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스포일러 많음.
30여 년 전에 나온 매드맥스 트릴로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전범을 창조한 고전 명작으로, '인류 문명이 멸망하고 난 뒤 삭막한 황무지에서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남은 자원들(물, 식량 등등)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는 생존자 집단'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면서 생존자 집단을 약탈하는 폭주족들' '방사능 오염 등의 이유로 인해 몸과 정신이 기괴하게 뒤틀린 사람과 짐승들'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하면 으레 떠오르는 클리셰들을 처음으로 제시한 원형으로 손꼽힌다. 만화 쪽으로는<북두의 권>이나 <총몽>, 게임 쪽으로는 <폴아웃> 시리즈 등 수많은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멜 깁슨이 맥스 역할을 맡은 이 오리지널 트릴로지와 이번에 나온 '분노의 도로'는 스토리 상 변변한 접점이 없다(정확히는 오리지널 트릴로지도 작품마다 그렇게 연결점이 많지 않다... ...라기보다는 '전직 경찰인, 맥스라는 이름의 고독한 방랑자가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것 외엔 거의 공통점이 없다. 사실 각 작품의 '맥스'들은 그저 우연히 비슷한 과거사를 갖고 있으며 성격 또한 비슷한 별개의 인물들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스토리 상의 직접적인 접점이 별로 없을 뿐 전체적인 주제나 서사 구조 측면에서 오리지널 트릴로지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 많으므로 오리지널 트릴로지 역시도 보는 게 전체적인 이해에 유리하다.
이 영화를 보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서부극의 매우 탁월한 재해석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신화가 없는 이들이다(애초에 그들이 떠나온 고향인 영국의 앵글로 색슨 족 역시도 자신들의 민족적 신화를 갖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아서왕 전설 정도인데 이 역시도 앵글로 색슨 족의 도래 이전 브리튼 섬의 주류 민족이던 켈트 족의 전설과 신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존 로널드 루얼 톨킨 교수 역시도 <실마릴리온>을 쓰며 영국인들에게 신화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한 미국인들은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스스로를 위한 신화를 창조하고자 했다.
서부극의 가장 전통적인 포맷은 이러하다. 1)황량하고 메마른 황무지 가운데, 선량한 사람들(물론 청교도들이다)이 모여 사는 개척 마을이 있다. 2)잔인하고 야만적인 산적, 또는 근처 인디언 부족이 마을의 평화를 위협한다. 3)고독한 떠돌이인 주인공이 홀연히 황야로부터 나타나서는, 총으로 (시간과 방식, 입회인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등 다분히 의식적인 성격의)결투를 벌여 악당들을 물리친 뒤 홀로 어디론가 떠난다. 그 과정에서 순결하고 아름다운 마을 처녀와 하룻밤을 보내 아이를 남기거나 자신을 도와주는 조수역 인물에게 멘토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이것은 즉 평온하고 목가적인, 그러나 위협받고 있는 공동체->그 공동체를 위협에서 구원하는 영웅의 등장->영웅은 그 자신의 탁월함과 특별함 때문에 범속한 일반인들과 섞여살 수 없으므로 다시 혼자 떠나지만, 그 대신 자신의 제자나 자식, 혹은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를 남김'이라는 고전적인 신화적 서사의 흐름과 일치한다(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행적 역시도 이와 어느 정도는 비슷하다. 당대 유태인들은 예수를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할 현실적, 정치적 구원자로 여겨서 환영했지만 예수 자신은 사랑와 자비, 용서를 통해 현실의 세속적인 갈등과 투쟁 너머 이뤄지는 사후의 영원한 구원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서부극에 있어서 구원자는 언제나 잘생기고 정의로운 백인 남성이며,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에 의해 구원받는 수동적인 약자들이고, 악당 역시 공동체 외부에서 유래한 '저 바깥에서 온 이방인'인 산적이나 인디언 등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있어 서부극의 원형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며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다. 시간이 흐르며 인물상이 다변화되고 입체화되며 구원자가 '외부에서 온 방랑자'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선출한 보안관 또는 판사라거나 악당도 외부의 이방인이 아닌 탐욕스런 농장주나 은행장이 되는 등의 변화는 이뤄졌지만 여전히 그 근간에는 명확한 선악구도와 남성 중심적 요소가 남아 있었다.
