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 CLOUD

  • Total :
  • Today :  | Yesterday :



  1. 2022.11.27
    <터커&데일 VS 이블> 봄- 힐빌리의 노래가 메아리치는 곳
  2. 2020.07.07
    기분전환 삼아 뒤늦게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봤다
  3. 2020.02.12
    <기생충> 단상
  4. 2020.01.27
    <사바하> 봄-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하니
  5. 2019.05.04
    이번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헐크 쪽은 이렇게 갔더라면
  6. 2019.01.20
    <휴게소> 봄- 분장은 잘 했는데... 어... 음...
  7. 2018.11.07
    <썸타임 데이 컴 백> 봄-원작에 대한 조잡한 안티테제
  8. 2018.09.21
    <스타워즈 8 라스트 제다이> 봄- 생각보다는 괜찮은데? 3
  9. 2017.11.07
    <인보카머스> 봄-이라크, 혹은 이라크 전쟁이라는 지옥 1
  10. 2017.09.23
    컨저링2 보는 중
  11. 2017.02.20
    <내츄럴 시티> 봄- 너무나 짙은 블레이드 러너의 그림자
  12. 2016.12.29
    신촌 CGV에서 한 스타워즈 로그원 상영 이벤트 갔다가 얻은 아이템
  13. 2016.06.03
    <맨 오브 스틸> 재시청 간략 감상
  14. 2016.05.18
    캡틴 아메리카:시빌워 간략 감상
  15. 2016.04.27
    시빌워 관람 전 보면 좋은 영상들
  16. 2015.05.24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보고 옴- 신화 없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신화
  17. 2015.05.20
    [펌질]어벤저스2 에이지 오브 울트론 관련 케빈 파이기 인터뷰
  18. 2014.12.14
    영화 <카트> 상영회를 한다고 한다
  19. 2014.12.07
    헬레이저 시리즈 6~9 간략 감상 5
  20. 2014.07.28
    헬레이저 시리즈 1~5 간략 감상 2
  21. 2014.07.20
    <엑스맨:데이즈 오브 퓨처패스트> 보고 옴- 다가올 과거의 나날들
  22. 2014.07.20
    <캡틴 아메리카:윈터솔저> 봄-하이드라는 거기에 있다
  23. 2014.07.20
    아이언맨과 배트맨
  24. 2014.07.20
    <겨울 왕국> 봄-All hail Queen Elsa!
  25. 2014.07.20
    <로보캅>(1987년 판) 다시 봄-기계의 몸, 경찰로서의 임무, 인간으로서의 실존

호러 장르 역시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하부 장르가 있고 저마다 정형화된 클리셰가 다수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인 클리셰 중 하나가 '물 맑고 공기 좋고 한적한 시골로 놀러 온 도시인들이 음침하고 폐쇄적인 시골 출신 살인마(아니면, 한 때 살인마였던 것)에게 공격받는다'는 내용이다. 미국에서 이런 시놉시스의 B급 호러 영화는 수백 편은 족히 나왔을 것이다.

미국은 땅이 넓고 그에 비해 시골의 인구밀도는 낮다. 특히 남부와 서부 같은 경우는 하루 종일 운전을 해야 겨우 주유소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곳이 흔하다. 이 말은 즉 지역사회의 게토화가 강하다는 의미다. 그에 더해 남부는 지금도 여전히 근본주의적 기독교 교세가 강하고, 공화당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며, 인종차별적인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는, 백인들 위주의 작은 마을이 많다. 21세기 들어선 많이 변했지만 도시인들은 그들을 '레드넥' '힐빌리' 등의 멸칭으로 부르며 조롱하는 동시에, 자신들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두려움을 품었으며, 헐리웃 호러 영화에도 예의 그러한 클리셰를 심었다.

이 영화는 그러한 클리셰를 대놓고 뒤집는다. 도시에서 놀러 온 대학생 일행은 비교적 전형적인 구성(보통 섹스를 하다가 죽는 경우가 많은 금발 여자, 운동선수 느낌이 나는 잘생긴 남자, 보통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학구파 여자, 구색맞추기용으로 끼워넣은 조연급 흑인이나 동양인 친구 캐릭터 한두 명 등)이지만 터커와 데일은 촌스럽고 아둔할 망정 선량하고 순박한 농부들이다. 이들은 우연히 마주치고, 대학생 일행 중 한 명인 엘리슨이 수영을 하려다가 물에 빠지자 터커와 데일은 그녀를 구해주지만 먼 발치에서 그걸 본 대학생 일행은 시골뜨기 살인마들이 엘리슨을 납치해갔다고 착각하고는 구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황당한 오해와 실수가 엇갈리면서 진짜 우연히 대학생들은 하나씩 죽어나가기 시작하고, 그걸 본 데일과 터커는 이 대학생들이 도시에서 자살 관광을 하러 온 거라고 착각한다. 

이 영화의 주된 포인트는, 각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착각이 나름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다(별로 현실적이진 않지만, 전통적인 장르 문법에는 매우 충실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관객은 전지적인 시점으로 양쪽 모두의 입장을 볼 수 있지만 인물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함에도 불구하고(역시, 장르 문법에 비춰봤을 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합리다) 상황이 점점 더 꼬이며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지켜보는 건 고구마와 사이다를 섞어 먹는 듯한 괴이한 즐거움을 준다. 

그 외에도 잘려나간 나뭇가지에 몸이 꿰이거나 머리에 못이 박히는 등 순한 맛 고어 씬들이 중간 중간 나오면서 양념을 쳐 주고, 비교적 소소하게 클리셰를 비트는 장면들이 여럿 있어서 보는 내내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클라이막스의 반전에 이르러서는 주로 호러 영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성된 '시골뜨기 살인마' 이미지를 역전시킴으로써 클리셰 전복의 즐거움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근본적 의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근본주의적 기독교 교세가 강하고, 공화당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며, 인종차별적인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는" 그들에 대한 경멸과 공포는 과연 정말로 우리 외부의 그들에게서 비롯한 것일까? 우리는 경멸과 공포를 향할 알기 쉬운 적을 원했던 것 아닐까? 그러한 경멸과 공포가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것 아닐까?


전체적으로, 꽤나 훌륭한 블랙 코메디 영화(호러나 고어는 기대하면 안 된다). 요즘 내내 우울했는데 오랜만에 웃었다.     

And

당연히 스포 많음.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라거나 한 요소들은 가급적 언급 안하고, 확고한 장단점 위주로 쓴다.

장점:
1)라이트세이버 검술과 포스가 조합된 멋진 전투씬. 특히 초반 레이와 카일로 렌과의 1차전은, 둘이 물리적으로 다른 장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어난 포스부터 강조된 둘 간의 강한 포스 연결에 힘입어 마치 한 장소에서 접전을 펼치는 것처럼 공방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특이점을 굉장히 멋지게 시각화시켰다. 그저 정신적인 대결이 아니라 전투에 휘말려 상대방 주변의 기물이 파괴된다거나 하는 요소가 잘 살아 있어서 보는 내내 감탄했다. 라제 때 스노크 앞에서 싸우던 장면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2)과잉되지 않은, 자연스럽게 나타난 '올바름':라제에서 짜증났던 게, 원론적으로는 옳은 주제를 너무 촌스럽고 직설적이며 교조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런 거 자체를 'PC주의(엄청 웃긴 표현이다)'라고 부르며 ㅂㄷㅂㄷ거리거나 '대중 영화에 사상 담으면 안 된다' 같은 병맛 넘치는 소리를 늘어놓는 얼간이들의 광광거림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다. 하지만 라제는 그냥 수준이 너무 형편 없었다(카미카제 씬을 떠올리면 지금도 빡친다. 정치적 올바름을 조롱하는 거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는 훨씬 절제된 방식으로, 이야기 흐름을 끊지 않고 그를 보여준다. 츄바카가 메달을 받는 장면, 마지막에 레즈비언 커플로 추정되는 두 여성이 키스하는 장면 등.

3)전체적으로 깨알 같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추억팔이 꺼리들:랜도 칼리시안의 재등장과 반가워하는 츄바카(에피 5에서는 츄바카가 랜도의 팔을 뽑으려 했었지ㅋ), 엔도 행성에 추락해 있는 데스스타2의 잔해, 포스의 영이 된 루크가 레이 앞에서 띄워 올리는 엑스윙, 다시 얼굴 비친 이워크 등등.      


단점:
1)너무 뜬금 없는 팰퍼틴의 재등장 및 레이와의 관계. 사실 깨어난 포스 때부터 레이가 팰퍼틴이나 아무튼 시스 쪽 네임드와 뭔가 연관이 있으려니 싶긴 했다. 스토리 내적인 근거보다는 그저 '카일로 렌이 한과 레아의 자식이라는 '빛'에서 태어나 '어둠'을 지향하는 인물이니 그 대극인 레이는 반대로 '어둠'에서 태어나 '빛'을 지향하는 인물로 설정되어야 아다리가 맞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결국 그 추측이 들어맞긴 했는데 전혀 감흥이 없다. 이 스타워즈 시퀄 3부작은 구 6부작을 계승하는 동시에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스타워즈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라제에서는 그걸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무리수를 많이 둔 데다가 너무 터무니 없는 초전개가 많아서 문제였을 뿐 그러한 근본적인 필요성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얌마. 


팰퍼틴은 옛 은하계를 어둠으로 뒤덮으려고 했던 절대악으로, 결국 다스 베이더는 스스로를 희생해 그를 제거함으로써 포스의 균형을 가져올 자라는 예언을 실현시키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구원하게 되었다(클래식 3부작의 주인공은 루크고, 이 과정에서 루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했지만 결국 개심하고 최종보스에게 막타를 친 게 베이더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 전까지 보여준 최종보스다운 사악한 카리스마는 물론 강렬하기 짝이 없었지만, 상징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팰퍼틴(나아가 시스 세력)은 노골적으로 나치를 모델로 한 악역 집단으로써 21세기에는 안 어울린다(물론 나치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임팩트 있는 개새끼들이 표방했던 잔인한 배타성과 선민의식, 차별주의는 현대에도 세계 각지에서 건재하지만, 그게 나타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상징성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깨어난 포스와 로그 원을 통해 처음 스타워즈 시리즈를 접한 젊은 관객들은 영화 시작하자마자 '그래서 팰퍼틴이 누군데 십덕 새끼야'라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쌍제이는 앞서의 두 작품에서 언급 한 마디 없었던 팰퍼틴을 뜬금 없이 되살려내서 다시 최종보스로 삼았다. 아니 그럼 베이더의 그 장렬했던 희생은 뭐가 된 건데 응응응? 


주절주절 말이 너무 많다는 문제도 있다. 팰퍼틴은 레이에게 "나를 죽여라, 그럼 네가 팰퍼틴 여제가 될 것이다"라고 대놓고 말해 버린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면 레이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으니 한 소리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자신의 의도를 그렇게 면전에서 대놓고 밝힌다는 게........ 어............ 음........넹...............................................-_-  

2)엑세골에 대충 데굴데굴 굴러 다니고 있는 신형 스타 디스트로이어:확 깨는 설정. 영화의 내용으로 봤을 때 이 스타 디스트로이어들은 사실 살아남았던 팰퍼틴이 재기를 꿈꾸며 총력을 동원해 다시 모은 한타 병력이다. 물론 그만큼 강하고 임팩트 있게 나와야 맞긴 하다. 하지만 하나 하나가 데스스타급 파괴력을 가진 주포를 상비하고 있는, 설정 상으로는 역대 최강의 스타 디스트로이어가 얼핏 보기에도 100대 넘게 날아오르는 건 너무 오버 밸런스다. 분명 '와 씨 개쩐다' '전례 없는 위기다' 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 장면인데 '이런 깡촌 변두리 행성에서 저 정도 함대를 꾸릴 수 있는 자금과 자재, 인력은 어디서 나온 거지?' '이 정도 대공사를 치르는 게 티가 안 날 리가 없는데?'라는 생각부터 든다.


말하자면... 깨어난 포스에서 퍼스트 오더라는 듣보잡 집단이 겨우 수십 년 사이에 신 공화국 내부에서 세를 불려왔고 영화 시작부터 이미 강력한 적대 세력이 되어 등장하는 거 보면서 '저게 말이 되나?' '초기 상황 세팅일 뿐이니 그러려니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너무 신경쓰이는데?' 생각 들었던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하나 하나가 데스스타나 다름 없는 이 전례 없는 막강한 함대는 레이가 포스 라이트닝 받아치기살법 한 방으로 팰퍼틴을 물리치는 순간 너무 허무하게 무너진다. 에피 4의 데스스타는 영화 절반이 그걸 파괴하기 위한 과정으로 채워졌고, 훗날 나온 로그 원에서 진 어소 일행이 그 설계도를 빼돌리기 위해 희생하는 과정을 보여줘서 비장함을 강화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스타 디스트로이어 함대의 경우는 '뜬금 없이 갑툭튀한 지나치게 강한 적이, 또 너무 뜬금 없이 전멸했다' 싶어서 감정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다. 야임마.

