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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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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제목과는 반대로 원래 RPG용 설정으로 만든 세계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려다가 문제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일지를 구체화 해보려다가... 가닥이 잘 안 잡히길래 한번 반대 방향에서 접근해 볼까 싶어서 그런 마스터의 입장에서 처할 만한 심리 상태의 흐름을 따라서 몇 자 적어 봅니다(특수한 경우라 해도 최소한 스스로 주의할  수는 있겠죠). 개별적인 문제점들을 하나씩 정리해 보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한 가지 문제로 시작해서 다른 문제점들이 거기에 딸려오는 형태더군요.


1)사전에 오프닝에서 엔딩에 이루는 플롯을 짜둔다

물론 소설을 쓰는 입장일 때는 저건 별로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좋은 버릇입니다. 물론 작가에 따라서는 소설을 써 내려가는 동안 인물들도 생동감을 얻고 그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사건들도 구체화되며 배경 세계도 디테일이 채워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작가들은 일단 써내려 간 다음에 계속해서 고치기를 반복하는 식으로 소설을 완성하기도 합니다만(심한 작가들은 그냥 머리만 굴려서는 도저히 구상을 완료하지 못하고 일단 쓰기 시작해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_-) 소설 작법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배경과 인물, 사건들을 구체화시킨 뒤 시간 순서에 따라서 전체적인 구성을 잡아두는 것입니다-물론 해당 작품의 성격에 따라 역순행적 구성을 취하거나 중간에 시점을 바꾸기도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경험 쌓인 작가가 보다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구사하는 테크닉이지 기본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도 쓰여지기 전의 구성 단계에서는 일관된 시점으로 시간 순서에 따라 사건들이 배열됩니다-. 그러나 RPG는 모든 요소들이 작가의 통제 하에 있는 소설과는 다르며, 서사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들인 PC들은 인간이 조종합니다. 이들은 필연적으로 마스터가 하나부터 열까지 짜둔 시나리오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며, 이것은 마스터의 질서정연한 구성을 흐뜨러 뜨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말썽들의 시작입니다.


2)PC들을 장애로 인식하게 된다

PC들도 PC들 나름대로 그렇게 움직이는 이유는 있습니다(단순히 마스터의 애드립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것과 같은 이유는 제하고). 어떤 경우에는 캐릭터의 백스토리와 기타 설정(D&D라면 가치관, 겁스라면 정신적 단점, WOD라면 네이쳐와 디미너)에 충실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마스터도 그 정도는 미리 숙지해 둔채 해당 캐릭터가 고를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를 마련해 두지만, 그에 대한 해석이 플레이어와 달랐을 수도 있고 플레이 과정에서 캐릭터가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을 수도 있습니다(당장 가치관이 바뀌거나 할 정도의 급격한 변화는 아니라도). 그런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몇 시간 동안 계속 플레이했더니 플레이어가 지쳤다거나 하는 이유로 자신의 캐릭터가 처한 게임 내 입장과 상황은 별로 고려하지 않은 채 메타 게임적으로 가장 '전략적인 선택'을 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건 간에 작게는 '쓸 데 없는 RP'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어 '진도'를 빼지 못하게 되고 크게는 마스터의 안배를 빠져나가 통제 범위 바깥으로 나가게 되기도 합니다. 이 시점에서 마스터는 PC들을 자신이 짠 시나리오를 '망가뜨리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기 쉽습니다.


3)자성(?)의 시간을 갖는다

스스로가 경험 많고 능력 있다고 자부하는 마스터는, 이 시점에서 즉시 철권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그도 RPG는 참가자들 간의 화합이 중요한 유희라는 전제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다만 그는 그 '화합'을 이뤄 내는 게 참가자들끼리 감정을 상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시나리오를 따라오게 만드는 기술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가자들간의 화합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걸 이뤄내는 건 마스터가 할 일이다.' 어떤 마스터는 그 자체를 자신의 마스터링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한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는 자신이 범한 실수들을 돌아보고 반성합니다- 그러나 그 '반성'은 플레이어의 성향과 캐릭터의 조작 패턴에 있어서 분석이 부족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몇 가지 가능성이 있는 분기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로망 있는 전개'를 선택하게끔 만들기 위한 자신의 통제가 불완전했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플레이어들이 저마다의 관점과 욕구를 통해 게임 환경에 접근하며 그로 인해 자신이 짠 시나리오를 재미 없게 느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역시도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며 배제해야 할 요소가 아니라는 점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4)무엇을 할 것인가?

