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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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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출범에 걸림돌이 된 민주주의

 

연방헌법이 인디언 부족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기 위해서는 연방정부와 주 정부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연방정부와 주 정부 간의 권한 배분을 규정한 연방제 민주공화정원리는 미국 정부와 인디언 부족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1776년에 독립을 했지만 미국이 연방국가 체계를 갖춘 건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였다. 주 헌법을 가진 각 주가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했고, 연합정부는 각 주를 대리해 외교권을 행사하는 대표부 정도에 불과했다.

 

주 사이의 교역을 규제할 권한이 연합정부에 없는 바람에 상거래가 통일되지 않았고, 주마다 자기 필요에 의해 개별 정책을 펼치곤 했다. 통상에 관한 조약을 외국과 체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부 주의 교역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미시시피 강 항해권을 별 이해관계가 없는 북부 주의 대표가 포기해버려 큰 마찰을 빚기도 했다. 여러 주에서 화폐를 남발하는 바람에 재정이 붕괴되었고, 급기야 1786년에는 매사추세츠 주에서 세금과 빚의 지불 연기를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강력한 중앙정부의 출현을 주장하는 이른바 연방파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연방파는 비교적 쉽게 합의할 수 있는 과세권 문제부터 건드리기 시작해 연방행정부와 대통령의 권한으로까지 논의를 진전시켰다. 여러 차례 진통 끝에 제헌의회는 18879월 최종적으로 연방헌법을 완성했다. 이제는 헌법을 비준하는 일만 남았다. 13개 주 중에서 9개 주가 비준하면, 연방정부가 성립하는 것으로 규정을 고쳤지만 이것도 쉽지 않았다.

 

소규모 자작농은 물론이고 대지주까지도 연방정부의 과세를 두려워했다. 연방헌법이 발효되면 연방정부는 전제군주와 같은 힘을 소유하게 되어, 자기들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하고 군대를 동원해 국민을 꼼짝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영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혁명을 일으켰는데 권력의 분산이라는 혁명의 성과를 연방정부가 무시하는 게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 미국인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 가까이서 공공집회를 열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국가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미국인의 태도는 민주주의 이념과 맥이 닿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란 공동체의 큰 틀을 인민이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원리를 뜻한다. 다시 말해 미국 독립 직후에 통용되던 민주주의 이념은 직접 민주주의를 지칭하는 용어로, 요즘 우리가 민주주의 하면 떠올리는 대의제(간접)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18세기 후반까지는 민주주의라고 말하면 직접민주주의만을 가리켰다.

 

그런데 대중이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민주주의 원리는 미합중국 출범에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13주 국가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려면 미합중국이 일정 규모 이상의 조직이 되어야 하는데, 민주주의의 자연적 한계는 미국의 확장에 발목을 잡을 여지가 많았다.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에서 민주정은 국민 모두가 한 곳에 쉽게 모일 수 있고 서로 다 알 수 있는 아주 작은 국가를 전제로 한다고 적었다. 민주주의는 넓은 시장과 많은 교역을 전제로 하는 거대한 국가에 어울리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미합중국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새로운 이념이 있어야 했다. 이렇듯 절박한 형편에 놓인 연방헌법의 기초자에게 안성맞춤의 이데올로기가 제시되었는데, 바로 공화주의였다.

 