3)헉스의 뜬금포 배반과 사망:권력욕에 눈이 멀어 정치적 라이벌일망정 어디까지나 같은 편인 카일로 렌을 제거하기 위해서 명백한 적인 저항군과 손을 잡는다는 거 자체는... 뭐, 현실 역사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깨어난 포스에서 묘사된 헉스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적대 세력 중에서도 신비주의적, 초월적, 영적 성격을 띄는 적인 '시스'와는 대비되는 물질주의적, 세속적, 현실적 성격의 적인 '제국의 부와 군사력, 직접적인 억압성'을 상징한다(클래식 트릴로지에서는 다스 베이더와 타킨 총독이 각각 그 역할을 맡았다). 그걸 명백히 드러내는 장면이, 의지의 승리를 패러디한 그 연설 장면이다. 그런데 라제에서는 비중이 폭락해서 카일로에게 충성충성충성거리는 개그 캐릭터가 되었다가, 이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는 뜬금 없이 죽어 버린다. 정말 이게 최선이었습니까 쌍제이? 라제 감독은 라이언이었으니 댁이 직접 책임은 없긴 한데, 그래도 정말로 이런 식으로 수습하는 게 최선이었냐니깐?  

4)레이-카일로 러브라인 극혐:솔직히 인정한다. 나 원래 로맨스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공정하게 못 보는 걸지도 모르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둘의 러브라인은 도대체 이해해먹질 못하겠다. 카일로는 둘째치고, 레이 입장에서 카일로는 단순한 적일 뿐 아니라 지 애비를 찔러 죽인 패륜아고 자신에게도 잔혹한 고문을 가한 상대다. 옘병 장난하냐? 
주관적으로는 이 둘 키스 씬 보고 라제에서 핀과 로즈가 뜬금 없이 키스하는 장면을 봤을 때랑 똑같이 빡쳤다.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그보다 더 질이 나쁘다고 본다. 게다가 이후 카일로는 포스의 영으로 승화한다. 저기요, 포스의 영 바겐세일 기간입니까 요즘? 포스의 영이란 거 원래 최고의 제다이 중에서도 한정된 극소수만 될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총평:
미친 듯이 욕을 먹은 라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결국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스타워즈를 포기하고 억지로 추억팔이용 옛 소재들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던 쌍제이의 고뇌가 느껴진다. 그래도 그런 영화 외적인 이유로 실드쳐주기엔 너무 눈에 밟히는 문제점이 많다. 좋게는 평가 못하겠다. 

And

'무자비하게 노동자를 탄압하는 냉혹한 자본가' 라는 이미지도 지금의 현실에는 별로 부합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삶에 그냥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저냥 사는 한국의 서민들이 전쟁과 기아가 횡행하는 아프리카 소국에 대한 기사를 읽고 막연히 불쌍하다는 생각 정도는 하지만 어차피 나와는 다른 세계 이야기로 치부하고 곧 잊어 버리듯이. 그런 자본가처럼 되고 싶어하는 노동자들이 서로를 죽인다. 그리고, 죽은 이들은 귀신으로써 자본가의 햇살 가득한 정원과 화려한 거실 주변을 떠돈다. 이 영화는, '시체들의 새벽'의 21세기 한국 버젼으로도 볼 수 있다. 

만일 내가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썼다면 기택 가족은 영화보다 더 필사적으로 박사장 가족에게 기생하려고 하는 한편 박사장 가족도 몰락하기 전의 기택 가족과 같은 서민들을 후려쳐서 돈 모은 또 다른 종류의 기생충으로 묘사했을 거다. 

And

당연히 스포 많음. 전에 이미 재미있게 봤었지만 아무래도 좀 의아한 구석이 많았는데, 어젯밤에 OCN에서 틀어주길래 재주행하고 생각을 정리해 봤더니 이제서야 아다리가 좀 맞는 것 같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불교에는 악이 없다, 파순이니 마라니 하는 건 인간의 삶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형상화한 것 뿐"라는 대사였다. 불교 교리에 비쳐보면 그 대사 자체는 맞는 말이지만 김제석이 처음에는 진짜 성인이라고 할 만한 존재였다가 타락한 것이었다면 그 이후에 김제석이 하는 일들 역시 불교 교리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쉬운 악행이라기보다는 그저 인간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다른 무언가여야 앞뒤가 맞는다. 

불교에서는 '부단한 수행을 거쳐 올바른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속세에 대한 모든 미련과 집착을 떨쳐내고 윤회전생과 생노병사의 고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저 '속세에 대한 모든 미련과 집착'은 재물욕이나 권력욕 같은 건 물론 부모에 대한 효도나 이웃에 대한 친절, 친구 간의 우애, 사회적 정의 같은 보편적으로 긍정적인 가치 역시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만일 내가 시나리오 작가였다면 네충텐파의 예언을 듣고 타락한 김제석이 그런 긍정적인 가치를 행함으로써 세간에서 존경받지만 그를 통해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오욕칠정과 속세에서의 삶에 집착하도록 만들었다는 식으로 묘사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대중적으로 어필할 만한 스토리는 아니긴 하다-_-) 정작 작중에서 김제석은 사천왕의 이름을 가진 네 제자들을 시켜 자신이 태어나고 100년 후 영월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들을 다 찾아 죽이라고 명령하고 그것이 악을 물리치는 방법이라고 정당화했다(즉 누가 봐도 명백한 악행을 저질렀다).

처음엔 그게 혼란스러웠는데, 다시 보니까 김제석이 처음 귀의했던 밀교 종파에서는 '불로불사를 이루는 것을 성불로 취급했다'는 대사가 있었다. 그걸 보니 비로소 뭔가 아귀가 맞춰지는 것 같더라.

불교의 모태가 된 힌두교에서는 아무리 사악한 존재여도 올바른 방식에 따라 길고 고통스런 수행을 하면 강력한 힘을 얻는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신들의 왕 인드라(한자로는 제석천, 또는 제석신왕이라고 쓴다. 김제석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따온 걸로 보인다)가 그 권위에도 불구하고 수행으로 강한 힘을 얻은 아수라에게 패배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그래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인드라가 승리한다). 불교에서도 수행을 쌓는 과정에서 타심통이니 천안통이니 하는 초능력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다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올바른 깨달음을 이룬 정각자, 부처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일 뿐이므로 초능력 자체에 혹해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할 뿐이다. 하지만 애초에 김제석이 따랐던 밀교 종파에서는 초능력 자체가 목적이었기에 김제석은 수행을 통해 손가락이 6개가 되고 불로불사를 달성한 순간 자신이 중생을 제도할 미륵이라는 오만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황의 스승으로서 권세를 누린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한 모순된 행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아무 의문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작중에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이 없어진다'고 표현되는 우주의 섭리에 따라 그런 김제석을 멸하기 위해 태어난 카운터 파트가 바로 금화의 쌍둥이 언니다(후술하겠지만, 후보가 몇 몇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김제석은 애초부터 잘못된 신앙을 따랐고, 혹독한 수행으로 초능력을 얻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깨달음을 이루지는 못한 것이다. 네충텐파의 예언은 그걸 지적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때 김제석은 자신이 미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한다(네충텐파가 예언을 들려주는 순간 그의 눈빛이 변했다고 언급하는 건, 그 순간 김제석이 타락한 게 아니라 자신이 처음부터 그릇되어 있었음을 자각했다는 의미라고 본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헷갈린 이유가 이거였다. 난 처음에는 김제석이 진짜 부처나 아라한 바로 아래 정도의 경지에 이른 성인이었다가 타락한 거고 그를 통해 원래는 김제석을 죽이는 뱀이었던 금화의 쌍둥이 언니가 부처가 된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이미 자신이 성취한 경지에 홀려 버린 것에 더해 작중에서 나한이 말하는대로 그저 오래 살고 싶다는 한없이 세속적인 욕망에 빠진 김제석은 그를 무시하고 금화의 쌍둥이 언니를 '악'으로 규정한다. 원래 불교에는 악이 없지만, 상술한대로 김제석의 신앙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기에 그게 가능했다. 

한편 금화의 쌍둥이 언니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금화의 다리를 물어 뜯어 절름발이로 만들어 놓고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도 자살했다는 언급이 있다. 그저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감독의 페이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서사작법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런 건 별로 세련된 방법이 아니다. 개인적인 가설은 금화의 쌍둥이 언니는 처음에는 원래부터 사악한 괴물이 맞긴 했지만, 진짜 뱀인 김제석을 멸할 '짐승'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는 거다. 즉 금화의 쌍둥이 언니는 처음부터 악으로 태어났다는 나한의 대사도 어느 정도는 진실을 내포하고 있되, 김제석이 네충텐파의 예언을 듣는 순간 자신의 악성을 깨달았듯이 금화의 쌍둥이 언니는 평생 그녀를 두려워하고 미워해오던 금화가 그녀를 죽이려고 농약 섞은 밥을 먹이려다가 마지막 순간 자비를 베풀어 대신 스웨터를 벗어주고 떠나자 창고 바닥을 파헤쳐 라이터(즉, 자신의 불성)을 찾아내고는 부처로 거듭나 예언을 실현시키게 된 것이다. 금화의 쌍둥이 언니를 지키던 뱀은, 석가모니가 수행을 하는 동안 그의 곁을 지켰다는 나가의 왕 무찰린다를 의미하는 거고. 그리고 김제석이 죽은 순간 그의 카운터 파트라는 자신의 숙명적 소임을 다했기에 스스로도 최후를 맞이한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김제석 같은 존재가 나타나 번뇌에 빠져 세상을 어지럽힐 테지만 비천하고 사악한 존재가 올바른 깨달음에 도달해 부처가 되는 일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다만 지금도 유감스러운 건... 정작 나 자신은 이 해석이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 깨놓고 말해 김제석이 믿었고 나중에 자신의 동방교로 발전시킨 예의 밀교 종파가 처음부터 글러먹었다고 보기보다는 한 때 김제석은 진짜 부처나 아라한의 경지 바로 아래 단계에 도달한 성인이었다가 예언(황야에서 기도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마주한 최후의 유혹 비슷하게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걸 가로막는 최후의 시험)을 계기로 오만과 아집에 빠져 타락했으며 금화의 쌍둥이 언니는 금화의 자비(=불교 최고의 가치)를 통해 부처가 되었다고 보는 쪽이 더 극적이지 않나 싶다. 위의 해석은 그 자비의 의미를 좀 축소시킨달까... 결정적인 역할이라기보단 예언 실현의 트리거(그것도 하찮은 건 아니지만) 정도 역할로 격하시키는 것 같다.           

And
...더보기

타노스의 핑거스냅 이후 5년. 어벤저스 1 초반처럼 의료봉사하며 사는 브루스 배너. 상담센터 운영하는 캡틴과 함께 "잃어버린 게 너무도 많지만 이런 삶도 나쁘지만은 않아." "허드슨 강에는 고래가 돌아왔지." "그래도 이게 과연 최선일까?" 등의 대화를 주고 받는다. 타노스의 목을 친 뒤 현자타임 와서 연락을 끊고 잠적한 토르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내심 씁쓸함을 떨치지 못하는 캡틴과 달리 현재의 삶에 적응하고 그럭저럭 만족하는 브루스. 물론 그간 화날 일도 몇 번 있었지만 한 번도 헐크로 변한 적 없다고 한다. 한 번은 폭주족들이 마을을 습격해 온 적도 있었는데 그 때도 헐크가 나오지 않아 마을 사람들과 합심해 물리쳤다고. 그걸 계기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평범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타노스에게 당한 뒤 헐크가 겁을 먹어서 깊이 잠들어 버리거나 아예 사라진 게 아닐까 추측하는 브루스 배너.  "지금까지 헐크는 거의 져 본 적이 없어. 힘만으로는 언제나 최고였고. 하지만 타노스에겐 일방적으로 당했잖아, 겁에 질릴 만 하지. 나로선 다행이야. 드디어 자동차 운전석에 방해 없이 앉았으니까."

 

2)앤트맨 귀환 이후 시간여행 아이디어가 나오자 토니와 마찬가지로 실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낸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불가능해서라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헐크가 더 이상 없는 지금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더 크다. 하지만 핑거스냅으로 사라진 베티 로스의 빈 무덤 곁에서 깜빡 잠들었다가 자신을 꾸짖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 고민하다가 토니와 만나고, 과학자로서의 호기심에 굴복해 결국 협조하게 된다. 에오울 때와 비슷한 패턴.

 

3)14타노스가 아웃라이더와 치타우리 군대를 몰고 와 격전을 벌이는 클라이막스. 전투에서는 도움이 안 된다는 걸 파악하고 후방(한 때 자신이 일하던 감마선 연구소, 지금은 임시 병원으로 사용 중)으로 물러나 있지만 아웃라이더들의 파상 공세에 방어선 일부가 무너지고 습격을 받는다. 브루스 배너는 함께 대피해 있던 민간인들을 구하기 위해 배너인 채로 적을 막아섰다가 중상을 입고, 죽어가던 중 무의식 속에서 헐크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사실 헐크는 타노스에게 당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품는 공포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것. 지금은 다들 헐크가 필요하다고 헐크를 설득하려고 하지만 헐크는 지금 뿐 아니냐, 네가 필요할 때만 나서서 싸우는데 지쳤다고 비웃는다. 문득 헐크가 특유의 어눌한 말투는 여전하지만 굉장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데 생각이 미치는 배너. 소코비아 사태 때 막판에 블위에게서 온 통신을 끊어 버리고 퀸젯을 조종해 세상을 등지려고 했던 건 헐크로서의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헐크의 분노와 파괴욕구를 두려워하고 억누르기만 하던 배너와 달리, 헐크는 그 때 이미 필요에 따라 배너로서의 지성도 활용할 수 있었던 것. 

