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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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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할 때까지 블로그질 안 할 생각이었는데 기록해 두고 싶은 일이 있어서 슥슥.

친한 동기놈 및 후배놈 하나랑 어제 술을 마시러 갔었다. 졸업한 선배 및 동기들에 대한 추억, 이번 학기 여러 모로 망가져 있던 나에 대한 충고, 내년 임원을 누구 뽑을지, 마음에 안 드는 선배 및 만학도에 대한 뒷담화 등이 오가다가... 화제가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으로 옮겨 갔다.


나:나 같은 경우에는 입장이 되게 미묘해. 내가 쓰는 소설은 명백히 순수 문학이라고 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판타지도 아니란 말야. 일종의 경계 지대에 있지. 순수 문학? 물론 먹고 살기 힘들지, 하지만 그들은 하다 못해 가시밭길을 간다는 명예와 사람들의 찬사라도 받을 수 있지, 하지만 나나 나와 비슷한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그렇지도 못해. 문단에서는 정통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까이고, 기존 장르 팬들에게는 고루하고 보수적이라고 까인다고. 나 학교에서는 교수님들에게 독창적이지만 기본이 부족하다는 이야기 자주 듣지? 하지만 서울 쪽에 친하게 지내는 형들이 몇 명 있는데, 그 형들은 라이트 노벨 쓰거든? 난 그 형들한테는 순문학하는 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는 소리 듣는다고, 망할.

후배:형, 형 말도 이해가 가긴 하는데, 그거 피해 의식 아니에요? 솔직히 나도 순수 쪽이고, 시 전공이니 형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교류를 거부하고 있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로 보여요.

나:피해 의식이 어느 정도는 깔려 있어, 나도 인정해. 하지만 너무 속터진다고. 이영도나 듀나 같은 작가들은 10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계속 새로운 작품을 내놓고 있고, '우리들'의 내부 기준에서 보자면 명백히 진화하고 있단 말야. 하지만 문단은 그들에게 '참신하고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갖고 있다고는 평할 망정 장르 소설들도 고유한 법칙과 논리가 있고, 또한 그것들이 나름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외면한단 말이다. 다만 '참신하고 재기발랄하다'라는 평가 하나만을 내리고서는 그 이후의 보다 진보된 작품들에 대해서도 계속 그 이미지만을 덧씌우고 있을 뿐이지.

후배:장르 문학이 홀대 당한다는 건 일리가 있어요. 형 말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고. 그래도 불구하고, 교류하고자 하는 노력- 한발 더 나아가 스스로의 저변을 넓히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건 장르 문학 쪽도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봐요. 물론 원인을 제공한 건 기성 문단의 권위적인 태도일지 몰라도,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문을 닫고 있는 건 똑같아 보여요.


자리가 파한 뒤, 기숙사로 올라오며 여러 생각을 했다. 후배놈의 말도 확실히 일리가 있긴 하다. 대체로 장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반권위적인 경향이 있는 편이고, 어떤 이들은 평론가 따위 전부 잉여 쓰레기 취급하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물론 순문학을 하는 작가들에게서도 나타나긴 한다. 훗날 공개된, 유명한 작가들의 일기나 편지를 보면 '평론가 XX가 감히 내 소설을 깠다, 나중에 나 잘 나갈 때 두고보자' '자신은 소설 한 줄도 못 쓰는 주제에 남 씹는 걸로만 연명하는 개객기' 등등으로 적어 놓은 게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순문학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체계화된 이론적 기반 위에서 평론가의 권위가 확고히 자리 잡아 왔으며, '평론가를 싫어하는 작가'들도 명료한 기준을 통해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판단할 수 있는 일정한 권위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보자면, 장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권위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며, 장르의 형식에 특화된 비평 이론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경향이 있다. 그들은 대개 '예술성 따지는 건 순문학에서나 하라고 해, 우리는 독자에게 재미를 주는 걸로 만족한다능'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술성과 오락성은 서로 배치되는 가치가 아니다.

후배와의 대화에서도 한 이야기지만, 나 자신을 포함해 장르 문학(그리고 거기에 큰 교집합 부분이 있는 '경계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순문학에 대해 필요 이상의 피해 의식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나도 대학에 와 문예창작을 전공하면서 비로소 느낀 것이지만, 일선의 교수님들은 장르 문학을 생각보다 '하급하게' 취급하지는 않는다-물론 하이틴 로맨스나 이고깽물, 게임 판타지 같은 건 아예 논외다-. 다만 장르 문학을 읽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전공인 순문학을 연구하는 걸 우선시 하며, 장르 문학 고유의 코드나 기반에 깔린 정서를 잘 이해하기 힘들어할 뿐이다.

그 후배는 '순문학도, 장르 문학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폐적인 세계에 갖혀 있다'고 지적했다. 아마도 그 분석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웹진 거울 쪽에서도 여러 차례 이야기가 나왔다시피, 장르 문학도 스스로의 기반을 확장시키고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하기 위해서는 고유한 문학 이론을 정립하고 그를 체계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내부적으로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가름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고, 잘 팔린다고 해서 그것이 독자와 소통이 된다는 증거인지에 대해 토론이 오가고,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문학상도 제정하고(이건 소규모로 하고 있긴 하지만... 너무 불안정하다, 역시 큼직한 재단 같은 게 필요해OTL).

'순수 문학'에도 '장르 문학'에도 속하지 못하는 나와 같은 입장, '경계 문학'을 하는 입장에 있다는 건- 관점을 바꿔보면 양쪽 모두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강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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