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 누군가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졌다. 카톡 창을 죽 보다가 '내가 이러면 안 되지 ㅅㅂ' 싶어서 후다닥 껐다.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난 혼자 살다 혼자 죽어야 한다. 난 그럴 필요가 있다.
지금 같이 rpg하는 팀에도 조만간 빠질 거라고 이야기해뒀다. 그저 이사 및 이런 저런 문제 때문에 여유가 안 난다고 말해뒀지만...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는 안다.
걍 개그 만화 같은 거나 보면서 적당히 놀아야겠다. 굳이 일부러 우울해질 필요는 없다.
그래도 술이 들어가니 약간 그렇긴 하다.

http://legacy.aonprd.com/indices/spelllists.html#
Spell List Index
legacy.aonprd.com
에라타가 적용되지 않은 주문도 많으므로 가능한 룰북과 대조해서 볼 것.
전에 사랑했던 분을 매우 닮은 여자분과 마주쳤다. 순간 철렁했다. 나야 꼭 전해드리고 싶었지만 끝내 그럴 수 없던 물건도 있었고... 아직도 가끔 그립지만, 그 분은 그런 내가 부담스러우실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분과는 다시는 마주치지 않는 게 옳다. 부디, 행복하게 잘 사시기를. 부디. 부디.
난, 내 사랑이 값싸고 무가치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래도 그 분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나는 그저 홀로 살다 홀로 죽기만을 원하게 됐지만, 그 분은 부디 그러하기를.
그래도 오늘은 한 잔 해야겠다.
...그녀에게 흰 삼베옷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세요
파슬리, 세이지, 로즈마리와 타임
이음새도, 바늘자국도 없다면
그녀는 나의 진정한 사랑이 될겁니다...

일단 지금은 남미 아마존 지역 일대 한정이지만, 앞으로도 그러할까. 현대인은 이미 전통적인 종교에서 섬기는 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섬기고 있다(자본주의라거나, 기술만능주의라거나). 기존의 종교들이 느리게 사멸해가는 건 이미 세계적인 추세고, 성직자는 갈수록 더 부족해질 것이다. 그 때도 사제의 결혼 허용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고, 결국 그게 세계적인 대세가 된다면?
신보다는 자기 가족부터 챙기려 들 가능성이 높고, 그러다 보면 반드시 말썽이 생기게 된다. 자신이야 성직자니 어쩔 수 없더라도 자식은 좀 무리해서라도 꼭 스타 강사가 가르치는 대치동 유명 학원에 보내고 싶고 고급 관료나 대기업 임원 자식들과 인맥도 미리 좀 쌓아두고 싶은데 자신은 가진 돈이 없다. 그런데 바로 옆에 헌금함이나 교무금 봉투가 놓여 있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다.
물론 중세 교황들도 뒤로는 첩질하고 사생아 낳고 마음에 드는 애한테 좋은 땅 물려주다가 자식들끼리 칼부림하는 꼴 지켜보는 등 할 거 다 했다. 하지만 그래도 대놓고는 못했고, 그런 짓 한 거 뽀록나면 라이벌에게 빌미 잡혀서 공격받고 입지가 약화됐다. 하지만 사제 결혼이 공식적으로 허용되면 횡령이나 청탁, 각종 비위가 만연할 것이다. 당연히 감찰이야 하겠지만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라는 문제도 있고, 거기에 쓸 예산과 인력, 시간 소요를 생각하면 너무 효율이 나빠 보인다. 성직자도 인간이고, 난 인간 전반의 평균적인 도덕성에 대한 신뢰도가 굉장히 낮다.
그렇게 되거나 말거나.... 사실 신은 섬기되 교회조직이나 인간이 만든 교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나로선 별로 상관은 없다. 그래도 여전히 내 신앙의 베이스는 가톨릭이고, 그런 입장에서 좀 씁쓸하긴 하다.
사제 숫자가 너무 적어서 문제라면 차라리 여성 사제를 허용하라고, 쯧.
두 번 다시는 누군가에게 연애감정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번거롭기만 해.