 

4)현실 쪽에서, 전선의 어벤저스는 후방이 공격받고 있는 걸 파악하고 급히 지원을 보내나 새 인피니티 건틀렛을 빼앗은 타노스의 맹공 때문에 여의치 않다. 겁에 질려 있던 민간인들은 마지막 용기를 짜내어 죽어가는 배너 박사 주변으로 모여 들어 그를 보호하려고 한다. 군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아웃라이더들의 압도적인 힘과 속도에 하나 둘 쓰러져 가는 사람들. 결국 연구소 일부가 파괴되면서 그 충격으로 오랫동안 꺼져 있던 감마선 조사장치에 전원이 들어오고 다량의 감마선이 빈사 상태의 배너에게 내리 쪼인다. 그 순간 무의식 속에서 배너는 그간 억누르고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여겼던 헐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사과하고, 죽음만이라도 함께 하자고 말한다. 그러자 처음으로 만족스럽게 웃으며 배너가 내민 손을 맞잡는 헐크.

 

5)둘의 마음이 통하는 순간 둘의 자아가 통합되고, 배너의 지성과 의지를 가진 헐크가 깨어난다. 부활한 헐크는 압도적인 힘으로 아웃라이더들을 순식간에 정리하고 남은 민간인들을 구한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전선으로 복귀. 포효 한 번에 폭풍이 일어나고 주먹질의 충격파로 마천루 십여 채가 무너져 내리는 등 '격분한 괴물이 아니라, 사람들을 지키는 영웅으로서 싸우는 헐크의 힘이 어떤 것인지' 피로하며, 인피니티 워 초반 당했을 때와는 정 반대로 타노스를 몰아 붙여 새 인피니티 건틀렛을 빼앗고 핑거스냅. 타노스가 소멸시켰던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되돌리고는 힘이 다해 쓰러진다. 이후 전개는 영화와 동일.

 

 

 

And

장:온갖 호러물의 세례를 무수히 받은 입장에서 봐도 악마 분장의 비주얼은 제법 훌륭하다(BJ 철구 닮았다. 철구가 방송에서 한 짓거리들을 생각해 보자면 노린 걸지도 모른다). 창백한 피부에 새카만 뱀을 휘감은 모습이나, 피부 아래쪽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이 끝없이 타오르는 모습 같은 건 꽤 볼만하다. 이거 하나만큼은 <곡성>보다 낫다.


단:악마 분장 외의 다른 모든 부분이 구리다. 강조하고 싶은 주제가 뭔지는 알겠는데... 그걸 자막까지 깔아가며 직설적으로 들이대는 바람에 곱씹어 생각할 시간을 안 준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고 하지는 못하겠고, 그와 마이너스 시너지를 일으키는 극적이고 과장된 성경체(...) 대사들의 남발도 문제. 가끔 가다 '악마스러움'을 강조할 때나 극적인 타이밍에 인간을 조롱하기 위해 반어적으로 성경구절을 인용하거나 할 때만 그런 거 해도 충분하잖아... 노숙자 4인방이 묵시록의 4기사와 각각 대응된다고 설명이 나오는데 보는 입장에선 별로 매치가 안 된다는 문제도 있고. 메인 스토리라인인 휴게소 파트와 서브 스토리라인인 사채업자와 대학생 파트+조건만남하는 여고생 파트의 접합력이 부족해 몰입을 방해하며(주제 측면에서는 이어지지만 이야기 내에서는 겉돈다), '저 상황에서 저 인물이 왜 저렇게 행동하지?' 싶은 부분들이 너무 많아서 영 거슬린다. 


재희는 연기대상 수상 경력도 있는 꽤 괜찮은 연기자인데 작품 선구안은... 어..... 할 말 없다. 맨데이트에서도 그러더니 또......  

And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많음.


기본적인 배경은 원작 소설 <가끔 그들이 돌아온다>와 영화가 비슷하다. 주인공은 학교 선생이고, 한 때 신경쇠약을 앓았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회복했으며, 썩 질이 좋은 편은 못 되는 학교의 문학 수업 선생 일자리를 막 얻은 상태다. 어린 시절 절친했던 형이 동네 불량배들에게 살해당하는 걸 눈 앞에서 봤었고, 아직도 그 때의 악몽을 종종 꾼다. 그럭저럭 견뎌가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때의 불량배들이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전학생'이라면서 눈 앞에 나타난다.


원작은 '떨치지 못한 유년기의 악몽이 성인이 된 이후 반복된다'라는 스티븐 킹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를 활용한 단편이다. 별로 길지 않은 분량 속에서도 어린 시절 잔인하고 난폭한 불량배들에게 느끼던 두려움과 성인이 된 지금도 무례하고 반항적인 학생에게 문득 문득 느끼는 두려움이 교차되는 가운데 점차 과거가 현재를 잡아먹어가는 걸 느끼면서 멘붕하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잘 드러나는 준작인데,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그런 부분이 무척 부실하다.


물론 괜찮게 잘 찍었다 싶은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원작에서는 담당 클래스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가 갑자기 죽었다는 언급이 있는데, 소설에서는 그저 한 줄로 묘사되고 끝나는 반면 영화에서는 주인공과 친근하게 대화하다가 뭔가를 놓고 가고, 주인공이 그걸 주려고 쫓아가던 중 사고가 나서 눈 앞에서 끔찍하게 죽어 버린다. 확 바뀌는 분위기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또한, 원작에선 어린 시절 형이 살해당한 곳과 지금 주인공이 근무하는 학교가 있는 곳이 별 관계가 없는데(오히려 그를 통해서 떨치지 못하는 과거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적으로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는 어린 시절 형이 죽었던 바로 그 마을의 학교로 오는 걸로 시작한다. 두려움보다는 과거와 직면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더 강조하는 설정 변경인 셈인데, 이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결말을 원작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꿔놓았는데, 그 바뀐 부분이 영 조잡하다. 원작의 결정적인 호러 포인트는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쫓아 온 악몽을 떨치기 위해서 악마와의 계약을 결심하고는 형의 모습을 한 악마를 소환해 불량배들의 악령을 끝장내지만 과연 이걸로 전부 끝난 것일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마지막 장면의 그 쌔함이었다.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사용한 제물이 바로 형이 쓰던 모자(우애 깊던 형과의 추억이라는 의미도 있다)라는 게 그 쌔함을 한층 더 강화시키고. 


그러나 영화에서는 죽은 형의 영혼의 도움을 받아서 악령들을 물리치고는, 아내도 (원작에선 없는) 아이도 살아 남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물론 해피 엔딩이라고 해서 배드 엔딩이나 새드 엔딩에 비해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법은 없는데, 이건 지나치게 평범하고 진부하다. 


'...반쯤 내려왔을 때, 무언가 그림자 또는 그저 이상한 느낌 때문에 그는 돌아섰다. 보이지 않는 무엇이 다시 나타난 것 같았다. 짐은 악마 불러내는 법에 적힌 경고가 생각났다. 무슨 일에든 위험은 따르게 마련이었다. 사악한 기운을 불러올 수도 있고 그들의 힘을 빌려 어떤 일을 해결할 수도 있고 심지어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 그들이 돌아온다. 그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악몽이 완전히 끝난 것일까?'


원작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느끼는 그 명치 끝이 싸해지는 먹먹함과 약간의 슬픔이, 이 영화에는 없다.  


   

And

PC충이 어쩌고 페미가 저쩌고 하는 헛소리는 거른다 쳐도 너무 악평이 많아서 거의 1년을 미루다가 뒤늦게 봤다. 일단 내가 보기에는 2, 3가지 정도의 눈에 확 띄는 결점이 있는데, 그 결점을 빼면 그렇게까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결점 1)포의 선상반란

라스트 제다이의 중요한 테마는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실패가 비극적인 장엄함을 갖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 있어 깊이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포 다메론은 핀과 로즈의 개별 행동을 서포트하기 위해서 레아 이후 공식적인 리더로 추대된 홀도 사령관에게 총까지 들이댄다. 이 전개에 있어서는 아무런 불만도 없는데... 핀과 레이가 결국 실패한 이후 정작 포는 큰 처벌을 받지 않고, 게다가 작중에서 홀도 사령관 본인이 나중에 레아에게 그가 마음에 든다고 언급함으로써 감정적인 면죄부까지 쥐어줬다. 관객이 포의 실패와 그 의미를 충분히 곰씹기 전에 작중에서 등장인물들이 'ㅇㅇ 괜찮음' '사적으론 유감 없음'으로 결론을 내버려서... 감정선을 따라잡기가 힘들다.


영화의 테마를 부각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더 힘을 줘서, 정당한 신임 사령관에게 총을 겨눈다는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의 번민과 결국 자신의 행동이 (최소한 작중 인물들이 느끼기에는) 무의미했음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묘사, 그리고 홀도 사령관 역시 그런 그를 이해하면서도 입장 상 포를 처벌하며 씁쓸해 하는 묘사 등이 짧게라도 드러나야 했다. 러닝타임 문제 상 어쩔 수 없다고? 그럼 다른 걸 잘라냈어야지... 카지노 씬 같은 거 말야... 제일 중요한 주제의 연출이 이렇게 설렁설렁해서는 그런 중요한 '실패'의 무게감이 와닿지가 않는다. 


결점 2-1)핀의 카미카제

....그 상황에서 꼭 포구를 향해 직접 개돌해야 돼? 여럿이서 포구 안 쪽으로 미사일이나 레이저 쏴 넣어서 내부 폭파를 시킨다거나 하면 안 되는 거야? 원래는 감동적이어야 하는 타이밍인데 너무 작위적이어서 짜식기만 한다. 게다가 카미카제로 비장함을 끌어내는 수작, 21세기 영화에서 써먹기엔 너무 촌스럽지 않아?


결점 2-2)핀과 로즈의 뜬금포 로맨스

ㅅㅂ

남초 사이트 등지에서 로즈 티코 발암이라고 쌍욕하길래 큰 삽질이라도 하나보다 생각하면서 봤는데 진짜 의외로 그런 쪽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 짜증이 솟구쳤다. 이놈의 헐리웃은 그 놈의 억지 로맨스 좀 못 때려 치우냐. 



PS=제다이의 귀환에서 "It's a trap!"이란 명대사를 남겼던 아크바 제독이 대사 한 마디로 사망처리된 건 굉장히 아쉽다.    


PS2=고뇌하는 루크를 보면서 '요다나 오비완은 어디 갔냐'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포스의 영으로 요다가 나타나서 놀랐다. 요다가 나온다는 걸 전혀 모르고 봤던 터라 깜놀 2배. 타이밍 보소....


PS3=루크가 허무하게 죽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어서 걱정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루크 스카이워커는 작품 외적으로도 미국에선 신화적인 위치의 영화 시리즈의 주인공이고, 작품 내적으로는 전설적인 대영웅이다. 그런 그가 전면에 나서 버리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스타워즈 트릴로지의 주역들이 묻혀 버리게 된다. 그런 걸 고려하면 화려하게 퇴장할 필요가 있긴 했는데, 그 마지막은 무척 좋았다. 그나마 아쉬운 부분은 '요다 보니까 포스의 영 상태에서도 포스 능력은 쓸 수 있는 모양이던데 헉스가 끌고 온 공성포나 AT AT 좀 화끈하게 때려 부숴주지.... 안 그래도 액션 분이 부족한데...' 싶은 정도. 

And

영화 자체는 그냥저냥 평범 무난한 수준의, 전형적인 엑소시스트 아류작 호러 영화다. 노잼까지는 아닌데, 에릭 바나의 연기 말고는 딱히 훌륭한 부분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독특한 부분이 있는데... 악마에게 씌인 사람이 이라크 귀환병이었다는 설정이다. 그가 이라크에서 왠 지하 동굴에 들어갔다가 씌인 채로 귀국했던 게 문제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조지고 부시는 그 전 대통령이 목놓아 주장했던 대로 '이라크는 악의 제국이고, 이 영화는 이라크가 일종의 지옥이며 거기서 유래한 악마가 미국으로 왔다'는 식의 제노포비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부제가 Deliver us from evil, 즉 '악으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것도 이 해석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다르게 보자면 지옥은 '이라크'가 아니라 '이라크 전쟁' 그 자체이며, 이 영화는 이라크나 이라크 인(혹은 무슬림)을 악마화하기보다는 이라크 전쟁이 미국에 남긴 상흔 자체를 은유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작중에서 랄프 형사가 하는 고민의 내용을 보자면 9.11 자체는 용서할 수 없는 테러이되 전쟁을 일으켜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는 반성적인 의미를 읽어낼 수도 있고(이 쪽 해석을 확대하자면 신앙의 힘으로 그 상처를 극복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어느 쪽 해석이건 개인적으로는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애초에 탈레반 훈련시키고 무기 제공한 거 니네였거든ㅋ 하지만, '미국인의 입장에서 이라크 전쟁을 어떻게 돌아보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준다.


