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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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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기갑신.

작년 말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를 몰랐다. 나 역시도 그에 대해서는 '평범한 촌부 출신으로, 무리한 FTA 강행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민노당 활동가' 정도 밖에는 아는 게 없었다는 걸 고백한다.

노무현 정부 때도 금속 노조 파업이나 농민들의 쟁의 사태 등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 입장에 있어서 그것은 몇 다리 걸친 남의 일이었을 뿐, 자신들의 피부에 와닿는 절실한 사안은 아니었다. 노태우를 거쳐 김영삼 이후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운동권의 입지가 약화되고, 민주화의 외침이 잦아들고, 각 대학 학생회들이 하나 둘 비정치적 노선을 표방하기 시작한 이래로 '중앙 권력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보편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그 분노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일단 논외로 하고). 그러한 추세는 비교적 최근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고, 예외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은 04년의 탄핵 정국 때의 사례 정도였다.

그러나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지난 4월 총선에서 강기갑이 사천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친박연대가 파란당 견제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그를 지원했다는 것도 물론 크게 한 몫 했지만, 그의 당선을 실현시킨 핵심적인 힘은 다수 농민들의 지지였다. 다만 여기에서 그쳤다면, '좋은 교육을 받은 것도 훌륭한 언변을 소유한 것도 아닌 시골 농부의 국회 입성'이라는 약간 특이한 경우로만 세인들에게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여러 문제점 많은 정책(이라고 쓰고 ㅆㅂ 삽질이라고 읽는다)들이 잇따라 도마 위에 오르면서 광우병 쇠고기 수입이 최대 이슈로 부상했고, 정부 측의 한심한 대처가 이어지면서 국민들은 촛불을 켜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다른 때 같았으면 아는 사람만 아는 마이너 의원으로 남았을 강기갑 의원은 청문회를 거치고 촛불 집회 현장에 모습을 보이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갖춘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협상이 국내 축산 농가의 이득만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 온 국민의 건강권 문제, 한 발 더 나아가 국민적 자존심을 손상시킨 굴욕으로 의미가 확장되고 있는 지금 그의 이름은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올랐고, 국회 발언이나 집회 현장에서의 삼보 일배 모습 등은 인터넷 인프라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한국의 인터넷 상에서 빠르게 퍼지면서 유투브 등을 통해 세계 반대편에서도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디씨나 루리웹 등지에서는 그에게 '호통기갑' '기갑신' 등의 칭호를 부여했다.

지금까지는 '그들만의 싸움'이던 농민들의 투쟁 가운데로 광우병 쇠고기 수입이라는 전 국민적 이슈가 터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모이던 차에 농민들의 대변인이라는 상징적 지위를 갖고 있는 그의 존재를 언론이 캐치한 게, 정치에 대체로 무관심하던 사람들마저 강기갑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일차적 계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강기갑 의원이 갖는 의미는 거기에서 그치는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강기갑이라는 이름이 현 상황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건, 그가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즉물적으로 이해 집단인 농민들의 의사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바로 엊그제까지 옆 논둑에 서서 날씨 걱정하던 동네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TV에서나 보던 근엄한 금뱃지 아저씨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호통을 친다는 것,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SRM이니 MM형질이니 OIE니 하는 이해하기도 힘든 전문용어를 입에 올리며 목에 힘주는 대신 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단식 투쟁한다는 것, 현장에서 직접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고 호흡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의 방식은 결코 세련되거나 매끄럽지 않다. 국민 전체의 민의를 수렴해야 할 국회의원이 농민들의 이해만을 대변하고자 하는 건 아닌가, 의원이 가져야 할 소양으로서의 지식이나 전체적인 비전이 결여된 사람은 아닌가, 그의 분노가 당장은 속 시원하지만 결국은 대국을 읽지 못하고 표류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지지자들을 위해, 진정으로 온 몸을 던지는 정치인'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던가. 서툰 데다 한계도 명확하지만, '그토록 절실하게 우리의 모든 것을 외치는 정치인'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과연 있었던가.

강기갑 의원의 가장 큰-그리고 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르는- 자산은 바로 그 치열하고 순수한 진정성이다. 그리고 그 진정성은, 한국의 짧은 헌정 역사 속에서 너무도 빨리 왜곡되고 뒤틀려 온 민주주의 본연의 가치 회복이라는 머나먼 이상에 희미한 빛을 던진다.

그렇다, 이 나라의 국회에는 그 같은 이가 두 셋 정도는 더 있어야 한다.


이건 사담이지만... 내가 민노당을 지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강기갑 의원에 대해서 호의적인 건, 그 열의가 마음을 끌어서다.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하고, 자주 망설이는- 잘못 판단하는 법이 드문 대신 행동을 해야 할 시기를 놓치는 경향이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있어 그러한 강렬함은 매우 인상적이다. 정치인이 아이돌 화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아직은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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