종종 악의를 가진 뭔가가 내 인생을 조지면서 '너도 마음껏 혐오해봐' '너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잖아' '사실 억울하지?' '어디 이래도 안 할래?' 하고 갈구는 것 같은 터무니 없는 망상이 든다. 진짜 그럴 리야 없겠지.
사람이 싫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되기 전에 이미 친분이 쌓인 관계는 단절하기가 아직 어렵다.
필요한 일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추석 때 뵈었을 때 오래 사시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역시 좀 그렇다.
이렇게 심란한 밤이면, 하늘을 올려다 보며 별을 찾곤 했다. 흐린 구름 틈으로 하나의 별빛이라도 보이면 그게 희망의 징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싶어했다. 이제는, 흐리고 탁한 하늘이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난 그 날 이후 한 번도 절망을 극복한 적이 없다. 내내 견뎌가며 살아왔을 뿐이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다.
견딜 수 없게 된다면 죽겠지.
단절하는 쪽이 나을까?
스트레스가 심하면 내 감정과 입장에만 매몰되어 상대방을 신경쓰지 못하는 게 내 결점이고, 아무래도 고쳐질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연애를 비롯한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 걸 피하고 싶어하는 주된 이유도 그거고.
그렇다면 최소한 그 결점이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을 최대한 피하는 게 낫다.
역시, 단절하는 쪽이 나을까.
나 역시 몇 몇 여자들로 인한 상처가 몇 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여자들을 도저히 용서는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며, 여성혐오 성향 남초 사이트 같은 데 가서 주작 티 나는 불행자랑에 끼어 들고 싶지는 않다. 내 미움 역시 개인으로서의 몇 명 정도에 한정될 뿐이다. 애초에 남녀 떠나서 사람 자체가 싫기도 하고. 내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남자가 역차별 당한다' 같은 개소리에 얹어갈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하물며, 승리가 멀쩡하게 풀려나 '씨발 같은 한국 법 그래서 사랑한다' 같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더.
나는 한 때 명예로운 인간이길 원했다. 이제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적어도, 저항할 수 없는 여자들을 상대로 내 증오를 정당화하는 추하고 너절한 약자는 되지 않겠다.
난 그렇게 혼자 살다가, 혼자 죽을 거다.
난 아직 그 날의 절망을 사무치게 기억한다.
난 혼자 살다, 혼자 죽을 거다. 그리고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렇게 죽은 뒤엔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고 싶다.

1도 모르겠다. 어흑마이깟

...이글루릭 섬에 사는 이누이트 족 노인에게는 (조상 대대로 이어 온 능력을 감퇴시키는) GPS 기술 도입이 문화적 비극이라며 안타까워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방향표시가 잘 되어 있는 대로들이 종횡으로 놓여 있고, 주유소, 모텔, 세븐 일레븐 편의점들이 즐비한 곳에 사는 우리는 대부분 이미 오래 전 놀랄 만한 길찾기 기술 활용 관습과 능력을 모두 잃어 버렸다. 특히 자연적 상태에서 지형을 인식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많이 축소됐다. 우리가 더 쉽게 길찾기를 할 수 있다면 더 줄어들거나 아예 없어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더 이상 길찾기 능력을 보존하는데 문화적 차원에서 큰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여전히 개인적 차원에서는 그 능력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는 결국 지구의 피조물들이며 컴퓨터 스크린에 뜬 가느다란 파란 선을 따라 이어진 추상적 점들이 아니다.실제 장소에 존재하는 실제 몸을 가진 실제 존재들이다. 한 장소를 알기 위한 노력은 성취감과 지식을 안겨 준다. 개인적 성취감과 자율성을 선사하고 더불어 소속감- 즉 어떤 장소를 그냥 지나쳐 가기보단 그곳에서 집에 있는 것과 같은 안도감을 느낀다.
부빙 위에서 활동하는 순록 사냥꾼이나 도심에서 싸고 질 좋은 물건을 찾아 다니는 사람 중 누구에게나 길찾기는 소외에서 애착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정체성 찾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인상을 찌푸릴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모호하고 진부해도 그런 비유적 표현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우리가 오래 고민한 문제와 얽혀 있다. 우리는 중요한 걸 포기하지 않고선 자아를 주변 환경과 분리할 수 없다.
(중략)
구글의 맵핑 전담 부서의 임원인 마이클 존스는 '구글 맵이 깔린 휴대폰을 갖고 있으면 지구 위 어디라도 돌아다니며 구글이 안전하고 편하게 가고 싶은 방향을 알려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 '이젠 누구도 다시는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의 말은 매력적인 선언처럼 들린다. 마치 우리의 몇 가지 기본적인 존재론적 문제가 영원히 해결된 것 같다. 그리고 이 선언은 사람들의 삶에서 '마찰'을 제거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사용에 집착하는 실리콘 밸리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이 선언에 대해 생각해 볼수록, 절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영원히 위치 감각을 상실한 상태에서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현재 위치를 몰라도 걱정 없다면, 굳이 현재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어진다. 즉, 휴대폰과 앱의 보호 속에서 늘 그들에게 의존하는 상태로 살게 된다는 걸 뜻한다....

