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관련 수업 레포트를 쓰다 생각난 생뚱맞은 것

 

비 온 뒤  / 구민숙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또르르! 굴러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

그것 훔쳐보려 숫총각 강낭콩 줄기는 목이 한 뼘 반이나 늘어나고

처마 밑에 들여 놓은 자전거 바퀴는 달리지 않아도 신이 났다

빗방울의 허물어지지 않은 둥근 선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서른여섯 나는, 물컹해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며

녀석들을 살짝 만져보고도 싶다

그래, 내게도 저런 가슴이 있었지

열일곱,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주눅 들지 않은 노래로 충전되어

금방이라도 둥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던

나는 바구니에 담아 내 온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목욕 수건들과 75 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

심사평:

  <비 온 뒤>는 우선 깨끗하게 정돈된 작품이며 메시지가 분명하고 시적 논리가 합당하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들의 결점을 충분히 뛰어넘고도 남는 작품이었다.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또르르! 굴러/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라는 첫 부분의 표현들에서 보듯 이 시는 어느 날 우연히 목격된 ‘빗방울들’에서 시적 사념을 출발시켜 그것을 약동하는 언어의 충전으로 끌고 나가다가 마침내 그것을 ‘시로써’ 터트릴 줄 아는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선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괜스리 어렵거나 추상적이거나 한 표현 한 구절 없이 자기 소리를 하나의 작품 안에 오롯이 담아낼 줄 아는 그 시적 절제 또한 믿음직스러웠다. 한마디로 싱싱하고 단정하며 마지막 연에서 보듯 장난기 어린 웃음이 배시시 행간 밖으로 삐어져나올 듯한 작품이다. 선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면서 그의 감각이, 그의 언어가 사념과 철학을 동반하며서, 오늘의 유행에 주눅들지 않으면서 더욱 깊은 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오세영, 이시영)

    마녀들의 밤(Walpurgis Night)

  금욕을 중심으로 삼는 기독교적 윤리가 지배하던 중세의 밤, 민간에는 마녀의 전설이 퍼졌다. 매년 4월 30일 밤이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그 댓가로 초자연적인 힘을 손에 넣은 마녀들이 전신에 마법의 고약을 바르고서 하늘을 나는 지팡이를 타고 산 중턱에 모여서 음탕하고 신성모독적인 회합을 벌인다는 음산한 전설. 민중들은 역병을 퍼뜨리고 땅에 저주를 내린다면서 그들을 두려워했고, 교회는 신앙의 이름을 걸고서 마녀의 색출과 탄압에 앞장섰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숱하게 많은 무고한 이들-특히 과부들과 노인들-이 살해당했다.

  근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해 보면 이 비극은 당시의 정치권력에 깊이 개입하며 스스로를 신앙의 공동체로서만이 아니라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힘의 축으로 자각하고 있던 교권의 독선 및 오만과, 계몽되지 못한 민중들의 무지와 몰이해가 더불어 빚은 사태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한 가지 해석을 추가하고 싶다.

  종교적 원형에 의하면 하늘과 태양은 남신이며, 대지와 하천은 여신에 해당한다. 풍요로운 자연은 여신의 자궁에서 태어나 부패하지 않고 살아가는 생명력 그 자체이며, 이와 같은 인식은 발렌도르프의 비너스와 같은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대인들은 성과 축제를 통해 자연에 배례를 바쳤고, 그 기저에는 다산과 번영을 기원하는 고대인들의 에로티시즘이 깔려 있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서 모든 인간의 의식 바탕을 이루는 원초성 그 자체로 볼 수 있으나, 중세 무렵 이러한 자연 숭배는 기독교의 계율과 엄격한 수직적 사회 질서로 인해 ‘음탕하고 이교적인 행위’로 취급당했다. 어쩌면 그 당시의 민중들은, 마녀로 몰린 이들을 지켜보면서 농토와 신분에 묶인 자신들의 처지와 비교해 은밀한 대리만족과 질투심을 동시에 갖지 않았을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극히 당연하고 절대적인 질서로 받아들여져 온 ‘하느님 중심의 질서’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래서 마녀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그들이 부분적으로나마 간직하고 있는 원시성을 동경하고 있던 게 아닐까.

  「비온 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들은 상당히 에로틱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시어들이다. 그러나 그 에로틱함은 욕정을 자극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마치 초원을 달리는 영양 무리나 강물을 거슬러 몸을 솟구치는 연어의 몸짓 등에서 느껴지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성격의 것이다. 시적 화자는 비가 세상의 지저분한 표면을 한 꺼풀 씻어낸 뒤의 광경을 바라보면서 본능적으로 그 원시성을 깨닫는다. 화자가 꿈꾸는 원시성은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열일곱 살 무렵이다. 화자는 서른여섯의 나이를 먹고 세파에 익숙해져 있는 도시인이지만 그 본능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마치 탄 사람도 없는 자전거 바퀴가 혼자서 신나하는 것처럼. 화자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슴은 축 쳐져 있고, 한 손의 빨래 바구니엔 현재의 일상을 담어둔 스스로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그 부끄러움은 태초의 야생성을 희구하던 중세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화자의 부끄러움은 현대인 모두가 내면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는 성격의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