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 3 본편과, 후일담 에피소드 아이기스의 사이 시점이 배경. 이오리 준페이의 시점에서 본 특과부 동료들의 일상. 일부 묘사는 게임 본편이 아니라 극장판에서의 묘사를 차용했기에 게임과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다(그 김에 내가 지어낸 내용도 좀 있다). 3 엔딩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3 본편을 클리어한 사람만 읽기를 권한다.
이오리 준페이는 그 날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봄이 온 하늘은 한없이 맑고 드높았고, 그 하늘 아래 불어오는 미풍에 실려 벚꽃잎들이 휘날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돌았고, 거리는 떠들썩했다.
3월 5일.
지난 1년 동안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의문의 대규모 무기력증 발발 사건과 광적인 종말 숭배는 깨끗하게 가라앉은, 속된 활력과 열정이 넘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도쿄 미나토구 타츠미 포트 아일랜드에 소재한 월광관 고등학교의 2010년도 졸업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졸업생 대표로 전 학생회장 키리조 미츠루가 기념사 낭독을 위해 학생회관 단상에 올라서는 걸 지켜보며 준페이는 늘 쓰고 다니던 야구모자를 벗어들고 거칠게 머리를 긁었다. 옆에 앉아 있던 클래스메이트, 타케바 유카리가 작게 핀잔을 줬다.
"얌전히 좀 앉아 있어, 준페이. 딱히 친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1년 동안 같이 기숙사 쓴 선배잖아, 다시는 볼 일 없을텐데 예의는 지켜야지."
"어, 그래."
준페이는 다시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입맛을 다셨다. 장내를 둘러보다가 저 만치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얌전한 인상의 소녀-분명 옆 반의 야마기시였지, 기숙사에서도 몇 번 본 적 있었다-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준페이는 다시 눈을 돌려 따로 앉아 있는 졸업생들을 살펴보다가 움찔했다. 복싱부의 주장이며 에이스인 사나다 선배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기숙사였고, 멋지고 강한 선배로서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오가면서 인사 정도만 몇 번 주고 받았던 사이일 뿐이었다. 얼른 시선을 피한 준페이는 모자 챙을 잡아당기며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마치면서 돌아보니, 1년 전 이 단상에서 저는 이렇게 말했었죠. 미래의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고....
키리조 선배의 차분한 음성을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약간 걱정스런 기색으로 유카리가 작게 소근거렸다.
"아까부터 답잖게스리 뭐야, 준페이 주제에. 몸이라도 안 좋아?"
"유카릿치, 우리... 뭔가 굉장히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병으로, 아버지를 잃는 시련에...
유카리의 예쁜 얼굴에 그늘이 스쳐갔다. 그 표정을 보며 준페이는 확신했다. 나도, 유카리도, 약속을 했었다. 바로 이 날, 3학년들의 졸업식날.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약속을.
-병으로, 잃어...?
주변에서 나직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별일이네, 회장이 이런 자리에서 말이 막히다니."
"자리가 이런 자리니까... 아버지의 추억이 떠올라 그런 거 아니겠어?"
"회장도 인간이구나, 헤."
키리조 미츠루. 이 월광관 고등학교의 출자기업인 일본 굴지의 대기업 키리조 그룹의 계승자인 동시에 문무재색을 모두 갖춘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언제나 당당하고 단호하던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가슴의 고동이 격해지는 걸 느끼며 준페이는 거칠게 모자를 벗어들고 재차 물었다.
"마코토 녀석, 어디 있는지 알아?"
"어머?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키리조 선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더 이상 졸업식 기념사가 아니었다.
-기억났어...
"어...? 나 뭔가 중요한 걸..."
유카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준페이는 등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는 걸 느꼈다. 단단하고 확신에 찬 손길이었다.
"사나다 선배...!"
어느새 다가온 사나다 아키히코 선배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지는 내가 이어가겠어.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반드시 맞서 싸우겠어!
그 순간, 모든 것이 기억났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지구 상 모든 생명체의 확고하고 절대적인 '죽음'에 최후의 최후까지 맞서기로 했던 그 순간.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떨리다 못해 부서져 나갈 듯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 속의 결의를 끌어올려 맹세했었다.
'다시 평온을 찾은 이 거리가 잘 보이는 장소에서, 결코 돌아보지 않겠다는 지금의 결의를 기억과 함께 잃어버리지 않도록 꼭 거기서 다시 만나자.'
'언제나 하던 것처럼.'
'멍!'
'같이.'
'싸우겠어요.'
'너만 믿는다!'
'낙승이야.'
준페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나다 선배는 씨익 웃어 보였다. 어느새 후카도 다가와 있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유카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약속!"
-내겐 소중한 친구들이 있고...
