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
이 사진들 외에도 황금거룡 깃발을 발견하고 사진 찍어도 되냐고 여쭤봐서 허락 받았는데, 하필 그 때 폰이 말썽을 일으켜 못 찍었다. 13시대 재밌나....
트위터에서 핫했던 단두대도 발견. 역시 폰 문제 때문에 못 찍었다. 수백 개에 달하는 깃발들이 나부끼는 것, 나와 같이 행진 맨 뒤에 있던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적힌 위엄 넘치는 초거대 깃발도 찍고 싶었는데 역시 폰이.... 그만...
내가 돌팬이 아니다 보니(난 락과 메탈 좋아하고, k팝에 별로 관심 없었다. 이번 집회 나가면서 다만세 듣다 보니 이것도 생각보다 괜찮네 정도로 생각하게 됐을 뿐이고...) 별로 공정한 관점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가 퀴어나 트랜스젠더인 것도 아니니까 뭐. 대략 주장을 보자면... '응원봉 문화는 아이돌 팬덤의 것인데, 퀴어나 트랜스젠더들이 그걸 자신의 것인 마냥 현장에서 뺏어가는 것이 싫다'는 거다.
중간 중간에 아예 '자유발언에서는 탄핵 이야기나 할 것이지 퀴어나 트젠들이 자기 정체성 밝히는 거 자체가 싫다'는 주장도 보이긴 한데 뭐 그런 차별적 언사는 아예 제끼고, 앞서의 주장만 보자면... 별로 공평한 것 같지는 않다. 아이돌 팬이 된다는 건, 어디까지나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라는 기호의 문제다. 말하자면 내가 호러나 sf, 판타지는 좋아하지만 로맨스에는 죽은 눈이 되는 것과 비슷한 거다. 하지만 성정체성이나 지향성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존재의 문제다. 기호의 문제와 존재의 문제가 완전히 구별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이 글에서 다루는 논제는 그게 아니고...
잠시 옛날 이야기를 좀 하자면, mb 때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때도 그랬다. 표면 상으로는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쇠고기 수입 여부에 관한 것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mb 정권의 독선과 강압에 반감을 갖고 있던 수많은 집단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게 되었다. 이명박은 취임 당시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지만, 그게 낮은 자세로 국민들 패겠다는 뜻이었던 거 아직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겠지. 그래서 그 당시에도 갈라치기 공작이 성행했던 거고.
여하간 난 계엄 선언도 '모두가 결정적으로 딥빡쳐서 뛰쳐나오게끔 하는 계기'였을 뿐 그 전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룬썩10 정권을 극혐해왔다고 생각한다. 하다못해 평소 국힘 지지하며 기존 체제 내에서의 입신양명과 일확천금을 꿈꾸던 보리수도 계엄 선언 이후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며 크게 손해 본 바람에 '나중에 홍준표나 한동훈을 찍더라도 지금은 일단 저 돼지새끼 좀 치워놔야겠다'는 생각으로 집회 나올 수도 있는 거다. 그저 이번에는 아이돌 좋아하는 젊은 여성층이 많았고, 그들이 각자 팬질하던 아이돌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들고 있던 응원봉이 이번 탄핵정국의 일반적인 아이콘이 된 거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존재론적 문제인 성지향성이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돌팬으로서, 또는 그저 탄핵집회 참가자로서의 일반적인 아이콘 차원에서 응원봉을 드는 걸 '본래의 의미를 흐리는 문화 전유'로 취급하는 건 부당하다. 응원봉을 드는 걸 통해 세력 뻥튀기를 하는 걸로 보일 수는 있겠고 뭐 퀴어나 트젠 측에서 진짜 그런 의도가 있을 가능성도 있겠는데... 온갖 입장과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든 광장에서까지 그렇게 기싸움을 꼭 해야겠냐 씁.
게다가 문화 전유는 근본적으로 주류 집단이 소수 약자 집단의 전통문화를 존중 없이 유희나 과시적 대상으로 가볍게 취급하는 현상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시작된 개념이다. 깨놓고 말해 현대 한국사회에서 아이돌 덕질이 지탄받는 불건전한 취미도 아니겠다, 아이돌 덕후가 퀴어나 트젠에 비해 딱히 소수 약자 집단인 것 같지는 않다.
이건 '그냥 같이 좀 쓰게 허락해주자'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퀴어나 트랜스젠더가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그들 개개인이 딱히 '착하고 불쌍한 사람들'일 리는 만무하다. 그들도 소수자로서 나름의 좌절이 쌓이고 피해의식이 있을테고, 그걸 또 다른 집단에 대한 공격성으로 돌린 이들도 개중에는 분명 있겠지. 어쩌면 돈 많고 학벌 좋아서 그걸 나름의 무기로 쓸 수 있는 이들도 있을테고. 적극적인 차별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그런 상대와 엮이는 바람에 집단에 대한 편견이 생긴 케이스도 있을테고.
하지만 탄핵정국이라는 현 상황 하에서 룬썩10 정권과 국혐 종자들에 저항하는 것은 개인의 도덕 차원이 아닌 공공의 정의의 문제다. 응원봉이라는 아이콘이 갖는 대표성을 통해 그 다양한 계층과 입장의 사람들이 한데 묶이는 건, 음... 만약 내가 돌팬이라면 자랑스러울 일 같다.
그래도 우리 팬덤 소속도 아닌 이질적 집단이 우리 응원봉 들고 나오는 게 싫고 무시당하는 것 같다면 어쩔 수 없는데, 광장에서 그런 이들이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 차별적이고 부족주의적인 사고다. 민주주의자라면 그를 인정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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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데에도 비슷한 글을 썼다가 아이돌 팬인 지인이 불쾌해하길래 굳이 자극할 필요도 없겠다 싶어서 그 쪽은 지웠다. 음... 좀 더 이야기를 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기분 상한 상대 입장에서 공격적으로 여겨지지 않게끔 이야기할 재주가 없어서 말이지. 뭐 이걸 계기로 그 분에게 미움 받을지도 모르겠다 싶긴 한데, 만약 그렇다면 유감이고.
탄핵집회지만, 동시에 전장연 집회기도 했다. 원래는 서울대 병원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경찰에 막혀서 혜화 마로니에 공원으로 바뀌었다길래 급히 턴했다.
재작년 새해는, 녹사평에서 이태원 참사 분향소를 지키면서 맞이했었다. 이렇게...
https://garleng.tistory.com/1847
작년 새해는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마감치느라 정신줄을 놓은 상태였으려니 싶고, 올해 새해는 전장연과 함께 맞이했다.
그간 국혐 종자들이 이재명만은 안 된다고 무슨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마냥 줄창 떠들어대는 바람에 나도 평소의 신념을 젖혀두고 다음 대선만은 민주당 후보 찍을까 생각했었는데, 장애인 의제를 두고 이재명이 '그런 식으로 하면 반감만 커진다'고 말하는 것과 주변의 이재명 지지자들이 그만 하라고 하는 영상 보고 확신이 생겼다. 역시 이 나라에서 좌파라면 투표는 소신껏 하고 봐야 해. 이재명 본인도 장애가 있겠다, 뭐 본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노동자와, 장애인과, 여성과, 퀴어와, 트랜스젠더가 굳이 그 입장을 따라줘야 할 이유도 없다.
1시 좀 넘어서 끝나고 현장 정리를 좀 도운 뒤(어린 여자아이가 추워보이길래 꿀물 갖고 있던 걸 건네줬었는데 고맙다고 활짝 웃으며 인사하고 가더라, 귀여웠다) 혼자 남아 가져간 책 읽다가 첫 차 타고 귀가했다. 동네에 걸려 있던 국혐 시의원 현수막 문구가 며칠 전만 해도 혼란을 막겠다는 개드립이었는데 다른 걸로 바뀌어 있더라.
지금 베란다 창 밖으로 날이 밝아오고 있지만, 흐린 날씨라서 해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미하일 바쿠닌은 이렇게 말했었다. "소멸해가는 세계가 뿜어내는 독한 연기가 아직은 하늘을 뒤덮고 있지만 조만간 작열하는 자유의 태양이 그 연기를 거둬낼 것입니다."
이 나라를 살아가는 이들이, 그 태양의 빛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
비록 나는, 빨리 죽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기를 바라는 이런 인간이 되었지만. 그래도.
...라고 보수들은 (니가 뭘 몰라서 그런 거라는 눈으로 은근히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서만 돌아가는 세상 역시도 '공산주의 유토피아'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보수들이 자본주의의 장점이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자유경쟁과 기회의 평등을 확립하고 돈이 더 많은 돈을 벌어다줌으로써 출발선 위치를 바꿔놓는 걸 막으려면 상속세부터 현행 1000% 정도로 올려야 하는데, 막상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하면 다들 공산주의하자는 거냐고 불탈 걸ㅋ
공산주의도 역사 속에서 온갖 현실적 조건과 한계에 따라 변화가 이뤄지며 맑스가 제시했던 근본적인 초기상과는 멀어졌고, 자본주의가 그에 저항하기 위해 수정자본주의로 변화했다. 그리고 냉전이 끝나며 자본은 더 이상 스스로를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됐다. 지금 당장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해선 침묵한 채, 공산주의의 해악만을 끝없이 강조하며 'XX하면 공산주의해서 다 같이 망하자는 거다'라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난 금투세 법안 내다버린 이재명을 그래봤자 보수정당 민주당 정치인으로 취급하는 거고(국혐은 보수가 아니라 사람 취급해선 안 될 쓰레기 집단이며, 이번 내란 과정에서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13년 전, 월가 점령 시위가 한참일 무렵 슬라보예 지젝은 이렇게 말했었다:
"오늘날 무엇이 가능하겠습니까? 언론을 봅시다. 기술과 성(性)의 측면에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입니다. 달을 여행할 수 있고, 유전공학으로 영생을 누릴 수도 있으며, 동물이나 그 무엇과의 섹스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회와 경제 영역을 보죠. 거의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부자들의 세금을 약간 인상하고자 하면 그들은 경쟁력을 잃을 테니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의료보험료를 인상하고자 하면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의 방식이니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영생을 약속하면서 의료보장을 위해선 한 푼도 쓸 수 없다는 세상은 잘못됐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높은 생활수준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생활수준을 원하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공산주의자라면, 그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공공의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에서 공공의 것, 지적 재산에 의해 사유화된 공공의 것, 유전공학의 공공의 것. 이를 위해, 오직 이것만을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크리스마스 특별 콘서트가 있다길래 쓰린 가슴을 끌어안고(으앙 내 사진들...) 거기 나갔다 왔다.
주여, 오늘이 진짜 생신이 아닌 건 알지만 뭐 그래도 대충(...) 축하드립니다. 작년 오늘 이-팔 전쟁 꼬라지 보며 당신께 기도했던 게 생각나네요. 그 전쟁은 아직 안 끝났고,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가는 중입니다. 당신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속세의 일은 인간이 해결해야 하고, 그 전쟁을 끝내는 것도 인간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에서도 일종의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저기 모였던 이들, 싸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실수로 포스팅에 포함되어 있던 당시 찍은 사진들을 지워버렸다. 몇 시간 동안 어떻게든 복구하려고 해봤지만 구글에서 캐시된 웹페이지 보기 기능이 없어져서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
내 투쟁의 기록들이 사라졌다 싶어서 좀 속상하긴 한데... 뭐 불교적으로 생각하자. 모든 것이 空하니....
내가 기억하고 신께서 기억하실테니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겠다. 씻고 나가야지.
어제 광화문 집회를 마치고 집에 와서 한 잔 하고 딴 짓 좀 하다가 새벽 무렵에 자려던 참이었는데, 트위터 쪽을 보니 남태령 쪽에서 분위기가 굉장히 안 좋았다. 아주 굉장히.
대강 간략히 상황을 정리하자면
1)전국 농민총연맹 소속 농민들이 양곡법 관련 문제로 인해 항의 차원에서 집회에 참가하려고 트랙터 17대를 몰고 서울로 올라옴
2)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집회 신고가 되어 있었고, 경기도까지만 해도 경찰들이 협조함
3)그런데 서울로 들어오기 직전, 남태령-사당 구간에서 갑자기 경찰들이 차벽으로 길을 막고 트랙터를 파손함
4)트위터와 인스타 등을 통해 상황이 전파되고 시민들이 모여듦
5)경찰들이 트랙터 행렬 앞쪽 차를 빼더니 우회해서 뒤쪽으로 돌아가 행렬을 앞뒤로 봉쇄하고, 농민들과 시민들이 고립됨
그런 상황에서 아는 사람 몇 명이 현장에 나가 있었다. 그 사람들이 마음에 걸려서 첫 차를 타고 다시 나갔다. 남태령까지 가는 동안 졸리고 피곤하고 술기운도 올라와서, 술은 마시지 말 걸 그랬다고 한 50번 쯤 후회했다-_-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7시 경이었다. 사람이 많아지면서 험악하던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어 있었고, 핫팩이나 커피, 김밥 등을 나눠주고 있었다. 방송 차량도 와 있었고, 다행히 신경 쓰이던 지인들도 다들 무사히 귀가했다길래 머릿수 좀 채우다가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되돌아왔다.
저 잠 좀 자자라는 문구가 깊이 공감됐다. 그리고 술 마시지 말 걸 그랬다고 새삼 또 후회했다.
물품 나눔하는 곳에서 하나 남았던 깔개를 양보해 주신 여성분 감사합니다, 좋은 일 있으시길 바랍니다. 사실은 밤 새고 술까지 마신 상태로 왔더니만 그 때 이미 쓰러질 거 같았어요(...)
