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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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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만화에 있어 슈퍼 히어로 장르는 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초인적인 힘과 지혜, 그리고 정의감을 지닌 비범한 영웅이 절대다수의 일반인들로 구성된 사회의 법과 질서와는 별개로(때로는 노골적으로 대립하며) 역시 초인적인 힘과 지혜, 그리고 사악함을 지닌 비범한 악당과 대립한다는 기본적인 플롯이 제시된 지는 100여 년이 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슈퍼 히어로 장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평소에는 일반인들 틈에 섞여 생활하다가 적이 나타나면 행동에 나선다는 이중적인 정체성, 다종다양한 온갖 초능력과 특수 장비, 특유의 개성적인 복장과 같은 요소들을 최초로 정립한 슈퍼 히어로는 슈퍼맨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로 다양한 출판사와 거기 소속된 수많은 작가들이 실로 방대하기 그지없는 세계 설정을 바탕으로 해 온갖 슈퍼 히어로와 그와 대립하는 슈퍼 빌런들을 창조해냈으나 2014년 현재 미국 슈퍼 히어로 장르를 이끄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두 회사는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 등이 속해 있는 DC 코믹스와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스파이더맨, 헐크, 그리고 X-멘들이 속해 있는 마블 코믹스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회사는 거의 대등한 인기와 인지도를 누리는 라이벌이며(DC 코믹스 쪽이 더 역사가 오래되고 원작 만화에 대한 팬덤 충성도가 높은 편이지만 영화화 및 캐릭터 산업을 비롯한 프랜차이즈 분야의 흥행성에 있어서는 마블 코믹스 쪽이 좀 더 앞선다) 현실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각자의 대표적인 슈퍼 히어로들을 통해서도 서로 간접적인 긴장 관계를 맺고 있다. 본 글에서는, 특정한 단일 영화나 캐릭터에 대해 다루는 대신 DC와 마블 코믹스의 그러한 긴장에서 비롯한- 서로 비슷하되 대조적인 요소가 강한 슈퍼 히어로들 중 DC 코믹스 소속의 배트맨과 마블 코믹스 소속의 아이언맨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 위해, 양 쪽 다 만화 원작을 영화화한 것과 그에 부속된 설정 자료들을 기준으로 한다).

 

일견 배트맨과 아이언맨은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 둘 모두 초능력이나 비범한 출신 성분 같은 게 없는 평범한 인간 출신이고, 둘 모두 어두운 과거가 있고, 둘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산가이며, 둘 모두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고, 둘 모두 그러한 재력과 두뇌를 활용하여 슈퍼 히어로 활동을 한다. 그러나 둘의 공통점은 딱 거기까지다.

 

배트맨- 즉 브루스 웨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돈과 웨인 엔터프라이즈 회장이라는 위치, 그리고 응용과학부서를 통해 만들어낸 배트맨 슈트나 텀블러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슈퍼 히어로 활동을 하기 위한 도구이며 유용한 플러스 알파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에게 있어서 아이언맨 슈트는 슈퍼 히어로로서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맨인가 아니면 슈트가 아이언맨인가라는 이 의문은 아이언맨3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둘의 첫 번째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브루스 웨인은 장비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온갖 무술의 고수이며, 다양한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하고, 범죄 심리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과 추리력, 온갖 범죄자와 슈퍼 빌런들에 대한 방대한 정보력, 전술 능력을 갖고 있다. 배트맨 슈트의 방탄 기능이나 활공 능력 같은 것은 총으로 무장한 범죄자들과 도심 한 복판에서 싸운다는 그의 특성과 맞물려 유용한 도구로 작용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범죄자들에게 공포를 심어준다는 상징적 의미가 훨씬 더 크다. 하지만 토니 스타크는 그렇지 않다. 영화 속의 토니 스타크는 자신감 넘치고 유들유들한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속으로는 자신이 근본적으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며 주변에 넘쳐나는 온갖 초능력자와 외계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아이언맨3초반에서 중반까지에 걸쳐, 어벤저스에서의 사건에 대한 악몽에 시달리며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이는 묘사가 나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도 나름 열심히 몸을 단련하고 정보 수집도 게을리 하지 않지만 슈트가 없는 자신은 그러한 존재들 앞에서 철저히 무력하다는 두려움이 적어도 아이언맨3초반의 그를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되며, 그러한 불안에서 도피하기 위해 그는 끝없이 기존 슈트를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슈트들을 만들어내며 생각만으로 순식간에 슈트의 파츠들을 불러내 입을 수 있도록 하는 연구에 몰두한다.

 

둘은 성격도 완전히 다르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다크 나이트에서 집사 알프레드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자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에게는 한계가 없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토니 스타크는 역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아이언맨2에서 팔라듐 중독으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방탕하고 무절제한 삶을 지속하며 죽음을 기다린다. 둘 모두 고뇌를 내면으로 감추고 강한 척하는 외강내유형 인물이지만, 브루스 웨인의 경우 평소의 방종함은 배트맨으로서의 본질을 감추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 미녀를 끼고 다니며 호텔 로비의 분수대에서 수영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머리 속으로 오늘 밤 잡아야 할 범죄자를 생각하고 있다. 반면 토니 스타크의 경우 허무주의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탕아에 가깝다. 자신이 아이언맨이라는 걸 이미 공표한 토니 스타크는, 양쪽 모두에서 나타나는 화려하고 자기 현시욕 강한 모습(아이언맨 슈트의 그 눈에 띄는 컬러링을 보라!)을 통해 내면의 두려움과 나약함, 고독감을 감추려고 한다.

 

결정적으로, 시리즈 마지막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브루스 웨인은 원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었다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그를 이겨내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한 번 자신을 철저히 패배시킨 베인에게 대항할 힘을 얻는다. 그러나 역시 시리즈 마지막인 아이언맨3에서 토니 스타크는 자신의 두려움이 구현된 상징이나 다름없던 슈트들을 모두 파괴하고서 겁 많고 나약한 스스로를 세상에 대해 열어 보인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언맨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의식을 확립한다.

 

 

스파이디 불쌍해요 스파이디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