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 CLOUD

  • Total :
  • Today :  | Yesterday :



난, 절대적이고 완전한 자유라는 개념을 믿지 않은 지 오래됐었다. 무한한 자유라는 것은 무한한 구속이라는 것과 같다. 이 세계를 명징하게 알고,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자유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어떠한 자유도 없는가?

인간은 살아가면서 다른 인간과 끝없이 교류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그 모든 경험은 개인에게 있어 진실한 것이되, 그는 어디까지나 그 개인에게 있어 그러할 뿐 다른 인간에게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속한 환경과 입장이라는 큰 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그 틀은 각 개인마다 모두 다르기에 그 진실은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육체가 정신을 구속하고, 언어가 사유를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유는, 다만 자신이 속한 현실- 만인에게 공평하게 냉혹한 우주에 속한 채, 영원히 고독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이라는 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자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가를 두고 벌이는 투쟁이 고작이라고 믿었다.
     
근대 기독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자유 의지다. 신은 인간이 선할 것을 바라되, 많은 것을 겪고 배우고 생각한 인간이 종국에는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써 선을 택해야만 비로소 가치가 있기에 악을 선택할 자유 역시 주었다는 게 그것이다. 다만 악을 택한 인간은 최후 심판의 그 날에 단죄받을 것이다. 그것은 무한히 선하고 인자한 신이 창조한 우주에 왜 이토록이나 많은 악과 슬픔, 허무가 횡행하는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내가 다시 신을 찾은지도 꽤 여러 해가 지났다. 신을 철저히 부정하고 혐오하던 시절의 기억에 비추어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지난 몇 년 간 항상 해오던 자문, 내게 과연 그 '투쟁에의 자유'가 있는가에 대한 답은... 일차적으로는 긍정이다.

내가 무언가 심각한 불법-이를테면 살인 같은-을 저지른다고 가정하자. 난 물론 잡혀서 인간의 법에 따라 재판 받을 것이고, 죄에 따른 응분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난 나의 행동이 크나큰 죄악임을 알며, 그 형벌을 순순히 감내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도로, 그 불법이 오랜 기간의 숙고와 고민 끝에 내려진 결정- 사고나 우발적인 이유에 의한 게 아니라 나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였다면 나의 내면에서 그에 대한 고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난 나의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그게 스스로를 향한 그 의문에 대해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긍정하는 이유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거꾸로 하면,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방대한 사유와 내적 갈등이라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구속'이 요구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아는 것은 반쯤 포기한 상태다. 다만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의문은, 과연 내가 가질 수 있는 자유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가, 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욕구가 일순간의 충동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내게 주어진 자유의 일부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미,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