깨놓고 말해, 내 요구가 받아들여지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둬야 할 것이다. 뭐, 그래봤자 나한테 뭔가 심각한 불이익이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감정적인 측면에서 뒷맛이 안 좋겠지.
내가 사람에게 뭔가 크게 기대를 건다거나 일정 이상의 친분을 갖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신경쓰는 성격인 게 다행스럽다.
당장 현실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는 고민이나 개인적 약점, 우울함 같은 건 남에게 드러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이 블로그에서는 이런 저런 소리 늘어놓고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자기검열은 거치는 데다가, 어차피 오다 가다 이 블로그 볼 타인들은 나를 모르니까.
때때로 이 같잖은 자기연민이 스스로도 지겹고 짜증난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런데, 남에게 어떻게 여겨질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모쪼록 혼자 살다 혼자 죽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렇게 죽은 뒤엔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고 싶다.

사람이 싫고, 난 그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 이전부터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던 사람 상대로 거리 조절을 잘못해서 말 실수를 했다거나 하는 바람에 멀어지면 아직도 침울하다.
혼자 살다 혼자 죽으려면 이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 내가 아직도 미련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젠 나이도 제법 먹었는데도 난 아직까지 내 감정(특히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잘 다루는 게 어렵다. 고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노력했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실패했고, 이젠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칠 수 없다면 뭐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지 어쩌겠어.
그래도 가능한 빨리 죽었으면 좋겠고, 그렇게 죽은 뒤엔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고 싶다는 생각은 가시지 않는다.

일하기 싫어서 그 대신 타이만 플레이가 왜 몇몇 사람들에게 어필하는가를 생각하다가 떠오른 거.
몇 년 전 나는 어떤 사이트에 자주 갔었다. 여성 덕후 비율이 높고(친목질 및 개인정보를 알 수 있을 만한 글이나 사진을 올리는 게 금지되어 있었기에 아마도 그럴 거라고 추정할 뿐 확실한 비율은 모른다) 동인계 내부의 이야기도 자주 오가며 프로 작가들도 심심찮게 슬쩍 섞여들어 놀거나 눈팅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걸로 추정되는... 당시엔 제법 규모가 있는 사이트였다. 그 사이트의 어떤 게시판에 누가 글을 올렸다.
1)동인 출신 작가들은 매력적이고 개성 있는 캐릭터를 만들거나 예쁘고 섬세한 문장으로 캐릭터의 심리를 묘사하거나 그러한 심리가 복잡하게 얽히는 위기상황을 짜내는 데 뛰어나다
2)그러나 단편적인 상황 하에서 캐릭터 간의 교감(주로 로맨스)을 묘사하는 데 집착하다 보니 그 개별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엮어 통일성 있는 서사를 구축하는 데에는 미숙한 경우가 많고, 이야기 흐름에 있어 비약이나 설정 구멍이 자주 생긴다
3)작가 본인이 쓰고 싶고 보고 싶은 것 자체가 애정캐들의 로맨스 위주다 보니 그들이 속한 사회적 배경 상황에 대한 고찰이나 고증이 부족한 경우도 많다
4)썰과 시츄 위주로 노는 건 물론 재미있지만 프로 지향이라면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필요하다
뭐 대강 그런 글이었다. 반박도 일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수긍하는 내용의 댓글들이 많았다.
나야 뭐 동인계가 진짜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 사이트에서 놀면서 이런 저런 썰도 좀 주워들었고, 그 바닥 용어도 여럿 알게 됐지만 딱 거기까지만 아는 수준이라. 하지만 그 글이 비교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가정하면, 타이만이 몇몇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이유도 설명이 될 것 같다. 기존의 TRPG 향유층 사이에서는 '플레이어들이 자기 PC를 장기말 삼아 효율적으로 마스터가 주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과 '각 PC의 개인사와 배경을 부각하고 그러한 PC 간의 드라마와 서사적 개연성을 강조하는 것'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느냐가 주된 담론이었다(RPG는 RP+G의 결합이라고 보는 관점의 연장이다. 나는 별로 동의 안 하지만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그러나 동인계 출신들은 RPG의 룰을 '애캐 구현 시뮬레이터' '시츄 시뮬레이터'로 받아들이고, 원래 해당 룰의 지향점은 상황극의 배경요소로 축소해석하고(말하자면 요즘 좀비물에서 극한 상황에 놓인 생존자들 간의 드라마를 강조하고 좀비 자체는 그런 극한 상황을 조성하는 배경요소로 쓰는 것처럼), 상황극 위주로 노는 걸 더 선호하기에 타이만이라는 유형이 어필하는 것 아닐까... 라는 게 내 가설이다.
이상은 어디까지나 그 게시판에서 봤던 글이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는 전제 하에 뇌피셜 돌린 거라서 사실은 아닐 수도 있음. 이 가설이 성립하려면 타이만 좋아하는 건 동인 출신들이 대부분이라는 전제가 필요한데 진짜로 그런지도 모르겠고.