사실 남태령 소식 처음 접했을 때 콜택시 부를까 했는데.... 기다리는 시간 가는 시간 하면 그냥 지하철 타고 가는 것과 별 차이도 없겠다 싶어서 관뒀다. 콜비 아낀 걸로 책 사야지. 초여명에서 나온 크툴루의 교단들 읽으면서 지난 2년 반 동안 까인 이성치를 회복하자...
장소는 경복궁. 집회 때문에 광화문 근처에 온 것은 박근혜 탄핵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중간에 오랜만에 이순신 장군님께 인사나 하러 갈까 했는데 경찰이 손피켓 보고는 "저쪽에선 반대집회 중이라서 저쪽에 볼 일 있으면 손피켓은 숨겨서 가라"고 하길래 귀찮아져서 관뒀다...
예술의 전당 앞에서 발견한 피켓. 이명박 때 저런 거 많이 봤어.
고담시티 자경단 연합. 사진 찍어도 되냐고 허락 받았다. 얼굴 안 찍히게 조심.
매번 신세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주노총.
을지로입구역 근처에서 발견한 인간 촛불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급격히 피곤해져서 행진 중간에 열에서 빠져나와 귀가했다. 분위기가 밝고 평화로워서 '역시 MB 때랑은 다르구나' 속 편하게 생각하면서 왔는데... 막상 집에 와서 현황을 살펴보니 어두워진 이후 분위기가 확 안 좋아진 모양이다. 으으... 좀 더 있다 올 걸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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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썩10과 대통령실, 법레기들, 국혐 종자들, 자칭 보수언론들이 그 어떤 쓰레기짓을 하더라도 '난 저런 쓰레기들과 엮이지 말아야겠다' 생각하고 손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짝에 줄 서면 저렇게까지 해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구나!'고 열성적으로 빨아제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줄도 결코 짧지 않을테고 커트라인도 꽤나 앞쪽일텐데... 자신만은 예외일 거라고 생각하는 게 또 사람 마음이지. 이건 막연한 내 느낌이지만, 지난 12월 3일을 기점으로, 한국 정치판에서 적어도 누가 '상종해선 안 될 쓰레기인지 최소한 사람이긴 한지'는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쓰레기를 전부 태워 없애는 건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정죄는, 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처럼 혼탁하고, 현세는 지옥일 것이다. 그 사실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 혼탁함 속에서도 잎을 더럽히지 않는 연꽃이 피는 걸 막지도 못할 것이다.
내가 그 연꽃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당, 민공당, 민정당 거쳐가면서 이 나라의 헤게모니를 반세기 넘게 쥐고 전횡해 온 것들을 증오하는 것이다.
그 세월 동안 거슬리는 상대는 죄다 빨갱이라고 모욕하고 가두고 죽이면서 권력을 쌓아 온 것들을 증오하는 것이다.
미국 지원 받고 국민들 갈아넣어 강대국 반열에 들고 나니 약자 혐오로 권력을 연장하려 드는 것들을 증오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그 권력이 흔들릴 것 같으니 내란 수괴 싸고 돌면서 남탓하는 그 뻔뻔함과 너절함, 야비함을 증오하는 것이다.
시간을 끌다보면 어떻게든 유야무야되고 적당히 잊혀질 거라고 확신하는 그 비열함과 오만함, 천박함을 증오하는 것이다.
법정과 청문회에서 '내가 아무리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도 너희는 나한테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그 한없이 추악한 확신을 증오하는 것이다.
나의 이 증오가, 결코 '정의'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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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2. 14. 윤석열 탄핵 가결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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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룬썩10 개인의 탄핵보다는(그것도 이제 헌재에서 최종 결정이 나야 하는 거긴 한데) 국혐을 위법 집단으로 규정하고 해체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망상 찌끄리던 통진당보다 훨씬 질 나쁘거든. 해체 안 하면 통진당은 만만해서 해체했고 국혐은 아니라서 넘어갔다는 뜻 밖에 안 되거든.
국혐 패거리들은 반세기 넘게 이 나라를 장악해 오면서,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에게 '보수정당의 표준'으로 스스로를 각인시켰다. 물론 국혐을 조진다고 해서 이 나라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국가주의, 전체주의적 근성은 이번에 완전히 끝장내야 한다.
국혐 종자들은, 아프리카의 군벌들이나 중남미 군사독재자들과 비슷한.... 애초에 '보수'나 '우파' 카테고리에 넣어선 안 되고 사람 취급해서도 안 될, 전부 태워 죽여야 할 쓰레기들이다. 하지만 그런 놈들이 너무 오랫동안 '현대 민주공화국의 보수정당'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사람들의 인식이 지나치게 어그러졌다. 예를 들어, 음모론을 남발하는 김어준의 경우. 대체로 사람들은 김어준을 '극좌'로 취급한다. 하지만 김어준이 자본주의의 해체를 주장한 적 있는가? 국가 권력의 소멸을 주장한 적 있는가? '극좌'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 하지만 딴지일보 시절부터 김어준은 (그 방식이 좀 질 낮고 천박할 망정) 개인주의자이며 자유주의자에 가깝고, 그런 주장은 한 적 없다.
이제 곧 21세기도 1/4분기 째고, 한국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수치적, 물질적 성장에 집착하는 촌스런 근대성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원론적으로는 그런 촌스런 근대성조차도 배제할 수 없는 인간사의 일부긴 하다. 역사는 스스로 흐르고, '만인이 추구해야 할 올바른 이데아' 같은 건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국혐을 완전히 조져놔도, 몇 백년 쯤 뒤 과학기술의 발전과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강력한 힘과 리더십에 의한 독재'를 긍정하는 목소리는 다시 나올 것이다. 인간은, 역사는 내내 그러했고 그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결국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에 굴종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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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스 만세. 프로메테우스 만세. 길 스콧 만세.
지난 3일 룬썩10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매일 같이 커다란 폭로와 떡밥이 튀어나오고 온갖 썰과 음모론이 범람하고 있어서... 나도 정신이 온통 그쪽에 쏠려 있는 참이긴 한데, 멘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일상을 회복해야겠다 싶던 참. 좋은 소설을 쓰려면 좋은 인풋이 필요한 법이고, 질 좋은 인풋을 한참 안 했다 싶어서... 전부터 한 번 보려고 했던 호러 영화 <디 이노센츠>와 <더 터닝>을 몰아봤다.
이 두 영화는 고딕 호러의 고전이며 최초로 하우스 호러라는 호러의 서브 장르를 개척한 작품이기도 한 헨리 제임스의 중편 소설 '나사의 회전'이다. 장중하면서도 음산한 대저택에 가정교사로 고용된 주인공이 유령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일련의 괴현상을 접하고 자신이 가르치는 어린 남매를 유령에게서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게 기본적인 시놉시스인데, 원작 소설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작가에게 영감을 준 고전 명작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예의 역사적 의미도 있지만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며 '이 괴현상이 과연 유령의 짓인지 상상력 풍부한 주인공의 망상 내지 환각인지 만약 진짜 유령의 짓이라면 정말로 홀린 것은 누구인지'를 독자가 계속 자문하게끔 만들고,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나름 말이 되는 세련된 서술 방식 때문이었다. 19세기 기준으로 이런 소설은 정말로 드물었다. 1961년에 <디 이노센츠>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고, 플롯이 좀 단순화되었고 밋밋해졌지만 주인공인 미스 기든즈 역을 맡은 배우 데보라 커의 호연과 인상적인 연출로 역시 명작 반열에 들었다(그 대신 호러 씬의 연출이나 공포 수위는 아무래도 요즘 호러 영화보다 훨씬 약하다).
<더 터닝> 역시 나사의 회전을 원작으로 해서 비교적 최근(2020년 작)에 나온 영화인데.... 이건.... 음.............. 원작 소설과 <디 이노센츠>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별개의 호러 영화로 보면 뭐 그렇게까지 나쁜 영화는 아니다. 양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당히 볼 만한 수준은 된다. 하지만 원작 소설과 <디 이노센츠>의 핵심이었던 그 애매모호함- 유령의 존재가 진짜인지 아닌지, 어쩌면 문제의 근원은 망상과 편집증에 빠진 주인공의 강박적인 도덕성과 의무감은 아닌지-이 완전히 사라지고, 악령이 대놓고 살인하는 평범한 영화가 되어 버렸다. 물론 원작 소설의 후광이 크고 <디 이노센츠>도 호러 영화사에 남은 명작이다 보니 감독 입장에서는 최대한 차별화를 하고 싶었을 거라는 건 이해가 되는데, 이런 식으로 원작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포기했다면 그걸 보충할 만한 독보적인 개성이나 미점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없고, 결과적으로 '아예 조진 건 아니지만 애매하게 평타 정도만 치는 그저그런 호러 영화 A'가 되어 버렸다. 평가가 1961년작보다 훨씬 나쁜데는 이유가 있었어...
<그것>에서 리치 토저, 미드 <기묘한 이야기>에서 마이클 윌러 역을 맡은 핀 울프하드의 연기만은 좋다. 61년판에서 마일즈라는 캐릭터는 마치 호색한 성인 남성처럼 주인공에게 징그럽게 들이대는 걸 빼면 대체로 착하고 예의바른 빅토리아 시대 부유층 집안 아들인데 비해 <더 터닝>에서 핀 울프하드가 연기한 마일즈는 여자 가정교사를 은근히 얕보면서 이겨 먹으려 드는 느자구 없는 90년대 청소년 느낌을 잘 살렸다.
넷플릭스 드라마 <블라이 저택의 유령>은 역시 나사의 회전 원작이면서도 꽤 잘 뽑혔다고 들었는데 그건 그것대로 또 로맨스 중심이고 호러 씬이 약하다고 들어서 손이 안 간다. 난 로맨스 안 좋아한다...
새미래민주당 지지자라면서 '이재명 구속이 먼저다, 윤석열 탄핵은 그 다음이다'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갑자기 인터넷 상에서 늘어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우르르 그런 글 쓰는 놈들 최소한 절반은 국혐 쪽 댓글부대라고 본다.
난 이재명을 지지한 적 없고, 앞으로도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이 강성 이미지가 강해서 급진적인 것처럼 보일 뿐 그 역시 근본은 수도권 중산층과 호남 지역을 핵심 지지기반으로 삼는 보수-리버럴 정당 민주당 정치인이다(국혐은 민정당 후신으로서, '보수정당'이 아니라 인두껍 뒤집어 쓴 사람 모양 쓰레기 집단으로 분류해야 한다. 게다가 이제는 룬썩10을 비호 중인 내란 동조 집단이기도 하다). 그가 흙수저 출신 소년공 출신이라고 해서, 노동의제에 더 적극적이라는 법도 없고.
하지만 그는 2년이 넘는 동안 그렇게 집요하게 압수 수색을 당해 왔으면서도, 중대한 범죄 여부를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룬썩10 정권의 검사 집단에 대한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검사들도 '작은 꼬투리 하나라도 있으면 억까하겠다'고 마음 먹고 달려 들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직도 결정적인 게 나오지 않았다면 그가 받는 혐의 대부분은 근거가 없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재명이 극도로 교활하고 철저하고 사악해서 증거를 전부 없앴고 주요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은 전부 자살시켰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재명이 그렇게 할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지난 대선에서 지지 않았을 거다.
여하간... 11월까지를 기준으로 봤을 때, 국혐이 제시한 예산안을 민주당이 거부하고 국혐이 임명한 관료를 민주당이 막는 걸 반복하는 한편, 민주당은 이재명을 보호하고 국혐은 이재명이 범죄자라고 공세를 펼치고 여타 군소 야당은 그에 대해 별로 말을 얹지 않는 형국이었다. 예외적으로 새미래민주당은 그 수장인 이낙연부터가 이재명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지지층 역시 서로 수박이니 찢빠니 하며 격하게 대립해왔다. 나야 뭐 좌파로서 둘 다 지지하지 않고(이낙연을 더 싫어하긴 했다) 떨어져서 보고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얼마나 큰지는 알 만할 정도였다.
하지만 쿠데타 시도 이후 특히 트위터 쪽에서 이낙연 프사 달고 '이재명 구속 윤석열 탄핵' 운운하는 계정들이 확 늘어났다. 내가 그런 놈들 절반은 국혐 쪽 댓글부대라고 보는 이유는... 12월 7일 시점에서 국혐은 탄핵 거부를 당론으로 확고히 했다탄핵 찬성에 투표한 건 안철수 김예지 김상욱 셋 뿐이었다). 이 시점에서 국혐은 완전한 내란 동조집단이 되었고 어떤 식으로건 끝까지 갈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다. 조금이라도 우선권을 뺏어 오려면 가장 큰 적인 민주당의 수장인 이재명에게 최대한 똥을 뿌릴 수밖에 없다. 12월 8일 시점에서 윤석열은 2선으로 물러나고 한동훈과 한덕수가 공동으로 국정 운영을 한다느니 하고 있지만(물론 이것도 되먹잖은 소리다. 국민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뽑은 거고, 대통령은 국민이 뽑지 않은 총리나 당대표 등에게 임의로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위임할 수 없다)... 만약 윤석열이 스스로 퇴진을 하건 탄핵당해 물러나건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인 이재명의 이미지를 최대한 조져야만 한다.