키리조 선배가 말을 맺지 못하고 단상에서 뛰어내리며 외쳤다.
"...그리고 어떤 미래가 오더라도 외면치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키리조 선배의 머리칼이 물결쳤다. 처음 보는 듯한, 순수한 기쁨이 담긴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가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그런데 만나기로 한 곳이..."
"어디였었죠 선배님...? 그건 아무래도 아직..."
사나다 선배와 후카가 일순 주저했지만 유카리가 외쳤다.
"이 거리가 잘 보이는 곳!"
그 말을 듣는 순간, 준페이는 앞장서서 학생회관을 뛰쳐 나갔다. 자신도 그게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따라와!" 가슴이 터질 듯한 온갖 감정이 맹렬히 솟구쳤다.
"컹!"
코로마루가 헥헥대며 뛰어오고 있었다. 켄이 얼굴이 빨개진 채 숨을 헐떡이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저 뒤에서 수위가 쫓아오고 있었다. "얘들아! 거기 개랑 초등부 꼬마 좀 막아다오!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준페이는 외쳤다.
"가자, 약속을 지키러!"
"죄송합니다, 잠시만 주무세요!"
사나다 선배의 외침과 함께 퍽 소리가 들려왔다. 준페이는 선두에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맹렬히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저 앞에, 이렇게나 모자라고 한심한 나를- 추한 질투심과 자격지심에 휘둘리던 나를 친구라고 부르며 웃어주던 녀석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야 나도 가슴을 펴고 녀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나 자신을 녀석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렇기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절대 멈출 수 없다.
"어이-!"
월광관 고등학교 옥상.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벤치에 앉은 아이기스의 무릎을 베고 친구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희디 흰 얼굴을 보는 순간, 아주 잠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마코토..."
아이기스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워들어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많이 피곤했나봐요, 지금은... 그를 좀 쉬게 해주세요."
"아, 뭐야 마코토 녀석! 거하게 뒷풀이하려고 했는데!"
준페이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옆에서 유카리가 팔꿈치로 준페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얏." 머쓱하게 머리를 긁는 동안 코로마루가 다가가 꼬리를 흔들며 마코토의 볼을 핥았다.
"그간의 긴장이 뒤늦게 풀린 모양이야. 자게 두자고, 준페이."
사나다 선배가 쓴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키리조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날씨지만 이렇게 두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일단 기숙사에 눕혀두자, 내가 차를 부르지."
"고마워요. 사나다 선배님은 졸업 후에도 당분간 근처에 머무를 거죠?"
"그래, 타케바. 마코토가 깨어나고 나면 크게 파티를 하지."
"본가는 좀 떨어져 있지만 날짜가 잡히면 언제든 오겠다. 선약을 취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라가키 씨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켄이 말끝을 흐렸다. 사나다 선배는 빙그레 웃으며 그런 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헝클어 뜨렸다.
"어린애 취급 마시라니까요."
켄은 볼멘 소리를 했지만 그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런 둘을 보며 후카가 활짝 웃었다.
"사나다 선배님도 많이 부드러워지셨네요."
"글쎄... 내가 변했다면 마코토 녀석과 함께 한 시간 때문이겠지."
대화를 들으며 준페이는 아이기스와 마코토에게 다가갔다.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쌔근쌔근하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오고, 가슴이 작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래, 좀 자라. 아이기스, 도와줘."
준페이는 조심스레 마코토의 상체를 일으켜세워 업었다.
"제가 하는 쪽이 낫지 않겠어요, 준페이 님?"
"아니. 내가 하게 해줘. 부탁해, 아이기스."
사나다 선배와 키리조 선배는 다시 졸업식장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기숙사에 도착했다. 아이기스가 도와주겠다고 한번 더 제안했지만 준페이는 끝까지 거절하고는 마코토를 업고 2층으로 올라가, 그를 침대에 눕혔다.
햇볕이 비스듬히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마코토의 볼을 쓰다듬었다. 준페이는 깊이 잠든 친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자식... 잘 생기긴 참 잘 생겼어, 좀 기생오라비같아서 부럽지는 않지만. 역시 남자라면 아라가키 선배처럼 키 큰 근육질 마초여야지! 뭐, 나는 치도링에게만 잘 생겨 보이면 되니까 괜찮아."
가는 숨소리가 곧 끊어질 듯 희미하게 들린다.
