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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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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트완 드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는 무척 아름다운 우화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오직 순수함과 명료함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러나, 난 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매함과 탐욕스러움으로 요약되는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나름의 인정할 만한 비판이나 사막의 황량한 아름다움에 대한 뭉클한 묘사들을 걷어내고 이 우화의 본질을 간략히 요약해 보면, ‘길들여짐’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될 수 있다. 왕자와 여우가 점차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과정은 분명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반대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식의 ‘길들여짐’을 거치지 않은 상대는 어떻게 되건 자신과는 완벽하게 아무 상관도 없는 타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후반에 왕자는 정원에 핀 장미꽃들에게 ‘너희와 나는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내게 있어서는 텅 빈 존재일 뿐이다’라고 선언한다. 어쩌면 그 장미꽃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나마 어떻게든, 또 다른 타자들과 서로 길들여지는 과정을 거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자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는다. 나는 왕자의 이 선언이, ‘내 가족들과 친구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어찌되건 알 바 아니다’라는 말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왕자가 철새들의 운행을 따라 별들 사이를 지나칠 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어느 별 근처를 지나갔다고 가정하자. 왕자는 선량하니까 물론 그 전쟁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의 존재를 슬퍼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별에 내려서 고통에 신음하는 이에게 사소한 도움이라도 베푸는 법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 별의 사람들과 왕자는 서로 ‘모르는 사이’이며 어떠한 종류의 ‘길들여짐’ 과정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밀을 먹지 않기에 밀밭에는 관심이 없는 여우처럼. 이 이야기에서 표현되는 ‘길들여짐’은 어디까지나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관계에만 머물 뿐 ‘대의와 이상을 위한 타자들 간의 연대’라는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나는 이 ‘길들여짐’이라는 것 안에 일상의 무감각함과 무관심함 속에 매몰된 채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지혜는 대단히 편협하고 이기적인 것이기도 하다.

  나는 어른이며, 결코 왕자처럼 순수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어른에게는 어른 나름대로 관철해야만 하는 신념과 부단히 우러러야 할 이상이 있다. 그것은 ‘고난’이라는 한 단어로 쉽사리 요약될 수 없는 모순과 번민으로 가득 찬 힘겨운 것이며, 중간에 지치고 좌절한 나머지 결국 포기하고는 ‘남들이 다들 사는 대로’ 살게 될 가능성도 높다. 나 역시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토록 간절하게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도 분명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며, 또한 그것은 ‘어린’ 채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성격의 가치다. 그리고 어른인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왕자는 너무나도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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