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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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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원작 소설을 읽어본 입장에서 평하자면, 우로부치 겐이 매우 탁월한 테크닉을 갖춘 작가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런 식으로 마스터와 서번트 1쌍씩 14명에 달하는 인물들+a에게 저마다 확고한 동기와 인물상을 부여하고, 전원이 나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뒷설정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큰 줄기와 엇나가는 법없이 서로 계속 상호작용하면서 전개에 영향을 미치게 조절하는 구성 능력은 정말 훌륭하다. 하지만 우로부치 겐은, '캐릭터의 개인적이고 협소한 인간관계'만을 절대시한다는 커다란 결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 큰 잘못을 저질러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과거를 가진 캐릭터가 작품의 현재 시점 내에서 그걸 후회하고 자기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주로 어필된다면 독자 입장에서는 그 캐릭터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건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집중하고, 그 캐릭터의 '속죄'를 응원하게 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반대 급부로 '예전에 많은 업적을 달성하고 수많은 이들을 구한 캐릭터가 작품의 현재 시점 내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패배하고 결국 파멸하는 모습'이 주로 어필된다면 독자 입장에서는 그 캐릭터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했건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집중하고, 그 캐릭터의 '실수와 호구짓'을 비난하게 되는 게 보편적이다. 이것 자체는 별로 문제될 게 없다. 비평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하나의 작품이 자체적으로 완결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에 속한 인물들의 현재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과거사보다는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작품 속에서 그 캐릭터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보다 낮은 층위에서 보더라도 독자는 캐릭터의 당장 잘 부각되는 모습에 더 큰 관심을 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메타적인 관점이고, 작가는 그러한 메타적 의식과 작품의 내적 논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우로부치 겐의 작품 속 주인공들 대부분은 '추상적이고 잘 안 와닿는 대의나 신념보다는 내가 잘 알고 내 팔 범위 안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훨씬 중시하며, 그러한 관계 중에서도 극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주인공과 히로인 간의 '딥 러브'(엔하위키에서 나온 표현이다)를 훨씬 강조한다. <사야의 노래>의 주인공은 히로인 사야와의 사랑을 완성함으로써, 세계를 멸망시킨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진 주인공으로 평가되는 아케미 호무라는 오직 마도카를 구한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 수많은 루프를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인간성을 마모시키고, 많은 희생을 외면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독자 입장에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Mob'들 뿐이다. 하지만 과연 Mob들의 목숨이라고 해서 하찮은 것인가?

 

제로 애니 방영이 끝난 뒤 어떤 팬덤에서 '확실히 잘못한 일은 질투 때문에 토오사카 토키오미를 공격한 것+집착 때문에 아오이의 목을 졸라 정신 이상 상태로 몰고 간 것 뿐인(+그래서 결과적으로 린을 고아로 힘겹게 자라게 한) 마토우 카리야보다 사이코패스 쾌락 살인마지만 이름 없는 엑스트라들만 죽인 우류 류노스케가 더 낫다'고 주장하는 거 보고 뜨악했다. 현실에서라면 아니지만 만화니까 상관 없고, 우류 류노스케의 살의와 광기보다 마토 카리야의 집착과 망집이 더 기분 나빴다는 주장은 일견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기분의 좋고 나쁨의 문제일 뿐 죄질을 평가할 수 있는 팩터는 아니다. 그리고 만화와 현실은 물론 다른 논리를 적용해야 하지만 어쨌든 그를 적용하는 주체는 같은 사람이다.

 

우로부치 겐이 쓴 다른 작품들이나 관련 인터뷰 등으로 보아, 우로부치 자신은 적어도 의식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내부적인 가치판단을 전제로 작품을 쓰는 것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인 '자신이 알지 못하고, 별 관심도 없는 이름과 얼굴 없는 수많은 사람들vs자신이 더 없이 소중히 여기며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 단 1명'의 구도 하에서 그 주인공들은 거의 예외없이 후자를 선택하고 그로 인해 세상이 멸망하건 인류가 좆망하건 주인공은 구원 받는다.

 

우로부치 겐은 확실히 실력 있는 작가고, 특히 캐릭터 조형과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맞물리며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구성 능력은 작가를 지망하는 입장에서 배울 점이 많다. 그러나 누가 나한테 우로부치 겐 빠라고 한다면 빡칠 거 같다(...)

 

PS=딴 소리지만...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호엔하임이 크세르크세스에 의해 제물로 바쳐졌던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들의 협력을 얻어내고 그들 하나 하나의 이름을 외치는 장면이었다. 다른 만화 같았으면 '사람'이 아니라 악역의 악랄함을 강조하기 위한 '숫자'들일 뿐이었을 그 희생자들이 단순한 'Mob'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가의 가치관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멋진 연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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