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8년 전에도 이순신 장군상 앞에 있었다. 그 때는 밤 10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지. 아직도 가로등 전부 끄고 전경들이 '여러분들은 지금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운운하는 방송 틀어놓고 소화기 뿌려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는 낮부터 종각역부터 이순신 장군상까지 전부 전경 버스로 틀어 막아놓다시피해서 그저 현장까지 도착하기만 하는 데에도 차 사이로 기어오르는 등 오만 지랄을 다 했는데... 그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격한 충돌이 없어서 다행이다 싶기도 한데, 그 경험을 해 본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솔까말 좀 뜨뜻미지근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명박은 낮은 자세로 섬기겠다고 해놓고 일주일도 안 되서 집회 나온 사람들을 낮은 자세로 두들겨 팼는데, 박근혜는 끝까지 그냥 쌩까고 말려고 들 게 뻔하다. ....그래도 뭐,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는 건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죽는 사람은 백남기 선생님 한 분으로도 충분하고도 남는다.
지금 상황에서 야당이 어디까지 움직여 주느냐가 제일 중요한데... 야당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가능한 선택지는 크게 봐서 둘 중 하나다.
1)끝까지 밀어붙여서 의회에서 박근혜를 탄핵시킨다.
박근혜가 강제로 끌어내리지 않는 이상 절대 스스로 물러날 인간이 아니라는 건 다들 알테고, 탄핵이 정답이긴 하다. 가능성도 제법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결국 새누리당 패거리들과도 딜을 안 할 수가 없다. 탄핵 소추 동의해 주는 대신, 책임 소재의 핵심을 박근혜에게 몰고서 새누리당 패거리들은 친박만 족치고 나머지 비박계는 적당히 넘어가준다는 식이 되겠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진짜 악의 축들이라고 보는 새누리당의 친이계 사람모양 쓰레기 새끼들은 여전히 대체로 건재하겠고. 게다가 이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헌재에서 막힐 수도 있다.
2)'대승적 차원' 운운하면서 적당히 해두고 대신 정치적 이권을 나눠 받는다
거국중립 내각 구성 제안을 받아들이고, 야권 출신 의원과 관료들을 '충분히' 꽂아넣고 아직 덜 쓴 재료들은 언론에 푸는 대신 아껴두고 향후 새누리당을 압박할 카드로 쓴다. 탄핵까지 가지 않고도 박근혜를 실질적으로 치워 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야권의 중핵을 구성하는 더민주당과 국민의당도 어디까지나 자기 권력 기반 획득이 최우선인 정치인들이라는 거다(그것만을 위해 수단방법을 어디까지 안 가리냐... 에 있어선 새누리당 놈들만큼은 아니라고 쳐도). 지금 국민들이 느끼는 이 분노는 뒷전이 되기 쉽다.
내가 보기에는 현재 상황 상 결국 2번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아무리 대구 박근혜 지지율이 5%를 찍었어도, 1번 아니면 다 빨갱이라는 교육을 어릴 때부터 뼈저리게 받아 왔고 먹고 사느라 바빠서 그게 잘못된 건지 아닌지 생각할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들은 "백번 양보해서 최순실만이 아니라 박근혜 잘못도 있다 해도 새누리당 자체는 괜찮다" 같은 소리하며 다음 대선에도 응1번 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2번으로 간다고 가정할 경우... 결국 국민들이 느끼는 분노가 뒷전이 될 거라는 저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선 문재인과 안철수를 거리로 불러내서 "이 사태에 분노한 국민들의 뜻을 최우선으로 하겠다" 정도의 메시지를 자기 입으로 말하게 해야 한다. 문재인은 공공연한 자리에서 자기 입으로 한 말을 뒤집을 정도로 뻔뻔한 인간까지는 못 된다. 안철수도 그렇고. 물론 나라고 해서 문재인과 안철수의 도덕성을 크게 기대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는 앞에서 저런 소리를 하게 만든다면 그건 고스란히 정치적 책임이 된다. 그걸 쌩깔 수 있는 건 BBK가 자기 꺼라고 말하는, 녹음도 아니고 무려 동영상이 걸려 있는 데도 자긴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뗄 수 있던 이명박 정도의 강인한 멘탈이 아니고선 어렵다. 그 이후로도 계속 국민들이 '저 새끼들이 말 안 뒤집나' 감시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써놓고 보니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원론적인 소리네.
교복 입은 학생들도 많이 보였다. 8년 전 나는, 바로 그 장소에서 풀밭에 쪼그려 앉아 놀고 있는 꼬마애들 보면서 '너희가 보다 나은 나라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고 생각했었다. 그 학생들 중에는, 그 때 그 꼬마들도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