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가올 눈보라를 예고하는 이 차디찬 새벽 속에서, 우리는 패배했다.
왜 야권이 이번 대선에서 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여기저기서 분석이 나오고 있다. 혹자는 한국 정치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건 이념이 아닌 지역이며, 최대 인원을 갖고 있는 지역인 경상도의 결집이 그 일등공신이라고 한다. 혹자는 개발과 성장으로 대변되는 박정희 신화가 자유와 진취로 대변되는 노무현 신화보다 강했다고 한다. 혹자는 경제난과 사회 불안이 심화되며 미래를 두려워하게 된 젊은 세대가 기존의 보수권에 투항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모든 분석들은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이번 대선에서의 패배는 내 개인적으로도 뼛속까지 쓰라리다. 나이가 30이 넘어서도록 알량한 재주라고는 글줄 좀 쓴다는 것 뿐이며, 밥벌이로 삼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그 글재주와 지금껏 모아 온 잡다한 지식들 뿐이다. 반드시 작가가 아니더라도 문화예술계 쪽으로 밖에는 취업길이 없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정부는 반드시 예술과 문화, 근본적으로는 표현의 자유를 억눌렀다. 바로 아래 글에서, 나는 ㅂㄱㅎ가 '읽을 수 있는 적이기에 두렵지 않다'고 적었다. 그러나 19일 밤 10시 경, ㅂㄱㅎ 당선이 확실시 되는 순간 나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억눌렀고 그 날 밤새 술에 취한 머리로 멍하니 온라인 게임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분명 최악을 각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서 희망을 갖고 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희망이 더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이 이기기 위하여 금산분리 완화, 순환출자 제한 완화 등의 새누리당과 똑같은 공약으로 거대 재벌을 끌어 들이고 대형 언론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면, 그래서 승리했더라면(물론 그랬어도 못 이겼겠지만) 나는 지금보다 더욱 절망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리고 패배했다. 51.6%가 ㅂㄱㅎ를 찍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을 제대로 이해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ㅂㄱㅎ가 독재자의 딸이건 말건,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그대로 계승하고 아버지의 이름에 금칠을 하건 말건, 반대파에게 무자비하고 억압적이건 말건 그들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그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슬퍼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 51.6%들을 증오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 ㅂㄱㅎ가 현대 한국의 시대정신이다.
문재인과 민주당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MB가 모은 이상의 표를 끌어 모았다. 많은 진보가 눈 앞의 거악을 막기 위해 이소연 후보와 김순자 후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문재인 전 후보에게 비판적 지지의 표를 보냈다. MB의 꾀주머니로 불리던 윤여준은 문재인이 통합을 이룰 그릇이라고 판단하고 민주화 세력에게 빚을 갚겠다는 선언과 함께 그에게 갔다. 이정희는 ㅂㄱㅎ 당선만은 막겠다는 일념으로 ㅂㄱㅎ에게 최대한의 극딜을 쏟아 부은 뒤 대선을 불과 며칠 앞두고 사퇴했다. 입장 상 적극적이래야 적극적이기 힘든 위치에 있는 안철수도 "문안 인사 드린다"고 국민들에게 외치며 소극적으로나마 힘을 보탰다. 그리고 그 모든 움직임 뒤에는 지난 5년 간 내내 쌓여 왔던 분노와 피로, 그리고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문재인과 그에게 힘을 실어준 많은 이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정면의 진검 승부에서 패배했고, 그 검은 부러졌다.
불의하지 않은 한도 내에서 모든 수단에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패했다는 것은 나쁘지 않다. 불가피한 패배라면, 최소한 올바른 방식으로 패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올바르게 패했다. 희망의 근거는 되지 못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이 5년 간의 겨울은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추울 것이다. 마침, 오늘은 마야 달력에서 예언된 '마지막 날'이다.
모든 희망의 끝에서, 새로운 희망이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PS=
...군사 '혁명'이라. 광주 민중항쟁은 어떤 이름으로 바뀔까. '광주 폭동'? 아니면 그저 '광주 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