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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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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는 자리에 앉아, 주머니에서 5전 백동화를 골라 꺼내면서, 비록 한 번도 꿈에 본 일은 없었더라도 역시 그가 자기에게는 유일한 여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여 본다. 자기가 그를, 그 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던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구보가 제 감정을 속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여자를 만나보고 돌아왔을 때, 그는 집에서 아들을 궁금히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에게 '그 여자면' 정도의 뜻을 표시하였었던 것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구보는, 어머니가 색시 집으로 솔직하게 구혼할 것을 금하였다. 그것은 허영만에서 나온 일은 아니다. 그는 여자가 자기 생각을 안하고 있는 경우에 객쩍게스리 여자를 괴롭혀 주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구보는 여자의 의사와 감정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러나 물론 여자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하여 오지 않았다. 구보는 여자가 은근히 자기에게서 무슨 말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도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제 자신 우스운 일이다. 그러는 동안에 날은 가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흥미를 구보는 잃기 시작하였다. 혹시 여자에게서라도 먼저 말이 있다면...

그러면 구보는 다시 이 문제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게다. 언젠가 여자의 집과 어떻게 인척 관계가 있는 노마나님이 와서 색시 집에서도 이편의 동정만 살피고 있는 듯 싶더란 말을 들었을 때, 구보는 쓰디쓰게 웃고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희극이라느니보다는, 오히려 한 개의 비극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구보는 그 비극에서 자기네들을 구하기 위하여 팔을 걷고 나서려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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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해지자. 내가 그 분께 품었던 그 모든 감정, 그 모든 인식들이 어쩌면 단순한 나만의 환상이었을 수도 있다. 박태원은 이 작품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마저도 단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애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난, 아마도 그런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나 자신의 모습과는 별도로 그것이 정말 제대로 된 '사랑'은 아닐 것이다. 난, 그 분을 사랑할 자격이 없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지금이 더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 저 구절을 읽으며, 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상황을 정리해보자. 1)그 분은 남자친구분이 있고, 곧 결혼하실 모양이다. 2)내가 그 분에게 가졌던 감정이 어떤 것이건 이제는 의미가 없다. 3)그 분은 내 감정을 어느 정도 눈치채셨을 가능성이 높다. 4)현재 상황에서는 그 분도 아무래도 내가 의식이 되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건 부담스러워하실 것이다.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면 그것도 나름 가슴아픈 일이지만 일단 이 가능성은 논외로 한다. 5)반했던 분에게 그런 불편을 끼쳐드리고 싶지는 않다. 내게 있어서도 그 분과 자주 마주치면 마음을 정리하기가 어려워진다. ->결론)당분간 그 분을 보지 않는 게 가장 합리적이고 서로에게 유익한 해결책이다.

.....그래도, 그 분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번 추석 때 그 분은 어떻게 보내실까, 양가 부모님들 모시고 상견례라도 하시려나.

...............


이쯤 해두자. 더 이상 구질구질해지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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