원내 0석 따리인 새미래 입장에서 지금도 여전히 이재명을 조지고 싶다면 공통의 필요를 가진 국혐과 손잡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0석 따리인 새미래 입장에서는 국혐에게 제시할 만한 조건이라곤 국혐 2중대로 기어들어가서 탄핵 거부를 돕는 것 뿐이다. 자신들 딴에는 국혐을 이용하는 것 뿐이며 이재명을 조지고 나면 탄핵 대오에 합류할 거라고 주장하겠지만 0석 따리 새미래와 일단은 집권 여당으로서의 프리미엄이 있는 국혐의 파워 차이는 압도적이고, 어느 쪽이 이용당할지는 뻔하다. 이재명 구속과 윤석열 탄핵은 양립이 불가능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 결과적으로 반민주 반국가 반란세력 국혐 편에 서겠다는 뜻이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자기 이름 내건 지지자라는 작자들이 저 지랄을 하고 있는 데도 '자제해달라' 한 마디 안 하는 이낙연 수준도 알 만하다ㅋ
ps=아마 그럴 일 없을 것 같지만, 진심으로 선의와 정의감에 근거해서 '이재명 구속이 윤석열 탄핵보다 우선하거나 둘이 등가'라고 믿는 분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재명이 정말로 나라를 망칠 대악인일 가능성? 전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입니다. 그에 비해 윤석열은 구체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실제로 반대 세력에 대한 '처단'을 말하며, 반헌법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의원들을 겁박하고 체포하려 했고, 국민의 힘은 절대다수가 그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건 이미 일어났고, 진행 중입니다. 어느 쪽 위험을 더 크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망치는 걸 막아야겠다면 이낙연이 되었건 누가 되었건 간에 그보다 더 나은 후보를 제시하고 그가 어느 면에서 더 훌륭한지 다른 국민들을 설득해, 다음 대선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면 됩니다. 하지만 윤석열과 국민의 힘을 방치한다면 다음 대선을 치를 일 자체가 없어질 겁니다."
집에서 국회의사당까지는 거리가 제법 된다. 좀 이른 시간에 나갔는데도 지하철이 빽빽하길래 '아무리 토요일이어도 붐빌 시간대가 아닌데' '이 사람들이 전부 집회 나가는 건 아닐 거 아냐'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전. 전부 집회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국회의사당역 무정차 한다길래 여의나루역에서 내렸는데 나 포함해서 한꺼번에 다들 우르르 내리더라.
역사 내에서부터 벌써 '윤석열은' '퇴진하라' 구호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옆에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은 찡그리며 시끄럽다고 불평했지만 뭐... 사안이 사안이니 좀 참으쇼.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럽고 불편해야 정상이니.
역에 내리자마자 보인 손팻말. 옆에 지나가던 여자분이 통화하며 "엄마 오늘 생신인 건 아는데 탄핵이 더 급해"라고 하시는 걸 곁귀로 듣고 웃음 꾹 참았다.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민중의 소리 기사를 보니 다른 곳에 모인 인원까지 합치면 100만 넘긴 듯.
분위기도 평화롭겠다... 나름 준비를 했는데도 어두워지자 너무 추워서 좀 일찍 들어오기로 했다, 다음엔 더 두꺼운 거 입고 나가야지(....)
현장에서 줏은 한겨레 특별호에 실린 기사. "남한에 특이 동향을 만들어놓고 북한의 특이 동향이 없다는 군 입장문이 특이했다" 이거 기자 딴에는 나름 노린 드립인 거 같은데 웃어버렸다. 좀 분하다...
'소설 안 써져' '통장에 잔고가 얼마 안 남았는데' '인간관계 싫어' '돈이 너무 없는데 급한대로 알바라도 할까' '그래도 사람 상대하는 일은 싫은데' '사실 제일 좋은 건 빨리 죽는 거긴 한데' 등의 생각만을 끝없이 머릿속에서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지난 3일 밤 룬썩10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로 그런 생각들이 싹 사라졌다. 특히 민주당 안귀령 대변인이 총 앞에 나서는 걸 본 이후로는 머릿속이 맑다.
국혐은 보수정당이 아니라 사람 취급하지 말아야 할 쓰레기들답게 룬썩10 방탄을 선언했다. 파악된 대로라면 계엄이 진행됐을 경우 국혐 내에서도 반윤 성향 의원들은 다 같이 좆됐을 텐데 뭐... 곧 죽어도 자신들의 권력은 놓지 못하는 그 짝 패거리답다ㅋ
트위터를 비롯한 인터넷 상에서는 계속 2차 계엄 가능성이 언급되는 중이고 민주당은 이걸 단순한 계엄이 아니라 친위 쿠데타로 규정하고 저지를 위해 총동원령을 내렸으며 다른 야당들도 각자 항전 태세를 갖췄다. 며칠 전부터 국회의사당 주변은 집회 인파로 가득하다. 박근혜 탄핵시위 이후 오랜만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룬썩10 본인은 감옥에서 죽어야 하며, 이번 사태의 유력한 발단인 명태균, 계엄 사령관 박안수, 국방부 장관 김용현, 기타 등등도 마찬가지고, 그 김에 국혐과 그 언저리 종자들도 전부 반란 세력으로 규정하고 족치지 않으면 이 나라가 돌이킬 수 없이 뒤틀릴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동시에, 전부 족치는 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난 이번에도 역시, 무수히 익명화된 개개인들의 악의 없는 비겁함과 무책임함이 어떤 파멸적인 결과를 낳는지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21세기 초, 전세계가 그렇고 그것은 이미 일종의 시대정신이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산다는 것이 그에 굴복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난 오늘 국회의사당으로 간다.
https://v.daum.net/v/20241202171810183
"마개를 열고 구멍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작년에 '이번에는 뭔가 되겠다' 싶어 열심히 쓰던 소설 하나가 룬썩10 정권의 문화계 예산 삭감 때문에 계약이 꼬이고, 올 여름 무렵 마음 다잡고 새로 쓰던 소설 하나도 결과가 안 좋아서... 그 후 내내 무기력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나도 마개를 다시 한 번 열어볼까 생각 중이다.
난 좌파로서, 지금도 여전히 직접 일해서 버는 것이 돈으로 돈을 버는 것보다 가치 있다고 믿는다.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의 격차가 커질수록 이미 쌓아두고 세습해온 자본이 많은 부유층만이 더욱 큰 이익을 보고 빈부격차는 끝없이 커질 것이다. 똑같이 주식이나 코인에 투자를 해도 가난한 사람이 1을 버는 동안 부유층은 100을 벌 테고, 거기에 세금조차 물리지 않는다면 그 격차는 더욱 더 커질 것이다. 세금 내기 싫어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테고.
자본주의의 극복을 꿈꾸는 좌파로서 나의 그러한 꿈이나 바람 같은 것과는 무관히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체제를 이미 바꿀 수 없고 바꾸고 싶지도 않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 안에서의 부와 성공을 원한다. 내 쪽이 세상이라는 기계에 맞지 않는 나사인 거다. 그런 건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둔감해질 때도 됐는데. 그런 거 가지고 새삼 고민하지 않을 때도 됐는데. 나도 젊은 나이가 아닌데. 가끔 그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숨이 막혀 온다.
최근 약간의 현실도피를 겸해서 게임 하나를 잡았다. 그 게임 속 주인공들은 세상을 無로 되돌리려는 암흑 마도사를 물리치고, 지수화풍을 관장하는 4개의 크리스탈을 복구해 세상을 구했다.
창 밖으로 해가 밝는다. 엔딩을 본 모니터 앞의 나 자신은, 또 그저 견뎌야 할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이오리 준페이는 눈을 떴다. 익숙한 기숙사의 자기 방 천정이 희미하게 보였다. 코로마루를 뒤로 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처음 이 꿈을 꿨을 때는 아침까지 침대 속에서 웅크려서 눈물흘렸었다. 켄은 마코토의 꿈을 꿀 때마다 즐겁다가도 깨어날 때마다 슬퍼진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자신은 꿈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그저 둔중한 고통이 가슴을 짓누르는 걸 느끼며 스스로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끝없이 되새길 뿐이었다. 그럭저럭 학교를 다니면서도, 가끔 치도리의 면회를 가서 웃으며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조차도 그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준페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아무렇게나 던져 둔 옷가지, 잡지, 게임기, 기타 잡동사니들이 발에 채였지만 아직도 꿈 속에 있는 것처럼 의식이 뿌옇고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마치, 정처 없이 밤거리를 헤매다가 들른 편의점에서 처음 섀도타임에 빠져 들었던 그 날처럼. 계단에 발을 딛었다. 여자들 방이 있는 3층을 지나, 작전실이 있는 4층을 지나, 옥상으로 나갔다.
기숙사 옥상에서 재배하던 텃밭 옆에는 모종삽과 장갑, 씨앗 주머니, 물뿌리개 등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마코토가 죽은 그 날 이후로, 아무도 돌보지 않은 것이다. 마코토와 함께 돌봤을 때 "다음에 보자 채소들아, 한가할 때 또 얼굴 비칠께"라고 콧노래를 부르며 채소들에게 말을 걸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옥상 난간을 짚고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기숙사 앞 도로에는 차들이 오가고, 도로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 직원이 나와서 지루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골목 모퉁이에서 취객이 벽에 기대어 토하고 있었다. 노숙자 하나가 신문지를 휘감고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있었다. 도로 저 만치에서 젊은 커플이 소리지르며 싸우는 게 보였다. 그걸 보면서, 불현듯 이오리 준페이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화내고, 울고, 먹고, 자고 있었다. 지구 상의 50억 명이 넘는 그 숱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오늘도 무심하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올 죽음을 억지로 외면하면서.
우리는 닉스와 싸워 이겼고 세상은 안전해졌다. 사람들 모두가 아무 것도 변한 것 없이, 평소대로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세상은 이제 괜찮은 것 같았다. 비록 여전히 어딘가 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있지만 아무튼....
남겨진 우리는 괜찮지 않아, 마코토. 전혀.
밤 12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섀도타임은 오지 않는다. 대신 탁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는가 싶더니 이내 빗발이 굵어졌다. 그 비를 맞으면서 준페이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얼굴에 넘쳐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귓전에 메아리치는 것이 빗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빗줄기와 더불어 시간이 조용히, 느리게, 결코 멈추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고 흘렀다. 모든 것을 평등한 종말로 인도하는 그 시간 속에서, 미래의 희망은 그 누구도 갖고 있지 못했다.
죽음을 맹목적으로 두려워하고 피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에 이끌리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없는 본성. 그 본성에 새겨진 필연적인 나약함과 비겁함, 무책임함이 모든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을 하나로 잇는 마음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어둡고 거대한 '악의'의 태풍이 되었다. 그 태풍의 눈 속에서, '그것'이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웃고 있다.
'그것'이 포효한다.
'그것'이 춤을 춘다.
'그것'이 오고 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 속에서, 마치 환상처럼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푸른 나비 하나가 기숙사 옥상에 엎드려 통곡하는 준페이의 머리 위를 잠시 맴돌다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러나 준페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후의 이야기는, 에피소드 아이기스로 이어집니다
밤하늘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유독한 녹황색으로 물들어서 일렁거리고, 그 하늘 가운데에서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색의 만월이 떠올라 세상을 비춘다. 섀도타임. 원래는 있을 수 없는, 매일 밤 자정이 되는 순간 펼쳐지는 13번째 시간. 타로 카드의 메이저 아르카나 13번, '죽음'에 대응하는- '현실'에 속하지 않는 초현실의 시간. 모든 전자기기가 작동을 멈추고, 인간이건 짐승이건 할 것 없이 모든 생명체가 검은 관으로 변해 침묵하는 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세상은 현실감을 잃어 버리고서 원래 모습의 기괴하고 음울한 반영으로 변한다. 오직 달빛만이 음산하게 내리쬐는 거리 저 편에서 총성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인다. 우리는 그 악몽 같은 거리를 내달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광경을 목격한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 가운데에서, 그 강력하던 아이기스가 반파되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아이기스를 내려다 보는, '그'의 모습을.
"섀도 반응... 료지 군에게서 느껴져요!"
"그럴 리가! 료지가 섀도라니?"
경악하는 후카와 유카리. 그리고, '그'의 단아한 입술이 열린다.
"정확히는 달라. 나는 섀도보다 더 위의 존재. 12개의 아르카나가 전부 합쳐져서 태어나는, '선고자야."
모치즈키 료지. 갑작스럽게 전학을 온 이후 고작 1달 남짓한 시간 동안 친구로 지냈던 소년. 늘 쾌활하고, 가볍고, 여자를 밝히고, 그러면서도 가끔은 사려깊고 따뜻한 면모를 보여주던 소년. 그 순간 준페이는 속으로 탄식한다.
또, 이 꿈을 꾸는구나.
료지의 모습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검은 망토를 두른 해골을 닮은 기괴한 형체로 변한다. 우리는 각자 페르소나를 소환해 덤벼들지만, 료지는 엄청난 힘을 발휘해 혼자서 우리 모두를 순식간에 제압하고는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문라이트 브릿지를 부숴버린다. 발 바로 앞에서 무너져 내린 문라이트 브릿지를 보며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자기 자신을, 준페이는 마치 타인의 몸 속에 갇혀 그의 말과 행동, 감정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본다. 요사하게 빛나는 만월을 배경으로 공중에 떠 있는 그의 나직한 음성이, 박살난 콘크리트와 철근 덩어리가 도쿄만으로 떨어지는 요란한 소음을 뚫고 우리들 모두의 뇌리로 파고든다.
