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바 관련으로 근로 계약서를 본인이 직접 써야한다길래... 대전에 갔다 왔다.
건성으로 휘릭휘릭 서명하고 과사에서 늘 하던대로 "조교님 예뻐지셨네요, 남자친구 생기셨나요?" 같은 헛소리를 하다가.... 대학원 다니는 여자 선배를 오랜만에 만나서 "오랜만이네요, 선배님 아직도 남자친구 없으시면 저는 어떠함? 전 연상 취향임" 하다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보고 속으로 아차 싶었다. 얼렁뚱땅 넘기고("아니... 결혼하셨던가요, 축하드립니다")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어차피 진심으로 하는 소리도 아닌데 뭘.... 어차피 농담이라는 걸 상대도 아니까.... 나를 좀 이상한 놈으로 보겠지만 애초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뭘....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니까 상처 받을 일도 없어... 진심이니 상처 따위를 받는 거야... 그것도 한 두번이지 이제는 지겨워.... 나이 30먹고 마음의 상처 따위로 침울해 하는 것도 찌질하고 한심해.... 나는 괜찮고 아무렇지도 않아.... 진심과 선의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게 빛을 보는 일은 별로 없어.... 차라리 그럴 바에는 농담과 헛소리로 대충대충...... 대충.... 대충...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대충... ....아 씨발.........
과사에서 단 둘이 있을 때, 조교님이 정색하고서 '니가 농담삼아 하는 말인건 아는데 남들 앞에서 자꾸 그러니까 불편하더라, 그것 때문에 애들 사이에서 네 이미지도 안 좋고' 하시길래 다신 안 그러겠다고 사과했다. 내가 확실히 좀 지나쳤다 싶긴 하다. 어쩌면 내가 작업 멘트 날리고 하는 건 그저 픽션에서 자주 묘사되는 '옛 사랑에 상처 받은 남자가 일부러 지골로 짓을 하며 공허감을 메우려 하는 심리'를 무의식적으로 따라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뭐... 어쨌든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겠다, 일단 나한테 그런 건 안 어울리기도 하고.
게다가... 조교님한테는, 내가 예전에 반했던 사람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지금도 지갑에 그 분 사진을 넣고 다니는 주제에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 그 분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값싸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 같다.
2)
조교님과 단 둘이 있을 기회를 포착해서(...정확히는 도중에 자꾸 과 애들이 와서 끊기는 바람에), 일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지난 2월에 졸업한 학교는 졸업자 취업률 때문에 태클이 걸려 부실 대학으로 선정되어 있다. 아마도 내가 애초부터 '대외적으로 조교 노릇을 해보지 않겠냐'고 조교님에게 제안을 받은 건 어떻게든 공식적인 취업자 수를 늘리려는 대학 당국의 필사적인 발악 때문일 것이다.
"네 후배 중에 조교 일에 잘 맞는 애가 있어. xx라고, 알지?" "네, 별로 친하진 않지만 똑똑하고 센스도 좋고 저보다 조교 일에 잘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해요." 걔가 이제 4학년 2학기인데, 학점은 되는데 성적 때문에 조교 지원이 안 되거든. 걔는 우리 학교 교직원이 꿈인데, 조교 일을 하면 그만큼 경력으로 인정된단 말이야.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네 이름을 걸어놓고 걔한테 업무 인수 인계할 생각이야. 내가 보기엔 너는 적성이 취직 말고 어디까지나 소설 쪽이고..." 맞게 보셨어요. "그러니까, 네가 3개월 동안 공식적으로 이름을 걸어놓고, 과 애들 사이에서도 나 다음 조교가 너인지 걔인지 헷갈려 하는 애들이 많거든. 방학 중 가끔 나와서 전화 정도만 받아주고, 그 동안 나는 업무 인수인계를 걔에게 하고... 계약서와는 별도로 너는 3개월 동안 이름만 빌려주고 조교 일은 걔가 하는 거야."
객관적으로 보자면 아무 것도 문제될 게 없다. 조교님은 다음 조교가 걔인지 나인지 헷갈리는 과 애들 상대로 설득하느라 뒷골이 땡기시겠지만 스스로 감수한 일이고, 나는 실질적으로 3개월 간 거의 놀고 먹으며 100만원이 좀 넘는 봉급을 받으며 내 소설 쓰는 데만 집중할 수 있고, 걔는 스펙을 쌓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내가 걔한테 이름만 빌려주고서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돈을 받아 챙긴다는 것은 무척이나 마음에 걸린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돌아오면서 고민하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3개월 뒤에는 걔 계좌로 내 봉급을 자동이체 처리해야 되는데 내가 300만원 정도 받는 걸 따로 모아놓고 그걸 같이 송금해주면 되잖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 나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미래를 동시에 보고 있다고. 어느 한 쪽의 미래에서는 그 돈을 받아 챙기고서는 어머니 선물도 사 드리고, 자격증 시험비도 내고, 컴퓨터도 바꾸고서 '나와 조교님, 걔 셋이 전부 납득했으니 서류 상으로는 내가 조교일 뿐, 내부적으로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의 미래에서는 내가 걔한테 그간 모아둔 3개월치 봉급을 보내주면서 '이 돈은 내가 아니라 내 이름을 걸고 실질적으로 일한 네가 가질 자격이 있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단 한번도 스스로가 그렇게 도덕적이라거나 고결한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하지만 나 자신이 번 돈도 아닌, 원래는 남이 받았어야 할 돈을 받으며 무위도식하는 나 자신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지금의 나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어머니에게 용돈 받으며 방바닥이나 긁는 30대 백수다. 그 돈을 받으면 어머니 선물도 사드리고 친척들 사이에서 '나도 사회인으로서 내 몫을 하고 있음'이라는 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은 내가 가져도 되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3개월 간 나오는 봉급을 쓰지 말고 따로 모아두고서, 이 3개월이 끝난 뒤 걔한테 걔좌이체 신청을 하며 그 돈도 같이 보내 주면 나는 좀 가슴아플 망정(...) 윗선에서 시달리는 조교님한테도 민폐를 안 끼치고, 걔한테도 떳떳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씨발 그냥 내가 그 돈 먹어도 아무도 나한테 뭐라고 안 할 텐데 내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했지'하며 데꿀멍거린다 해도, 그 와중에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는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도록 행동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어머니에게 설득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이 없다.
.......
지금 내 입장이 대단히 미묘하긴 하다. 그냥 '나 안해!' 해버리면 내 자존심은 만족시킬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내게 300여 만원이 적은 돈이 아니라는 점도 그렇거니와 걔가 커리어를 쌓을 기회를 뺏는 셈이 된다. 조교님도 나 이전에 다른 졸업생들에게 연락해 봤다고 하셨었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받아들여 버리면... 한참 동안이나 고작 300여 만원에 내 명예를 팔았다는 생각에 지독하게 우울할 것이다. 법조인 같은, 사회적으로 '명예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타락하는 이유 중 하나가 기왕 명예를 잃었으니 돈이라도 챙겨야겠다는 심리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심리는 '명예'라는 관념이 자기 내면에 있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굽신거림에서 나온다는 착각 때문이다.
내 명예는 나만의 것이다. 오직 나만을 납득시키고 만족시킬 수 있는, 일종의 아집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집조차도 나의 것이다.
.....ㅅㅂ 몰라 썅, 3개월 뒤면 내 입장도 확고해지겠지. 그 동안은... 돈 들어와도 아껴둘까 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