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얼마 전, 집에 갔다 오면서 검은 정장을 챙겨왔다. 교수님 한 분의 모친상에 다녀 온 다음 날의 일이었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그는 큰외삼촌의 부고를 접하고는 포항에 다녀 왔으며 며칠 지나지 않아 또 학교 동창 한 명이 조모상을 당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한 두 다리 걸쳐 있는 사람들 셋이 이 세상을 떠났다. 냉정하게 봤을 때, 그것들은 남의 일에 불과하다. 큰외삼촌의 경우도, 그는 단지 몇 차례 만났을 뿐이었다. 그는 전혀 슬퍼하지 않았으나, 또한 그런 스스로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서둘러 집에 갔다 온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학자들은 종교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가장 주요한 이유로는 역시 죽음, 피안 저편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갈 환경을 스스로 정할 수 없으며, 그래서 삶이 잔인한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단지 살아 있기에 살아 가고자 하며, 그 맹목적인 열망은 이 만인에게 적대적이고 냉혹한 세계 속에서 인간을 한 없이 이기적으로 만든다. 어떤 이들은 종교가 신을 인간의 수준으로 떨어뜨렸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이기적인 속성마저도 삶을 위해서는 필요악이기도 하다. 그는 신앙을 갖고 있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치기 위해 신을 믿은 적은 없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타인의 죽음을 대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그에 대해 무심한 지를 자각하게 된 그는 결국 자신도 역시 이기적이고 냉담한 속물에 지나지 않는 걸까 생각해 본다.
그는 집에서 가져 온 정장을 꺼내 한번 입어본다. 그는 정장 차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은 키 때문에 정장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는 둘째치고라도, 뭔가 묻거나 때가 타지 않을까 항상 신경써야 하는 데다가 올가미처럼 목을 죄어 오는 넥타이가 너무도 갑갑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갑갑함과 불편함은 어쩌면 사람들이 죽음과 소멸에 대한 이야기를 거북스러워 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다가와서 어느 한 순간 호랑이처럼 포효한다. 누구나 무의식적으로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그 순간 그들은 살아있고,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는 굳이 그것에 대해 입에 올리느니 차라리 일상의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게 만든다. 그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스스로가 그 수많은 죽음들에 대해 단지 남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냉담한가를 자각한다. 그는 자신이 무한한 인류애를 지닌 성자는 될 수 없다는 것도, 그러한 무관심 역시 자신의 삶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는 담배를 피워문 채, 그것이 타들어 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본다. 생명은 매 순간순간마다 이 담배처럼 타들어 사라져 간다. 필터 근처까지 태울 때도 있고, 반 정도 피우다 영 맛이 없어 버릴 때도 있으며, 몇 모금 빨기도 전에 뭔가 일이 생겨서 아쉬워하면서도 급히 장초를 꺼버릴 때도 있다. 담배는 자신이 언제 어떤 이유로 꺼져 버릴지 알지 못하며, 인간은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지 못한다. 그는 몇 해 전, 충북 음성에서 일주일 간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했던 때를 떠 올린다. 각양각색의 이유로 가족들에게 버려져 죽음의 때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그들의 침대 곁에서 기도를 올리면서 자신은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육체적인 피로 외엔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냉담함과 무관심, 망각이 삶을 이어나가는 데 어느 정도는 필요한 요소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자신은 정도가 지나친 게 아닐까 자문해 본다. 진정으로 인간답기 위해, 자신은 검은 정장의 거북함을 어느 정도 감내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는 벚꽃이 피어있는 나무 아래 계단을 오른다. 누구에게나 있어 삶은 이 계단과 같은 오르막길이다. 가끔은 평지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봐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짐일 것이다. 편안한 내리막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려감이 있으면 올라감이 있고, 올라갈 때의 고통을 항상 염두에 두고 정신을 긴장시키고 있느니 차라리 내리막 같은 건 애초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새삼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속물임을 깨닫고 자조한다. 그러나 그러한 속물근성 때문에, 자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올 수’ 있었던가. 그는 자신이 결코 성자는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는 성경을 펴 놓고 기도를 올린다. 신이 인간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는 무보수 만능하인이라고 믿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이 지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누구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며, 어느 정도의 죄를 짓는다.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또한 그것이 나태와 무관심,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하는 ‘악’을 합리화하는 핑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는 자신의 냉담함, 타인의 슬픔에 대한 무심함이 도를 넘어서지 않게 해 달라고, 언제나 자기반성과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아주 가끔씩은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타인의 죽음에도 눈물 흘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린다. 남의 일에 진정으로 슬퍼해 본 것이 얼마나 오래 전의 일이던가, 그는 문득 자문해 본다.
그는 문득 허기를 느낀다. 그는 항상 정신적으로 강인하고 깨어 있는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렇지 못하며,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육체의 피로와 허기, 고통을 느껴야 함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육체도 정신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상기하며 그는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공복감이 서서히 물러감을 느끼면서 그는 문득 자신은 아직 살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언제나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빙그레 웃어 보이고 있는 죽음이 그 마른 손을 내밀 때, 자신은 과연 기쁨도 슬픔도, 쾌락도 고통도 아는- 거기에 더해 항상 날카로움을 잃지 않는 진정한 ‘인간’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은 지구 상에서 살아가는 수십 억의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며, 지극히 작고 미미한- 결코 특별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자신이 결국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언젠가 찾아올 죽음 앞에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누가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가? 그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학교를 가고, 수업을 듣고, 밀린 레포트에 허덕이고, 그런 와중에도 종종 시간을 내서 영화를 보러 가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술을 마실 것이다. 누구나 가끔은 죽음을 생각하고 잊어 버리길 반복하며, 서로 싸우고는 화해하거나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죽음이 그 냉랭함으로 스스로를 입증하듯, 삶도 그 가열참으로 스스로를 입증할 것이다. 선한 자에게도 악한 자에게도, 행복한 자에게도 불행한 자에게도 똑같이 밝고 푸른 하늘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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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썼던 글. 오늘 저 글에서 언급한 교수님이 또 다시 상을 당하셔서(...) 장례식장에 다녀 왔다. 2년 전과 비교해 봐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나 궁금해져 옛날 글을 뒤져서 다시 읽어 보니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