 

And

그럭저럭 평타는 치는데 1보다 못하다. 뭔가 무서운 게 나올 것처럼 음악과 카메라 앵글로 분위기를 잡는다->별 거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작중인물(+관객)이 '뭐야 괜히 긴장 빨았잖아'할 타이밍에 점프 스케어 갑툭튀... 라는 연출이 남발된다. 

원래 이건 호러물의 역사를 통틀어 수없이 반복되어 온 굉장히 유효한 기법인데(클리셰가 클리셰인 이유는, 그만큼 효과가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초반부터 내내 이런 게 반복되다 보니 나중에는 그에 면역이 되서 공포감이 증발하고 걍 피식피식 웃으며 보게 된다. 호러물이라면 역시 천천히 죄어드는 맛이 있어야지 아무렴... <애나벨>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중에서 해결되지 않는 후속작 떡밥의 비중이 너무 큰 것도 감점 포인트. 

이 와중에 막내딸 자넷 역을 맡은 아역 배우의 연기랑, 카메라 포커스가 나간 상태에서 빙의 모드와 통상 모드를 전환하는 연출은 볼 만하다.  


인시디어스도 그렇고 컨저링도 그렇고 1편이 제일 재미있음ㅇㅇ



And

:일단 한국에서는 드립따 안 팔리는 장르인 SF, 그 중에서도 사이버펑크를 상업 영화에서 시도했다는 것에서 일단 점수를 주고 싶다. 사이버펑크 특유의 뿌옇게 흐린 하늘, 비가 쏟아지는 무국적적이고 퇴폐적인 밤거리, 폐허와 네온사인이 공존하는 풍경, 무너진 채 방치된 대도시의 풍광 등의 미장센은 이미 익숙하지만 여전히 특유의 정취가 잘 살아 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가져 온 미장센이 좀 지나치게 많음. 재주넘으며 총 쏘기, 몸을 기묘한 각도로 뒤틀면서 총알 피하기, 회전하며 그걸 보여주는 카메라 워크 등 이거 개봉하기 얼마 전에 대박쳤던 매트릭스에서 영감을 얻었구나 싶은 액션 씬도 좀 지나치게 많다. 사실 사이버펑크에서 블레이드 러너랑 공각기동대 빼면 남는 거라곤 뉴로맨서 정도겠다... 표절이라고 할 만한 수준도 아니겠다 그거 갖고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은데, 좀 지나치게 많다 그게 음...

 

이야기의 주제, 그리고 도입부 역시도 블레이드 러너와 거의 비슷하다(사이보그의 인간성에 대한 고찰, 짧은 수명을 가진 군용 사이보그가 탈주했다는 내용 등). 여기에 로맨스도 끼워넣고, 예의 군용 사이보그는 초반에 작중의 대 사이보그 전담 특수경찰(MP라고 부름. 주인공이 여기 소속이다. ...어김없는 블레이드 러너)에게 붙잡히는 등 나름 차별화를 꾀한 부분도 보이고 그 외에도 설정 상의 몇몇 소재들은 꽤 괜찮다 싶은 게 여럿 있는데(파괴된 여신상이나, 인간과 사이보그를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의 기억과 추억을 삭제하고는 머나먼 우주로 데려간다는 우주선 등. 무엇의 은유인지는 명백하다) 이야기 내에서 그 소재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잘 엮이지 않는다. ‘미래의 한국은 이런 모습이다, ㅈㄴ 황량하지?’ ‘가난한 사람들은 저런 데서 살아’ ‘이제 그런 거 충분히 봤으면 스토리로 돌아갈까?’라고 감독이 계속 옆에서 토를 다는 느낌.

 

후반부에 드러나는 어떠한 반전은 나름 꽤 인상적인 게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짧게 휙 지나가서 별로 반전 같지도 않다. 상황에 몰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어색한 연기와 낭비되는 캐릭터들도 마이너스 요소.

 

 

총평은 5점 만점에 2. SF, 특히 사이버펑크를 엄청나게 좋아한다면 한 번 쯤은 볼 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블레이드 러너를 한 번 더 보는 게 낫다

And


물론 저 마스크만 받은 건 아니고...



경품으로 레고 타이 스트라이커를 얻었다. 추첨운 같은 건 별로 없는 편이라서 걍 상품 구경이나 하고 갈까 싶어서 앉아 있었는데 내 좌석 번호가 불리더라. 병신년의 마무리는 개인적으로는 썩 나쁘진 않은 듯.


레고는 그닥 관심 없는데 그냥 팔까 아니면 기념 삼아 만들어 볼까?

And

*액션은 여전히 볼 만하다. 드래곤볼이 따로 없네.

*초반에 클라크가 조엘의 홀로그램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조엘이 "...선택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 운운하는 부분은 솔까말 좀 같잖았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까는 전형적인 레퍼토리인데, 물론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막장을 달린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시 미국도, 그리고 그러한 미국의 막대한 영향을 받은 한국도 선택의 자유와 기회 평등이 이뤄지는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그리고 그에 근원을 두고 있는 북한이 막장의 극한을 찍었고 지금도 찍고 있으며 헬조선은 그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해서 헬조선이 헤븐조선으로 변하는 건 아니다.

*파오라가 클라크와 싸우는 장면에서 진화드립치는 거 보면서 영 집중이 안 됐다. 니맠ㅋㅋㅋㅋㅋㅋㅋㅋ 진화는 환경에 적응한 결과일 뿐이지 강함이나 우월함의 증거는 아니거든ㅋㅋㅋㅋㅋㅋㅋㅋ 이과도 아닌 내가 그런 걸 신경써야겠엌ㅋㅋㅋㅋㅋㅋㅋ?

*와중에 조드 장군 역을 맡은 마이클 섀넌의 연기 하나는 빛을 발한다. 부하 과학자에게 "칼엘을 죽이지 않고서도 크립톤 인들의 유전자를 채취할 수 없냐"고 물어봤다가 불가능하다고 하니까 잠시 침묵하는 부분이 올ㅋ

*다시 보니까 클라크가 인명 구조나 주변의 파괴 여부에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지는 않다. ...어..............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매친 그 상황에서 키스하지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변에 폐허들을 좀 둘러 보라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nd

상세한 감상은 차후에 쓰고...



*당초 예상은... 어벤저스2 마지막에 토니가 캡틴에게 "자네가 보고 싶을 거야, 다 큰 어른들이 질질 짜겠지"라고 말했던 것처럼, 시빌워에서는 캡틴이 버키를 구하려다가 죽고 토니가 "이런 희생을 감수해야 할 가치까진 없었어" 하며 눈물 뽑은 뒤->인피니티 워 1에서 캡틴이 없는 상태로 타노스랑 붙었다가 비전은 마인드 스톤 뽑히고 끔살, 어벤저스 멤버들은 개처발리고->인피니티 워2에서 캡틴이 부활해 복귀하며 반격의 기틀이 다져진다... 정도의 흐름으로 가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게는 안 되더라.


*역시 당초에는 토니가 캡틴에게 등록 법안을 두고 "난 최악을 피하기 위해 서명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악역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캡틴은 윈터솔저에서 알렉산더 피어스가 "우린 세상을 구하기 위해 구정물에 손 담그는데 우리보고 손 더럽다고 까는 놈들 극혐"했던 걸 떠올리며 하이드라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고 씁쓸해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안 나와서 좀 아쉬웠다. 그래도 비슷한 대사가 나오긴 하더라.


*평론가들이 "등록 법안을 둘러 싼 이념대립으로 시작해 캡틴과 토니 간의 감정대립으로 흘러가는 게 아쉬웠다"고 평가한 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감독이 그렇게 찍은 이유도 이해는 된다. 강한 감정적 동기를 가진 캐릭터에게 이입시키는 게 아무래도 더 대중에게 어필하기 쉽지 아무렴ㅇㅇ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캐릭터 간의 감정적 대립이 아니라 거대 담론을 다루는 원작 쪽이 더 마음에 든다.


*스파이디 귀여워 스파이디.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과 머리 모양이 같더라. 전투 중에도 계속 개드립치는 버릇은 원작(+어메이징 스파이더맨)과 비슷해서 만족.


*메이 숙모가 샘스파나 어스파보다 젊고 섹시해서 ㅎㅇㅎㅇ. 벤 삼촌은 편히 눈 감지 못했을 거야...


*제일 웃겼던 건 역시 앤트맨이 (자신을 발견 못해 어리둥절해하며 누가 떠드는 거냐고 하는) 토니에게 "니 양심! 오랜만이지?" 하는 장면.


*블랙팬서는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와칸다 백성들에 대한 위정자로서의 의무감만으로 움직이는 배드애스한 안티 히어로일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쾌남이라 의외였음. 


*율리시스 클로가 안 나온 건 좀 아쉽다. 골룸과 빌보의 재회가 이뤄졌을지도 모르는데ㅋ


*악역이 극악무도한 빌런 같은 게 아니라, 복수심에 불타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구글링을 좀 해보니 원작에서는 하이드라 소속 과학자였던 모양인데, '캐릭터의 개인적이고 감정적 동기'를 중시하는 무비버스 버젼에는 걸맞는 변화였던 듯.  

 


 

  

And


영상이 좀 잘려서 나오는데 사이즈 조절하기 귀찮. 


And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스포일러 많음. 


30여 년 전에 나온 매드맥스 트릴로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전범을 창조한 고전 명작으로, '인류 문명이 멸망하고 난 뒤 삭막한 황무지에서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남은 자원들(물, 식량 등등)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는 생존자 집단'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면서 생존자 집단을 약탈하는 폭주족들' '방사능 오염 등의 이유로 인해 몸과 정신이 기괴하게 뒤틀린 사람과 짐승들'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하면 으레 떠오르는 클리셰들을 처음으로 제시한 원형으로 손꼽힌다. 만화 쪽으로는<북두의 권>이나 <총몽>, 게임 쪽으로는 <폴아웃> 시리즈 등 수많은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멜 깁슨이 맥스 역할을 맡은 이 오리지널 트릴로지와 이번에 나온 '분노의 도로'는 스토리 상 변변한 접점이 없다(정확히는 오리지널 트릴로지도 작품마다 그렇게 연결점이 많지 않다... ...라기보다는 '전직 경찰인, 맥스라는 이름의 고독한 방랑자가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것 외엔 거의 공통점이 없다. 사실 각 작품의 '맥스'들은 그저 우연히 비슷한 과거사를 갖고 있으며 성격 또한 비슷한 별개의 인물들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스토리 상의 직접적인 접점이 별로 없을 뿐 전체적인 주제나 서사 구조 측면에서 오리지널 트릴로지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 많으므로 오리지널 트릴로지 역시도 보는 게 전체적인 이해에 유리하다. 


이 영화를 보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서부극의 매우 탁월한 재해석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신화가 없는 이들이다(애초에 그들이 떠나온 고향인 영국의 앵글로 색슨 족 역시도 자신들의 민족적 신화를 갖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아서왕 전설 정도인데 이 역시도 앵글로 색슨 족의 도래 이전 브리튼 섬의 주류 민족이던 켈트 족의 전설과 신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존 로널드 루얼 톨킨 교수 역시도 <실마릴리온>을 쓰며 영국인들에게 신화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한 미국인들은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스스로를 위한 신화를 창조하고자 했다. 


서부극의 가장 전통적인 포맷은 이러하다. 1)황량하고 메마른 황무지 가운데, 선량한 사람들(물론 청교도들이다)이 모여 사는 개척 마을이 있다. 2)잔인하고 야만적인 산적, 또는 근처 인디언 부족이 마을의 평화를 위협한다. 3)고독한 떠돌이인 주인공이 홀연히 황야로부터 나타나서는, 총으로 (시간과 방식, 입회인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등 다분히 의식적인 성격의)결투를 벌여 악당들을 물리친 뒤 홀로 어디론가 떠난다. 그 과정에서 순결하고 아름다운 마을 처녀와 하룻밤을 보내 아이를 남기거나 자신을 도와주는 조수역 인물에게 멘토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이것은 즉 평온하고 목가적인, 그러나 위협받고 있는 공동체->그 공동체를 위협에서 구원하는 영웅의 등장->영웅은 그 자신의 탁월함과 특별함 때문에 범속한 일반인들과 섞여살 수 없으므로 다시 혼자 떠나지만, 그 대신 자신의 제자나 자식, 혹은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를 남김'이라는 고전적인 신화적 서사의 흐름과 일치한다(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행적 역시도 이와 어느 정도는 비슷하다. 당대 유태인들은 예수를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할 현실적, 정치적 구원자로 여겨서 환영했지만 예수 자신은 사랑와 자비, 용서를 통해 현실의 세속적인 갈등과 투쟁 너머 이뤄지는 사후의 영원한 구원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서부극에 있어서 구원자는 언제나 잘생기고 정의로운 백인 남성이며,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에 의해 구원받는 수동적인 약자들이고, 악당 역시 공동체 외부에서 유래한 '저 바깥에서 온 이방인'인 산적이나 인디언 등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있어 서부극의 원형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며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다. 시간이 흐르며 인물상이 다변화되고 입체화되며 구원자가 '외부에서 온 방랑자'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선출한 보안관 또는 판사라거나 악당도 외부의 이방인이 아닌 탐욕스런 농장주나 은행장이 되는 등의 변화는 이뤄졌지만 여전히 그 근간에는 명확한 선악구도와 남성 중심적 요소가 남아 있었다. 