전 사람이, 그저 상대가 반항할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얼마든지 상대를 모욕하고 빼앗고 때리고 범하고 죽일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압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 사실은 제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한 때는 제가 품었던 증오를 극복하고, 보다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지만 전 이제 그 희망을 증오합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아주 가끔씩 이루곤 하는 정의나 유대는 아직 별로 싫지 않습니다.
홍콩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들에게 당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타노스의 핑거스냅 이후 5년. 어벤저스 1 초반처럼 의료봉사하며 사는 브루스 배너. 상담센터 운영하는 캡틴과 함께 "잃어버린 게 너무도 많지만 이런 삶도 나쁘지만은 않아." "허드슨 강에는 고래가 돌아왔지." "그래도 이게 과연 최선일까?" 등의 대화를 주고 받는다. 타노스의 목을 친 뒤 현자타임 와서 연락을 끊고 잠적한 토르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내심 씁쓸함을 떨치지 못하는 캡틴과 달리 현재의 삶에 적응하고 그럭저럭 만족하는 브루스. 물론 그간 화날 일도 몇 번 있었지만 한 번도 헐크로 변한 적 없다고 한다. 한 번은 폭주족들이 마을을 습격해 온 적도 있었는데 그 때도 헐크가 나오지 않아 마을 사람들과 합심해 물리쳤다고. 그걸 계기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평범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타노스에게 당한 뒤 헐크가 겁을 먹어서 깊이 잠들어 버리거나 아예 사라진 게 아닐까 추측하는 브루스 배너. "지금까지 헐크는 거의 져 본 적이 없어. 힘만으로는 언제나 최고였고. 하지만 타노스에겐 일방적으로 당했잖아, 겁에 질릴 만 하지. 나로선 다행이야. 드디어 자동차 운전석에 방해 없이 앉았으니까."
2)앤트맨 귀환 이후 시간여행 아이디어가 나오자 토니와 마찬가지로 실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낸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불가능해서라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헐크가 더 이상 없는 지금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더 크다. 하지만 핑거스냅으로 사라진 베티 로스의 빈 무덤 곁에서 깜빡 잠들었다가 자신을 꾸짖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 고민하다가 토니와 만나고, 과학자로서의 호기심에 굴복해 결국 협조하게 된다. 에오울 때와 비슷한 패턴.
3)14타노스가 아웃라이더와 치타우리 군대를 몰고 와 격전을 벌이는 클라이막스. 전투에서는 도움이 안 된다는 걸 파악하고 후방(한 때 자신이 일하던 감마선 연구소, 지금은 임시 병원으로 사용 중)으로 물러나 있지만 아웃라이더들의 파상 공세에 방어선 일부가 무너지고 습격을 받는다. 브루스 배너는 함께 대피해 있던 민간인들을 구하기 위해 배너인 채로 적을 막아섰다가 중상을 입고, 죽어가던 중 무의식 속에서 헐크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사실 헐크는 타노스에게 당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품는 공포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것. 