강함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
"현 시간 부로 긴급조치가 발령되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이 방송을 보고 계시는 모든 시민 여러분들은 출입을 자제하고....."
"전기와 가스, 수도 공급 여부가 불확실... 어쩌면 이것이 최후의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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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빛이 꺼졌다.
도쿄, 서울, 샌프란시스코, 상하이, 모스크바, 델리, 파리, 런던... 세계 유수의 대도시들이 하나 둘 어둠에 잠겨갔다. 중간 중간 땅 위에서, 바다 위에서 큰 섬광이 번뜩였다. 핵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유도 목적도 없는 거대한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고 그렇게 미친 사람들은 그 공포를 떠넘길 상대를 필요로 했다. 마치 얇은 종이 위에 떨어뜨린 먹물 방울이 퍼져 나가듯 어둠이 세상을 잠식했다. 그 어둠은 결코 멈추지 않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문명의 빛, 생명의 빛을 하나씩 확실히 꺼뜨려갔다. 결국 지구 전체가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막막한 우주의 바다를 떠도는 유령선처럼. 결코 걷히지 않을 그 영원한 어둠 위로, 오직 달만이 무서우면서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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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실로 돌아온다. 모두가 창백한 안색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런 우리를 내려다 보면서, 그는 더 없이 슬프면서도 다정한 어조로 덧붙인다.
"아이기스가 나를 마코토의 내면에 봉인했었기에 그의 영향을 받아서, 난 인간의 감정이 생겼어. 너희를,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어 버렸고.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진심으로 부탁할께, 날 죽이고 모든 걸 잊어버려줘. 그렇게 하면 최소한 그런 고통은 없을 테니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끝날 거야."
풍경이 바뀐다. 이번엔 기숙사 로비다. 키리조 선배는 그간 조사한 이쿠츠키 슈지의 일지 속에서 료지, 아니 선고자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걸 뒷받침할 단서들을 발견했다고 이야기해준다. 죽음에 매료되어 있던 조부 키리조 코우에츠가 섀도들을 모은 것 역시 닉스를 불러들이기 위한 시도였으며 마코토가 월광관 고등학교로 전학을 와서 기숙사로 들어온 것도 이쿠츠키가 손을 쓴 걸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그리고 나 자신은...
"따지고 보면 전부 네 탓이잖아! 그런 걸 속에 품고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낸 거냐?"
이 꿈을 꿀 때마다 그 날, 그 순간을 반복한다. 마코토의 멱살을 잡고 비명을 지르듯 절망과 공포를 토해낸다. 패닉으로 갈라진 자신의 목소리를 마치 남의 목소리처럼 듣는다. 마코토는 상처받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슬픔, 고통, 두려움, 고독감, 죄책감, 의무감, 온갖 감정이 깃들어 흔들리는 그 눈동자에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이 비친다. 아니야, 마코토.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네가 그걸 키워낸 거나 다름 없잖아!"
몇 번이나 이 꿈을 꾸고, 몇 번이나 이걸 반복해서 겪는다.
"책임지고 해결해, 넌 특별하잖아!"
난 죽는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를 외면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게 그렇게 말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
마코토가 슬프게 중얼거린다. 이 모든 것이 이 날 일어났던 일이다. 결국 마코토는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닉스를 막아낸 뒤, 마치 벚꽃이 지듯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 날 그에게 한 말과 행동을... 되돌리지 못한다. 꿈 속에서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