"안심해, 지금 너희를 죽일 생각은 없어. 그저 알아두길 바랐어. 나라는 존재가 곧 멸망의 약속이며, 멸망 그 자체에 맞서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걸."
꿈 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하는 그 날의 기억, 그리고 모든 것이 늘 그 때와 같다. 료지는 담담한 태도로 우리에게 고한다. 태고에 이 별에 도착해 모든 생명에 '죽음'의 운명을 선사한 존재이며 모든 섀도들의 어머니인 닉스에 대한 것, 닉스가 눈을 뜨면 이 별의 모든 생명체가 섀도 피플이 되어 자기보존 본능을 잃어 버리고 죽을 거라는 것, 닉스는 모든 생명의 끝이라는 개념 그 자체이며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닉스의 도래를 알리는 존재라는 것. 이 세계는 다음 봄을 보지 못할 테지만, 선택지는 줄 수 있다는 것. 순간 그의 무표정이 가면처럼 벗겨지고, 형언할 수 없이 엄청난 슬픔과 고뇌, 그리고 연민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그 선택지를 제시한다. 선고자인 자신을 죽이고 섀도타임과 섀도, 페르소나, 우리의 지난 싸움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다가 조용히 종말을 맞이하느냐 아니면 자신을 죽이지 않고 공포와 무력감에 떨다가 고통스럽게 종말을 맞이하느냐.
너무 따라잡기 힘든 이야기라고 키리조 선배가 보기 드물게 당황한다. 유카리는 덜덜 떨면서도 그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 따위 믿을 수 없다고 외친다. 코로마루가 등의 털을 세우고 거칠게 으르렁거린다. 후카는 눈물흘리며 외면한다. 켄은 료지에게 창을 겨누지만 그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린다. 사나다 선배가 증거를 보여보라고 이를 악물고 따진다. 그러나 료지는 슬픈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 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럼, 닉스가 강림했을 때의 미래를 약간 너희에게 보여줄게."
....
......
........
"여, 좀 잡힙니까 어르신?"
한 노인이 강둑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낚시를 하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중년 남자였다.
"그냥저냥허지... 그나저나 자주 보이는구만 자네? 회사는 어쩌고?"
"사실은 얼마 전에 회사에서 잘렸거든요. 그 놈의 무기력증 때문에 일감이 줄어들어서... 마누라에겐 도저히 솔직히 말할 엄두가 안 나서, 여기서 시간이나 때울까 해서요."
"거 안 됐구만. 와서 앉게."
노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중년 남자는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줬다.
"요즘 세상 분위기가 영 흉흉하지?"
"망할 무기력증... 이유는 모르겠고, 인터넷에선 믿기 힘든 소문은 넘치고, 이상한 사이비종교도 요즘 유행하는 모양이고.... 세상이 망하기라도 하려는 건가 모르겠어요."
"아직 젊은 친구가, 재수 없는 소리 말게."
노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며 강둑에 심어진 가로수들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요즘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해. 자네, 저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아나?"
"어... 나무는 잘 모르지만, 소나무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왜 저렇게 시들시들하죠? 소나무는 사철나무잖아요."
"그래, 보다시피 잎이 전부 갈색으로 죽어있어. 몇 달 전만 해도 녹색이었는데."
"매연 때문이 아니겠어요?"
"바보 같은 소리 말게. 내가 여기로 낚시하러 나온 게 몇 년 째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 응?"
단호한 태도로 말하던 노인의 발 앞에 죽은 새 한 마리가 툭 떨어졌다.
"뭐야, 재수 없게..."
중년 남자는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그 목소리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저 만치서 날아가던 새 한 마리가 비틀거린다 싶더니, 공중에서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는 그대로 지면으로 추락하는 게 보였다. 뒤이어, 저만치에서 어슬렁대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저, 저거!"
노인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툭 떨어졌다. 노인은 경악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남자의 뒤쪽을 가리켰다. 중년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기겁을 하며 주저앉았다. 강 위에 죽은 물고기 떼들이 배를 뒤집고 떠올라 있었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 순간, 노인이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크흑...?"
"어, 어르신?"
"크억!"
노인은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긴급 속보입니다, 시민 여러분. 전 세계적으로 동식물들의 갑작스런 죽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화분의 꽃부터 시작해서, 개나 고양이 등의 반려동물, 농가의 가축들, 어린이, 노인을 거쳐 최근 성인들까지..."
"아직까지 이 연쇄적인 대규모 사망의 원인은 불명입니다. 밀과 벼, 보리 등의 필수작물들이 전부 말라죽어, 유래 없는 세계적 식량난이 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대국민 담화 도중 총리가 쓰러지면서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총리는 즉각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예후가 썩 좋지 않다고..."
"의사들마저 연이어 갑작스레 죽음을..."
"일종의 생물학 테러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UN 총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은 서로를 배후로 의심하면서 고성을...."
"패닉에 빠진 시민들이 폭도가 되어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대규모 인원이 세계 각지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닉스'라는 알 수 없는 이름을 외치면서..."
"자유공영당 소속 시도 마사요시 의원은 자위대를 출동시켜 일본의 강함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
"현 시간 부로 긴급조치가 발령되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이 방송을 보고 계시는 모든 시민 여러분들은 출입을 자제하고....."
"전기와 가스, 수도 공급 여부가 불확실... 어쩌면 이것이 최후의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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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빛이 꺼졌다.
도쿄, 서울, 샌프란시스코, 상하이, 모스크바, 델리, 파리, 런던... 세계 유수의 대도시들이 하나 둘 어둠에 잠겨갔다. 중간 중간 땅 위에서, 바다 위에서 큰 섬광이 번뜩였다. 핵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유도 목적도 없는 거대한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고 그렇게 미친 사람들은 그 공포를 떠넘길 상대를 필요로 했다. 마치 얇은 종이 위에 떨어뜨린 먹물 방울이 퍼져 나가듯 어둠이 세상을 잠식했다. 그 어둠은 결코 멈추지 않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문명의 빛, 생명의 빛을 하나씩 확실히 꺼뜨려갔다. 결국 지구 전체가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막막한 우주의 바다를 떠도는 유령선처럼. 결코 걷히지 않을 그 영원한 어둠 위로, 오직 달만이 무서우면서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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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실로 돌아온다. 모두가 창백한 안색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런 우리를 내려다 보면서, 그는 더 없이 슬프면서도 다정한 어조로 덧붙인다.
"아이기스가 나를 마코토의 내면에 봉인했었기에 그의 영향을 받아서, 난 인간의 감정이 생겼어. 너희를,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어 버렸고.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진심으로 부탁할께, 날 죽이고 모든 걸 잊어버려줘. 그렇게 하면 최소한 그런 고통은 없을 테니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끝날 거야."
풍경이 바뀐다. 이번엔 기숙사 로비다. 키리조 선배는 그간 조사한 이쿠츠키 슈지의 일지 속에서 료지, 아니 선고자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걸 뒷받침할 단서들을 발견했다고 이야기해준다. 죽음에 매료되어 있던 조부 키리조 코우에츠가 섀도들을 모은 것 역시 닉스를 불러들이기 위한 시도였으며 마코토가 월광관 고등학교로 전학을 와서 기숙사로 들어온 것도 이쿠츠키가 손을 쓴 걸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그리고 나 자신은...
"따지고 보면 전부 네 탓이잖아! 그런 걸 속에 품고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낸 거냐?"
이 꿈을 꿀 때마다 그 날, 그 순간을 반복한다. 마코토의 멱살을 잡고 비명을 지르듯 절망과 공포를 토해낸다. 패닉으로 갈라진 자신의 목소리를 마치 남의 목소리처럼 듣는다. 마코토는 상처받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슬픔, 고통, 두려움, 고독감, 죄책감, 의무감, 온갖 감정이 깃들어 흔들리는 그 눈동자에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이 비친다. 아니야, 마코토.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네가 그걸 키워낸 거나 다름 없잖아!"
몇 번이나 이 꿈을 꾸고, 몇 번이나 이걸 반복해서 겪는다.
"책임지고 해결해, 넌 특별하잖아!"
난 죽는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를 외면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게 그렇게 말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
마코토가 슬프게 중얼거린다. 이 모든 것이 이 날 일어났던 일이다. 결국 마코토는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닉스를 막아낸 뒤, 마치 벚꽃이 지듯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 날 그에게 한 말과 행동을... 되돌리지 못한다. 꿈 속에서조차.
"아, 아얏! 아파라!"
"하여간, 준페이 형은 그 나이 먹고 왜 그렇게 엄살이 심해요?"
"사나다 선배는 복싱부 에이스거든! 진심으로 때린 게 아니어도 웃어 넘길 수 있는 데미지가 아니긴 마찬가지거든! 만성용왕권에 맞으면 뼈와 살이 분리되지만, 붕권도 뼛속까지 아픈 정도는 되거든!"
"타르타로스에서 싸우던 때에는 섀도에게도 여러 번 얻어맞았잖아요. 적당히 좀 해요."
켄은 준페이의 볼에 반창고를 붙여 주면서 투덜거렸다.
"이빨 흔들리는 데는 없죠? 연고를 발랐으니 곧 나을 거에요, 며칠 동안 붓기야 하겠지만. 입 안이 터진 건 알보칠에 물 좀 섞어서 머금고 있으면..."
"아, 안돼 아마다 소년! 사람은 그런 거 머금으면 죽어!"
켄은 한심하다는 심정을 굳이 숨기지 않는 눈으로 호들갑을 떠는 준페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준페이는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근데 켄, 어쩌다 구급약 같은 걸 방에 챙겨두고 있는 거냐? 보통 초딩 방에 있을 물건은 아니잖아?"
"저는 특별과외활동부에 들어오기 전부터 통신교육으로 창술을 단련했거든요. 어머니의 일 때문에."
준페이는 침묵했다.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 아라가키 신지로. 전 월광관 고등학교 재학생. 사나다 아키히코와는 같은 고아원 출신의 친구로, 키리조 미츠루와 더불어 셋은 특별과외활동부의 창설 멤버였다. 그러나 섀도타임 도중 섀도가 민가에서 날뛰었고, 그와 싸우던 도중 신지로의 페르소나 카스토르가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는 바람에 상징화가 돼지 않은 채 섀도타임에 휘말린 켄의 어머니가 살해당했다. 죄책감을 느낀 신지로는 도망치듯 특과부 활동을 관두고 학교도 휴학했다. 그리고 켄은 고아가 됐고, 친척 집에 얹혀 살며 월광관 초등부에 다니다가 페르소나 구사 재능이 있다는 걸 파악한 이사장의 눈에 띄어 기숙사에 들어왔다. 아직 어린 켄이 페르소나 구사 재능이 있었던 건 아마도 복수라는 명확한 삶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전에 미츠루가 추측한 적 있었다.
"반드시 어머니의 원수를 찾아내서 죽이고, 그 뒤엔 저도 죽을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필사적으로 단련했고... 그러다 보니 손바닥이 벗겨진다거나 해서 다치는 일도 가끔 있었거든요."
"......"
켄의 눈은 소년답지 않게 어둡고 탁했다. 준페이는 그 눈을 바라보며 가슴 한 구석이 싸해지는 걸 느꼈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라서.... 감당을 하지 못하겠어.
그 때 톡톡하고 뭔가 두들기는 소리와 부스럭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준페이는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의 케이지 안에서 통통한 갈색 햄스터가 뒷발로 일어나 뭔가 보채듯 작은 앞발로 창살을 두들기고 있었다. 켄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야식을 안 챙겨줬네요. 저 녀석, 해바라기씨를 좋아하거든요."
몸을 일으킨 켄은 책상 서랍에서 해바라기씨가 든 캔을 꺼내어, 케이지 위쪽을 열고는 몇 알을 넣어줬다. 햄스터는 눈을 빛내며 그걸 갉아먹기 시작했다.
"오오, 햄스터를 키우고 있었구나. 다행히 주인을 닮지 않아서 귀여운데."
"귀여워보이고 싶지도 않거든요!"
켄은 볼을 부풀렸다. '떼렛떼떼! 이오리 준페이는 화제를 돌리는데 성공했다!' 준페이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안도했다.
"이름이 뭐야?"
"햄버그에요."
"맛있어 보이는 이름이네 거. 아, 그렇다고 잡아먹고 싶다는 뜻은 아니고."
"마코토 형도 똑같은 말을 했었어요."
아. 웃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진다. 켄은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해바라기 씨를 갉는데 열중하는 햄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검은 눈동자에는 어떤 기쁨이나 즐거움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만일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 대신 햄버그를 맡아 키워달라고 마코토 형에게 조른 적 있었어요. 결국 저는 살아남았고, 햄버그도 건강한데... 이젠 마코토 형이 없네요."
"...."
작게, 거의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가끔 마코토 형 꿈을 꿔요. 그 꿈 속에서, 저는 마코토 형과 같이 보낸 시간을 반복하고 있어요. 같이 라멘집에 갔던 일, 영화축제에 갔던 일, 아라가키 씨가 죽은 이후 옆에 있어줬던 일, 기숙사 옥상에서 특훈 상대가 되어줬던 일... 준페이 형도 기억나죠?"
"아아, 그 때. 마지막에는 결국 네가 녀석에게 한 방 먹이는데 성공했었지."
