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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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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러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사전 정보를 최대한 피해 다니다가, 드디어 보고 왔다. 머릿 속으로는 '호빗은 온통 시커멓고 수염 텁수룩한 드워프 남정내들만 득시글 거리는데 얼굴과 이름 매치나 제대로 될까' '어렸을 때 소설로 읽었을 때도 드워프들은 리더인 소린, 늙었다는 묘사가 많은 발린, 뚱뚱하고 잠이 많다는 묘사가 많은 봄부르, 가장 젊다는 묘사가 나란히 나오는 필리와 킬리 정도나 기억해가며 읽었는데' '애초에 동화가 시작이었으니 이야기 자체가 아무래도 반지의 제왕에 비해 스케일이 작고 소소한 편이긴 한데 3부작이라고? 억지로 스케일링한 거 아냐?' '반지의 제왕 때도 아라곤과 아르웬의 로맨스는 좀 따로 노는 느낌이었는데 억지로 여캐 우겨넣는 거 아냐?' 같은 생각을 하며 가서... 어느 정도는 '흥흥 나으 호빗은 이러치 아나! 라고 까줄테다'라는 불손한 생각도 좀 하면서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고, 빌보가 프로도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는 순간 그런 생각들이 전부 머릿속에서 표백됐다. 2시간 반 가량의 상영 시간 내내 아닥하고서 헉헉대며 보다가 스탭롤이 올라가고 나서야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난 갈 데 없는 톨킨덕후가 맞나 보다 아아(...)

 

일단 총평을 하자면, 원작에 대한 경의를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상업적 각색이 많이 들어갔다는 느낌. 거기에 더해서 호빗 3부작 자체를 반지의 제왕 3부작에 종속시키고자 한 의도가 강하게 느껴진다. 팬의 입장에서는 호오가 갈릴 만한 접근이지만, 영화화를 함에 있어 충분히 합리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보인다. 왜냐면, 거대한 선과 악의 전쟁이라는 표면적 서사가 있었으며 중간계 전체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봐도 한 시대의 종막을 장식하는 장대한 에픽 사가였던 반지의 제왕에 비해 호빗 원작은 훨씬 작고 소소한 이야기이고, 근본적으로 아동용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동 대상 판타지 물이 나름 인기있긴 하지만, 전 세계의 톨킨 덕후들이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거의 장인에 가까운 마인드로 최대의 가용 대자본과 현존하는 최상급 기술들을 모두 쏟아부어 만듦으로써 극한까지 관객을 동원하고 그만큼의 수익을 내는 게 컨셉인 이 시리즈를 다만 '아동 대상 판타지 물'로만 국한시키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접근이다. 그렇다면, 동일 컨셉으로 이미 기록적인 흥행몰이를 하고 비평가들의 평까지 좋았던 반지의 제왕에 처음부터 끝까지 플롯을 종속시키는 것도 괜찮은 접근이다. 그 예로, 호빗 원작에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프로도가 레드북을 기록하고 있는 빌보의 이야기를 듣는 도입부 씬. 최근 반지의 제왕 영화 시리즈를 재주행한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이 초기 상황은 반지의 제왕 시작 시점인 빌보의 생일 잔치 직전이다. 프로도에게 옛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우선 관객들에게 소린과 그가 이끄는 드워프들의 과거사 및 소린의 열망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를 전달해주고, 현재로 돌아와 프로도가 간달프를 마중나간 뒤(이 역시 반지의 제왕 1부 시작 시점과 이어진다) 담배를 피워물고 60년 전의 모험을 본격적으로 회상하는 식으로 반지의 제왕 영화 팬들에게 우선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원작에서 빌보는 드워프들이 떠난 다음 날 아쉬움 반 안도감 반의 심정으로 뒷정리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간달프에게 "왜 아직 출발 안하고 미적대고 있냐"고 귀잡혀서 끌려가는데(간달프가 어디로 오라고 쪽지를 남겨뒀는데 안 봤냐고 따져묻자 14명 분 설거지 하는 것만으로도 빡치는데 쪽지가 눈에 들어오겠냐고 불평하는 장면이 웃겼기 때문에 기억한다) 영화에서는 어린 시절의 모험심을 다시 떠올리곤 얌전히 자기 발로 쫓아가는 걸로 바뀌었다. 중간에 뛰어가는 빌보에게 깜짝 놀라 물러나는 호비트 농부는 60년 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 일행이 떠나는 걸 보며 흐뭇하게 전송해주는 그 아저씨로 추정. 드워프들과 합류해 길가던 중 손수건 안 챙겨왔다고 당황하는 깨알 같은 원작 재현에 흐뭇.

 

간달프가 "파란색이 둘인데 이름이 기억 안나"라고 하는 거 보고 알라사르랑 팔란도가 좀 존재감이 없긴 하지... 생각하며 빵터지던 와중에 라다가스트가 갑툭튀, 그가 나온다는 걸 전혀 모르고 봤기 때문에 헉했다. 하지만 명색이 마이아 씩이나 되면서 고작 거대 거미 정도에 ㅎㄷㄷ하고, 뒤이어 돌 굴두르에서 나즈굴(훗날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앙마르 윗치킹으로 추정된다, 그냥 나즈굴 A였다면 60년 뒤 웨더톱에서 나즈굴 전원과 싸워 후퇴시킨 간달프와 너무 비교되서 불쌍해지니 윗치킹이라고 생각하련다)과 투닥투닥하다가 아직 힘이 덜 회복된 사우론을 보고 토끼 마차 타고 죽어라 튀는 걸 보며 안구에서 육즙이 흘렀다(...) 이건 원작에도 없던 장면인데 토끼 마차랑 몸 개그 보여주려고 나왔냐ㅠㅠㅠㅠㅠㅠㅠ

 

트롤들과 만났을 때, 원작에서는 그냥 빌보가 '어떻게 잡아 먹는 게 제일 맛있냐'는 화두를 던져 아침이 올 때까지 서로 조리법을 두고 싸우게 유도해서는 햇빛에 돌이 되도록 시간을 끌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영화에선 간달프 빼고 전원이 붙잡혀 굴욕을 당하다가 빌보가 시간이나 좀 벌던 중 간달프가 멋진 장면을 독식하는 걸로 바뀌었다(그리고 간달프의 이 '아침 햇살과 함께 멋진 장면 독식하기'는 60년 뒤 헬름 협곡 전투에서도 유감없이 과시된다).