이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는 문명이 멸망하고 혼돈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기말적 세상이라는 배경이 고스란히 서부극의 거칠고 무질서한 황야로 전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황야 가운데 3대 세력이 등장한다. 물과 식량이 있으며 광신적인 열정을 기반으로 수하들을 통제하는 이모탄이 다스리는 '시타델'이 대표적이다. 시추 및 정유 시설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피플이터가 다스리는 '가스 타운', 무기 공장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불렛파머가 다스리는 '탄환 농장'이 이 3대 세력을 구성한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동원할 수 있는 차량의 숫자나 인력으로 미뤄봤을 때 시타델은 이 3대 세력 중 가장 크고 강한 것으로 보인다(그 외로는 고슴도치처럼 칼날이 잔뜩 달린 특이한 차량을 사용하며 주로 약탈을 통해 먹고 사는 것으로 보이는 '버저드', 주로 바이크를 몰고 다니며 협곡을 근거지로 두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통행세를 받아 먹고 사는 '록 라이더즈' 등의 군소 세력들도 있다). 이 3대 세력은 집단의 특성에 따라 스타일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부와 폭력을 쥔 남성이 권력을 쥐고 있다(영화 상에서 구체적으로 사회상이 묘사되는 것은 시타델 뿐이지만, 세상이 세상이다 보니 가스타운과 탄환 농장도 현대의 도덕관념을 적용할 수 없는 막장이긴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들의 삶이 서부극에서 묘사되는 폭력성과 무질서함보다 훨씬 정도가 심한 건, 멸망 이후의 세상이라는 요소 때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간들은 육체고 정신이고 어느 한 구석이 뒤틀려 있다. 이 영화의 최종 보스 포지션이며 수많은 워보이들의 광신적인 숭배를 받는 이모탄은 오염과 질병으로 인해 병든 육체를 플라스틱 갑주와 호흡기로 가리고 있고, 사람을 먹는다면서 공포의 대상이 되는 피플이터도 혼자서는 차에 오르고 내리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이모탄의 자식들 중 하나는 사지가 오그라 들은 기형이고, 다른 하나는 건장한 근육질이지만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 이모탄이 자신의 뒤를 이을 건강한 남자 아이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 사회에서 가능한 최고의 음식을 먹고 최고의 의료 처치를 받을, 권력의 정상층에 있는 이들조차도 이런 상태인데, 하층부는 말할 것도 없다. 눅스를 비롯한 워보이들은 다들 암세포를 달고 사는 시한부 인생들이며 오직 이모탄에 대한 충성과 영광스러운 죽음을 통해 발할라로 가리라는 광신만이 그들의 위안이 된다. 전투와 약탈에 나설 수 없는 여자들은 의자에 묶여서 젖을 짜이는 기계 취급당한다. 노인들은 바위 틈에서 이모탄을 신처럼 올려다 보며 가끔 물을 뿌려주면 그걸 받으며 그걸 찬양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이 잔인한 세상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건전하다. 고전적 서부극에서 구원자 포지션일 맥스가 이 영화에서 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전투력 지원+빡센 일 셔틀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능력도 그렇고 비중도 그렇고 진 주인공에 가까운 것은 강인한 여전사 타입 캐릭터인 퓨리오사이며, 목적도 이모탄을 타도하고 시타델의 권력을 얻는다거나 하는 상알파스러운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평화롭고 안전한 녹색의 땅(Green place)으로 간다는 것이다. 퓨리오사와 함께 하는 이모탄의 다섯 아내들 역시 자유가 없이 물건 취급당할 망정 몸은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과거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는 와중에도(직접적으로 그를 표현했던 건 치도 하나 뿐이지만, 다른 이들도 그런 미련이 완전히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퓨리오사를 도우며 저마다 한 건씩 활약한다. 맥스는 초반에는 오직 자신의 안전과 자유만을 위해 퓨리오사와 대립하다가 협곡 통과를 계기로 협력하며 점차 마음을 열어가지만,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제법 실력과 비중이 있는 사이드킥 정도의 역할에서 머문다(맥스가 한 일 중 정말로 중요한 것은, 중후반부 녹색의 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좌절한 퓨리오사에게 시타델에 대한 역습을 제안한 것 뿐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퓨리오사와 이모탄의 다섯 아내 캐릭터들, 그리고 퓨리오사의 출신 공동체인 부발리니의 원로(물론 다들 여성들이다)들 간의 유대와 신뢰다. 초반 시타델에 있는 다섯 아내들의 처소에 새겨진 글씨는 그저 이모탄 개인에 대한 원한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자면 핵전쟁을 일으켜서 세상을 망가뜨린 남성 위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낼 여지도 충분하다. 이러한 페미니즘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호오가 크게 갈릴 수밖에 없지만(개인적으로는 호감이다),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방식으로서 '정복과 지배'가 아니라 '유대와 신뢰'를 제시한다는 것은 굉장히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건실한 관점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녹색의 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까마귀들과 기괴한 흉물들만이 배회하는 오물로 가득 찬 늪지대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에 한 번 좌절한 퓨리오사가 소금 사막을 가로질러 어딘가에 있을 지도 모르는 또 다른 낙원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시타델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 때 퓨리오사는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160일 간을 버틸 수 있는 연료만 가지고 정처없는 여정을 떠나거나 어딘가 그럭저럭 살 만한 환경이 갖춰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자신들끼리 살아가는 걸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맥스는 시타델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고, 퓨리오사는 그를 받아들인다. 이 부분이 특별한 것은, 그 귀환이 이모탄에 대한 투항이나 기존 체제에의 재편입 내지 그저 이모탄의 자리를 자신이 대신하겠다는 권력의지가 아니라 이모탄의 독재에 억압당하고 있던 워보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희망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이토록 병들고 뒤틀린 참혹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 그걸 견디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압제와 부조리가 횡행하는 기존의 사회로 돌아가서 그걸 끝장내고 타인과 연대를 이룬다는 것의 가치를 드러냄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이모탄의 시체를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주는 것은 그간 묶여서 젖을 짜이던 여자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고전 서부극에서 무수한 비판을 받은 요소인 배타성과 일방향성, 남성 중심성을 극복하기에 이른다. 미국인들이 서부극이라는 포맷을 통해 자신들만의 신화를 창조하고자 했다면, 이 영화는 그러한 신화로서의 서부극의 골자를 새로이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모여서 이루는 사회가, 그리고 그 미래가 건전하고 순수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이 인간인 이상 사회의 주류를 구성하는 권력의 주체가 백인이건 흑인이건, 남성이건 여성이건, 서양인이건 동양인이건, 어떤 식으로건 억압과 차별, 대립과 증오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전망과는 별개로 무엇이 옳은 것이며 그 옳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과 노력은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헐리웃 액션 영화에서 이 정도의 성찰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매우 탁월한 작품이다.         



PS=위에 쓴 것들 외에도 이 영화에는 대단히 상징적인 요소들이 많다. 천지 간을 가득 메우는, 이 영화에서 단연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인 압도적인 모래 폭풍 장면 이후 퓨리오사 일행, 맥스, 그리고 눅스가 그간 알아왔고 좋고 싫음과는 별개로 익숙해져 있던 삶(맥스는 홀로 차를 몰고 황무지를 떠돌던 삶, 퓨리오사 일행은 자유가 없는 삶, 눅스는 명령하는 사람에게 따르는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퓨리오사의 초기 목표였던 녹색의 땅으로 간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출애굽기에서 노예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벗어나 가나안으로 향해 가던 모세를 연상하게 한다. 치도가 초반에 이모탄에게 돌아가려고 했던 것도 모세를 따르던 이들이 방랑에 지친 나머지 노예 시절을 그리워하던 것과 비슷하고. 북유럽 바이킹들처럼 명예로운 죽음을 통해 발할라로 가길 바라던 워보이 눅스가 사랑을 통해 변모하고, 그가 죽기 직전 남기는 말이 초반에 하던 말과 내용은 같지만 그 의미와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PS2=이모탄의 아내들 중 1명(흑누님이었던 걸로 기억)이 하는 대사가 이 영화의 주제를 집약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총알은 죽음의 씨앗이에요, 하나를 심을 때마다 생명 하나가 죽죠."



     

And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phero&no=113668


스포 많음. 출처는 디씨 히어로 갤러리. 

And

 

 

진작에 <카트> 보러 가려고 했는데 바빠서 미루다가 흐지부지됐었는데 잘 됐다, 올 해의 마무리는 이거다. <습지...>랑 <공룡 둘리...>도 들고 가야지, <이제는 없는 이야기>는 책을 샀던 거 같은데 어디 뒀더라.

 

+

 

http://singlesparks.net/xe/about_notice/1607

 

입금 계좌 및 장소 안내는 이 링크에.

And

6)헬레이저6:헬시커

 

 

스토리 상 2편의 직계. 오랜만에 커스티가 재등장한다. 이제 성인이 되어 결혼까지 해서는 남편 트레버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녀. 둘이서 함께 차를 타고 가며 호작질을 벌이다가(...) 차가 도로 아래 강으로 추락하고, 트레버는 탈출하지만 커스티는 차 안에 갇혀 강바닥에 가라 앉아 버리는 임팩트 넘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트레버는 당시의 정황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고 종종 편두통에 시달린다는 이유로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고 담당 형사 랜지는 트레버가 사고를 위장해 커스티를 죽였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랜지는 트레버를 신뢰한다고 말하지만, 랜지의 파트너 형사인 기븐스는 노골적으로 트레버를 추궁하며 뒤를 쫓고, 트레버는 점차 혼란에 빠진다.

 

전체적으로 볼 만한 심리 스릴러(‘호러 영화가 아니다).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는 장면이 과연 객관적인 진실인가 아니면 트레버의(혹은 다른 누군가의) 왜곡된 기억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감상자가 자문하게끔 유도하며 교차 편집으로 그러한 혼란을 증폭시킨다. 이후에 나온 <메멘토><아이덴티티>와 한 핏줄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굿캅&배드캅 클리셰를 교묘하게 뒤튼 후반의 반전도 너무 주제를 직설적으로 말해 버리는 감은 있지만 꽤 인상적이고. ....그런데, 이 작품이 굳이 헬레이저 타이틀을 달고 나올 이유가 없어 보인다. 형식적으로는 커스티와 핀헤드의 악연을 마무리하며 커스티 역시도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게 영혼을 사로잡힌 노예가 되었다는 어둡고 아이러니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역대 헬레이저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핀헤드와 상자의 존재감이 흐릿한 작품. 2편 마지막에서 커스티와 함께 떠났던 티파니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고, 원래는 헬레이저 시리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심리 스릴러에 억지로 커스티 코튼의 캐릭터를 비롯해 시리즈의 몇몇 요소들을 가져다 붙인 느낌이다(그나마도 설정 오류가 좀 있다. 커스티가 삼촌 프랭크에게서 상당한 유산을 받았다는 언급이 있는데 1편에서 묘사되는 프랭크는 존내 개털 한량 아니었음...?). 헬레이저 시리즈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된 별개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보면 평타 이상은 치는 물건이지만 시리즈 특유의 상징성이나 철학성과는 괴리감이 너무 크다는 점, 그리고 그 괴리감에도 불구하고 클라이브 바커 본인이 각본에 참가했다는 점 때문에 팬 입장에서 엄청나게 미묘하다 으음...-_-

 

7)헬레이저7:데더

 

 

 

기자 에이미 클라인이 주인공. 상자를 처음 만든 르마샹 가문이 미국으로 이주해 성을 영어 식인 머천트(Merchant)로 바꿨다는, 4편에서의 묘사를 계승하고 있다. 윈터라는 남자(르마샹 가문의 후손이다)가 젊은이들을 모아서는 그들을 죽였다가 되살리는 기적을 보여서 그에 경도된 사람들을 모아 창설한 데더(Deaders)'라는 신흥 종교 집단을 이끌고 있고, 예의 부활 과정을 촬영한 비디오 테잎이 에이미가 일하는 신문사 앞으로 배달되어 그를 본 에이미가 호기심을 느끼고 그들을 취재한다는 내용. 사실 그 부활은 르마샹의 상자가 가진 힘을 남용한 거였고, 상자의 힘을 멋대로 이용하는 그들에게 분노한 핀헤드가 심판을 내린다는 쌈마이한 스토리 라인을 자랑한다... ....뭥미 이거.

 

역대 헬레이저 시리즈 중 3편 이후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다. 하지만 고어 묘사에 있어서도 그가 담고 있는 상징성에 있어서도 가장 수준이 낮다. 헬레이저 시리즈의 핵심 주제인 고통의 쾌락이 그 철학적 깊이를 잃고 다만 단편적이고 즉물적인 유희의 일환으로 여겨지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비판... ...을 담은 내용.... ...같기도 한데, 이 물건 자체가 바로 그런 종류다.