'RPG는 다함께 즐기는 것이다'->'그리고 그러한 즐거움은 마스터가 짠 재미있는 시나리오에서 나온다'->'나는 마스터로서 모두에게 즐거움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하지만 거기에 플레이어가 참가하는 건 월권행위다.' 마스터의 사고가 여기까지 진행됐으면 이미 막장의 조짐이 드러났다고 보면 됩니다. 이 시점에서 마스터는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집니다. 다수의 플레이어들의 즐거움을 위해 그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NPC들에게 매력을 부여하고 지금까지 시나리오에 심어온 복선들을 점검하고 그걸 모아 PC들을 놀라게 할 반전을 마련합니다, 마치 그가 소설을 쓸 때 뒷설정들을 깔아 놓는 것처럼. 이 시점에 이르러 그의 사고 구조 안에서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소설을 읽는 독자와 별 차이 없습니다. PC들의 존재는 플레이어들의 존재와 일체화됩니다.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지만 또한 고된 작업이고, 그 고됨은 마스터로 하여금 스스로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됩니다. "내가 이토록 열심히 시나리오를 짰는데!" 그가 짊어진 십자가가 무겁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무게의 상당부분은 플레이어들을 타자화시키고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외면했다는 사실과, 그가 굳이 RPG를 하는 것은 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자신의 시나리오에 '종속'되어 있는 플레이어들이 그에 몰입하는 걸 지켜봄으로써 자신이 짠 시나리오가 '재미있음'을 확신하고 싶다는 이기적이고 도취적인 욕구 때문이기도 합니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소설이 있으며, 자신이 소설에 담아 전달하려고 했던 걸 독자들이 제대로 받아 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소설이라는 매체가 등장한 이래 무수한 작가들을 괴롭혀 왔습니다(그러한 욕구가 정당한가는 논외로 하고. 참고로, 작가의 자아가 강할수록 소설이 재미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학 이론에서의 정설입니다). 그리고 RPG라는 양식은 소설보다 독자는 적지만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강렬한 방식으로 대상에게 자신이 전달하고자 했던 바를 어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쓰면서 설정 짜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짜게 되는 거지요. 그 과정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을 통해 자기합리화를 하고. 제가 전에 쓴 '자아도취형 마스터링의 폐해'라는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그것은 세련된 형태의 자기기만이 됩니다. 이것은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다수의 플레이어들과 능동적인 위치에 있는 한 명의 마스터라는 전통적인 플레이 방식과 결합하며 문제가 더욱 커지게 되고, 마스터가 소설을 쓰는 사람일 경우- 그리고 그의 소설이 정말로 '재미있을 경우' 이 문제는 특별히 심각해집니다.


5)My precious----!!!!!!! 그 반ㅈ.... 아니 그 캠페인은 내 꺼야!!!!!!!!!!

슬슬 마무리입니다. 그런 마스터도 RPG 시나리오 짜는 것과 소설 쓰는 것은 다르다고는 생각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 인식수준이 고작해야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소설과는 달리 RPG는 플레이어들의 개입에 따라 진행이 어그러질 수 있으므로 최대한 플레이어=캐릭터들의 행동을 자신의 예상 범위 아래 둬야 한다'는 정도에서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고 과정 안에서 캐릭터와 플레이어들은 동일시되며, RPG의 고전적인 전제 중 하나인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캐릭터에게 일인칭적으로 이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결합해 은근히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그들의 관점을 캐릭터 내부에 매몰시킬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물론 그런 싱크로 율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적당한 시점에서 알아챌 수 있도록 배치해 둔 복선(미리 살짝 인식해 두면 나중에 반전이 되어 돌아올 때 그 충격이 더 강렬해지는)을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플레이어들의 입장을 배려하는 관대한 마스터다'라는 부분도 어필할 겸 스스로에 대한 심리적 알리바이도 마련할 겸(사실 어지간히 뻔뻔한 마스터가 아니라면 이쯤 되면 살짝 찔리기도 합니다) '좀 더 시야를 넓혀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봐라'라고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약간이나마 힌트도 찔러 줍니다. 그래도 어쨌든 그 모든 행동들이, 독자와의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는 작가의 입장에서 벗어나 보다 좁은 거리에서 직접적으로 자신이 공들여 짠 스토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마스터는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그것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은 소설을 썼고, 익명의 독자들에 의해 그 소설이 '재미있다'는 판정을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고, 그 마스터는 썩 괜찮은 작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마스터는 자신의 시나리오가 '제대로만 진행되면 재미있다'고 믿게 되고, 나아가 시나리오와 설정을 넘어서 그 캠페인 전체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통제를 벗어나는 플레이어들의 돌발 행위는 '자신의 소유물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도록 방해하는 이레귤러 팩터'로 규정짓게 됩니다. 그는 확실히 재주 있는 작가일 수 있지만, RPG에 있어서는 바로 그 사실이 그의 덫이 됩니다.


6)그리고....

물론 그 모든 노력과 안배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플레이어들이 시나리오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로 대표되는, 문학사에 숱하게 많은 위대한 거장들의 찬란한 작품들도 까는 사람들은 까는 게 현실입니다. 마스터가 쓸만한 작가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전에 재미있게 읽어준 독자들이 자기 책을 사준 적이 있다 해도 모든 참가자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마스터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어, 중간중간 시나리오가 망가질 뻔한 위기의 순간도 몇 번 있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의도대로 무사히 엔딩을 맞이하고 캠페인을 종료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플레이어들의 말, "내가 직접 참가할 수 있다는 거랑 다른 참가자들에 대한 예의 때문에 끝까지 오긴 했지만 솔직히 스토리는 별로 재미 없었어요." 마스터는 충격을 받습니다. 이럴 수가, '내' 캠페인이! 그토록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짠 스토리가 재미없었다고!? 그리고 그는 한 동안 실의에 빠집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이전의 실수를 거울 삼아 새 캠페인을 준비합니다. 마이너한 취미다 보니 다른 팀 구하기도 여의치 않고, 한번 마스터링한 사람에게 계속 맡기는 관성 때문에 기존 팀원들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새로 캐릭터를 만듭니다(시스템이 바뀌었다면 룰 공부도 합니다. 룰북을 정독해 기본 시스템을 숙지하고, 인터넷을 뒤지며 최적화 트리를 연구하고, 거기에 캐릭터의 백스토리를 끼워넣는 등 늘 하던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마스터는 다짐합니다.


이번에는 기필코, 모든 플레이어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짜겠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자신이 짠 스토리가 재미 없었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다음엔 더 잘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자면 전향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결코, 자신의 방식을 근본부터 바꾸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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