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리 준페이는 눈을 떴다. 익숙한 기숙사의 자기 방 천정이 희미하게 보였다. 코로마루를 뒤로 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처음 이 꿈을 꿨을 때는 아침까지 침대 속에서 웅크려서 눈물흘렸었다. 켄은 마코토의 꿈을 꿀 때마다 즐겁다가도 깨어날 때마다 슬퍼진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자신은 꿈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그저 둔중한 고통이 가슴을 짓누르는 걸 느끼며 스스로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끝없이 되새길 뿐이었다. 그럭저럭 학교를 다니면서도, 가끔 치도리의 면회를 가서 웃으며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조차도 그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준페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아무렇게나 던져 둔 옷가지, 잡지, 게임기, 기타 잡동사니들이 발에 채였지만 아직도 꿈 속에 있는 것처럼 의식이 뿌옇고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마치, 정처 없이 밤거리를 헤매다가 들른 편의점에서 처음 섀도타임에 빠져 들었던 그 날처럼. 계단에 발을 딛었다. 여자들 방이 있는 3층을 지나, 작전실이 있는 4층을 지나, 옥상으로 나갔다.
기숙사 옥상에서 재배하던 텃밭 옆에는 모종삽과 장갑, 씨앗 주머니, 물뿌리개 등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마코토가 죽은 그 날 이후로, 아무도 돌보지 않은 것이다. 마코토와 함께 돌봤을 때 "다음에 보자 채소들아, 한가할 때 또 얼굴 비칠께"라고 콧노래를 부르며 채소들에게 말을 걸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옥상 난간을 짚고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기숙사 앞 도로에는 차들이 오가고, 도로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 직원이 나와서 지루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골목 모퉁이에서 취객이 벽에 기대어 토하고 있었다. 노숙자 하나가 신문지를 휘감고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있었다. 도로 저 만치에서 젊은 커플이 소리지르며 싸우는 게 보였다. 그걸 보면서, 불현듯 이오리 준페이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화내고, 울고, 먹고, 자고 있었다. 지구 상의 50억 명이 넘는 그 숱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오늘도 무심하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올 죽음을 억지로 외면하면서.
우리는 닉스와 싸워 이겼고 세상은 안전해졌다. 사람들 모두가 아무 것도 변한 것 없이, 평소대로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세상은 이제 괜찮은 것 같았다. 비록 여전히 어딘가 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있지만 아무튼....
남겨진 우리는 괜찮지 않아, 마코토. 전혀.
밤 12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섀도타임은 오지 않는다. 대신 탁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는가 싶더니 이내 빗발이 굵어졌다. 그 비를 맞으면서 준페이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얼굴에 넘쳐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귓전에 메아리치는 것이 빗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빗줄기와 더불어 시간이 조용히, 느리게, 결코 멈추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고 흘렀다. 모든 것을 평등한 종말로 인도하는 그 시간 속에서, 미래의 희망은 그 누구도 갖고 있지 못했다.
죽음을 맹목적으로 두려워하고 피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에 이끌리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없는 본성. 그 본성에 새겨진 필연적인 나약함과 비겁함, 무책임함이 모든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을 하나로 잇는 마음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어둡고 거대한 '악의'의 태풍이 되었다. 그 태풍의 눈 속에서, '그것'이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웃고 있다.
'그것'이 포효한다.
'그것'이 춤을 춘다.
'그것'이 오고 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 속에서, 마치 환상처럼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푸른 나비 하나가 기숙사 옥상에 엎드려 통곡하는 준페이의 머리 위를 잠시 맴돌다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러나 준페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후의 이야기는, 에피소드 아이기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