"솔직히, 마코토 형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즐거우면서도 내내 마음 속에 응어리가 있었어요. 아라가키 씨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난 복수를 해야 하니 이런 걸 즐겨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를 지키고 죽은 후에도 감정이 복잡했었죠. 하지만 그 꿈 속에서는 정말로 행복해요. 그리고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알게 되는 거에요. 마코토 형은 이제 죽었고, 더 이상 없다는 걸. 잠에서 깰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차라리 그런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간절하게. 엄마가 죽었을 때 한참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도, 그 꿈 속에서는 즐겁고 기쁘다는 걸... 도저히 부정하지 못하겠어요."
"그렇구나....."
"저도 사나다 형이 요즘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하지만 역시 저도 좀 이상해 보이죠?"
"이상하지 않아, 켄. 다들 같은 기분이니까. 키리조 선배도, 유카리도, 후카도. 물론 나도. 그 날 이후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이기스도, 가끔 기숙사를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는 코로마루도 그렇겠지."
"엄마가 죽었을 때 어른들은 다들 그렇게 말했어요, 어찌 됐건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아마도 그 말이 맞을 거에요.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도저히 그 맞는 말대로 하지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아라가키 씨가 저 자신을 위해서 살라는 유언을 남긴 것 옆에서 들었었죠? 1월 31일 그 날, 두렵지만 그래도 닉스와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심하고 타르타로스로 가기 직전 저는 아라가키 씨와 찍었던 사진 앞에서 기도했어요. 이것은 죽은 아라가키 씨의 영혼을 위한 싸움인 동시에, 살아 있는 저 자신을 위한 싸움이라고. 그러니까 함께 해달라고. 하지만 제게 용기를 준 마코토 형까지 죽은 지금 저는 삶도 죽음도,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준페이는 이를 악물었다. 삶과 죽음이 같을 리가 없다. 같아선 안 되는 거다. 하지만 도저히 켄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준페이 형. 만일 아라가키 씨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저를 보면 화를 낼까요?"
"글쎄다... 나는 아라가키 선배가 아니니까. 강하고 멋지고 남자다운 선배라고 생각했고 죽었을 때도 무척 슬펐지만 진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준페이는 잠시 신지로의 생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깊이 눌러 쓴 비니 아래 빛나는 형형한 눈. 낮은 목소리. 언제나 입고 있던 겨울용 코트. 그리고 아주 가끔씩 볼 수 있던, 능숙한 솜씨로 국자를 휘젓던 모습.
"요리하는 걸로 봐서 겉보기보다 섬세한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마코토 녀석과 나름 인연을 맺은 모양이니 우리와 똑같이 슬퍼했을지도 모르지. 솔직히 그에 대해선 도저히 뭐라고 말 못해주겠다야, 하지만 말이야."
준페이는 아마다의 어깨를 두들겼다.
"나는 화내고 싶지 않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준페이 형."
켄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은 한참 우두커니 서 있었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
켄의 방을 나선 준페이는 문득 자신이 여자들이 지내는 3층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이 혼탁했다. 어른이 되어도 술은 절대 입에 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아마도 술에 잔뜩 취하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계단 옆 자판기와 의자가 놓여 있는 휴게장소를 지나서,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아이기스의 방 앞이었다.
"아이기스, 있어? 자는 중이야?"
겉모습은 금발 벽안의 미소녀로 보이지만, 그녀의 정체는 야쿠시마에 소재한 키리조 그룹 산하 비밀 연구소에서 제작된 대 섀도 특별 제압병기 7식. 잠을 잘 필요가 없다. 인간이 잠을 자면서 피로를 회복하고 기억을 정리하는 것처럼, 절전 모드에 들어가서 회로를 식히고 기판을 세척하고 데이터를 정리할 뿐이며 그 상태에서도 주변 상황을 알 수 있다. 준페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기계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아이기스는 방에 틀어박혀서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달라질 리도 없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을 계속했다.
"요즘 들어서, 다들 이상해. 슬픈 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뭔가... 너무 이상해 모두들. 그나마 후카는 슬픈 와중에도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 같지만 말야. 유카리는 이성적인 척하지만 사실 무리하고 있어. 키리조 선배는 한 술 더 떠서 부서지기 직전 같아 보이고. 사나다 선배는 마음을 닫아 버렸고, 켄도 자포자기한 것 같더라. 나도 갈피를 잡지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아무 이야기라도 하고 싶어서. 아이기스, 넌 어때? 억지로 나올 필요는 없어. 그럴 때도 있는 거겠지. 그냥, 목소리만이라도 들려주면 안 될까?"
잠시 대답을 기다렸지만, 역시나 문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면서 문에 기대어 복도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것조차 싫다면, 내 이야기라도 들어줄래? 엄청 창피하지만, 솔직히 말할께. 아이기스, 난 말야, 처음 페르소나 능력에 각성하고 남 몰래 섀도와 싸워 사람들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슈퍼 히어로가 된 것 같아서 엄청 들떴어. 마침 내 페르소나 헤르메스는 생긴 것도 멋있었고, 화염을 다뤘고, 아, 만화나 게임 주인공들은 불 속성인 경우가 많거든. 내가 적성을 갖고 있던 무기도 마침 그런 주인공들이 자주 사용하는 양손검이었고. 검술 같은 건 모르는 나로선 야구 배트마냥 힘껏 휘두를 뿐이었지만. 크흠, 말하자면 뽕이 엄청나게 찼단 말이지 그게. 하지만 마코토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고는 녀석을 질투하기도 했고, 페르소나 능력을 빼면 내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어. 그런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준페이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다들 같이 어둡고 위험한 타르타로스를 오르면서 싸우던 시절이... 사신 타입이라고 했던가, 몸에 사슬을 감고 쌍권총 같은 걸 든 그 더럽게 강하던 섀도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내가 레벨업해가고 있다는 걸 느끼던 그 시간들이 그리워. 그 공포와 고통마저도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의미기도 했으니까."
이 시작도 끝도 없는 무력감과 폐색감으로 가득 찬 현재와는 달리.
그 때였다.
"유감이지만, 그녀는 듣지 못하는 것 같군. 관절 가동음도 들리지 않고 오일 냄새도 나지 않는 걸로 봐서, 아예 스스로 전원을 내려버린 모양이야."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옆에 흰 알비노 시바견이 다가와 있었다. 코로마루는 작게 재채기를 하더니 뒷발을 들어 귀를 긁었다. 준페이는 그걸 보며 멍하니 눈을 껌벅거렸다. 방금, 코로마루가 말을 한 게 맞나? 어, 혹시 내 망상인가? 놀랐지만 동시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마루는 도저히 보통 개라고 생각되지 않는 수준의 지혜와 판단력을 갖고 있다. 애초에 페르소나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평범한 동물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자아의식이 있다는 의미다. 아이기스는 코로마루의 '말'을 자주 통역해주곤 했고, 유카리는 코로마루가 너보다 더 똑똑할 거라고 놀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코로마루는 준페이의 놀라움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다가와서 몸을 비볐다.
"하지만 나는 들었다. 나라도 괜찮다면, 잠시 어울려주지."
"어... 고마워 코로마루... 씨?"
어색하게 대답하자 코로마루는 크게 하품을 했다.
"치워라, 그냥 코로마루로 충분해."
코로 준페이의 어깨를 쿡 밀었다. 준페이는 손을 들어 코로마루의 등을 긁었다.
"시원하군. 그 녀석이 긁어주던 것보단 못하지만."
"...."
"옆구리도 좀 긁어봐라."
코로마루는 준페이 옆에 발라당 드러누워 헥헥거렸다. 준페이는 코로마루의 흰 털을 쓰다듬으며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어, 음.... 코로마루, 오늘 하루 동안 후카부터 해서 켄까지 모두를 한 번씩 만나봤는데, 내가 무심코 마코토 녀석을 떠올리게 하는 바람에 괜히 다들 아픈 곳을 찌른 것 같더라고. 나란 놈도 참 한심하게스리..."
"좀 더 힘줘서 긁어 봐."
"넌 아무렇지도 않아?"
"확실히 넌 많이 성장했다, 이오리 준페이. 하지만 성장했다고 해서 없던 눈치가 갑자기 생기는 건 아니거든. 그게 너답고."
코로마루의 입꼬리가 웃는 것처럼 말려올라갔다. 그러나 가늘게 뜬 그 붉은 눈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나라고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있겠냐? 다들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어. 이 기숙사 안은, 슬픔과 상실감의 냄새로 가득해. 견디기 힘들 정도로."
"......"
"주인님이 돌아가셨을 때, 내 마음 속은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그게 내 삶의 이유가 됐지. 내 페르소나에도 영향을 줬고. 하지만 증오와 복수는 삶을 지탱하는 이유는 될 수는 있어도, 삶을 이끄는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거다."
"아, 그 대사 어떤 만화에서 본 거 같아."
"그런가? 난 글은 읽지 못하니까. 아무튼 나는 한 때, 주인님과 함께 살고 죽는 미래를 원했다. 주인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섀도 근절을 원하게 됐고. 그래서 이 기숙사에 들어와 너희들과 함께 싸우고, 함께 산책을 하고, 맛있는 밥을 먹고... 그러다 보니 어느 샌가 목적이 생겼어. 이 싸움을 끝내고 모두 함께, 우리가 연 내일을... 그림자 없는 세상을 본다는 목적이."
준페이는 다시 슬픔이 목구멍을 꽉 메워오는 걸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특히 마코토에게는, 주인님이 내게 주셨던 목걸이를 맡기려고 했어. 그라면 내 두 번째 주인으로 인정할 만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코로마루는 눈을 감았다.
"나 역시 극복하지 못하고 있어. 모두와 마찬가지로.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코로마루는 뒹구르르 몸을 굴려서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두 귀가 축 늘어졌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슬픔과 상실감이 몰아닥쳤을 때는, 그저 그걸 인정하고 견딜 수밖에 없다는 거야."
"아, 그것도 어디선가 본 대사 같네... 어떤 게임에서 나온 거 같기도 하고."
"시끄러. 그래서 그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는 나도 알지 못해. 어쩌면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어 무너질지도 모르지. 그렇기 때문에, 너나 다른 녀석들에게 당장 듣기만 좋을 뿐인 위로 따위는 할 수 없어."
코로마루는 일어나서 몸을 부르르 털더니, 준페이의 손등을 부드럽게 핥았다.
"다들 함께... 그저, 어떻게든 견디고 있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뭔가 계기가 생기지 않을까. 나 역시, 그 희박한 가능성에 걸어볼 수밖에 없다. 지금은 말이지. 네가 견디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깨 정도는 빌려주마."
"...고마워."
준페이는 주저앉은 채 코로마루의 목을 끌어안고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그 따스하고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에, 에취!"
"끼잉..."
잠시 얌전히 안겨 있던 코로마루는 준페이가 재채기를 해대기 시작하자 몸을 비틀어 그 팔 안에서 빠져나왔다. 준페이는 킁 하고 코를 들이마시며 물었다.
"어... 코로마루? 너 방금까지 사람 말 하지 않았어?"
"와웅?"
코로마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본 준페이는 피식 웃어버리곤 다시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또 혼자서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응, 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준페이는 몸을 일으키고는 등 뒤의, 여전히 굳게 닫힌 방문을 흘긋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아이기스가 네 말을 전해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네가 하는 말처럼 들린 것도 아마도 전부 내가 멋대로 상상한 거겠지. 음, 나 만화랑 게임 좋아하니까. 아마도 너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하다 보니, 무심코 평소에 봤던 만화나 게임 주인공 대사들을 끼워맞춘 것일 꺼야. 누구 대사인지는 일일이 기억할 수 없지만. 이 이오리 준페이 님은 야구 실력만큼이나 상상력도 뛰어나거든! 아무튼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코로쨩!"
일부러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전혀 즐겁지 않았다.
준페이는 아래층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잠이 들고, 내일이 밝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시간이 흐르겠지만, 우리들의 시간은 거대한 무덤 같은 이 기숙사 안에서 멈춰 버렸다. 너무도 많은 추억과 기억들 속에 파묻혀 버린 채로. 삶도 죽음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채, 과거에 남지도 못하고 미래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그 사이에서 그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부유하면서. 그 추억과 기억들만을 끝없이 곱씹으면서.
준페이는 준페이다 보니까, 코로마루의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이 알 리 없다는 사실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기분 꿀꿀한데 날씨 한 번 개구리네...."
교정으로 나온 준페이는 혼잣말을 하며 찡그린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잔뜩 낀 우중충한 날씨는 마치 자신의 기분 같았다.
"개구리라도 튀어나올 것 같구만."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움찔했다. 불현듯 이쿠츠키 슈지 전 이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개자식 덕에 호된 꼴을 봤었지. "내가 이쿠츠키냐, 젠장!" 짜증이 치솟은 준페이는 마치 그 자리에 이쿠츠키의 얼굴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기둥을 거칠게 걷어찼다. 하늘을 향해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준페이는 교정을 가로질러 통학용 모노레일에 올라탔다. 오늘은 공부 안 한다. 새로 개봉한 영화나 조지러 가야지. 포트 아일랜드 역 근처에 있는 영화관, 스크린 샷에는 최근 개봉한 마블 히어로 영화의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그걸 보며 머리를 좀 비워야겠다. 영웅은 공부 따위 안 한다네!
"...얼레."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영화관 앞 분수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띄는, 성숙하고 이지적이면서도 화사한 미모의 소녀. 그러나 그 미모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준페이는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키리조 선배, 여기서 뭐하세요?"
"으, 응?"
그녀, 키리조 미츠루는 화들짝 놀라면서 준페이를 바라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영화 리플렛이 떨어졌다. 미츠루는 헛기침을 했다.