민주공화국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요즘은 공화주의를 민주주의와 결부시켜 사용하고 있지만 이 둘은 다른 차원의 이념이다. 그러면 공화주의의 실체는 무엇일까?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공화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정부 형태가 어떤 것이든 간에 법에 의해 지배되는 모든 국가를 공화국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법에 의해 지배될 때 비로소 공공선이 우위를 차지하고, 공적인 것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에 대한 루소의 해석은 공적인 것혹은 공공선을 뜻하는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에서 공화주의(Republicanism)라는 용어가 유래한 사실과 맞닿아 있다. 공화주의의 특징에 대해서는 대체로 자의적인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시민의 자치적 참여 등을 핵심으로 꼽고 있다.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는 관련이 깊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자신의 주요한 원리, 특히 절대 국가에서 반대하면서 제한 국가를 옹호하는 원리를 공화주의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에 대한 공화주의적 관점을 잃어버렸다. 법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둘은 서로 달랐다. 모든 법은(타인의 자의에 예속되는 것을 막으려는 비자의적인 법조차도) 어쩔 수 없이 자유를 제한하게 된다는 자유주의자와는 달리, 공화주의자는 그러한 법이 자의적 권력과 예속의 중압을 경감시켜준다면 어떤 엄격한 법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공화주의는 자의적 권력에 의한 자유의 제약은 거부하지만, 공공선에 의해 자유가 제한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공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대체로 공감하는 공공선이 존재하고 이러한 공적인 것이 정치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려면, 법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가 있는 사회에서는 국가의 법이 아닌 사회의 법이 실현될 공간이 갈수록 줄어든다. 공공선이 국익의 위세에 자꾸만 밀려난다. 그러다 보니 공화주의 이념은 겉보기만 화려한 담론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미합중국 수립 과정에서 공화주의가 한 역할이 바로 이랬다.

 

민주주의, 공화주의와 결합하다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는 동일한 기준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념이 아님에도 연방헌법 기초자는 공화주의를 민주주의와 같은 평면에 대립항으로 놓고 양자를 비교했다. 연방헌법 초안 작성에 관려한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 등이 함께 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는 민주정과 공화정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두 가지 있는데, 공화정에서는 전체 시민이 선출한 소수의 대표에게 통치권이 위임되고, 시민의 수가 늘어나고 영토가 커지더라도 공화정은 그에 맞추어 확장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건국 초기의 지도자가 공화주의 이데올로기에 매력을 느끼게 된 주된 이유는 주 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연방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려는 자신들의 필요에 공화주의가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화주의는 전제정치와 상반된 이미지를 가졌으면서도 모호한 내용으로 되어 있어 입맛대로 각색하기 좋은 이념이었다. 연방헌법 기초자들은 통치 범위를 확장하면 당파나 이해관계가 한층 더 다양해져서, 다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할 만큼 다수파가 공통의 동기를 가지는 것이 어려워진다며 큰 정부를 선택해야 하는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바람직한 정부 형태인 공화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큰 규모의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주의 권한을 연방정부에 양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케케묵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해서 공화제의 외투를 뒤집어 쓴 미합중국이 탄생했다. 반면 민주주의는 전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연방헌법 제정 과정에서 헌법 본문은 물론 전문에서조차 민주주의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처럼 뒷전으로 밀려났던 민주주의는 언제 다시 무대 위로 등장했을까?

 

왕정이 근대적 국민국가로 탈바꿈하는 시기에 왕권에 대응하는 의회를 확립하고 군주 주권과는 다른 국민 주권을 정립하는 데 공화주의는 큰 몫을 했다. 그런데 공화주의는 근대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채택되기에는 큰 약점이 이었다. 국가의 외형을 키우는 것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확대된 규모에 걸맞게 중앙정부의 권한을 늘리는 데는 그리 신통치 못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매력적인 정치 이념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인민은 정치적으로 평등하게 대우받길 원했다. 정치 참여에 대한 요구를 국가권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길들이는데 인민에 의한 통치라는 이데올로기는 효과적인 장치가 될 수 있었다. 다만, 사전에 조율할 게 있었다. 민주주의란 인민이 직접 참여한느 방식의 정부 형태라는 등식을 지워버려야 했다. 이러한 필요는 그대로 현실에 반영되었다. 인민이 직접 참여하면서 통치권을 행사하는 일느바 그리스 시대의 고전적 민주주의는 순수 민주주의라 불리며 실제 정치 세계에서는 발붙이기 어려운 강학 상의 정치체제로 오그라들었다. 그러고는 그 빈자리를 지금의 우리가 흔히 거론하는 간접민주주의가 채웠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고 나자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하는 통치자 수라는 잣대로 민주주의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선거권의 확대, 기회의 균등 등이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1820년대 미국 사회에서 통용되던 민주주의란, 인민에 의한 직접선거를 의미하는 정치적 범주를 넘어 그 이상의 가치와 요소를 포함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였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보편적인 모습으로 바뀌면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접목이 이뤄졌고, 이렇게 해서 민주공화정은 지금의 우리 귀에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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