 

리븐델 입성 씬에서, 원작에서는 그냥 엘론드가 저택에서 일행들을 맞이해주는 걸로 나오는데 영화에선 엘론드가 걍 예지력만 좀 있는 딸바보 뒷방 늙은이가 아니라 여전히 말 타고 활 쏘고 칼질하는 현역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는지, 등장씬이 좀 더 푸쉬를 받았다. 사루만과 갈라드리엘이 여기서 등장하는 것도, 원작에서도 없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두번째로 헉했다. 사실 갈라드리엘이 굳이 나와야 할 이유는 없긴 한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반지의 제왕과의 연계성 강화 겸 팬 서비스로 보인다. 사실 그 동안 내내 머릿속이 '오오 갈라드리엘 마님은 이 때도 여전히 아릿다우시고도...'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60년 뒤 사루만의 타락 플래그는 여기서 이미 암시된다(간달프가 사루만을 두고 우리들 중 가장 훌륭한 마법사라고 띄워주면서도 '그는 위대한 힘만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서 은근히 디스한다).

 

안개 산맥에서 빌보가 일행들과 떨어지고, 드워프들이 고블린들에게 끌려가 굴욕 당하는 동안 절대반지를 득템하고 골룸과 만나 수수께끼를 주고받은 뒤 탈출하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던 장면이었는데 아쉬움이 많다. 반지의 제왕 영화에서는 빌보가 반지 줍고 "이거 뭥미?" 하는 동안 골룸이 크아아읆;ㅇ렇;ㅁ흠;ㄷ허;ㅁㅎㄴㄱ하ㅓ;ㄱ허;ㅁ 하는 거 듣고 흠칫해 얼떨결에 반지를 주머니에 쑤셔넣는 걸로 묘사됐는데, 당시엔 호빗 영화화는 아직 계획에 없었을테니(나중에 호빗도 찍고 싶다 하는 생각 정도야 있었겠지만) 그 묘사와 다르다는 건 넘어가 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설렁설렁 넘어갔잖아!!!!! 원작에서 골룸은 빌보와 수수께끼를 주고받으며 지상에서 살았던 시절을 희미하게 떠올리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지상에서 온 빌보에 대해 미움과 맹렬한 굶주림을 느낀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골룸이라는 존재의 비참함과 혐오스러움,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불쌍함에 크게 일조한다. 60년 뒤 그가 맡게 되는 중요한 역할을 감안해서라도 이 시퀀스는 좀 더 힘을 줬어야 했다.

 

1부의 보스로 나오는 아조그. 원작에서의 아조그는 이미 한참 전에 죽었는데 나름 포스있게 나온다. 기왕 연계성을 강화하는 김에, 소린에게 '네 놈의 목은 내가 취하고, 피는 우리의 진정한 주인에게 바치겠다' 같은 대사를 하며 은근히 사우론의 존재를 암시해도 좋았을 거 같은데, 그냥 리븐델에서 간달프가 '스마우그가 우리의 적과 동맹을 맺을 경우 커다란 재앙이 될 거요'라는 식으로 지적하자 엘론드가 '적? 누구? 사우론은 이제 없고 세상은 평화롭소'라고 말해 버려서 좀 그림이 안 사는 느낌. 흠.

 

마지막에 독수리들을 불러 위험에서 빠져 나오는 시퀀스에서는 속으로 오오 과이히르 오오를외쳤다. 호빗 마지막 부분에서 투입되어 다섯 군대의 전투를 끝낼 최종 병기 역할도 할테고, 60년 뒤에는 간달프를 아이센가드에서 구해내기도 할테고, 최종 임무까지 완수한 프로도와 샘을 운명의 산에서 회수해 오는 역할도 하고... 대사 한 마디 없는 주제에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독수리들이 활약하는 듯하다.

  

소린의 캐릭터 묘사는 꽤 만족스러운 편. 참나무 방패 소린이라는 인물은, 톨킨의 드워프 상을 대표하는 아이콘에 가깝다. 부하들 뒤에 숨는 법 없이 늘 위험에 앞장서는 의리의 소유자에 책임감 강하고 성실하지만, 완고하고 탐욕스럽고 독선적이기도 하다. 원작에서는 심술쟁이에 욕심꾸러기라는 느낌이 더 부각됐는데 영화에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양 쪽 다 균형 있게 묘사되는 편. 다른 드워프들은 원작에서도 그랬다시피 대체로 존재감이 좀 희미하긴 한데... 뭐 이거야 원작에서도 그랬으니 어쩔 수 없지. 임의로 숫자를 줄이거나 했으면 전 세계의 톨킨덕후들이 분노했을 거다.

 

전체적으로, 나올 거 다 나오고 빠질 건 적당히 빠졌다는 느낌. 두번째 감상 때는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거 같지만, 지금은 그저 마냥 좋다 모드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고 있다. 내가 그렇지 뭐(...) 이제 다음 편에서는 베오른과, 에스가로스의 바르드가 등장할 듯. 아참, 스란두일도 나오겠군. 레골라스도 곁다리로나마 나와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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