"이오리로군. 아버님이 남기신 서류를 검토하다가 바람을 쐬러 나왔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여기더군."
"우연이네요.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죠 키리조 선배?"
준페이는 허리를 굽혀 리플렛을 집어 미츠루에게 건네며 거기 적힌 문구를 흘낏 보았다. 화려하고 풍요롭지만 갑갑한 삶을 살던 엘리트가 어느 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걸 버리고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미츠루는 헛기침을 하며 그걸 받아들었다.
"마.... 유키와 이 영화를 본 적이 있었어. 으흠, 그냥 그 때 일이 기억났을 뿐이다. 내용이 조금... 와닿았거든."
준페이는 팔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미츠루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언제나 냉철하고 당당한, 그리고 한없이 고고한 키리조 선배도 후카나 유카리와 마찬가지로, 그 녀석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거 물어봤다가 화내면 어쩌지? 수학여행 때처럼 처형당하지 않을까? 그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준페이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 때는... 마코토도 있었고.... 료지도 있었고..... 새삼 다시 침울한 감정이 되살아나는 걸 느끼며 준페이는 입맛을 다셨다. 어두침침한 오후, 사람들은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 군중의 바다 속에서 준페이와 미츠루는 한 쌍의 작은 섬처럼 나란히 앉아 있었다. 미츠루는 나직하게,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인간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에 속박당한다... 귀한 것과 지킬 것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와 권력자, 이른바 엘리트일수록 그 귀한 것과 지킬 것들의 노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영화였어."
"솔직히 난해하네요 거..."
"그, 그렇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해서 미안하군."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미츠루였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군. 조만간 특과부 전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데, 만난 김에 네게 먼저 해도 상관 없겠지. 아버님 대신 너희에게 사과하고 싶다. 키리조 코우에츠... 할아버님이 저지른 짓을 말이야."
"음? 그거야 그 영감ㅌ... ...어르신... ...사람이 저지른 짓이고, 전 총수님과 선배는 그걸 몰랐고, 안 뒤에는 수습하려고 노력한 입장이잖아요?"
"하지만 나와 아버님은 그 사실을 숨기고, 무기력증 확산을 막기 위해서일 뿐인양 너희를 이용했지. 보수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아니 뭐 그건 전에도 사과하셨잖아요? 전 괜찮아요 선배, 뭣보다 굳이 따지자면 제일 큰 피해자는 마코토 녀석인데, 녀석도 뭐...."
그 이름을 말한 순간, 미츠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준페이는 그걸 보며 키리조 선배가 어떤 슬픔과 죄책감을 짊어지고 있는지, 동시에 자신이 어떤 말실수를 한 건지 깨달았다. 드헉.
"그래.... 녀석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서, 그런...."
"죄, 죄송함다..........."
준페이는 야구모자를 벗어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하여간 나새끼는 입방정이 문제라니까. 유카리한테도 그것 때문에 꼽 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창피해하는 준페이의 귓전에, 평소와 마찬가지로 침착한 미츠루의 음성이 들렸다.
"지금은 슬픔에 잠길 때가 아니지. 할 일이 많으니까. 아무튼 너희에게도 좀 더 이해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그래서 설명하자면... 이오리?"
"말씀하세요 선배. 아, 잠시만요."
준페이는 얼른 일어나서는 분수대 맞은 편의 자판기로 뛰어가서 캔음료 2개를 뽑아와서 하나를 내밀었다.
"마시면서 이야기하시죠. 헤헷, 아무리 귀한 집 아가씨여도 후추 박사나 255차 캔 정도는 딸 줄 아시겠죠?"
일부러 깐죽거리는 준페이를 보며 미츠루는 처음으로 작게 미소지었다.
"관대하게 처형은 참아주마. 배려 고맙군, 이오리."
준페이는 히죽 마주 웃어보였다. 캔을 따서 차 한 모금을 마신 미츠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여하간 아버님은 10년 전의 사고를 비롯해서 섀도 관련 피해자들에게 최대한 보상하는 방침을 세우고 싶어하셨지만 생존한 관련자들은 할아버님의 죄를 덮어 버리고 침묵하는 걸 선택했어. 진상을 모르는 다른 임원들도 우리 책임이 아닌 걸로 얼버무릴 수 있다면 굳이 돈을 쓸 필요 없다고 강경하게 반대했었지. 일반 사회에 섀도나 페르소나 같은 이야기가 새나가기라도 하면 패닉이 발생할 것, 법적인 문제들도 지나치게 복잡해질 것도 고려해야 하다 보니 아무리 아버님이어도 독단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었어. 너희에게 급료나 본격적인 장비를 지급하지 못하고 매번 쿠로사와 씨를 거쳐야 했던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이야. 나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키리조 그룹 내부에 적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됐다. 아버님은 내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던 거야."
"솔직히 좀 많이 난해하네요 거......"
미츠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곧 모두에게 할 이야기다. 그 때 다시 설명해주지. 그나저나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것만으로도 꽤 스트레스 해소가 되는군."
말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에 깃든 수심은 걷히지 않았다. 준페이는 그녀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먼 곳을 응시하며 거의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유키가 남긴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만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나는 일종의 노예라는 걸.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고, 내 의무이며, 내 숙명이야. 절대로, 절대로 도망칠 수는 없어..."
그 목소리를 들으며 준페이는 깨달았다. 1년 전에 비해 키리조 선배의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진 것은 좋지만, 지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부드러움이나 온화함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슬픔과 두려움,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이었다. 준페이는 이를 악물었다. 이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무엇이 아닌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것은 분명 아니었다. 어떻게든 기운을 북돋아주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 개그를 할 수는 없잖아.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 분위기 파악은 한다고. 젠장, 마코토,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준페이는 잠시 고민했지만, 한발 앞서 미츠루가 말을 돌렸다.
"참, 이야기하는 걸 잊을 뻔했군. 닉스를 물리치고 모든 것이 끝났으니, 이젠 특별과외활동부도 해산이다."
"음? 며칠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완장과 페르소나 소환기도 회수한다고..."
"아, 이미 했던가?"
미츠루는 약간 허둥거렸다. 그걸 보며 준페이는 힘들게 웃어보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럴 리가 없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랬었지. 이번 달 말일... 3월 31일에 전부 걷어서 연구소로 보낼 예정이야.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내 개인적인 감정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알겠어요. 그래도, 앞으로도 다들 가끔 만나면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요. 많이 바쁘실 거라는 건 알지만요 뭐, 그냥 전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미츠루는 몸을 일으켰다.
"어울려줘 고맙다 이오리. 다시 들어가봐야겠어."
"예. 그럼 기숙사에서 봐요 키리조 선배."
목이 잠기는 느낌이 들었지만 간신히 대답했다. 미츠루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멀어져갔다. 준페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불러세웠다.
"키리조 선배!"
"뭐지?"
"우리는 함께 큰 일을 해냈잖아요! 힘들 때는 좀 더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해도 돼요. 저야 미덥지 못하겠지만, 사나다 선배도 있잖아요!"
미츠루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약간 슬프게 웃어보였을 뿐이었다.
이미 주변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미츠루의 뒷모습을 보며 준페이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토록 강하던 키리조 선배가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어쩌면.... 키리조 선배는 지나친 슬픔과 두려움,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무너지지 않을까? 예전의 키리조 선배는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에 종종 강압적인 면을 보이곤 했다. 유카리는 내내 그걸 불만스러워했었고, 자신도 종종 약간 거북하긴 했다. 작년 수학여행 이후로 그런 면이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은 그 때와는 정반대의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나 같은 놈이 생각해 봤자 뭐 별 수 있나...."
이런 생각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키리조 선배가 그렇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라고, 그녀의 이성과 자제력을 믿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머릿속도 마음속도 끝없이 복잡했고 주변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밤이 오고 있었다.
+
혼자 영화를 보고 나와, 와카츠의 DHA 정식으로 저녁을 해결한 뒤 폴로니안 몰의 오락실에서 시간을 죽이던 준페이가 기숙사에 도착한 건 밤 9시가 넘어서였다.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서며 힘껏 외쳤다.
"어이, 나 왔다!"
'응, 왔구나.'
로비의 소파에 앉은 채 특유의 무표정에 가까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친구가 대답한다. 자신은 그 곁으로 걸어가 소파에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는 옆에 털썩 앉아 리모컨을 집어들고 TV 채널을 돌리면서 불평한다. 유카리와는 한 교실에 앉아 있어도 멀리 있는 것 같다, 후카도 얼굴 보기 힘들다, 자신도 미래라는 걸 조금은 생각하게 된 이후 나름 공부를 좀 하게 돼긴 했는데 진도 쫓아가기 어렵다, 평화가 온 건 좋지만 가끔은 그 지겹던 타르타로스의 복도가 조금 그립기까지 하다, 뭐 그런 아무 말을 늘어놓는다. 그런 알맹이 없는 말을 친구는 옆에 앉아 조용히 듣고 있다. 얼핏 보면 그저 무표정하고 무관심해 보이는 인상이다. 하지만 녀석을 아는 사람이 좀 자세히 살피면 녀석은 항상 보일락 말락한 엷은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른쪽 눈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면서 녀석은 나직하게 말한다.
'열심히 잘 살고 있구나 준페이, 안심이야.'
"난 괜찮아! 치도링도 이제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 곧 휠체어 졸업할 수 있을 거라더라. 그러니까 너는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이거야! 이 이오리 준페이 님은...."
그리고, 백일몽에서 깨어난다.
텅 빈 로비는 어둡고 쌀쌀했다. 그리고 자신은 소파에 홀로 앉아 마치 녀석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중얼대고 있었다.
"꼭 미친 놈 같네... 하, 하하하..."
콧등이 시큰해 오는 걸 느끼면서 준페이는 로비를 둘러보았다. TV에서는 주식시장이 활황이라고 뉴스 앵커가 떠들고 있었다. 무기력증이 사라지고 섀도 피플이 됐던 사람들이 원 상태로 돌아와 각자 직장으로 복귀한 결과가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뉴스가 끝나고 나자, 요즘 한참 인기 상승세인 리세치라는 신인 아이돌이 나오는 광고가 이어졌다.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그 활력이 넘치는 세상은...
"보고 있냐, 마코토... 우리가, 그리고 네가 구한 세상이야..."
시끄럽고, 시끄럽고, 시끄럽고,
공허하다.
뉴스에서도, 시사 대담 프로에서도, 이제는 작년 한 해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집단 무기력증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다들 지난 1년을 잊어버리자고 암묵적으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세상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평하고 요란스러웠다. 마치 혼자 떠들고 있는 저 TV처럼. 준페이는 그 헛헛한 소음을 견딜 수 없어서 귀를 틀어막았다.
그 때 기숙사 문이 열리며 사나다 아키히코가 들어섰다. 내내 뛰어왔는지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어, 왔어요 선배? 지금까지 체육관에 계셨던 거에요?"
"...그래."
아키히코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준페이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로비를 가로질러 냉장고 문을 열고 이온음료를 꺼내 들이켰다. 그런 그에게 준페이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사나다 선배... 많이 바쁘세요?"
"무슨 일이지 준페이?"
"저기 말이죠... 요즘 키리조 선배 표정이 많이 어두워 보여서요..."
준페이는 약간 두서없이 낮에 미츠루를 만났던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래서, 좀 걱정돼서요. 키리조 선배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 선배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후로 처음 봤어요. 제가 섣불리 위로 같은 거 할 주제는 못돼지만, 사나다 선배는 키리조 선배와 중학교 때부터 친했으니까..."
소파 맞은 편에 앉아 묵묵히 준페이의 이야기를 듣던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약해졌군, 미츠루 녀석. 한심하긴."
"네?"
"못 알아들었냐? 한심하다고 했다."
준페이는 잠시 멍하니 아키히코를 바라보았다. 사나다 선배도 키리조 선배도, 둘 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서로 은근히 칭찬하기도 하고 옛 이야기를 주고 받는 걸 종종 곁귀로 듣기도 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쌀쌀맞게 말하는 거지? 그러나 준페이의 당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힘들겠지. 하지만 우리는 키리조 그룹 내부의 일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라.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스스로 해낼 수 밖에 없는 일이라면, 스스로 해내야만 해."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함께 사선을 넘어 온 동료고, 게다가 사나다 선배와는 친구잖아요?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미츠루는 어린애가 아냐. 오래 봐왔으니 아는 거다. 얄팍한 동정 따위 해봤자 의미 없어. 미츠루는 자신의 눈물은 스스로 닦아낼 줄 아는 녀석이다."
"어른도 아니잖아요! 키리조 선배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사나다 선배도 그랬잖아요, 강한 녀석인 건 알지만 그 심지가 부러져 버렸다고! 그 땐 그렇게 걱정해 놓고 지금은 왜 그래요 도대체? 자기 눈물이야 스스로 닦는다 쳐도, 위로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걸 꼭 얄팍한 동정이라고 폄하해야 돼요?"
준페이는 화가 치미는 걸 느끼며 버럭 소리질렀다. 그러나 아키히코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런 일까지 겪었는데도 극복했기에 난 미츠루를 인정하고 존경할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네 이야기대로라면 실망스럽고 한심할 뿐이야. 시합에서 졌다면 패자로 끝나지만, 그 때문에 마음이 꺾였다면 두 번 다시는 이길 수 없는 약자가 돼. 난, 약자가 싫어. 그 뿐이다."
"!"