이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는 문명이 멸망하고 혼돈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기말적 세상이라는 배경이 고스란히 서부극의 거칠고 무질서한 황야로 전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황야 가운데 3대 세력이 등장한다. 물과 식량이 있으며 광신적인 열정을 기반으로 수하들을 통제하는 이모탄이 다스리는 '시타델'이 대표적이다. 시추 및 정유 시설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피플이터가 다스리는 '가스 타운', 무기 공장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불렛파머가 다스리는 '탄환 농장'이 이 3대 세력을 구성한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동원할 수 있는 차량의 숫자나 인력으로 미뤄봤을 때 시타델은 이 3대 세력 중 가장 크고 강한 것으로 보인다(그 외로는 고슴도치처럼 칼날이 잔뜩 달린 특이한 차량을 사용하며 주로 약탈을 통해 먹고 사는 것으로 보이는 '버저드', 주로 바이크를 몰고 다니며 협곡을 근거지로 두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통행세를 받아 먹고 사는 '록 라이더즈' 등의 군소 세력들도 있다). 이 3대 세력은 집단의 특성에 따라 스타일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부와 폭력을 쥔 남성이 권력을 쥐고 있다(영화 상에서 구체적으로 사회상이 묘사되는 것은 시타델 뿐이지만, 세상이 세상이다 보니 가스타운과 탄환 농장도 현대의 도덕관념을 적용할 수 없는 막장이긴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들의 삶이 서부극에서 묘사되는 폭력성과 무질서함보다 훨씬 정도가 심한 건, 멸망 이후의 세상이라는 요소 때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간들은 육체고 정신이고 어느 한 구석이 뒤틀려 있다. 이 영화의 최종 보스 포지션이며 수많은 워보이들의 광신적인 숭배를 받는 이모탄은 오염과 질병으로 인해 병든 육체를 플라스틱 갑주와 호흡기로 가리고 있고, 사람을 먹는다면서 공포의 대상이 되는 피플이터도 혼자서는 차에 오르고 내리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이모탄의 자식들 중 하나는 사지가 오그라 들은 기형이고, 다른 하나는 건장한 근육질이지만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 이모탄이 자신의 뒤를 이을 건강한 남자 아이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 사회에서 가능한 최고의 음식을 먹고 최고의 의료 처치를 받을, 권력의 정상층에 있는 이들조차도 이런 상태인데, 하층부는 말할 것도 없다. 눅스를 비롯한 워보이들은 다들 암세포를 달고 사는 시한부 인생들이며 오직 이모탄에 대한 충성과 영광스러운 죽음을 통해 발할라로 가리라는 광신만이 그들의 위안이 된다. 전투와 약탈에 나설 수 없는 여자들은 의자에 묶여서 젖을 짜이는 기계 취급당한다. 노인들은 바위 틈에서 이모탄을 신처럼 올려다 보며 가끔 물을 뿌려주면 그걸 받으며 그걸 찬양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이 잔인한 세상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건전하다. 고전적 서부극에서 구원자 포지션일 맥스가 이 영화에서 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전투력 지원+빡센 일 셔틀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능력도 그렇고 비중도 그렇고 진 주인공에 가까운 것은 강인한 여전사 타입 캐릭터인 퓨리오사이며, 목적도 이모탄을 타도하고 시타델의 권력을 얻는다거나 하는 상알파스러운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평화롭고 안전한 녹색의 땅(Green place)으로 간다는 것이다. 퓨리오사와 함께 하는 이모탄의 다섯 아내들 역시 자유가 없이 물건 취급당할 망정 몸은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과거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는 와중에도(직접적으로 그를 표현했던 건 치도 하나 뿐이지만, 다른 이들도 그런 미련이 완전히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퓨리오사를 도우며 저마다 한 건씩 활약한다. 맥스는 초반에는 오직 자신의 안전과 자유만을 위해 퓨리오사와 대립하다가 협곡 통과를 계기로 협력하며 점차 마음을 열어가지만,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제법 실력과 비중이 있는 사이드킥 정도의 역할에서 머문다(맥스가 한 일 중 정말로 중요한 것은, 중후반부 녹색의 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좌절한 퓨리오사에게 시타델에 대한 역습을 제안한 것 뿐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퓨리오사와 이모탄의 다섯 아내 캐릭터들, 그리고 퓨리오사의 출신 공동체인 부발리니의 원로(물론 다들 여성들이다)들 간의 유대와 신뢰다. 초반 시타델에 있는 다섯 아내들의 처소에 새겨진 글씨는 그저 이모탄 개인에 대한 원한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자면 핵전쟁을 일으켜서 세상을 망가뜨린 남성 위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낼 여지도 충분하다. 