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새로 플레이 예정인 겁스 헌터들의 밤 캠페인에서 쓸 곰 인간 캐릭터, 누알라 컬렌이 등장하는 짤막한 단편. 원래는 플레이 들어가기 전에 캐릭터의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잡기 위해 1~2페이지 정도로 짧게 쓸 예정이었는데 쓰다보니 재미있어져서 좀 더 길어졌다. 전에OWOD워울프 캠페인에서 플레이했던 섀도우로드 루퍼스 라가바시 영월도 그렇고... 내가 굴리는 여성 캐릭터들은 대체적으로 천연 기질이 있는 듯. 만들 당시에는 별로 의식하지 않는데 만들어놓고 보자면 '노린 모에 요소' 같은 게 한 둘 정도는 있는 듯해 왠지 좀 창피하다. 다음 번에 여캐하면 좀 더 냉철하고 쿨한 캐릭터를 만들어볼까. ...근데 내 소설도 얼른 써야 할텐데...
중간에 특별 출연 캐릭터들이 좀 있다. 세션에 어떤 분 감상과 마찬가지로 스콧 너무 잉여해서 불쌍해...
PS=쓸 때는 재미있었는데 읽어보고 나니 이런 캐릭터를 플레이한다는 게 좀 부담되기 시작했다. ...영월 때도 잘 플레이했으니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_
인간 모습은 이런 누님인데
변신한 모습은 이러함ㅇㅇ 저 앉은 자세가 참으로 망충하도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은탄에 관통당한 복부에서 시큰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다행히 나쁜 곳에 맞진 않았지만 출혈이 멎지 않고 있었다. 달의 저주를 받은 종족, 짐승인간에게 있어 달의 금속인 은은 존재만으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장 그만두고 싶다, 이 저주받은 혈통에서 달아나고 싶다!
...고 할아버지는 생각했었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그녀는 이를 악물고서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단도를 빼들었다. 달빛 아래서 파랗게 날이 선 단도의 빛이 그녀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깊이 심호흡을 하고는 상처에 칼날을 찔러 넣었다. 흐읍, 신음 소리를 삼키면서 칼날을 뒤틀어 상처를 헤집는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당장 비명을 내질렀을 고통이 그녀의 신경을 때리고, 칼날 끝에 둔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찾았다.
“....!”
툭. 피에 젖은 은탄이 낙엽 위로 떨어졌다.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정신을 집중했다. 이 상황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녀는 국립공원에서 맹수에게 난도질당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는 꺼림칙한 예감을 떨칠 수 없어서 이곳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했고, 학살을 관두라고 설득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대화를 거부하고 공격해 왔다. 그것까지는 씁쓸할망정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짐승인간들이, 스스로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인 은을 무기로 사용한다고? 게다가, 마치 내가 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능하면 대화로 풀고 싶어서 검은 놔두고 왔는데 챙겨 올 걸. 짧은 후회가 뇌리를 스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보다 이 상황은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그녀가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사냥’에 나선지도 올해로 어느덧 5년 째였지만, 이러한 일은 처음이었다. 배후에 다른 존재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 누가?
크르르릉.
밤바람에 실려 나직한 으르렁댐이 들려왔다. 그녀는 깊이 심호흡을 하고 감각을 날카롭게 했다. 바람의 방향이 계속 바뀌는데다가 숲이 우거져 있어서 소리로도 냄새로도 방향과 거리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다. 짐승인간 중에서도 늑대인간은 추적과 사냥에 특화된 종족. 게다가 사냥감인 나는 부상을 입은 상태. 도저히 나처럼 쉬운 사냥감을 지나칠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아직 승산이 있어. 그녀는 권총을 뽑아 들었다.