 

8)헬레이저8:헬월드

 

 

 

배경 세계에서 헬레이저 시리즈는 이미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공포 영화 시리즈라는 설정이 특이하다. 인터넷 상에서 헬레이저 플래시 게임의 퍼즐을 푼 유저에게 헬월드라는 헬레이저 테마의 파티 초대권이 배송되고, 헬레이저 덕후인 주최자의 저택에 불금을 즐기러 온 10대 꼬꼬마들이 주인공. 캐스팅이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단지 그 뿐이지만.

 

르마샹의 상자를 여는 자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인터넷을 통해 접속한 불특정 다수들이라는 점이 이번 작의 가장 특이한 점인데... 이건 단순히 21세기의 트렌드에 맞는 설정 변화에서 그칠 게 아니라, 더 힘을 줘서 작품의 근본적 주제와 직결되는 근본적인 재해석이 되었어야 했다. 이 부분을 잘 풀었으면 시리즈의 부활을 알리는 화려한 리부트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후반에 드러나는 진상...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수준. 마지막 5? 그걸로 내 분노를 달랠 수 있을 거 같냐 감독놈아아아아악!!!!!!!!!!!!!!!

 

 

9)헬레이저9:레벨레이션

 

 핀헤드는 3편에서 이미 그 독특한 심오함과 위엄, 카리스마를 죄다 털어 먹고서 단순화, 평면화를 거친 끝에 그저 하나의 상업적 기표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 9편에서는 그것조차도 희미해진, 그 기표의 그림자만 남았다. 시바 신의 가호를 담아 외쳐, ㅆㅂ!!!!!!!!!!!!!!!!!!!!!!!!!!!!!!!!!!!!!!

 

 

And

1)헬레이저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클라이브 바커의 원작 <헬바운드 하트>에 기초한 첫번째 작품. 원작 소설에서는 래리를 짝사랑하는 여자였던 커스티가 영화에서는 래리의 친 딸로 바뀌었다(그와 더불어 원작에서는 똑똑하고 사려 깊지만 썩 미인은 아니었던 커스티가 미소녀로 변했고, 원작에서는 요염한 팜므 파탈 그 자체로 묘사되던 줄리아는 무서운 인상의 아줌마로 변했다. 흠좀무). 당시에는 래리가 흘린 피를 통해, 핀헤드를 비롯한 수도사들이 있는 지옥 같은 이세계에서 탈출해 서서히 인간으로서의 '몸'을 복구하는 프랭크의 모습을 역대급 아날로그 특수 효과로 묘사해 보는 이에게 엄청난 충공깽을 선사했다.

 

개인적으로 헬레이저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1. 완전한 고통은 쾌락과 같음을 역설하는, 기존의 선악 관념에서 일탈해 있는 핀헤드의 철학적인 캐릭터성 2.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욕망이며 핀헤드를 비롯한 수도사들은 그러한 욕망에 탐닉하는 인간에게 '그가 원한 것'을 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일종의 심판을 내리는 존재라는 주제의식 3. 르마샹의 상자가 열리고 수도사들이 이 세계로 건너올 때를 비롯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압도적인 연출 이 세 가지라고 보는데, 이 중 1과 2를 매우 탁월하게 살려냈다.  

 

2)헬레이저2:헬바운드

 

시리즈 중 가장 인기가 좋은 2편. 시리즈의 저 3가지 매력 요소 중 3.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번에는 1편의 메인 악역이었던 프랭크 코튼이 퇴장하고(정확히는 후반부에 얼굴만 잠깐 비치고) 프랭크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지상으로 돌아 온 줄리아와, 그녀가 유혹한 채너드 박사가 메인 악역이 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가치는 역시 병실에서 커스티가 르마샹의 상자를 열고 수도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시퀀스와

   

 

줄리아의 인도를 통해 수도사들이 찾아오는 이세계로 온 채너드 박사가 끝없이 펼쳐진 미로의 압도적인 황폐함에 위축되고, 레비아탄의 빛 아래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시퀀스

 

 

이 둘이다. 이후 핀헤드의 과거가 드러나는 장면과 더불어서, 수도사들이 진정으로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해 작품 내적인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누군가에게는 천사이며 누군가에게는 악마라는 그 유니크한 캐릭터성을 다소 퇴색시켜 버렸다는 점에서는 약간 불만스럽지만 그 충격적인 비쥬얼만으로도 충분히 용서가 된다. 핀헤드라는 존재의 상징성이 퇴색되는 시발점이라는 점에 있어서 비판받을 여지도 있지만, 그래도 이 2편까지는 괜찮았다. 뭣보다 수도사들의 등장 장면에서, TV가 지직거리고 전등이 깨지고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오며 현실에 균열이 일어나는 그 연출이 너무 쩔어놔서 도저히 못 까겠음. 아, 그리고 커스티가 티파니와 함께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델마와 루이스> 비슷하게 여성 간의 유대라는 면에서 페미니즘적 주제의식을 읽어낼 여지도 있다.

 

3)헬레이저3:헬 온 어스

 

....오우 쒯 더 퍽....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이시여. 시리즈를 좆망의 길로 이끌기 시작한 망작. 2편에서 조짐을 보인, 핀헤드의 '선과 악이 아니라 쾌락과 고통이란 관점을 통해 인간을 보는, 그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도덕관을 들이댈 수 없는 초월적인 심판자'로서의 상징성이 완전히 무너졌다. 1편과 2편은 영화의 근본적인 주제 자체는 상당히 건전한 내용이었고, 그 메시지의 건전함과 사슬과 갈고리와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고어함이 공존하는 가운데 핀헤드라는 철학적인 심판자가 가교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3편에서 핀헤드는 그 유니크한 캐릭터 성이 완전히 증발하고, 기독교적인 개념의 '신에게 대항하는 존재로서의 악마'가 되어 버렸다. 성당에서 자기 머리에 박혀 있던 못을 뽑아 손에 박고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양 팔을 벌리며 "내가 길이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만 보자면 꽤나 포스있지만... 이 영화는 <엑소시스트>가 아니다. 게다가 보일러룸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부하로 만들고, 그들이 시민들을 학살하는 걸 보면서 큰 소리로 웃어 젖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다.

 

핀헤드 횽아 횽 그렇게 경박하게 처웃는 캐릭터 아니었잖아.... 2편에서 캐릭터성이 좀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횽은 어디까지나 고통의 본질과 인간성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고 온갖 고문을 통해 나름의 진리를 찾는 '수도사'였지 의미 없는 대량학살 자체에 탐닉하는 '살인마'는 아니었잖아....? 횽 왜 구랭 하지마 해지마 그르디망...........................'_`..............    

 

4)헬레이저4:블러드라인

 

2편까지의 철학성이나 주제 같은 건 머리에서 지우고, 3편에서 새로이 제시된 핀헤드의 캐릭터성을 어떻게든 수용하고 이 시리즈 역시 걍 B급 공포영화로 받아 들이는데 성공한다면(....그게 매우 어렵긴 하지만) 어떻게든 봐줄 만하다. 영화 자체의 수준만 보자면 완전 똥은 아니고 똥맛 카레 정도는 된다(3편이 워낙 개판이었던 터라 상대적으로 더 나아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영화 배경이 갑자기 현대에서 2127년으로 타임워프하고, 공간적 배경도 지구 궤도 상에 떠 있는 미노스 우주 정거장으로 바뀐다. 3편에서 핀헤드의 인간 시절이 묘사된 것을 뒤이어 이 작품에서는 르마샹의 상자가 맨 처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3편의 마지막 장면 이후 어쩌다 배경이 미래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서 처음 상자를 만든 르마샹 가문(프랑스 출신이었지만 미국으로 이민온 뒤 영어 식인 머천트로 성을 바꾼다)의 마지막 후계자와 핀헤드 간의 최후의 대결을 다루고 있다. 새로이 등장한 부하 수도사들의 면면이 볼만하다(특히 샴쌍둥이 수도사가 두 명으로 분리한 뒤 희생자를 둘러싸고 다시 합체해서 죽여 버리는 장면은 제법 신박했다). 시리즈의 타임라인 상 가장 마지막 작품이며 이 작품에서 핀헤드는 르마샹의 상자('비탄의 형상'이라고 불린다)와는 대극을 이루는 물건이며 르마샹 가문 마지막 후계자가 만들어낸 '엘리시움의 형상'에 갇혀 드디어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스토리 상 시리즈의 최종작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래봤자 똥맛 카레지만! 나으 헬레이저는 이 따위 단선적인 선악구도로 만사를 퉁치는 작품이 아니라능! 

 

5)헬레이저5:인페르노

 

....구라 안 까고 제법 괜찮다. 레알. 참트루. 다시 현대로 배경이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우연히 르마샹의 상자와 엮이게 된 형사가 주인공이다. 지금까지의 주인공들이 비교적 순수하고 건전한 인물들이고, 핀헤드를 비롯한 수도사들과 만난 뒤 방탕하고 타락한 인간들이 끔살당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ㅎㄷㄷ하다가 핀헤드와 계약을 맺건 아니면 틈을 노려 상자 모서리로 통수를 까서 돌려 보내건(....) 어떻게든 끝을 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유형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 주인공은 지금까지 핀헤드에게 당해 온 그 '방탕하고 타락한 인간'에 속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보는 사람마저 멘붕할 거 같은 괴괴한 연출이 이번 작품의 포인트. 헬레이저 시리즈의 매력 중 2.가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본다. 물론 1.과 3.은 시망.

 

마지막 장면은 개인적으로 약간 주인공에게 이입이 되서 가슴 아팠다.

And

 

 

DC 코믹스와 나란히 미국 슈퍼 히어로 물 산업의 양대 거두 자리를 유지해 온 마블 코믹스가 라이벌인 DC 코믹스와 구별되는 특이점은, 슈퍼 히어로와 슈퍼 빌런들을 작품 속에서 다루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DC 코믹스가 슈퍼맨으로 대표되는 초월적인 영웅들의 심리와 그러한 영웅이 느낄 법한 고뇌(평범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거대한 힘과 상이한 사고방식을 가진, 일종의 신에 가까운 존재로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보다 좋게 바꿀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를 강조하는 것에 비해 마블 코믹스의 영웅들은 보다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결함과 단점들이 더 부각되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절대다수의 일반인들로 구성되는 사회 속에 속해 있는 존재로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온당한 자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마블 코믹스의 그러한 스타일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강조되는 일련의 작품군이 X-멘 시리즈다.

 

마블 코믹스의 세계관 속에는 X-멘 시리즈 속의 뮤턴트들 외에도 이미 온갖 종류의 초인과 외계인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 세계 속의 대중들로부터 X-멘들을 비롯한 뮤턴트들은 유달리 따돌림 당한다. 왜냐하면, 초인 병사 혈청으로 힘을 얻은 캡틴 아메리카나 신적인 힘과 초과학을 보유한 외계인인 토르, 유전자 조작이 된 거미에게 물려 힘을 얻은 스파이더맨 같은 경우와는 달리 뮤턴트들은 근본적으로는 인간이지만 현생 인류로부터 한 단계 더 진화해 있는 다음 세대의 인류이기 때문이다. 뮤턴트들이 갖고 있는 온갖 종류의 초능력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신인류임을 나타내는 상징 내지 도구에 불과하다. 만물의 영장이며 생태계 피라미드의 최정점이라는 기존의 위치를 이 신인류들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현생 인류의 유전자 정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종족적 단위의 위기감과 생존본능이 무의식 수준에서 뮤턴트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자극한다. 그러한 대중들의 차별과 편견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회의 일원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관한 주제의식이 X-멘 시리즈의 핵심이다. 그리고 자비에르 교수를 필두로 하는, 기존 인류와의 평화적인 공존을 주장하는 온건파인 X-멘들과 매그니토를 필두로 하는, 뮤턴트에 의한 세계 지배를 주장하는 과격파인 브라더후드 오브 뮤턴츠의 대립 구도는 이야기 내에서 그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맡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시작은 처참하다. 뮤턴트에 대한 인류의 적개심은 극한에 이르러 결국 세계 전체가 뮤턴트 및 그에 호의적인 인간들을 포함하는 친 뮤턴트 파와 반 뮤턴트 파로 갈려 전쟁이 벌어졌고, 반 뮤턴트 파가 만들어낸 뮤턴트 색출 및 처단 전문 전투로봇인 센티넬의 대량 생산으로 인해 반 뮤턴트 파가 전쟁의 승기를 잡았으며 이런 절망적인 상황 하에서 자비에르 교수와 매그니토 역시도 과거의 대립은 잊고 서로 협력하지만 이미 전황은 완전히 기울어 있다. 이 상황은 한 가지 인상적인 시사점이 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엑스멘1편과 2편에서 묘사된, 기존 인류의 뮤턴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분명히 도를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반감을 품은 매그니토의 브라더후드 오브 뮤턴츠 역시 도가 지나친 암살 및 테러리즘으로 인류에게 반격을 가하고, 자비에르 교수의 X-멘들이 그를 수습함으로써 어떻게든 제 3의 길을 모색하려고 하고, 다시 브라더후드 오브 뮤턴츠의 활동으로 위협을 느낀 인류가 뮤턴트에 대한 사회적 탄압과 린치를 강화하는 과정을 드러낸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뮤턴트들에 대한 연민을 일으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뮤턴트들과 그를 옹호하는 인간들은 살해되거나 생체실험당하거나 아우슈비츠 또는 굴라그를 닮은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가축처럼 관리되게 되는 절망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이를 바꾸기 위해 자비에르 교수와 매그니토는 시간여행을 통해 울버린을 과거로 파견해, 센티넬 제작 및 본격적인 뮤턴트 탄압의 효시가 되는 미스틱의 트라스크 교수 암살을 저지하고자 한다.