지금은 다들 헐크가 필요하다고 헐크를 설득하려고 하지만 헐크는 지금 뿐 아니냐, 네가 필요할 때만 나서서 싸우는데 지쳤다고 비웃는다. 문득 헐크가 특유의 어눌한 말투는 여전하지만 굉장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데 생각이 미치는 배너. 소코비아 사태 때 막판에 블위에게서 온 통신을 끊어 버리고 퀸젯을 조종해 세상을 등지려고 했던 건 헐크로서의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헐크의 분노와 파괴욕구를 두려워하고 억누르기만 하던 배너와 달리, 헐크는 그 때 이미 필요에 따라 배너로서의 지성도 활용할 수 있었던 것.
4)현실 쪽에서, 전선의 어벤저스는 후방이 공격받고 있는 걸 파악하고 급히 지원을 보내나 새 인피니티 건틀렛을 빼앗은 타노스의 맹공 때문에 여의치 않다. 겁에 질려 있던 민간인들은 마지막 용기를 짜내어 죽어가는 배너 박사 주변으로 모여 들어 그를 보호하려고 한다. 군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아웃라이더들의 압도적인 힘과 속도에 하나 둘 쓰러져 가는 사람들. 결국 연구소 일부가 파괴되면서 그 충격으로 오랫동안 꺼져 있던 감마선 조사장치에 전원이 들어오고 다량의 감마선이 빈사 상태의 배너에게 내리 쪼인다. 그 순간 무의식 속에서 배너는 그간 억누르고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여겼던 헐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사과하고, 죽음만이라도 함께 하자고 말한다. 그러자 처음으로 만족스럽게 웃으며 배너가 내민 손을 맞잡는 헐크.
5)둘의 마음이 통하는 순간 둘의 자아가 통합되고, 배너의 지성과 의지를 가진 헐크가 깨어난다. 부활한 헐크는 압도적인 힘으로 아웃라이더들을 순식간에 정리하고 남은 민간인들을 구한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전선으로 복귀. 포효 한 번에 폭풍이 일어나고 주먹질의 충격파로 마천루 십여 채가 무너져 내리는 등 '격분한 괴물이 아니라, 사람들을 지키는 영웅으로서 싸우는 헐크의 힘이 어떤 것인지' 피로하며, 인피니티 워 초반 당했을 때와는 정 반대로 타노스를 몰아 붙여 새 인피니티 건틀렛을 빼앗고 핑거스냅. 타노스가 소멸시켰던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되돌리고는 힘이 다해 쓰러진다. 이후 전개는 영화와 동일.
더 강한 갑옷이 있어야 해. 지금보다 훨씬 더.

왜 이렇게 침울할까 생각을 해봤는데, 이유를 깨달았다. 사소한 계기로 내가 남의 감정에 공감도 잘 못하고, 남의 입장이나 상황을 헤아리는 것도 못하는 인간이라는 걸 새삼 느껴서 그런 거다.
몇 년 전 내가 그런 인간이라는 걸 자각했을 때는, 스스로가 끔찍한 괴물처럼 여겨졌었다. 나는 왜 이런 거냐고 울면서 기도했고, 당연히 신께선 내게 아무런 답도 주지 않으셨다.
죄책감과 고립감 때문에 죽으려고 했다가 실패했고, 다시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스스로를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난 이런 인간이니까 연애 같은 것도 해선 안 되고, 일정 이상 친한 사람도 없이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주제에 소설은 무슨 놈의 소설이냐... 같은 생각도 했었는데, 그래도 최소한 자기표현은 가능하고 창작은 원래 그런 거라는 식으로 마음을 고쳐 먹기는 했다. 하지만, RPG는 관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취미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