준페이는 사나다 아키히코의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한없이 차가웠다. 자신이 헛소리를 할 때마다 핀잔을 주고 짜증을 내면서도 챙겨주던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할 이야기 끝났으면 가겠다, 피곤해. 씻고 자야겠어."
그는 몸을 일으켜서 계단으로 향했다. 그 등을 잠시 바라보던 준페이는 소리를 질렀다.
"사나다 선배도 약하잖아요!"
"뭐?"
아키히코는 거칠게 몸을 돌렸다. 그러나 준페이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료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닉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사나다 선배도 좌절했잖아요! 우리가 뭘 할 수 있냐, 그런 것과 어떻게 싸우냐고! 우리 모두 겁나긴 마찬가지였어요, 특히 저는 마코토 탓을 하면서 억지를 부리기까지 했고! 하지만 결국 정신을 차리고 싸우기로 한 건 저마다 싸울 이유를 찾아낸 서로를 믿어서였잖아요! 지금 이런 선배 꼴을 보면 그 녀석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아키히코의 눈빛이 변했다.
"마코토 이야기는 하지 마!"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준페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 녀석을 떠올리면 미칠 것 같다고! 미키가 죽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 녀석이 날아올라서, 혼자 닉스를 향해갈 때 나는 아무 것도 못했어! 내가... 내가 약해서 그 녀석이 그렇게 된 거라고! 또 그 때처럼!"
"제기랄, 선배는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달에서 진짜 닉스가 나타난 그 순간, 아무 것도 못한 건 다들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니까,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집어치워, 패배자들끼리 서로 상처를 핥아주기라도 하자는 거냐?"
퍽.
아키히코는 준페이의 볼을 후려갈겼다. 준페이는 크게 휘청대면서 물러나다가 소파를 짚고 간신히 섰다. 아키히코 역시 당황했다.
"....미안하다, 준페이.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준페이는 머리가 어지럽고 입 안에서 피가 차오르는 걸 느끼며 찡그렸다. 나도 타르타로스를 오르면서 본의 아니게 꽤 단련이 된 거 같은데 역시 대단한 주먹이야, 진심으로 때렸다면 분명 기절했겠지.
"확실히 약해졌네요, 사나다 선배. 저 정도는 일격에 KO시켜야 정상일텐데.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죠? 닉스에 대해 들은 뒤 기숙사로 돌아와서... 그 때도 바로 이 로비였었죠, 헤헷."
"...."
"그 때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맞고 나서도 납득했어요. 엄청나게 아팠지만. 하지만 지금은 선배, 망가져 있어요. 키리조 선배나 유카리처럼. 건방 떠는 저도 한 방에 눕히지 못할 정도로."
아키히코는 어두운 표정으로 준페이를 외면했다.
"지금은 선배도 이래저래 버거운 거 같으니까... 뭐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거 같네요."
준페이는 천천히 말하고는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고 몸을 돌렸다. 계단 위에서 켄이 자신과 아키히코를 슬픈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이쿠, 보고 있었구나 아마다 소년? 언제부터였냐? 설마 처음부터?"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입안이 무시무시하게 쑤시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 방으로 와요, 준페이 형. 약이 있으니까 발라줄게요."
"기왕이면 치도링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사랑하는 여자에게 걱정끼치느니 남자가 낫지 않아요?"
"그것도 그렇네."
난간을 짚고 계단을 오르던 준페이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로비에서 아키히코가 이쪽을 등진 채 서 있었다. 그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래도 예전처럼 강하고 올곧은 선배로 돌아가길 기다릴게요, 사나다 선배.'
준페이는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너무나도 높고 힘든 계단이었다.
그가 없어도 세상은 변한 것 없이 시간이 흘렀고, 3학기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준페이와 유카리, 후카, 아이기스, 그리고 켄은 진급을 앞두고 있었고, 미츠루 선배와 사나다 선배는 졸업했지만 계속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유를 모두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월광관 고등학교 2학년생, 이오리 준페이는 점심 시간에 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 계단을 밟으면, 그 흐리고 쌀쌀하던 겨울날이 떠오른다. 그 때도 옥상이었다. 자신은.... 그에게 널 만나서 다행이라는 속내를 털어놓고는, 이 싸움이 끝나도 여전히 친구인 거냐고 물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뻔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웃으면서 내민 손을 맞잡아왔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전을 마치고 모두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았을 때- 자신이 이 옥상에 다시 올랐을 때 본 것은....
"...후카?"
후카는 옥상 난간에 기대서서 도시의 풍경을 내다 보고 있었다. 후카의 시선이 향한 저 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준페이는, 키리조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건설회사에 의해 한참 재건 공사 중인 문라이트 브릿지를 발견하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작년 12월, 죽음의 선고자로서 가진 원래 힘의 편린을 드러낸 모치즈키 료지가 그걸 단 일격으로 부숴버리던 광경이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언론에서는 작년 말 짧은 시간 동안 큰 위세를 떨쳤던 닉스 광신도들의 테러로 추측하고 있었지만, 길게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 안녕 준페이..."
후카는 준페이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미안, 바람이 불어서... 눈에 뭐가 들어갔나봐."
준페이는 묵묵히 손수건을 내밀었다. 후카는 눈 주변을 닦아내고는 손수건을 돌려주며 애써 밝은 태도로 물었다.
"요즘 지내기는 좀 어때?"
"나야 뭐 늘 비슷하지. 새삼스럽지만 학교 공부란 놈 참 쉽지 않네~ 섀도랑 싸우는 게 차라리 더 쉬운 것 같다니깐."
"그래도 성적 많이 올랐잖아? 작년 기말고사 때는 중위권까지 올라갔지? 준페이도 성실해졌으니까,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하하, 나님은 대단하니까!"
둘 사이로 다시 바람이 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준페이는 툭 던지듯 물었다.
"옥상, 자주 올라와?"
"응... 약속했던 곳이니까. 그것 말고도 추억이 많은 곳이라서. 마코토가 내 요리를 맛봐줬던 곳이기도 하고... 나츠키가 전학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눈 곳도 여기거든."
"아... 그 애? 그러고 보니 친해졌었지?"
"응....."
후카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 때는 나츠키가 멀리 떠나버렸지만, 아무리 멀리 있어도....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심지어 우주 저 멀리 있어도 소중한 상대와 마음만은 이어져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었어. 그걸 계기로 내 페르소나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힘'이라는 걸 깨달았었고. 하지만..."
그녀는 허공을 향해 흰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죽음만은 넘어서지 못하겠어."
"...."
"사실 요즘도 가끔 유노를 써서 마코토를 찾아보곤 해. 영혼이라도 남아 있다면, 유노라면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매번 헛수고로 끝나지만."
그 손은 허공만을 움켜쥐었다. 준페이는 이해한다고 말하려다가 침묵했다. 그런 말은 어떤 위로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시간이 더 많이 지나고 나면 익숙해지겠지. 나도, 우리 모두도... 어떻게든 각자 삶을 살아갈테고. 하지만... 지금은 역시 좀 힘드네."
후카는 슬프게 웃어보였다. 준페이는 그런 그녀 옆에 서서 오후수업 5분전을 알리는 예령이 울릴 때까지 한참 묵묵히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봄 햇살이 따사로이 내려쬐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며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녀석이 구해낸, 하지만 그 녀석 자신은 영원히 떠나 버린 세계였다. 그 녀석이 없는 우주였다.
+
수업이 끝나고, 종례를 마친 토리우미 선생님이 교실을 나섰지만 준페이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잔뜩 흐려진 하늘 아래 육상부원들이 서둘러서 연습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저만치 미야모토 카즈시와 니시와키 유우코의 모습도 보였다. 그 때, 토모치카 켄지가 준페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집에 안 가냐?"
"어, 으응... 가야지..."
애매하게 대답하는 준페이를 바라보며 켄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키 일 때문이냐?"
"...."
준페이는 대답대신 모자를 푹 눌러썼다.
"독서실 가려던 참인데 그 전에 하가쿠레에 들를래? 공부도 배는 좀 채우고 나서 하든가 해야지."
듣기로는 이 녀석도 작년에 카노 선생에게 단단하게 반해서 속앓이를 많이 했었는데, 마코토가 상담 상대가 되줬던 모양이었다. 준페이는 기운없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니가 쏘는 거냐?"
"음... 빌리는 걸로 해주마."
둘은 시시한 잡담을 주고 받으며 교실 문을 나섰다.
"넌 진로 뭘로 정했냐?"
"글쎄, 모르겠다야."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고 보니 요즘 다니는 독서실 총무 누님이 미인인데..."
"아 놔 이 새끼 또 시작이네."
"또래 여자애들은 유치하잖아. 시끄럽고, 연예인이나 밝히고. 여자란 역시 성숙하고 포용력 있는 누님이 최고라니까."
"너 야동도 유부녀 마인드컨트롤 같은 매니악한 거 좋아하지?"
"뭐임마? 난 어디까지나 순애 취향이거든?"
켄지는 찡그리면서 준페이를 노려보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준페이도 낄낄 웃으며 켄지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렇게 일부러 천박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실없이 키들대는 일상의 한 순간도 나쁘진 않다. 마코토 녀석은 이제 더 이상 없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얼레, 저기 타케바잖아?"
"응?"
준페이는 복도 저편을 돌아보았다. 활이 든 가방을 둘러멘 유카리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준페이는 재빨리 말했다.
"미안, 먼저 가라. 라멘은 다음에 먹으러 가자."
"어? 응..."
갸우뚱하는 켄지를 등 뒤에 남기고 준페이는 그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어이, 유카릿치!"
묻고 싶다. 너도 후카처럼 아직 슬픔에 젖어 있어? 그 녀석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어?
"응? 안녕 준페이. 어쩐 일이야?"
고개를 돌린 유카리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왔다. 무척 예쁘지만 약간 쌀쌀맞아 보이는, 남자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듯한 특유의 표정. 작년 이 무렵과 똑같았다. 왠지 모를 서운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준페이는 히죽 웃었다.
"어... 별 건 아니고, 오랜만에 만나보고 싶어서."
"같은 반에 같은 기숙사잖아, 보기야 매일 보면서 무슨 소리야?"
"그렇긴 한데, 쉬는 시간에도 점심 시간에도 넌 공부만 하고 있고... 말 걸기가 힘들달까, 말 그대로 얼굴만 마주치는 건 만나는 것과는 좀 다르쥐 아무래도~."
"좀 바쁜데, 할 이야기라도 있어?"
준페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슬픔에만 빠져 있지 않는 건 뭐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좀 그렇지 않나?
"뭐 대단히 할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고... 어 그런데 그거, 활 아냐? 그러고 보니 오늘은 궁도부 활동 있는 날 아니었어? 궁도부실은 반대편인데..."
"곧 3학년이잖아, 입시학원 등록했거든. 졸업할 때까지 궁도는 관두기로 했어. 궁도도 가벼운 마음으로 한 건 아니었고 마음은 아쉽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어... 그러냐."
유카리는 준페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작년에는 특별과외활동부 일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잖아. 너도 이제 마음 잡으라고 준페이. 학교 졸업하고 나서 진학도 취업도 애매하게 붕 떠 버리면 치도리한테 부끄러울 것 아냐?"
"아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타케바 선생님..."
"딱히 더 할 말 없으면 갈게."
유카리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보자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 녀석이 죽은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넌 정말 괜찮은 거냐?"
아차. 말 뱉고나서 준페이는 순간 후회했다. 유카리, 녀석을 좋아했었지. 그 녀석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상처가 될 지도 모른다.
유카리는 고개를 돌려 날카롭게 준페이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차갑고 단호하게,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서 말했다.
"지난 일에 매달려봤자 좋을 것 없어, 이오리 준페이."
"....미안."
"확실히 말해둘게. 마코토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 우리 모두를, 나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의 목숨과 미래를 지켜줬어. 어떻게 한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
"아무리 슬퍼해봤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마코토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주저하지도, 돌아보지도 않을 거야. 오직 앞만 바라보며 살아가겠어. 반드시."
준페이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둔한 그였지만 그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 너머에 깔린 엄청난 슬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괜한 말을 했네, 사과할게 타케바."
"...나도 쏘아붙여서 미안해, 준페이."
"그래... 유카릿치."
준페이는 어설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유카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같이 밥이라도 먹자 준페이. 하지만 오늘은 정말 곤란해. 그럼 간다."
"어, 응."
유카리는 등을 돌려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또각또각 하는 구두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렸다. 그러나 그 등은 작고 연약해 보였다. 준페이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소나 3 본편과, 후일담 에피소드 아이기스의 사이 시점이 배경. 이오리 준페이의 시점에서 본 특과부 동료들의 일상. 일부 묘사는 게임 본편이 아니라 극장판에서의 묘사를 차용했기에 게임과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다(그 김에 내가 지어낸 내용도 좀 있다). 3 엔딩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3 본편을 클리어한 사람만 읽기를 권한다.
이오리 준페이는 그 날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봄이 온 하늘은 한없이 맑고 드높았고, 그 하늘 아래 불어오는 미풍에 실려 벚꽃잎들이 휘날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돌았고, 거리는 떠들썩했다.
3월 5일.
지난 1년 동안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의문의 대규모 무기력증 발발 사건과 광적인 종말 숭배는 깨끗하게 가라앉은, 속된 활력과 열정이 넘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도쿄 미나토구 타츠미 포트 아일랜드에 소재한 월광관 고등학교의 2010년도 졸업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졸업생 대표로 전 학생회장 키리조 미츠루가 기념사 낭독을 위해 학생회관 단상에 올라서는 걸 지켜보며 준페이는 늘 쓰고 다니던 야구모자를 벗어들고 거칠게 머리를 긁었다. 옆에 앉아 있던 클래스메이트, 타케바 유카리가 작게 핀잔을 줬다.
