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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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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우선 이채로운 점은 1)모든 씬을 흑백으로 촬영했다는 점과 2)대사 대부분을 제주도 방언으로 처리했다는 점이다.

 

1)을 통해 나타나는 특성은, 영화 전반에 걸쳐 내내 색채감이 지워지고 그 대신 음영의 깊이를 통하여 빛과 어둠의 경계가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다루는 주제 자체의 특성 상 상당히 자극적인 장면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선혈의 붉은 색이나 그에 대비되는 유채꽃의 노란 색 같은... 그러니까, 관객들의 감성에 직접적으로 어필할 만한 시각적 자극이 최소화된다. 그 대신 절제된 배우들의 연기와 맞물려서, 이 영화는 매우 독특한 미장센을 연출해낸다. 이 영화에서 화려하고 자극적인 컬러 영상은 단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밝음과 어둠 사이의 매우 다양한 층위들을 적확하게 포착해서는 매 장면마다 그 '깊이'를 강조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방식이 가장 빛을 발하는 명장면은 역시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뿌연 연기로 가득 찬 실내에서 '시체 앞에 앉아 소소한 잡담을 주고 받으며 사과를 깎아먹는 두 군인의 모습'을 담은 도입부 시퀀스와, 중반부 마을 사람들이 피신한 산속 동굴 속에서 모닥불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퀀스다. 불꽃이 피어오르고, 연기가 맴돈다. 그 너머에서 사람들은 두런두런, 일상의 화제를 나눈다. 뭍에서는 해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좌우의 대립은 계속해서 첨예해지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그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돼지가 굶지 않을까, 다리가 불편하니 자신을 두고 가라고 하던 노모가 괜찮을까, 짝사랑하는 여자가 안전할까 같은 문제다. 깊은 어둠 속에서, 보다 희미한 그림자 속에서, 튀어 오르는 불씨의 파편들 속에서, 그들은 걱정하고, 슬퍼하고, 농담하고, 웃는다. 그리고 그러한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뭐라고 하기 힘든 복잡한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이 영화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무고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추모'에 맞춰져 있으며, 특정 이념을 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주의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다-남로당 무장대를 미화하는 내용이라는 일베충들 선전에 낚이지 말 것-. 흑백 필름의 사용은 이런 부분에서 매우 상징적이고 시사점이 많아 보인다.

 

2) 역시도 특이한 시도다. 그러나 1)과는 달리 아쉬움이 많다. 뭍에서 파견된 군인들을 제외한, 현지 제주도민들은 모두 제주도 방언으로 대화를 나누며 그 때문에 한국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자막이 입혀져 있는데... '대사를 우선 귀로 듣는다'->'바로 이해가 안되서 자막을 본다'는 두 과정을 거치게 되다 보니 아무래도 영화의 흐름을 바로바로 쫓아가기가 어렵다. 고증이나 현장감을 고려하자면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아무래도 영 아쉽다. 애초에 서사보다는 흑백의 영상을 통한 압도적인 이미지를 내세워 먹고 들어가는 작품이니만큼, 대사의 비중을 줄이고 연출에 더욱 몰빵했으면 더 완성도가 높아졌을 듯.

 

 

네이버 영화의 댓글란에서 일베충들이 감성팔이 영화니 선전물이니 하며 별점 테러를 하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특정 이념(그게 '남의 이념'이건, '북의 이념'이건)을 앞세우고 그것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념이나 정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그러나 그러한 폭력에 직면해야 할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은, 무고한 이들의 넋을 달래는 씻김굿으로서의 성격이 훨씬 강하다. '신위' '신묘' '음복' '소지'라는 제사 순서에 맞춰 배치된 영화의 흐름도 그렇고. 이것만으로는 좀 아쉽다 싶기도 하지만, 훌륭한 영화다.

 

4.3 사태(이 칭호는... 1948년부터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5년에 걸쳐 계속해서 이어졌던 민간인 학살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특정 날짜를 기점으로 단순화한다는 점에 있어서 좀 거부감이 들지만 다른 대체어를 못 찾겠다)에 대해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정권 당시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사과를 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비극적인, 그러나 이제는 잊어야 할 과거사' 같은 게 아니다. 엄한 사람 붙잡고 빨갱이 타령하면서 조리돌림하는 매카시즘은 여전히 한국 사회 전반의 망틸리떼를 지배하고 있고, 그러한 파시즘적 분위기가 공고해져 가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여전히 남도는 잠들지 못하고 있다. 한라산이 굽어보고 있는 아래, 21세기 초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PS=개인적으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에 대해 명확한 입장 정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이거 보고서 반대 입장을 굳혔다. 시밤 취준생 입장에서 제주도까지 갔다 오기엔 돈도 시간도 없는데 뭐 할 일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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