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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 죽영불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으며,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못 위에 흔적조차 없다.
by 자레드 갈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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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쯤, 처음으로 합의제에 의한 플레이에 참가한 적이 있다. 겁스 무한세계였고, 250cp 가량의 비교적 로우 파워에 초상능력을 최대한 배제한 다크 암울 모드였다. 당시 난 한국 출신의 무한 경비대원 캐릭터로 참가했었다.

합의제 플레이의 기본 전제인 '뒷 설정이 오픈된 상태에서 마스터에 준하는 책임감과 적극성을 가지고 부단히 새로운 떡밥을 떨군다'는 것은 취향 직격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그에 매료된 나머지 그것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고-1년이 더 지난 지금도 과연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지 자문해 보면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여러 실수들이 잦았다. 뭐... 그 실수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움츠러 든다거나 자책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를 보다 명확히 하고 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는 걸 막기 위해 기록으로 남겨 둔다.

문제점 1. 자기 캐릭터에 대한 필요 이상의 감정 이입

객관적으로 판단해 봐서, 당시의 자캐는 그 자체로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내가 아닌 다른 숙련된 플레이어가 잡았더라면 훨씬 흥미로운 면모를 다양하게 연출하면서도 캐릭터에 매몰되는 법 없이 넓은 시야를 유지하면서 떡밥들의 변주와 확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뒷설정에 있어 그 캐릭터의 설정은 당시의 내 개인적 체험과 욕구가 반영되어 있었다. 당시의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시야가 좁아 지는 건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여겨진다. 그로 인해 인물보다는 사건 중심으로 진행되는 당시의 캠페인 진행 방식에 있어서 아무래도 나는 균형 감각을 잃어 버릴 수 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다른 PC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그를 이용해 넓은 시야로 서사를 조율하는 데는 실패하게 되었다.

문제점 2. 자기 경험치의 과신

난 RPG를 처음 접한지 10년이 넘었고, 본격적으로 플레이를 한 기간도 결코 짧지 않다. 하지만 간과했던 사실은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플레이어로 참가했으며 마스터링을 한 경험은 상대적으로 짧다는 것이었다.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협력하는 관계이며 양자 간의 대립과 단절은 결코 유익하지 않다고 많은 룰북에서 명시되어 있지만 실 플레이에서는 아무래도 마스터가 정보를 독점하고서 자신이 짠 시나리오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플레이어들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경향이 많아지고, 플레이어들도 그에 대해 마스터의 음모와 안배를 분쇄하고 주어진 퀘스트를 클리어하는데만 집중하는 경향이 생긴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이분법적 관계를 벗어나 능동적으로 새로운 떡밥을 창출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했다. 그러나 나는 그간의 플레이 기간과 지식으로 인해 약간 자만하고 있었고, 그것은 플레이 중에도 여과 없이 드러났다. 다른 참가자들이 계속하여 떡밥을 창출하는 가운데 몇 번 끼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지켜 보며 난 그 사실을 절감했다. 합의제로 운영되는 플레이에서는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문제점 3. 다른 참가자들(특히 마스터)와의 부조화

당시의 마스터는 플레이를 진행하며 문제점 1, 2로 인해 내가 실수를 범하는 걸 여러 번 보았다. 그 마스터는 결코 '님은 이러이러해서 문제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대신 에둘러서 최대한 점잖게 자신의 의사를 전했지만 나는 그걸 제대로 캐치하지 못했다-지금도 난 겉으로 드러나는 말이나 태도 너머에 있는 진의를 제 때 파악하는데 서툴다-. 나 역시도 스스로의 문제점을 그 때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객관화하여 판단하지는 못하던 참이었고, 그로 인해 약간의 갈등을 빚었다. 나중에 마스터는 자신도 감정이 상해서 필요 이상으로 까칠하게 행동했다는 걸 인정하고는 내게 사과했고, 나 역시도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마스터에게 사과했지만 뒷맛은 썩 좋지 못했다. 물론 나의 아집과 미숙함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으며, 나의 책임이 더 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좀 더 오픈한 채로 소통할 수 있었더라면 서로에게(그리고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보다 더 즐거운 플레이가 되었을 텐데 싶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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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나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미숙한 지를 이해하며, 또한 어떤 면을 보강해야 할 지에 대한 목적의식과 방향성은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문제다. 아예 '나는 초보자'라는 마인드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초보와 함께 플레이를 하면서도 룰적인 세부 사항을 일러 주거나 이런 저런 훈수를 두는 대신 근본적인 마인드나 접근법을 가르쳐 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지는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걸 개인적으로 친하다거나 하지도 않은 다른 참가자들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지금의 내가 봉착한 문제다. 일단은... 이론적인 부분을 좀 더 공부해 보거나 좋은 리플레이를 읽어 보며 간접 경험을 쌓아야 할 듯 하다. 물론 간접 경험은 한계가 있는 법이지만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 봐도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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