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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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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하나가 자주 간다고 한 게 생각나서, 현장에 도착해서 혹시 왔냐고 물어보려고 전화했었는데 안 받더라(....)

 

다들 지쳐 있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는 게 공기에서 느껴졌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무엇을 하더라도 와닿지가 않고, 그저 의무감으로 한데 모여 앉아 있을 뿐. 바로 앞의 이순신 장군 동상 뒤 편 분수대에서는 초딩들이 까르륵 거리면서 뛰놀고 있는데 그 갭이 미친 듯이 쩌는 게... 한 폭의 초현실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6년 전 이맘 때 바로 여기서 촛불집회 한참 할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스크럼 짠 전경들과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는 도로에서 불과 십 여 미터 떨어진 카페 안에 앉아,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재미있는 구경을 하듯 그를 바라보던 그 시선들. 

 

저녁 무렵이 되자 대책위 소속이라는 분이 앞으로 나와서는 내일 교황께서 집전하는 시복 미사 때문에 유민이 아버님이 있는 중앙 천막 2개만 남겨두고 나머지 천막들은 일단 걷었다가 내일 미사가 끝나고 3시 쯤 다시 천막을 치기로 유가족들과 이야기가 되었다고 하자 앉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대는 분위기가 감돌더니 아줌마 한 분이 격앙된 어조로 반발했다. 이 틈에 천막들 전부 치워버리는 거 아니냐, 유가족들과 무슨 관계냐, 하는 거 보니 영 미덥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대책위 측도 유가족들의 뜻이다, 내일 3시에 다시 천막 치기로 서울시와 합의가 되었으니 걱정 안해도 된다고 반박하다가 점차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듣다가 짜증이 나서(....) 쓰레기 치우고 천막 철거하는 거 좀 돕다가 쉬다가 하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까 그 아줌마가, 내 자식들이 그렇게 될 지도 모르는 판인데 경찰들이 그렇게 무섭냐, 당장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 시큰둥하게 듣고 있다가 옆에 있던 아저씨가 하는 말 듣고 움찔했다.

 

"유가족들 뜻이라고? 나는 내 자식들이 그렇게 될까봐 불안해서 온 거야! 애초에 도와달라고 하질 말든가!"

 

 

6년 전 이 무렵 바로 여기서 촛불집회가 벌어질 때도, 청와대로 가 MB에게 우리들의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있었다. 내가 종각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가면서 본 의경들만 몇 개 소대 규모는 된다. 바로 옆 청계 광장 쪽에 있을 인원들까지 합하면 수 백 명은 족히 될 것이다. 그들이 그걸 그냥 둘 리가 만무하다. 반드시 충돌이 일어날테고, 다음 날 조중동이나 종편에서 추모가 폭력시위로 변질되었다고 난리칠 게 너무도 뻔하다. 일베 벌레놈들이 어떤 드립을 쏟아 낼지는 생각하기도 싫고. 그리고, 유가족들과 대책위,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이제 세월호를 '비극적인,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일 뿐이며 나와는 사실 별 상관 없는 흔한 사고 중 하나'로 기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간의 괴리는 더욱 더 커질 것이다.  

 

만에 하나 청와대 앞 마당까지 제지받지 않고 도착해서는 레이디 가카를 불러냈다고 치자. 난 박근혜가 유족들의 슬픔과 원한, 시위 참가자들의 다음에는 내 자식들이 그렇게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정말로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박근혜는 일부러 그걸 무시할 뿐이다. 러시아 3월 혁명 초반 '자비로운 차르에게 온정을 구하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향했던 농민들을 차르가 총칼로 진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현실에서 무슨 이말년 만화도 아니고 청와대로 간다(그리고 의경들과 좀 싸우다가 진압당한다)는 선택은 세월호 특별법 무손실 버젼을 통과시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끔 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겁이 나느냐 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의 문제일 뿐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알면서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때는 분명 존재한다. 나는 그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청와대로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저씨의 말을 듣고 내가 움찔할 수밖에 없었던 건, 세월호 참사와 특별법 제정을 위한 노력이 이 정도 수준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다음에는 내 자식들이 저렇게 당할 수 있다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나 자신부터가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 지방선거 관련해서 이 블로그에 글을 썼을 때도 그러한 논지였고. 난 청와대로 가야 한다는 주장은 귓등으로 튕겨내 버리고서 당장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하지만 같은 절박함과 위기의식을 통해서- 하지만 이미 육친을 잃고서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과 아직 잃지는 않았지만 앞날을 대비해두고 싶어 투쟁하는 사람 간의 온도 차는.... 고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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