+
밤의 숲은 온갖 소리와 냄새들이 뒤섞여 있다. 잎새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그 바람 소리에 실려온 저 먼 곳의 부엉이 우는 소리. 부엽토 아래 썩어가는 낙엽들의 냄새와, 이곳의 공기를 짓누르는 ‘야수’들의 살의를 느끼고 도망친 야생 동물들의 두근대는 심장 박동 소리. ‘그것’은 몸을 부르르 털어냈다. ‘그것’도 평소에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난폭한 성격 때문에 대인관계는 썩 좋지 않을망정-‘그것’은 그 성격 때문에 4개월 전 이혼했고, 법원으로부터 옛 아내 근처에 접근하지 말라는 판결을 받았다- 직장 생활도 하고, 퇴근하고 난 뒤에는 89년 식 포드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소시지와 매시드 포테이토 샐러드로 저녁식사를 하고, 야구 중계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잠자리에 들고, ....보름달이 뜨고 피가 끓어오르는 밤에는 마취제 성분이 든 감기약을 잔뜩 먹은 뒤 자신의 몸을 침대에 묶어놓는 절차가 거기 추가되고. 하지만 ‘그 남자’가 찾아온 이후부터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남자’는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분노와 충동이 온당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비이성적이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그 남자’의 매력과 언변에 빠져 들었고... 자신이 지난 3개월 동안 이 국립공원을 찾아오는 10여 명의 행락객들을 찢어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자각했을 무렵에는,
이제 자신은 ‘이성적’이 되고 싶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다. 우우, 오우우, 오우우우.... 저 먼 곳, 한 없이 머나먼 저편으로부터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울음소리 속에 깃든 의지가 그에게 속삭였다. 이성은 인간이 우리 종족들을 억누르기 위해 만든 족쇄일 뿐이다. 인간은 그저 이익을 위해, 혹은 재미삼아 다른 이들을 죽이고 그것을 TV 화면 너머로 팝콘을 씹으며 즐겁게 지켜본다. 자기 손을 더럽히는 게 아니니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합리화하면서. 위선적인 이성 따위는 집어 치워라, 너의 영혼을 직시하라. 너의 피, 너의 생명, 그 깊은 곳에 깃들어 있는 원초의 의지를 느껴라. 너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며...
유혈과 살육의 쾌락만이 짐승에게 허락된 유일한 안식이다. 그 순간,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하게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는 쾌락의 노예, 나의 노예다.
명령대로, 나의 주인이여----!!
‘그것’은 손에 들고 있던 라이플을 집어 던졌다. 하찮은 인간의 무기 따위에는 의존하지 않는다. 그 안에 든 꺼림칙한 이물질에 대해서도 더 이상 신경쓰고 싶지 않다. 살의와 잔혹함이 그의 마음을 뒤덮었다. 주둥이가 길어진다. 전신이 따끔거리며 털이 돋아난다. 허리가 굽고, 네 다리가 지면을 딛는다. 노란 두 눈은 지옥불과 같은 욕망과 굶주림으로 형형하게 타오른다. 사냥감이 가까이 있다. 부상을 입고, 약해져 있다. 침침한 시선으로 밤의 어둠 속을 더듬으며 겁에 질려 있다. 넌, 내 먹이다. ‘그것’은 포효하며 몸을 도사리고 있던 수풀 속에서 뛰쳐나갔다.
“크르르릉-----!”
따닥. 무시무시한 어금니는 허공을 물어뜯었다. 핏자국이 가득한 이끼와 나뭇가지 더미를 파헤치며, ‘그것’은 일순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분명히 여기일텐데...? ‘그것’의 내면에서 마지막 남은 이성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도망쳐라. 그러나 ‘그것’의 굶주림과 살의는 그 경고를 무시해 버렸다. 그것은 킁킁대며 사납게 피에 물든 나뭇가지 더미를 헤집었다. 살코기, 뜨끈한 피. 그것이 필요해. 난 그것이 먹고 싶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욕정으로 흥분한 인간이 육체를 탐하는 것과 비슷하게 ‘그것’은 신선한 피와 고기를 원했다. 그 순간 ‘그것’은 완전한 짐승이라기보다는... 노예에 가까웠다. 욕망의 노예.
그리고 나무 위에서, 거대한 검은 형체가 뛰어 내려오며 육중한 앞발로 ‘그것’의 허리를 후려갈겼다. 우드득. 척추가 부러지는 느낌을 받으며 ‘그것’은 피와 내장 조각을 토해냈다. 차가운 달빛 아래서 확 피보라가 일어났다. 아무리 사납고 굳세다 해도 평범한 짐승이었다면 단숨에 절명했을 만한 부상.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짐승이 아니었다. 노예, 욕망의 노예. 어떤 의미에서는... 괴물. 더 이상 자연에 속하지 않은 부정한 존재로서 그의 육신을 구성하는 미지의 힘이 너덜너덜해진 신경다발을 다시 이어 붙이고, 박살났던 갈비뼈를 재생시키고, 갈갈이 찢겨졌던 내장 조각들을 새로이 생성했다. 그러나 검은 형체는 그것을 방치하지 않았다.