 

이 영화가 특히 높게 평가될 만한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현실의 나쁜 상황을 바꾸기 위해, 그 상황의 시발점이 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 역사를 고친다는 아이디어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터미네이터를 비롯해 이미 수많은 영화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흐름이 일률적이고 직선적이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여서 자신이 태어나지 않게 만들면 지금존재하는 나는 있을 수 없게 된다는 할아버지의 모순이나 과거의 가난한 자신에게 돈을 줘서 부자로 만들면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돈은 내가 번 게 아니라 저절로 생긴 것이 된다는 공짜의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울버린을 매개로 과거의 찰스가 현재의 자비에르 교수를 만나고, 미래의 자신이 해준 조언을 통해 용기를 얻은 찰스의 활약으로 역사가 바뀌어 뮤턴트는 멸망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전통적인 해피엔딩을 제시하는 것과 동시에 이 시간여행이 육체는 현재에 남은 채 정신만이 과거로 이동해 과거의 자신 육체에 덧씌워진다는 설정을 통해 저러한 모순을 비껴갔다. , 이 세계의 현실은 최종적으로 뮤턴트와 친 뮤턴트 파가 패배해 멸망하는 절망적인 운명에서 벗어났고 원래는 죽었던 사람들도 모두 살아 돌아온 평화로운 미래라는 현실 A', ’미래에서 온 그의 정신이 이용하던 울버린의 육체가 남겨져 있는 과거라는 현실 B‘의 둘로 나뉜 것이다. 전통적인 시간여행 장르의 문법에 더해, 이론상으로는 그와 공존하기 어려운 평행세계라는 설정을 아주 절묘하게 병치시키는 이러한 독특한 구성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영화 후반부, 과거의 에릭 렌셔가 백악관을 파괴하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위협하는 장면과 미래의 매그니토가 자비에르 교수의 손을 잡으며 그 동안 우리가 싸워 온 시간들이 아깝다고 탄식하는 장면이 이어지는 연출에서 이것은 절정에 달하며 이후 결말에 이르기까지 관객에게 슬픔과 안타까움, 희망과 긍정이 교차하는 온갖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이 영화는 매우 잘 만든 작품이다.

 

 

PS=센티넬의 제작자인 트라스크 박사가 난쟁이로 설정된 것에서 크게 감탄했다. 작중에서 트라스크 박사는 뮤턴트를 증오스러운 적이라기보다는 역사 상 한 번도 이뤄진 적 없는 모든 인류의 단결을 이끌어 내기 위한 희생양에 가깝게 여기는 걸로 묘사되는데(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phero&no=49226&page=9&search_pos=&s_type=search_all&s_keyword=%EC%97%91%EC%8A%A4%EB%A7%A8 ), 이것은 뮤턴트라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로부터 온갖 차별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을 그 자신의 신체조건과 맞물려 관객으로 하여금 매우 독특한 페이소스를 느끼게끔 한다. 울버린을 과거로 보내는 캐릭터인, 키티 프라이드 배역의 엘렌 페이지가 실제로 레즈비언이라는 것도 X-멘 시리즈의 상징성과 잘 맞물린다.

 

And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에서는 테러리즘에 대한 광범위한 패닉이 횡행했다. 사이가 좋건 나쁘건, 매일 같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마주치던 익숙한 사람들이 어느 날 한 순간, 아무런 전조도 없이 폭발이나 가스, 기타 온갖 수단에 의해 죽어나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고 친구나 연인, 가족이 될 수도 있으며 자신들은 그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대처할 방법도 모른다는 이 집단적 공포는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고 외국인(특히 아랍권 출신 이민자나 무슬림)에 대한 제노포비아를 촉발했다. 사람들은 직장 휴게실에서, 카페테리아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공원 벤치에서 어깨를 옹송그린 채 겁에 질린 시선을 주고받으며 낮은 목소리로 이 막연하면서도 끔찍한, 형체 없는 두려움들을 말했고 그 두려움은 날개를 얻어 미국 전체를 그 불길한 그림자로 뒤덮었다. 정치적으로는 강한 미국을 부르짖는 공화당 내 극우파가 선거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이를 기반으로 조지 부시 주니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사회적으로도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가 언론자유와 개인의 인권보다 우선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미 정부와, 폭스 뉴스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은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면서 싸워야 할 외부의 적을 찾아 다녔고 정부 기관은 은밀히 자국 내 국민들에 대해서까지 대규모 도감청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지 부시 주니어 당시 대통령이 명백하고 현실적인 위협이라고 거듭 강조했던 대량 살상 무기는 이라크에서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참전 군인들의 피로와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무차별 체포 및 고문이 언론에서 이슈가 되며 반전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포와 불안, 피로가 만연해 있던 당시의 미국 사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오히려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역설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의 의도가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빈 라덴은 결국 대 테러 특수부대 데브그루 팀에 의해 사살되었지만, 2014년 현재에도 여전히 알 카에다로 총칭되었던 테러리즘의 세포 조직들은 아랍권과 아프리카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고 미국 내에서도 지난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깊이 뿌리를 내린 이 형체 없는 두려움은 채 걷히지 않고 있다. 그러한 현재 시점에서, 이 영화는 슈퍼 히어로 물이라는 외피를 통해 미국이 추구해야 할 정의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캡틴 아메리카(이하 캡틴’)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배후에서 세계 정복을 획책하고 있던 비밀결사 하이드라에 대항해 싸운 적 있는 전쟁영웅이다. 용기와 애국심, 악에 맞서는 순수한 열정과 희생정신은 갖고 있지만 몸이 너무 허약하여 전쟁에 나갈 수 없었던 그는 그의 정신력을 높이 산 군 소속의 과학자 에스카인 박사에 의해 인간의 신체적 잠재능력을 극한까지 이끌어내지만 내면의 선과 악 역시 극단적으로 증폭시키는 약물을 투여 받아 초인 병사가 되어 싸우게 된다. 캡틴의 탄생과 하이드라와의 싸움을 묘사한 영화 <퍼스트 어벤저>에서 그는 하이드라의 수장 레드스컬을 쓰러뜨리지만 남극의 얼음 속으로 떨어져 동면 상태에 빠지고, 이후 세월이 흐른 현재에 깨어나서는 UN 산하의 국제 안보기관인 실드의 국장 닉 퓨리에게 스카웃된다. 이후 영화 <어벤저스>에서의 사건을 거치며 현재의 세계에 점차 적응해 가지만 그는 여전히 구식 도덕관념과 사고방식에 매여 있는,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게 변해 버린 현재의 세상 속에서 고독과 소외감을 떨치지 못하는 과거의 영웅이다. 21세기의 트렌드에 맞지 않는 고지식한 도덕성과 성실함, 그리고 애국심이 캡틴의 정체성이다.

 

이 시점에서 대개의 사람들이 흔히 하기 쉬운 오해는, 캡틴이 9.11과 테러와의 전쟁 이전부터 미국의 대외정책 근간을 이뤄왔던 오만한 제국주의를 대변하는 히어로라는 것이다. 하지만 캡틴이 진정으로 상징하는 것은 그보다 한 발 앞선, ‘순수한 의미에서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미국의 이상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 영화 초반, 성장환경부터 시작해 정치 성향, 학벌, 대인관계 등을 분석하여 앞으로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를 추려내어 고도 3000피트에서 정밀 타격한다는 계획인 프로젝트 인사이트(작게 보면 테러와의 전쟁 당시 미국이 주장하던 공세적 방어개념에 대한 은유가 명백하며, 궁극적으로는 대의를 앞세운 통제와 감시, 억압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를 두고서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공포라고 비판하는 장면에서 일차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가장 극대화되는 장면은 중후반에서 드러나는, 실드 내부에 배반자가 있는 수준을 넘어서 실드 자체가 하이드라에 장악되었다는 반전 부분이다. 하이드라의 간부는 말한다. 자유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하면 저항하기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게끔 만들었다고. 이것은 <어벤저스>에서, 독일에 간 로키가 사람들에게 자유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겠다’ ‘자유는 가장 위대한 거짓말이라고 조소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겁에 질려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한 노인이 일어나 당신 같은 자에게 무릎 꿇지는 못하겠다고 선언한다. 독일이라는 장소와 그 노인의 나이 대를 고려해봤을 때 그 노인은 아마도 젊은 시절 독일군으로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그가 로키에게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은, 두 번 다시 그러한 기만과 억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장면을 통해, 비록 로키와 하이드라는 서로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에 있어서의 유사성을 통해 결국 나치와 그 배후에서 암약하던 하이드라가 어떤 식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하는지가 상징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캡틴에게 있어서 실드라는 조직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영화만 봐서는 알기 어렵지만, 설정 상 실드는 캡틴이 남극에서 실종되어 잠든 이후 그의 상관이었던 체스터 필립스 대령과 친구 하워드 스타크, 그리고 연인 페기 카터 셋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조직이다. 엄격하지만 포용력 있는 아버지 같았던 상관, 버키 반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친했던 친구, 무엇보다 사랑했던 여자까지 해서 셋이 남긴 유산이나 다름없는 실드가 한 때 치열하게 싸웠고 말 그대로 목숨과 바꿔 파멸시켰다고 여겼던 적대 조직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렸다는 상황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드가 하이드라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었다고 판단한 즉시 조직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사람들에게도 그를 따라달라고 설득하는 것은 보통 용기나 도덕성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캡틴은 보수적인 인물이며 그 사고방식 역시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미국적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지언정, 미국의 오만한 패권주의적 질서를 긍정하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를 적극적으로 혁파하기 위해서 싸우고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묶어 명확한 대의와 이상으로 이끌어 나가는- 개인의 무력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그보다 훨씬 강한 토르나 아이언맨 등과 비교해도 전혀 슈퍼 히어로라고 부르기가 어색하지 않은 영웅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올바른 보수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다.

 

And

 

 

미국 만화에 있어 슈퍼 히어로 장르는 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초인적인 힘과 지혜, 그리고 정의감을 지닌 비범한 영웅이 절대다수의 일반인들로 구성된 사회의 법과 질서와는 별개로(때로는 노골적으로 대립하며) 역시 초인적인 힘과 지혜, 그리고 사악함을 지닌 비범한 악당과 대립한다는 기본적인 플롯이 제시된 지는 100여 년이 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슈퍼 히어로 장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평소에는 일반인들 틈에 섞여 생활하다가 적이 나타나면 행동에 나선다는 이중적인 정체성, 다종다양한 온갖 초능력과 특수 장비, 특유의 개성적인 복장과 같은 요소들을 최초로 정립한 슈퍼 히어로는 슈퍼맨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로 다양한 출판사와 거기 소속된 수많은 작가들이 실로 방대하기 그지없는 세계 설정을 바탕으로 해 온갖 슈퍼 히어로와 그와 대립하는 슈퍼 빌런들을 창조해냈으나 2014년 현재 미국 슈퍼 히어로 장르를 이끄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두 회사는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 등이 속해 있는 DC 코믹스와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스파이더맨, 헐크, 그리고 X-멘들이 속해 있는 마블 코믹스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회사는 거의 대등한 인기와 인지도를 누리는 라이벌이며(DC 코믹스 쪽이 더 역사가 오래되고 원작 만화에 대한 팬덤 충성도가 높은 편이지만 영화화 및 캐릭터 산업을 비롯한 프랜차이즈 분야의 흥행성에 있어서는 마블 코믹스 쪽이 좀 더 앞선다) 현실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각자의 대표적인 슈퍼 히어로들을 통해서도 서로 간접적인 긴장 관계를 맺고 있다. 본 글에서는, 특정한 단일 영화나 캐릭터에 대해 다루는 대신 DC와 마블 코믹스의 그러한 긴장에서 비롯한- 서로 비슷하되 대조적인 요소가 강한 슈퍼 히어로들 중 DC 코믹스 소속의 배트맨과 마블 코믹스 소속의 아이언맨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 위해, 양 쪽 다 만화 원작을 영화화한 것과 그에 부속된 설정 자료들을 기준으로 한다).

 

일견 배트맨과 아이언맨은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 둘 모두 초능력이나 비범한 출신 성분 같은 게 없는 평범한 인간 출신이고, 둘 모두 어두운 과거가 있고, 둘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산가이며, 둘 모두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고, 둘 모두 그러한 재력과 두뇌를 활용하여 슈퍼 히어로 활동을 한다. 그러나 둘의 공통점은 딱 거기까지다.