이러한 페미니즘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호오가 크게 갈릴 수밖에 없지만(개인적으로는 호감이다),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방식으로서 '정복과 지배'가 아니라 '유대와 신뢰'를 제시한다는 것은 굉장히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건실한 관점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녹색의 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까마귀들과 기괴한 흉물들만이 배회하는 오물로 가득 찬 늪지대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에 한 번 좌절한 퓨리오사가 소금 사막을 가로질러 어딘가에 있을 지도 모르는 또 다른 낙원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시타델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 때 퓨리오사는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160일 간을 버틸 수 있는 연료만 가지고 정처없는 여정을 떠나거나 어딘가 그럭저럭 살 만한 환경이 갖춰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자신들끼리 살아가는 걸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맥스는 시타델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고, 퓨리오사는 그를 받아들인다. 이 부분이 특별한 것은, 그 귀환이 이모탄에 대한 투항이나 기존 체제에의 재편입 내지 그저 이모탄의 자리를 자신이 대신하겠다는 권력의지가 아니라 이모탄의 독재에 억압당하고 있던 워보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희망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이토록 병들고 뒤틀린 참혹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 그걸 견디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압제와 부조리가 횡행하는 기존의 사회로 돌아가서 그걸 끝장내고 타인과 연대를 이룬다는 것의 가치를 드러냄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이모탄의 시체를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주는 것은 그간 묶여서 젖을 짜이던 여자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고전 서부극에서 무수한 비판을 받은 요소인 배타성과 일방향성, 남성 중심성을 극복하기에 이른다. 미국인들이 서부극이라는 포맷을 통해 자신들만의 신화를 창조하고자 했다면, 이 영화는 그러한 신화로서의 서부극의 골자를 새로이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모여서 이루는 사회가, 그리고 그 미래가 건전하고 순수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이 인간인 이상 사회의 주류를 구성하는 권력의 주체가 백인이건 흑인이건, 남성이건 여성이건, 서양인이건 동양인이건, 어떤 식으로건 억압과 차별, 대립과 증오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전망과는 별개로 무엇이 옳은 것이며 그 옳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과 노력은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헐리웃 액션 영화에서 이 정도의 성찰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매우 탁월한 작품이다.
PS=위에 쓴 것들 외에도 이 영화에는 대단히 상징적인 요소들이 많다. 천지 간을 가득 메우는, 이 영화에서 단연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인 압도적인 모래 폭풍 장면 이후 퓨리오사 일행, 맥스, 그리고 눅스가 그간 알아왔고 좋고 싫음과는 별개로 익숙해져 있던 삶(맥스는 홀로 차를 몰고 황무지를 떠돌던 삶, 퓨리오사 일행은 자유가 없는 삶, 눅스는 명령하는 사람에게 따르는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퓨리오사의 초기 목표였던 녹색의 땅으로 간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출애굽기에서 노예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벗어나 가나안으로 향해 가던 모세를 연상하게 한다. 치도가 초반에 이모탄에게 돌아가려고 했던 것도 모세를 따르던 이들이 방랑에 지친 나머지 노예 시절을 그리워하던 것과 비슷하고. 북유럽 바이킹들처럼 명예로운 죽음을 통해 발할라로 가길 바라던 워보이 눅스가 사랑을 통해 변모하고, 그가 죽기 직전 남기는 말이 초반에 하던 말과 내용은 같지만 그 의미와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PS2=이모탄의 아내들 중 1명(흑누님이었던 걸로 기억)이 하는 대사가 이 영화의 주제를 집약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총알은 죽음의 씨앗이에요, 하나를 심을 때마다 생명 하나가 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