“크워어어어엉-----!!!”
달빛 아래 울려 퍼지는 포효와 함께, 아름드리 나무도 꺾어놓을 듯한 괴력이 실린 두 번째, 세 번째 타격이 ‘그것’의 위로 쏟아졌다. 두개골이 깨져 나간다. 눈알이 튀어 나온다. 회색 뇌수가 흩어져 뿌려지고,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검은 형체는 ‘그것’의 가슴을 가르고서 아직도 꿈틀꿈틀 뛰면서 전신에 생명을 보내려는 심장을 뽑아 들고서는,
콰득.
거대한 앞발로 그것을 짓이겨 부쉈다.
+
“주문하신 허니 티 나왔습니다.”
누알라 컬렌은 테이크아웃 종이컵에 담긴 허니 티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읽던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앞이 좀 침침한데... 그녀는 살짝 콧잔등을 찌푸리며 눈가를 매만지고서야 자신이 안경을 벗어뒀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안경을 어디다 뒀더라?
“저기, 이거 찾으세요?”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앞으로 안경이 내밀어졌다. 누알라는 시선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 약간 곱슬거리는 갈색머리칼에 건장한 체격, 시원시원한 인상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고맙습니다.” 누알라는 웃어 보이며 안경을 받아썼다. 손이 가볍게 맞닿았고, 청년은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어, 지켜보고 있었는데... 안경을 아까 있던 자리에 놓고 가시더라고요. 그래서 찾지 않으실까 해서... 아, 저는 스콧이라고 합니다. 저기, 혹시 시간이 나시면 차라도 한 잔 더 하시면서....”
누알라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쉴 만큼 쉬었고, 사건의 전후 처리는 지역 경찰이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누알라는 스콧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좀 바빠서요.”
“아, 예...”
스콧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잠시 허공을 헤매던 그의 시선이 누알라가 읽고 있던 신문 기사에 머물렀다.
<국립공원에서 변사체 다시 발견. 피살자는 37세의 회사원으로, 4개월 전 이혼한 이후 직장에서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려 왔다고 한다. 최근 빈발하는, 맹수로부터의 습격 사건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산림 감시원들은 이 지역에는 대형 맹수가 살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공원 관리당국은 해당 지역을 폐쇄하고 감시 인력을 충원할 계획을 밝혔으며...>
“어... 이 뉴스, 저도 봤어요. 요즘 세상이 참 험악하죠...?”
“그렇네요.”
누알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더 이상 희생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한 일은 그걸로 충분한 것일까. 게다가 배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어... 전 가볼께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스콧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누알라는 혹시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내 관뒀다. 신경 써야 할 문제가 많았다. 옆 테이블에서 PSP를 가지고 노는 척하며 둘을 지켜보고 있던, 짧은 회색 머리칼의 남성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스콧에게 말을 건넸다. “브래드와 내기했는데 내가 이겼군. 20불로 피자 사줄께.” “관둬 에버렛, 뭐 먹을 기분 아냐.” “아무튼 브래드는 필요한 물건 사고 바로 집으로 간댔어. 우리도 그만 놀고 슬슬 우리 일을 하자고. 다니엘도 슬슬 올 때가 됐는데.”