 

배트맨- 즉 브루스 웨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돈과 웨인 엔터프라이즈 회장이라는 위치, 그리고 응용과학부서를 통해 만들어낸 배트맨 슈트나 텀블러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슈퍼 히어로 활동을 하기 위한 도구이며 유용한 플러스 알파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에게 있어서 아이언맨 슈트는 슈퍼 히어로로서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맨인가 아니면 슈트가 아이언맨인가라는 이 의문은 아이언맨3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둘의 첫 번째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브루스 웨인은 장비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온갖 무술의 고수이며, 다양한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하고, 범죄 심리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과 추리력, 온갖 범죄자와 슈퍼 빌런들에 대한 방대한 정보력, 전술 능력을 갖고 있다. 배트맨 슈트의 방탄 기능이나 활공 능력 같은 것은 총으로 무장한 범죄자들과 도심 한 복판에서 싸운다는 그의 특성과 맞물려 유용한 도구로 작용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범죄자들에게 공포를 심어준다는 상징적 의미가 훨씬 더 크다. 하지만 토니 스타크는 그렇지 않다. 영화 속의 토니 스타크는 자신감 넘치고 유들유들한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속으로는 자신이 근본적으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며 주변에 넘쳐나는 온갖 초능력자와 외계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아이언맨3초반에서 중반까지에 걸쳐, 어벤저스에서의 사건에 대한 악몽에 시달리며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이는 묘사가 나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도 나름 열심히 몸을 단련하고 정보 수집도 게을리 하지 않지만 슈트가 없는 자신은 그러한 존재들 앞에서 철저히 무력하다는 두려움이 적어도 아이언맨3초반의 그를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되며, 그러한 불안에서 도피하기 위해 그는 끝없이 기존 슈트를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슈트들을 만들어내며 생각만으로 순식간에 슈트의 파츠들을 불러내 입을 수 있도록 하는 연구에 몰두한다.

 

둘은 성격도 완전히 다르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다크 나이트에서 집사 알프레드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자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에게는 한계가 없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토니 스타크는 역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아이언맨2에서 팔라듐 중독으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방탕하고 무절제한 삶을 지속하며 죽음을 기다린다. 둘 모두 고뇌를 내면으로 감추고 강한 척하는 외강내유형 인물이지만, 브루스 웨인의 경우 평소의 방종함은 배트맨으로서의 본질을 감추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 미녀를 끼고 다니며 호텔 로비의 분수대에서 수영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머리 속으로 오늘 밤 잡아야 할 범죄자를 생각하고 있다. 반면 토니 스타크의 경우 허무주의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탕아에 가깝다. 자신이 아이언맨이라는 걸 이미 공표한 토니 스타크는, 양쪽 모두에서 나타나는 화려하고 자기 현시욕 강한 모습(아이언맨 슈트의 그 눈에 띄는 컬러링을 보라!)을 통해 내면의 두려움과 나약함, 고독감을 감추려고 한다.

 

결정적으로, 시리즈 마지막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브루스 웨인은 원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었다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그를 이겨내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한 번 자신을 철저히 패배시킨 베인에게 대항할 힘을 얻는다. 그러나 역시 시리즈 마지막인 아이언맨3에서 토니 스타크는 자신의 두려움이 구현된 상징이나 다름없던 슈트들을 모두 파괴하고서 겁 많고 나약한 스스로를 세상에 대해 열어 보인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언맨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의식을 확립한다.

 

 

스파이디 불쌍해요 스파이디

And

 

 

백설공주이래로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미국 애니메이션의 태산북두로 군림해왔다. 애니메이션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디즈니야말로 미키 마우스와 도덜드 덕의 고향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며, 디즈니에서 만든 작품들 이름을 몇 개 정도는 댈 수 있다. 그러나 그 명성과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최근 10년 동안 디즈니는 2인자로 취급하던 드림웍스가 슈렉쿵푸 팬더라는 히트작을 내놓으며 위상이 추락했고, 심지어는 자회사인 픽사조차도 토이 스토리-E로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마땅히 이렇다 할 성공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1999년의 타잔을 마지막으로 10년 이상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디즈니는 팬들 사이에서 미국 애니메이션 장르의 첫 번째 개척자이자 첫 번째 본좌로서 경의를 바칠 만한 대상은 될 수는 있을망정 더 이상 젊은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는 없다고 여겨지는- 냉정하게 말하자면 애니메이션 장르에 있어서 역사적인 의미와 상징성 외에는 더 이상 기여할 게 없는 퇴물로 전락해 잊힐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디즈니가 이대로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창조집단으로서의 위치를 상실 내지 포기하고서 단지 우수한 마케팅과 매니지먼트 능력만을 지닌 기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지난 세월 동안 몇 차례나 위기를 극복하며 쌓아온 저력을 다시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는 팬덤 내에서 초유의 관심사가 되어 왔다. 2010년의 라푼젤2억 불 이상을 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한 후에도 이것을 재기의 신호탄으로 봐야 할지 회광반조로 봐야 할지에 대해선 논란이 가시지 않았지만, 20141(현지 기준으로는 1311) 디즈니는 지금까지 없었던 아주 특별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작품, 겨울왕국이 미국 애니메이션 사에서 갖는 의의나 장면 연출, 음악, 두 주인공들인 엘사와 안나 자매 간의 유대감과 가족애 등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분석이 이뤄졌고 아직도 더 깊이 파헤쳐볼 여지가 남아 있으나 본 글에서는 아렌델의 여왕, 엘사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인권 의식이 신장되고 페미니즘의 싹이 트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의 공주 캐릭터들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초기에는 공주라는 우월한 사회적 위치에 더해 아름답고 선량하지만 단지 그 뿐이었던 공주 캐릭터들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왕자라는 존재로 상징되는, 이상화된 남성상을 체현하는 상대 캐릭터 못지않게 똑똑하거나 나름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등으로 묘사의 다양화가 이뤄졌고 개중에는 이야기 속에서 제법 적극적으로 그를 활용해 난국을 타개하거나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와는 반대로 위기에 처한 왕자를 자기 손으로 구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녀가 부여받는 역할은 어디까지나 왕자와 사랑에 빠지고 온갖 역경을 거친 끝에 그와 결혼하여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즉 좋은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여자의 이상적 행복이라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관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왕국의 공주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높은 사회적 위치와 부, 무엇보다도 (그와 비슷한 물질적 조건을 갖춘) 멋진 남자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식의 박탈감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그러나 이 영화 속의 엘사는 그러한 공주 캐릭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완전히 진일보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위험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특별한 힘을 선천적으로 타고났다. 왕과 왕비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일부이기도 한 그 힘을 통제하고 관리하려고만 할 뿐이다. 자문을 위해 찾아간 트롤들의 수장인 패비 할아버지가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왕비가 한 일이라고는 안나의 기억 중 엘사의 힘에 대한 부분을 지우고서 엘사를 고립시킨 것뿐이다(동생을 상처 입혔다는 엘사 본인의 죄책감도 한 몫 했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걱정해주긴 하지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힘에 대해서는 불신과 두려움으로 일관하며 억누르려고만 하는- 즉 어떤 이해도 내비치지 않는 부모의 처우, 대관식 날이 되어 방 밖으로 나가게 되었지만 여전히 언제까지고 힘을 숨긴 채 이상적인 여왕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만난 지 하루도 안 되어 결혼하겠다는 동생에 이르기까지 사방이 온통 그녀를 억압하는 요소들 뿐이다. 숨기려고 했던 힘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자신을 마녀라고 부르는 장면에서 그 억압성은 극대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상에 대해 원한을 품는 대신 자신의 힘이 가진 위험성을 인정하고서 홀로 살아가는 쪽을 선택하고, 형언할 수 없는 고독과 동시에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태도가 수동적이며 그 자유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어느 정도 합당하지만 그 정도의 고립과 억압을 겪고서도 자신의 힘에 도취되거나 세상에 복수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내면에서나마 그러한 자존과 독립성을 일궈낸 캐릭터는 공주만이 아니라 역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거의 모든 캐릭터를 통틀어 엘사가 거의 유일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신분이나 특별한 힘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보편적인 정서에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엘사의 그러한 독보적인 캐릭터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영화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게, 결국 악당의 음모는 밝혀지고 엘사와 안나는 자매애를 회복하며 왕국은 평화를 되찾는다. 개인적으로는 홀로 산 위에서 노래하며 한 없이 차디차 보이면서도 아름다운 얼음의 성을 지어 올리는 그 시점에서 그녀가 느낄, 그 한 없이 슬프고 고독하면서도 드높고 깨끗한 자유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보지만 인간적인 행복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런 결말이 더 낫긴 하다. 그녀는 타자화된 공주’- Let it go의 가사를 빌어 표현하자면 착한 아이’-가 아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여왕으로서 아렌델을 훌륭히 다스릴 것이다. 여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Long live the Queen.

 

 

사실은 이 움짤이 보고 싶었다, 여왕님 ㅎㅇㅎㅇ

And

 

 

새로운 로보캅을 관람하기 전, 다시 한 번 먼지 쌓인 DVD 박스를 뒤져서 폴 버호벤 감독의 오리지널 <로보캅>을 다시 꺼내봤다. 전작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 새로 나온 후속편을 보기 전이나, 오리지널이 따로 있는 영화의 리메이크 작을 보기 전마다 필자는 거의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거치곤 한다.

 

198712월 한국에서 개봉한 이 영화의 배경은 근미래의 미국 디트로이트 시로, 디트로이트는 산업혁명 시기에 자동차 산업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한 대도시였다. 여기서 우선 방점을 찍고 살펴봐야 할 부분은, 미국 문화에서 자동차라는 물건이 갖는 상징성이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바이킹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동서로부터 얼어붙은 베링 해협과 아이슬란드를 거쳐 이 땅에 도착했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 땅을 신대륙으로 선포했으며 그 후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으로 대표되는 유럽 열강들이 앞 다투어 이 땅으로 건너와 인디언들과 교역을 하고 식민지를 설립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던 공통된 믿음이 있었으니, 이미 오랜 세월 전부터 그 땅에 터를 잡아 살아오며 -그 문명의 성격이 백인들의 그것과 달랐을 뿐- 이미 고유한 문명을 확립하고 있던 인디언들은 야만인들에 불과하며 자신들은 개화된 인간으로서 이 신천지를 자유로이 탐험하고 개척할 권리가 있다는 신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땅은 끝도 없이 넓어 보였고, 백인들은 말을 몰고 그 광활한 땅을 돌아다니며 발길이 닿는 모든 땅의 주인이 될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다른 열강들과의 식민지 다툼에서 승리하고 미국을 건국한 이후에도 미국인의 시조들은 그러한 모험심과 개척의지, 프론티어 정신이야말로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임을 천명했다.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경우에 따라선 피붙이만큼이나 가까운 관계로 맺어진 짐승이 바로 말이었고, 세월과 함께 말은 자동차로 모습을 바꿨다. 지금도 미국인들에게 있어 자동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주인의 사회적 지위와 부, 품위의 상징이며 아낌없는 애정의 대상이다. 미국에서는 부유층은 물론 어느 정도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중산층만 되도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새 자동차를 선물해 주는 것이 흔한 풍습이며, 아들은 차에 별명을 지어주고 주말마다 세차를 해주고 교외로 그를 몰고 나가 데이트 상대를 찾는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자동차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는 마이클 베이 감독의 2007년 영화 <트랜스포머>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총기와 더불어 미국 문화의 양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 산업에 있어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의 디트로이트는 일본에 선두 자리를 내주고서 이미 쇠락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를 반영해서인지, <로보캅>의 디트로이트는 온갖 범죄와 부패가 횡행하는, 현대 자본주의에 지배되는 대도시의 타락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도시다.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은 민영화되어 있고, 민선 시장은 실권이 없으며, 뒷골목에서는 폭력 조직들이 난립하고 빈민들은 비참하게 죽어간다. 하지만 도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대기업 OCP는 그에 신경 쓰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기업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건 더럽고 무질서한빈민가를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 세련된 첨단 고층건물들을 지으려고 한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폭력 조직과 싸우던 중 순직한 경찰 알렉스 머피는 OCP에 의해 유해가 회수되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대로 절반 기계, 절반 인간, 완전한 경찰인 로보캅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OCP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시민들에게 봉사하고 공공질서를 위해 헌신하는 경찰이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보호하고 불순분자들을 법질서 집행이라는 명목으로 처단하는 사냥개다. 로보캅이 된 알렉스 머피는 여러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갖고, 점차 기억을 회복해가며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결말 부분에서 자신을 죽였던 폭력조직의 보스에게 복수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사적인 복수라기보다는 경찰로서의 의무에 더 가깝게 묘사되며, 영화는 내내 알렉스 머피의 자아 찾기에 결코 작지 않은 비중을 둔다. 이러한 주제는 2편에서 머피와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로 발전하고, 시리즈 중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가장 수준 낮다고 평가되는 3편에까지 이어져서는 3편 마지막 부분에서 머피가 OCP 회장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그 목소리의 울림이 가볍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알렉스 머피라는 인간이라는 선언인 동시에 여전히 로보캅이라는 기능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현실에 대한 긍정을 모두 포괄한다는 점에 있다. 즉 그것은 기계의 육체 속에 갇혀 경찰로서의 의무에 매인다는 명확한 현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자유로이 사고하고 판단한다는 선포다.

 

이번 리메이크 <로보캅>의 감독인 호세 파딜라는 브라질 출신이다. 미국의 앞마당이나 다름 없는 중남미 출신 영화감독으로서, 그가 오리지널의 주제의식을 어떻게 변주해 보일지 기대하며 나는 영화관으로 갈 것이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