"얌전히 좀 앉아 있어, 준페이. 딱히 친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1년 동안 같이 기숙사 쓴 선배잖아, 다시는 볼 일 없을텐데 예의는 지켜야지."
"어, 그래."
준페이는 다시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입맛을 다셨다. 장내를 둘러보다가 저 만치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얌전한 인상의 소녀-분명 옆 반의 야마기시였지, 기숙사에서도 몇 번 본 적 있었다-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준페이는 다시 눈을 돌려 따로 앉아 있는 졸업생들을 살펴보다가 움찔했다. 복싱부의 주장이며 에이스인 사나다 선배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기숙사였고, 멋지고 강한 선배로서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오가면서 인사 정도만 몇 번 주고 받았던 사이일 뿐이었다. 얼른 시선을 피한 준페이는 모자 챙을 잡아당기며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마치면서 돌아보니, 1년 전 이 단상에서 저는 이렇게 말했었죠. 미래의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고....
키리조 선배의 차분한 음성을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약간 걱정스런 기색으로 유카리가 작게 소근거렸다.
"아까부터 답잖게스리 뭐야, 준페이 주제에. 몸이라도 안 좋아?"
"유카릿치, 우리... 뭔가 굉장히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병으로, 아버지를 잃는 시련에...
유카리의 예쁜 얼굴에 그늘이 스쳐갔다. 그 표정을 보며 준페이는 확신했다. 나도, 유카리도, 약속을 했었다. 바로 이 날, 3학년들의 졸업식날.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약속을.
-병으로, 잃어...?
주변에서 나직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별일이네, 회장이 이런 자리에서 말이 막히다니."
"자리가 이런 자리니까... 아버지의 추억이 떠올라 그런 거 아니겠어?"
"회장도 인간이구나, 헤."
키리조 미츠루. 이 월광관 고등학교의 출자기업인 일본 굴지의 대기업 키리조 그룹의 계승자인 동시에 문무재색을 모두 갖춘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언제나 당당하고 단호하던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가슴의 고동이 격해지는 걸 느끼며 준페이는 거칠게 모자를 벗어들고 재차 물었다.
"마코토 녀석, 어디 있는지 알아?"
"어머?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키리조 선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더 이상 졸업식 기념사가 아니었다.
-기억났어...
"어...? 나 뭔가 중요한 걸..."
유카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준페이는 등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는 걸 느꼈다. 단단하고 확신에 찬 손길이었다.
"사나다 선배...!"
어느새 다가온 사나다 아키히코 선배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지는 내가 이어가겠어.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반드시 맞서 싸우겠어!
그 순간, 모든 것이 기억났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지구 상 모든 생명체의 확고하고 절대적인 '죽음'에 최후의 최후까지 맞서기로 했던 그 순간.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떨리다 못해 부서져 나갈 듯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 속의 결의를 끌어올려 맹세했었다.
'다시 평온을 찾은 이 거리가 잘 보이는 장소에서, 결코 돌아보지 않겠다는 지금의 결의를 기억과 함께 잃어버리지 않도록 꼭 거기서 다시 만나자.'
'언제나 하던 것처럼.'
'멍!'
'같이.'
'싸우겠어요.'
'너만 믿는다!'
'낙승이야.'
준페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나다 선배는 씨익 웃어 보였다. 어느새 후카도 다가와 있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유카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약속!"
-내겐 소중한 친구들이 있고...
키리조 선배가 말을 맺지 못하고 단상에서 뛰어내리며 외쳤다.
"...그리고 어떤 미래가 오더라도 외면치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키리조 선배의 머리칼이 물결쳤다. 처음 보는 듯한, 순수한 기쁨이 담긴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가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그런데 만나기로 한 곳이..."
"어디였었죠 선배님...? 그건 아무래도 아직..."
사나다 선배와 후카가 일순 주저했지만 유카리가 외쳤다.
"이 거리가 잘 보이는 곳!"
그 말을 듣는 순간, 준페이는 앞장서서 학생회관을 뛰쳐 나갔다. 자신도 그게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따라와!" 가슴이 터질 듯한 온갖 감정이 맹렬히 솟구쳤다.
"컹!"
코로마루가 헥헥대며 뛰어오고 있었다. 켄이 얼굴이 빨개진 채 숨을 헐떡이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저 뒤에서 수위가 쫓아오고 있었다. "얘들아! 거기 개랑 초등부 꼬마 좀 막아다오!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준페이는 외쳤다.
"가자, 약속을 지키러!"
"죄송합니다, 잠시만 주무세요!"
사나다 선배의 외침과 함께 퍽 소리가 들려왔다. 준페이는 선두에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맹렬히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저 앞에, 이렇게나 모자라고 한심한 나를- 추한 질투심과 자격지심에 휘둘리던 나를 친구라고 부르며 웃어주던 녀석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야 나도 가슴을 펴고 녀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나 자신을 녀석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렇기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절대 멈출 수 없다.
"어이-!"
월광관 고등학교 옥상.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벤치에 앉은 아이기스의 무릎을 베고 친구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희디 흰 얼굴을 보는 순간, 아주 잠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마코토..."
아이기스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워들어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많이 피곤했나봐요, 지금은... 그를 좀 쉬게 해주세요."
"아, 뭐야 마코토 녀석! 거하게 뒷풀이하려고 했는데!"
준페이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옆에서 유카리가 팔꿈치로 준페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얏." 머쓱하게 머리를 긁는 동안 코로마루가 다가가 꼬리를 흔들며 마코토의 볼을 핥았다.
"그간의 긴장이 뒤늦게 풀린 모양이야. 자게 두자고, 준페이."
사나다 선배가 쓴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키리조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날씨지만 이렇게 두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일단 기숙사에 눕혀두자, 내가 차를 부르지."
"고마워요. 사나다 선배님은 졸업 후에도 당분간 근처에 머무를 거죠?"
"그래, 타케바. 마코토가 깨어나고 나면 크게 파티를 하지."
"본가는 좀 떨어져 있지만 날짜가 잡히면 언제든 오겠다. 선약을 취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라가키 씨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켄이 말끝을 흐렸다. 사나다 선배는 빙그레 웃으며 그런 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헝클어 뜨렸다.
"어린애 취급 마시라니까요."
켄은 볼멘 소리를 했지만 그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런 둘을 보며 후카가 활짝 웃었다.
"사나다 선배님도 많이 부드러워지셨네요."
"글쎄... 내가 변했다면 마코토 녀석과 함께 한 시간 때문이겠지."
대화를 들으며 준페이는 아이기스와 마코토에게 다가갔다.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쌔근쌔근하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오고, 가슴이 작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래, 좀 자라. 아이기스, 도와줘."
준페이는 조심스레 마코토의 상체를 일으켜세워 업었다.
"제가 하는 쪽이 낫지 않겠어요, 준페이 님?"
"아니. 내가 하게 해줘. 부탁해, 아이기스."
사나다 선배와 키리조 선배는 다시 졸업식장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기숙사에 도착했다. 아이기스가 도와주겠다고 한번 더 제안했지만 준페이는 끝까지 거절하고는 마코토를 업고 2층으로 올라가, 그를 침대에 눕혔다.
햇볕이 비스듬히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마코토의 볼을 쓰다듬었다. 준페이는 깊이 잠든 친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자식... 잘 생기긴 참 잘 생겼어, 좀 기생오라비같아서 부럽지는 않지만. 역시 남자라면 아라가키 선배처럼 키 큰 근육질 마초여야지! 뭐, 나는 치도링에게만 잘 생겨 보이면 되니까 괜찮아."
가는 숨소리가 곧 끊어질 듯 희미하게 들린다.
"그러고 보니 나도 너도 서로 방에 놀러간 적은 한 번도 없구나. 남자끼리는 같이 밤새 게임하거나, 만화책 보거나, 야한 거 보거나, 그러면서 노는 것도 재미인데 말이지. 뭐 그 동안은 통 여유가 없었으니까. 다음엔.... 꼭 같이 놀자. 아 참, 그러고 보니 넌 토못치와도 친하지? 셋이서 말이야. 미야모토 녀석도 부를까? 그 녀석 땀내나는 열혈바보라서 좀 노잼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은 녀석이니까. 데빌버스터 온라인2 같이 할래? 아니면 과자 먹으면서 슈퍼 히어로 영화 DVD나 볼까? 영화관과는 달리 늘어져서 떠들며 보는 재미가 또 각별하거든. 그것도 아니면 이오리 준페이 아워 한 번 더 해볼까?"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창백하다.
"이젠 정말로 모든 싸움이 끝났으니까... 마음 편하게.... 실컷 노는 거다, 마코토. 알겠지?"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꼭이다, 친구. 푹 자고, 내일 보자고."
준페이는 불을 끄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아이기스가 침대 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는 그를 발견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오리 준페이는 그 날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봄이 온 하늘은 한없이 맑고 드높았고, 그 하늘 아래 불어오는 미풍에 실려 벚꽃잎들이 휘날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
그 날 이후의 나날들은, 기억이 흐릿하고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억지로 기억하려고 해봤자 희미하게 떠오르는 건 마치 빛바랜 옛날 사진들처럼 중간중간 끊긴 풍경들 뿐이었다.
녀석의 장례식.
관을 껴안고 통곡하던 유카리.
조용히 흐느끼던 후카.
검은 베일을 쓴 채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던 키리조 선배.
어두운 표정으로 조문객을 응대하던 사나다 선배.
하늘을 향해 슬프게 포효하던 코로마루.
평소와 달리 어른스러운 척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소리내어 울던 켄.
아이기스는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다. 방문을 닫아 걸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코토 녀석의 폰에 저장되어 있던 번호들을 통해 전체 메일로 부고를 전했더니, 많은 이들이 찾아왔었다. 늘 조용하고 쿨해 보이던 그 녀석의 인간관계가 이렇게 다양했나 놀랄 정도로.
쿠로사와 순경은 정복 차림으로 나타나 영정 앞에 서서 경례를 붙였다.
상복을 입은 마요이당 점주 역시 이제 행복해질 때도 됐는데 허무하게 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와일덕 버거 옆의 헌책방 노부부 내외는 아들도 늙은 우리보다 먼저 가버렸는데 왜 손주 같던 애까지 먼저 가는 거냐면서 눈물흘렸다.
토모치카 켄지는 하가쿠레에서 녀석과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학생회의 오다기리 히데토시는 정중히 예의를 갖췄지만 눈이 빨개져 있었다.
함께 온 후시미 치히로라는 1학년생은 아무 말도 못하고 울다가 기절했다.
히라가 케이스케라는 선배는 녀석의 주치의가 되겠다고 약속한 바로 다음 날 죽어버렸다고 한탄했다.
미야모토 카즈시는 자신도 무릎이 거의 다 나았는데 왜 넌 근성 없이 꼼짝 못하고 누워 있냐고 울먹거렸다.
토리우미 이사코 선생님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게 "거짓말쟁이"라고 중얼거렸다.
니시와키 유우코는 조문객 응대와 식탁 정리를 하며 쉴 새 없이 돌아다녔지만 눈빛이 텅 비어 있었다.
학교에서 몇 번 본 앙드레인가 하는 프랑스 유학생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고 했다. 앙드레는 프랑스에서 열린 청소년 패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받은 거라면서 입선 트로피를 녀석의 영전에 바쳤다.
T라는 명의를 쓰는 정체모를 누군가가 최고급 화환과 함께 40만 엔이나 되는 조의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낯선 초등학생 소녀가 어머니와 함께 찾아와서는 "마이코가 크면 결혼하기로 했잖아"라면서 내내 울다가 지쳐 잠들어 버리기도 했다.
스에미츠 노조미라는 뚱뚱한 동급생은 "이 세상 모든 맛있는 걸 먹어봤다고 자랑할 상대가 하나 더 늘었지만, 이런 식으로 늘어나길 바라지는 않았다"고 탄식했다.
무타츠라고 하는 낯선 스님은 생전 녀석과 인연이 있었다면서 돈을 받지 않고 밤새 경을 읊어 주었다.
녀석의 육상 라이벌이었다던, 하야세 마모루라는 타 학교 학생은 "언젠가 네가 있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내 삶을 열심히 달리겠다"고 영정 앞에서 맹세했다.
카미키라고 성을 밝힌 중년 여인은 녀석이 자신의 죽은 아들과 친구였다고 했다. 카미키 부인은 밤새 일을 돕고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아들이 살면서 많은 걸 나에게 줬듯, 유키 군도 여러분에게 많은 걸 줬을 것이니 그걸 소중히 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모두 떠나가고 우리들만이 남았다.
'난 깊은 인간관계 따위 싫어' '그냥 혼자 살다 혼자 죽을 거야' 같은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가, 한 때 친분이 있던 사람들과 만나 어울리는 꿈을 꿨다. 즐거웠다.
그리고 깨고 난 지금, 나는 그 꿈 속에서 느낀 즐거움이 얼마나 하찮고 무가치한지 안다. 뭐.... 그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본지 10년이 넘었고, 어지간해서는 다시 만날 일은 아마도 없으려니 한다. 그 사람들은 좋은 분들이었다. 다만, 내가 그런 걸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행복하게 잘들 살기를 바란다. 비록, 이런 세상이지만.
난 오늘도 세상과 나 자신을 견뎌야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