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좀 해봤는데, 예상대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완전히 마음이 뜬 모양이다. 다른 여자 있다는 거 진짜냐고 여쭤봤는데 니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고 하시길래 아들인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면 누가 신경써야 되냐고 짜증냈다.
재혼할 수도 있다고 하시길래 나는 어떻게든 어머니와 법적인 부부 관계는 유지할 수 없냐고 했는데 역시 무리인 모양이다. 그 여자분도 전처의 아들인 내가 불편할 텐데 그거 어쩔거냐고 물어보니까 만일 널 껄끄럽게 대한다면 자신이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서로 알고 지내다 보면 마음을 열고 잘 지낼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나쁜 가능성만 생각하지 말라는 등의 아무 말을 하시길래 살다 보면 나쁜 방향의 가능성부터 고려하고 준비해 두는 게 더 낫다는 거 아버지도 아실 거 아니냐고 하니까 아무 말 못하시더라.
오면서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이미 마음이 뜬지 오래된 어머니는 더 이상 신경 안 쓰고, 나름 사랑하고는 있는 아들과 새 여자와 셋이서 함께 잘 지내고 싶은'모양이다. 하지만 난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어머니도 종교 관련해서 다소 거북스런 면모가 없지는 않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그 여자가 훨씬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생판 모르는 사람이 명절 때마다 와서 제사 지내는 걸 보고 싶지는 않다.
아버지와 헤어지기 직전, '나는 그 여자 보고 싶지 않다, 아버지 삶이니 강요는 못하겠지만 제가 실망할 선택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 버리셨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버지와 절연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친가 쪽 친척들과의 관계도 자연스레 소원해지겠지만 뭐 어쩔 수 없는 문제고. 이번 건에 있어서는 양보하고 싶지 않다.
신의를 바칠 친구도, 절조를 바칠 연인도 가지지 못할 거라고 늘 생각해왔다. 이제는 가족도 박살날 판이구나,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