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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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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간 같이 RPG를 해 온 지인이 집으로 와 하루를 묵고 갈 예정이다.

 

RPG는 대단히 사회적인 취미다. 오랫동안 같이 플레이를 하다 보면 굳이 프라이버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해도 어느 정도는 서로의 성격과 취향, 그리고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딱히 개인적으로 절친한 사이가 아니어도 나름 정이 붙기가 쉽고.

 

그 지인은... 지금까지 접해 온 바로는 나쁜 사람은 아니다. RPG에 있어서도 그 사람은 노련하고 실력 있는, 가능하면 앞으로도 같이 플레이를 계속하면서 배우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사람'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지가 않다. 굳이 그 지인이 아니라, 다른 누구더라도. 평소에는 누군가를 만난다 해도 일 관련이거나 뭔가 명확한 공통의 목적 의식을 갖고 있는... 어느 정도는 공적인 범주에 속하는 만남들이 대부분이니 문제될 게 없는데, 그 지인을 대할 때면 뭔가 거리 감각이 흐트러지는 느낌이 든다.

 

 

난 그 날 이후, 내가 더 이상 人間으로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한 번 더 노력했었고, 결국 또 실패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난 아직 여전히 마음 속 한 구석으로는 人間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그걸 거의 포기해 가고 있다. 이젠, 완전히 포기하고 더 이상 신경쓰지 않을 때도 됐는데.

 

그 날 이후로 지난 몇 년에 걸쳐 줄곧 생각해 왔다. 학교 동기들을 비롯해 몇 명 있는 친구들도, 어쩌면 단지 내 쪽에서만 '친구'라고 여겼던 게 아닐까. 걔들은 내 둔감함을, 눈치 없음을, 신경질적인 면모들을- 철저히 공적인 관계에서는 나름 잘 숨길 수 있지만 그 경계가 조금만 희미해지면 튀어나오는, 내 엉망진창인 사회성을 그저 참아주고 있던 게 아닐까. 앞에서만 친한 척하고 뒤에서는 날 비웃거나 짜증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거기까지였던 게 아닐까. 만일 아니라 해도 나 자신의 문제에 짓눌린 나머지 상대의 입장과 감정을 충분히 신경쓰지 못하고, 그러다가 결국 문제를 일으켜서는 서로 감정이 나빠진 채 멀어지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내 쪽에서 거리를 둬야 하지 않을까.

 

난 그들을.... 아직도 내 친구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 때문에 연락하지 않은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아마도, 이대로 멀어질 것이다.

 

 

진심과 선의로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새로 사람을 대할 때의 거리 감각을 맞춰놨는데, 그 지인을 대할 때면 그 거리 감각의 영점이 흔들린다는 느낌이 든다.

 

.....어쩔까, 이렇다는 이야기를 그 지인한테 확실히 해 버리고 영점을 새로 맞추는 쪽이 더 나을까 아니면 무난하게 적당히 농담과 드립과 RPG와 책과 만화 이야기나 하면서 하룻밤 보낼까. 이성적으로는 내가 이런 걸 두고 고민하건 말건 그 사람은 알 바 아닐테니 후자 쪽 선택지가 훨씬 나을 것 같긴 한데... 그러기엔 그 거리감각이 엉망이 되는 감각이 너무 혼란스럽다. 

 

+

 

이야기할 타이밍을 못 잡았다. 트라우마가 무슨 자랑 거리도 아니고,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싶기도 하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