"그러고 보니 나도 너도 서로 방에 놀러간 적은 한 번도 없구나. 남자끼리는 같이 밤새 게임하거나, 만화책 보거나, 야한 거 보거나, 그러면서 노는 것도 재미인데 말이지. 뭐 그 동안은 통 여유가 없었으니까. 다음엔.... 꼭 같이 놀자. 아 참, 그러고 보니 넌 토못치와도 친하지? 셋이서 말이야. 미야모토 녀석도 부를까? 그 녀석 땀내나는 열혈바보라서 좀 노잼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은 녀석이니까. 데빌버스터 온라인2 같이 할래? 아니면 과자 먹으면서 슈퍼 히어로 영화 DVD나 볼까? 영화관과는 달리 늘어져서 떠들며 보는 재미가 또 각별하거든. 그것도 아니면 이오리 준페이 아워 한 번 더 해볼까?"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창백하다.
"이젠 정말로 모든 싸움이 끝났으니까... 마음 편하게.... 실컷 노는 거다, 마코토. 알겠지?"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꼭이다, 친구. 푹 자고, 내일 보자고."
준페이는 불을 끄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아이기스가 침대 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는 그를 발견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오리 준페이는 그 날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봄이 온 하늘은 한없이 맑고 드높았고, 그 하늘 아래 불어오는 미풍에 실려 벚꽃잎들이 휘날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
그 날 이후의 나날들은, 기억이 흐릿하고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억지로 기억하려고 해봤자 희미하게 떠오르는 건 마치 빛바랜 옛날 사진들처럼 중간중간 끊긴 풍경들 뿐이었다.
녀석의 장례식.
관을 껴안고 통곡하던 유카리.
조용히 흐느끼던 후카.
검은 베일을 쓴 채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던 키리조 선배.
어두운 표정으로 조문객을 응대하던 사나다 선배.
하늘을 향해 슬프게 포효하던 코로마루.
평소와 달리 어른스러운 척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소리내어 울던 켄.
아이기스는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다. 방문을 닫아 걸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코토 녀석의 폰에 저장되어 있던 번호들을 통해 전체 메일로 부고를 전했더니, 많은 이들이 찾아왔었다. 늘 조용하고 쿨해 보이던 그 녀석의 인간관계가 이렇게 다양했나 놀랄 정도로.
쿠로사와 순경은 정복 차림으로 나타나 영정 앞에 서서 경례를 붙였다.
상복을 입은 마요이당 점주 역시 이제 행복해질 때도 됐는데 허무하게 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와일덕 버거 옆의 헌책방 노부부 내외는 아들도 늙은 우리보다 먼저 가버렸는데 왜 손주 같던 애까지 먼저 가는 거냐면서 눈물흘렸다.
토모치카 켄지는 하가쿠레에서 녀석과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학생회의 오다기리 히데토시는 정중히 예의를 갖췄지만 눈이 빨개져 있었다.
함께 온 후시미 치히로라는 1학년생은 아무 말도 못하고 울다가 기절했다.
히라가 케이스케라는 선배는 녀석의 주치의가 되겠다고 약속한 바로 다음 날 죽어버렸다고 한탄했다.
미야모토 카즈시는 자신도 무릎이 거의 다 나았는데 왜 넌 근성 없이 꼼짝 못하고 누워 있냐고 울먹거렸다.
토리우미 이사코 선생님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게 "거짓말쟁이"라고 중얼거렸다.
니시와키 유우코는 조문객 응대와 식탁 정리를 하며 쉴 새 없이 돌아다녔지만 눈빛이 텅 비어 있었다.
학교에서 몇 번 본 앙드레인가 하는 프랑스 유학생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고 했다. 앙드레는 프랑스에서 열린 청소년 패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받은 거라면서 입선 트로피를 녀석의 영전에 바쳤다.
T라는 명의를 쓰는 정체모를 누군가가 최고급 화환과 함께 40만 엔이나 되는 조의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낯선 초등학생 소녀가 어머니와 함께 찾아와서는 "마이코가 크면 결혼하기로 했잖아"라면서 내내 울다가 지쳐 잠들어 버리기도 했다.
스에미츠 노조미라는 뚱뚱한 동급생은 "이 세상 모든 맛있는 걸 먹어봤다고 자랑할 상대가 하나 더 늘었지만, 이런 식으로 늘어나길 바라지는 않았다"고 탄식했다.
무타츠라고 하는 낯선 스님은 생전 녀석과 인연이 있었다면서 돈을 받지 않고 밤새 경을 읊어 주었다.
녀석의 육상 라이벌이었다던, 하야세 마모루라는 타 학교 학생은 "언젠가 네가 있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내 삶을 열심히 달리겠다"고 영정 앞에서 맹세했다.
카미키라고 성을 밝힌 중년 여인은 녀석이 자신의 죽은 아들과 친구였다고 했다. 카미키 부인은 밤새 일을 돕고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아들이 살면서 많은 걸 나에게 줬듯, 유키 군도 여러분에게 많은 걸 줬을 것이니 그걸 소중히 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모두 떠나가고 우리들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