+
집으로 돌아온 누알라는 샤워를 하고 몸을 닦은 뒤, 실내의 불을 모두 끈 뒤 향초에 불을 붙였다. 바곳과 겨우살이 나무의 새순을 섞어 만든 향도 이제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새로 사둬야 할 듯했다. 예금 잔고가 모자라기 시작했는데... 어쩔 수 없지. 누알라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작은 금제 낫을 들고는 왼손 바닥을 살짝 그어 피를 내고는 향로에 그 피를 뿌렸다. 뿌옇게 연기가 일어나고, 나신이 된 누알라는 그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향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향로 뒤의 작은 제단에는 숫사슴의 뿔과 창날- 사냥의 신, 세눈노스의 상징이 놓여 있었다. 세눈노스여, 영험한 죽음과 재생의 신이여. 최고의 사냥꾼이며 모든 짐승들을 가호하는 분이여. 전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왜 당신께서 저를 선택하셨는지. 저는 여전히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동족’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들을 제 손으로 죽이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당신이 제가 원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누알라는 손에 황금의 낫을 든 채 정신을 집중했다. 지난 5년 동안, 셀 수도 없이 이 제의를 반복했지만 의미가 확실한 계시나 비전이 주어진 적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지극히 짧고 단순명료한 내용이 대부분. 나는 과연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민족 최고의 영웅, 쿨란의 맹견의 피를 잇는 가문의 피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는 거의 남지 않은 고대 드루이드의 진전을 이어가고 있는 입장에서 나는 과연 합당하게 행동하고 있을까. 그때, 누알라는 손에 쥔 황금의 낫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음을 깨달았다. 설마...! 누알라는 화끈거리는 통증을 무시하며 낫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공기가 바뀌어 있었다. 우웅, 우웅, 우우웅. 매캐한 향내음 가운데서 풋풋한 숲의 내음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새로 핀 꽃, 새로 돋은 풀, 그 위로 쏟아지는 태양과 이슬, 흙과 짐승들의 냄새. 집중하자 그 내음은 한층 더 강해졌다. 나직하게 울리는 공기 가운데서 누알라는 기도에 집중했다. 세눈노스여, 당신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 깊은, 너무나도 깊어서 귀로 들리는 ‘소리’라기보다는 일종의 진동처럼 여겨지는 음성이 그녀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다. 남자 같기도 하고 여자 같기도 한,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노인 같기도 한- 흉폭하고 거칠지만 한없이 순수하고 또렷한 음성.
-자연의 법칙에 일탈한 이들이 가까이 있다. 죽어 흙으로 돌아감을 거부하고, 다음 생명으로 이어지기 위한 순환의 틀을 깨뜨리고 나온 자들이. 나의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부정한 존재들이. 그들이 더 가까이 오면 너 역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곳에, 너와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교의 상징을 앞세운 여인, 그리고 운명에 의해 몰림받는 자. 그들과 함께, 그 존재들을 토멸하라.
누알라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붉은 십자가의 이미지가 한 순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옛날, 로마군이 저 상징을 앞세우고서 각지의 스톤 헨지들을 파괴하고 교단의 유산을 몰수해 갔었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기독교인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한 적은 아직까지는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받은 교육 및 드루이드로서 쌓아온 가치관과 그들은 여러모로 충돌하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수호신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손안에 쥔 낫의 열기가 약해지고, 코끝에 떠돌던 숲의 내음이 멀어져 갔다.
-너는 나의 창이며 활이다. 활과 창이 주인의 의지에 의심을 품지 않듯이, 너 역시 그러할 지어다. 모든 짐승의 주인이며 사냥꾼의 지도자인 내가 약속하니, 너의 쓰임새가 다할 날이 오면 넌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나의 사냥터를 거닐 것이다. 분노와 무절제가 아닌 평온과 지혜 속에서 나의 왕국에 머물 것이다.
후우욱.
그녀의 손 안에서 낫은 다시 차갑게 식었고, 실내 공기는 매캐한 향내음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창 너머에서 다시 일상의 소음이 밀려들었다. 오가는 차들의 소리, 늦게 귀가하는 행인들의 말소리, 좀 떨어진 음반 가게에서 틀어놓은 요란한 음악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누알라는 마음을 굳혔다. 어떤 사람들일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만나보자. 그리고, 내 의무를 계속하자. 그때, 현관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네, 나가요!”
현관문을 열자, 이웃집 아주머니가 앞치마를 두른 채 눈이 휘둥그래져서 누알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뭐 요리하다가 태웠수? 시커먼 연기가 나던데.... 냄새도 이상하고.”
“예, 가스 불을 끄는 걸 깜빡해서... 제가 좀 잘 깜빡하거든요. 이제 껐으니 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알라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주머니는 그제서야 마주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겉보기엔 안 그래 뵈는데 영 허술해서... 얼른 남자친구라도 사귀어야 내가 걱정을 안 하지. 그건 그렇고, 다음부터는 요리할 때 옷은 좀 입고 하시우. 원, 내가 아니라 영감탱이가 보러 왔으면 어쨌을 거여?”
“...아!”
누알라는 그제서야 자신이 아직 알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닫은 뒤 누알라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아아, 창피해서 이를 어쩌지...? 동물들이라면 안 그렇겠지만 난 인간인데! 난 그래도 인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